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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지향과 범주 속 진정한 표정들
마경덕 시집 《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마경덕 시는 파동 치는 감정을 더는 건드리지 않는다. 그의 시 안에는 암울했던 삶의 밑 자리들이 잊을만하면 치통처럼 아문 신경을 자극한다. 문장이라는 수사로 시의 맥락을 절정으로 치닫게 하려는 강제된 언어의 가식이나 그럴 의도도 없다. 화투장의 흑싸리처럼 담담히 밑장으로 깔려 어긋나는 손길을 한없이 기다려주듯 어느 순간 행운처럼 빨강 싸리 같은 공감을 불러온다. 생의 주체에서 밀려나 있다가도 시간의 주체로 돌아와 느긋하게 자리를 지키는 내밀한 시어들은 꼭 마경덕 시인의 과거적 삶을 닮았다. 그렇다고 어려웠던 시절을 왜곡하여 각색하지도 않는다. 당연히 시의 언어가 아버지의 손바닥 안 굳은살처럼 투박해 보이지만, 살가운 온정을 품고 있다.
다섯 번째 시집《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의 시제로 올라온 ‘객짓밥’, ‘못주머니’, ‘근육들’, ‘통구멩이’, 같은 시어들은 특별해서 마경덕 시인만의 변별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여수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는 마경덕 시인을 상상해 본다. 터널 안으로 들어서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마래터널의 긴 암흑을 시인은 기억하고 있다. 그처럼 수없이 어둠을 통과하면서 불안한 소녀의 시간으로 당도한 서울은 만만찮은 곳이었다. 그만큼을 더한 고통의 세월을 감당해야 했지만, 그마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만 존재한다. 내밀하게 간직한 소중한 체험 속 기억들은 잘 정리된 목록처럼 선명하다. 그런 아련한 기억을 인화하듯 문장을 입혀 현재화되곤 한다. 성장 시절의 추억까지 도란도란 들려주듯 금번 시집에는 마경덕 시인이 추구하는 시적 근원과 지향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어의 실용적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마경덕 시인의 시적 세계는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실과 경험에 의한 목록들로 주조를 이루고 있다. 마경덕 시가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은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삶의 저편에서 수수된 체험적 형언들이기 때문이다. 시라는 문장을 인위적 수사로 조장하거나 특별함으로 돋보이려 하지 않고 눈높이를 언어의 진정성으로 바라보는 결과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상투적인 시어를 배제하고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삶의 언어를 사물적 지시어로 환기하여 쉼없이 변주하기 때문이다.
군용 천막으로 만든 국방색 못주머니
목수인 아버지 허리에 매달려 살았다
나로도, 녹동, 광양, 거문도까지
파도를 넘어 일거리를 찾아 따라가던 못주머니
바쁠 땐 아버지 입이 못주머니였다
서너 개씩 입에 물리던 못들
망치 소리 빨라지면 입에 물린 못들도 하나씩 사라졌다
손에 박인 못자국과 비릿한 쇳내는 모두 못주머니에서 나왔다
탕, 탕 망치의 장단에 나무의 뼈가 이어지고
기둥이 서고
지붕이 덮이고
집들이 일어섰다
미송 나왕 소나무 편백
단단하고 여린 나무의 속살을 매섭게 파고들던
대못 무두못 살못 납작못
집 속으로 사라진 그 많은 못은
집의 뼈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늦은 밤, 지친 허리를 놓고
나무연장통으로 들어가던 초라한 못주머니
온갖 못들이 전대처럼 생긴 주머니에 우글거리며 살았지만
못에 찔린 상처와 먼지뿐
탈탈 털어도 땡전 한 푼 나오지 않았다
-<못주머니> 부분
사람들은 과거라는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세월이 지날수록 애틋한 마음은 더 강화된다. 그만큼 늙어가며 갖게 되는 세월의 회한은 어쩔 수 없이 떠안고 가야 하는 업보인 셈이다. 그 추억이 아버지가 살아온 생애였다면, 더한 것이다. 아버지는 헤진 “군용 천막으로 만든 국방색 못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일하신 목수이셨다. “나로도, 녹동, 광양, 거문도까지/ 파도를 넘어 일거리를 찾아 따라가던 못주머니”를 챙겨 집을 나선 아버지를 어린 눈으로 봐왔기에 또렷이 기억한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힘든 노동을 이어간 아버지의 못질은 가족을 위한 ‘사랑’을 실천한 노동이었다. 그 고된 망치질이 “바쁠 땐 아버지 입이 못주머니였다/ 서너 개씩 입에 물리던 못들/ 망치 소리 빨라지면 입에 물린 못들도 하나씩 사라졌다/ 손에 박인 못자국과 비릿한 쇳내는 모두 못주머니에서 나왔다”는 횟수만큼 가족에게는 든든한 생계가 되었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손놀림이 바빠진 성실한 아버지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는 시인은 몸에 밴 ‘비릿한 쇳내’까지 아직껏 기억하고 있다. 시인은 아버지처럼 목수 일을 하는 현장이나 사람들을 보면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난간에서 위태롭게 발을 디딘 채 허공을 메워가는 망치 소리가 거듭될 때마다 “탕, 탕 망치의 장단에 나무의 뼈가 이어지고/ 기둥이 서고/ 지붕이 덮이고/ 집들”이 완성되어간다. 그 소리는 나무를 두드리지만, 나무의 섬세한 결을 어루만지는 은밀한 작업 공정이다. 완성하고자 하는 집마다 사용되는 목재가 다르듯 “미송 나왕 소나무 편백/ 단단하고 여린 나무의 속살을 매섭게 파고들던/ 대못 무두못 살못 납작못/ 집 속으로 사라진 그 많은 못은” 매번 노동의 정당한 대가가 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음 알게 한다. “집의 뼈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생계가 어려웠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떤 때는 오랜만에 아버지가 돌아오셨지만, 못에 찔린 상처와 빈털터리인 못주머니만 덜렁 내민 것을 기억한다. 그마저 가슴 아린 기억을 더는 이어갈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아버지의 추억을 시인은 안타까운 듯 탈탈 기억을 털어내고 있다. 아버지의 고된 망치질 소리도 이젠 시인의 가슴으로만 들을 수 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추억을 상기하지만, 그마저 나이에 묻히고 못내 세상에 다 털고 가야만 한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시인은 ‘사랑’이란 말 대신 ‘못주머니’란 상징을 통해 아버지의 모습을 선명한 이미지로 복기하고 있다.
우리 엄마도
서울 가서 밥 굶지 말고, 힘들면 편지하라고
취직이 안 되면
남의 집에서 눈칫밥 먹지 말고
그냥 집에서 내려오라고
기차표 한 장 살 돈을 내 손에 꼭 쥐어 주었다
그 한마디에
객짓밥에 넘어져도 나는 벌떡 일어났다
-<객짓밥> 부분
소도시에서 살기가 힘들어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시절의 사실적 서사를 담고 있다. 그 당시 지방은 국가에서 주도한 몇몇 산업도시를 빼고는 젊은 사람이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불모지였다. 지금이나 예전이 다르지 않지만, 1960~1970년대는 서울 말고는 여건이 녹록지 않았다. 그 시대는 농, 어촌 인구의 급격한 도시 이주가 사회 문제가 될 정도로 열악한 시절에 시인은 여수를 떠났을 것이다. 한눈팔면 코도 베어간다는 서울, 혹독하다 못해 살벌한 분위기를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서울살이를 하며 찾아온 위기 때마다 ‘엄마’가 당부한 말씀을 새기며 견뎠을 것이다. 나이 들어 잊을 만도 하지만, 엄마와의 추억이 매번 되살아나곤 한다. 마침 ‘소금쟁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과거를 재발견한다. 사물과 동화되는 순간의 인식이 빠르게 내면으로 파동 친 것이다. 소금쟁이가 물속에 빠질까 봐 다리에 기름칠을 해주신 ‘하나님’은 ‘소금쟁이’한테 표면장력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까지 부여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먹잇감을 연못에 던져 배고픔을 견딜 수 있도록 했다. 연못이 마르면 다른 곳으로 날 수 있는 ‘날개’까지 달아준 ‘하나님’은 ‘엄마’의 모습으로 재현된다. 연못에 떠 있는 ‘소금쟁이’에서 연상된 “서울 가서 밥 굶지 말고, 힘들면 편지하라고/ 취직이 안 되면/ 남의 집에서 눈칫밥 먹지 말고”라는 엄마의 각별한 말씀이 마음을 후벼 파고 있다. 시인은 엄마와의 긴밀한 당부를 살면서 한 시도 잊지 않았다.
‘근육’이란 용어가 갖는 의미는 ‘단단함’ 또는 건강한 남자에 대한 상징으로 주로 사용하는 단어다. 물론 이외에도 다양한 의미로 활용된다는 것도 안다. 시 <근육들>에서 ‘근육’은 단순히 몸의 형체를 지지해주는 단순한 구조로만 인식하지 않는다. 신체구조 중 ‘근육’을 사회구조의 중요 구성 및 시대정신으로까지 거듭 변주한다. 시적 언어의 포괄적 응용으로 의식의 확장성을 시도한 것이다. 엄마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건강한 기질을 긍정과 전향적인 사회성으로 ‘근육질’을 변용해간다.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로 활용해야 할 삶의 근력을 함부로 낭비해선 안 될 것이라는 계몽적 응용이 흥미롭다. “근육을 소비하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소낙비, 근육이 빠진 어느 정치인의 공약처럼 바닥에 뒹근다”는 시행을 보자. ‘소낙비’와 ‘정치인’의 동일 인식은 ‘사라지는’ 것과 ‘뒹군다’는 것에서 의미 차이가 난다. 자연성에 의한 소낙비는 소멸하면 그만이지만, 정치인의 ‘공약空約’은 사회적 폐해로 남은 다는 차이다. 근육의 사전적 의미를 활용해 정치인에 대한 조소를 통해 책임 있는 민주적인 사회의식으로의 확장성을 보여준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모든 구조를 지탱해주는 힘은 바른 인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육들’은 비상식적인 세태를 우회적으로 시비하고 있다. 시인이 바라보는 시적 바탕은 사물과 사람들의 유사성에서도 간과하지 않는다.
시 <통구멩이>에서 나오는 ‘통구멩이’라는 어종은 “뱃머리 닮은 둥글넓적한 대가리 거무죽죽한 몸통이 허름한 통통배를 닮”았다고 묘사된다. 그 생긴 것이 일반적인 물고기와는 다른 모양새인 것 같다. 눈밖에 난 모양 때문 천덕꾸러기 같은 ‘통구멩이’를 보며 오래전 “입 하나 덜자고 어린 것을 고깃배에 실어보”낸 엄마로부터 버려진 ‘화장火匠’이란 아이(총각)가 생각난 것이다. 천애 고아가 되어버린 모자란 듯한 아이를 뱃사람들은 노예처럼 부려 먹었다. “걸핏 밥을 태우고, 반찬은 짜고, 말귀마저 어두워 귀싸대기 벌겋게 부어올랐다/ 하늘 아래 혼자라서 젖은 장홧발에 차였다/ 그래도 밥은 실컷 먹어요, 씩 웃던 머리통이 큰 화장火匠”의 안타까운 사연을 시인은 가슴으로 아파한다. 마침 광양 언니가 보내온 ‘퉁구멩이’를 보며 그 ‘화장火匠’이란 총각과 닮은 듯하여 씁쓸한 것이다. 아비도 모르며 살아가는 총각의 사연이 남다르지 않아 가슴이 더 아파오는 ‘통구멩이’의 전생 같은 울림이 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말 일은 아닌 것이다. 정당한 노동에 대가를 지불받지 못한 국가 안전망의 누수까지 생각해봐야 한다.
언어의 형용에 능해야만 좋은 시가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마경덕 시인은 말하고 있다. 시는 표면과 이면을 구분하지 않고 문장으로 수렴하여 시적 위의를 함의한다.
남한강 언덕배기 너와 집 한 채
금이 간 흙벽 불씨 마른 호롱이 걸려있다
오래전 폐업한 카페 후미개
퀴퀴한 냄새가 달려 나오고
소파가 먼지를 탈탈 털며 앉으라 한다
반쯤 타다만 장작
싸늘한 벽난로에 둘러앉아 젖은 등 말리는 등받이 의자들
카페의 메뉴는 정적이다
벽에 붙은 반라의 여자, 너무 오랫동안 웃었다
맥주잔을 들고 폭소를 터뜨리는 여자의 웃음은 소리가 없다
두 개의 보형물이 들어있는 풍만한 가슴
김빠진 맥주잔, 거품이 철철 넘친다
-<카페 후미개> 부분
과거 속에 묻힌 시간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사실이란 것을 기억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대상은 사라져 존재하지 않지만, 실재했던 시간을 현실처럼 되돌려놓기도 한다. ‘카페 후미개’도 그런 시각에서 바라본 이면의 모습이다. 그것이 시로써 실현하고자 하는 언어의 진면眞面인 것이다. 한때는 활기가 넘쳤을 ‘카페’의 쇠락이 보여주는 뒷이야기가 꼭 쓸쓸한 것만은 아니다. 사람 드나들던 발길이 끊기고 말면 초췌한 얼굴마냥 초라해 보이는 법이다. 인적이 끊긴 풍경에서 번져오는 아련함을 외면하지 못한 “남한강 언덕배기 너와 집 한 채”가 시적 배경으로 시작한다. 집안에 꽁꽁 숨겨놓은 비밀들이 하나둘씩 풀어헤쳐지고 있다. 까닥하면 읽어낼 수 없었을 집 내부를 밝혀주는 흙벽의 ‘호롱불’은 퀴퀴한 냄새나는 곳을 가리키고 있다. 사실 ‘호롱불’은 실재하지만, 그 기능은 할 수 없다. 그 호롱불을 켠 사람은 타자의 가슴속 환한 시적 지향이다. 오래전 누구 하나 찾아주지 않은 소파 위 먼지와 장작 난로 안의 시간은 정지되어 버렸다. 사람이 오지 않은 카페는 결국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질 것이고 실재하지 않는 장소처럼 서서히 잊혀질 것이다. 과거의 시간 속에 정지된 모든 것들은 과거만의 모습이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흘리고 간 환락의 소란을 잊기라도 하려는 듯 정막한 고요에 아랑곳하지 않고 “벽에 붙은 반라의 여자, 너무 오랫동안 웃었다/ 맥주잔을 들고 폭소를 터뜨리는 여자의 웃음은 소리가 없다/ 두 개의 보형물이 들어있는 풍만한 가슴/ 김빠진 맥주잔, 거품이 철철 넘친다”는 전언은 미완의 욕망에 대한 상실감을 애써 감추고 있다. 그 안에서 헐거워진 ‘너와집’ 안팎으로 봄볕을 타고 날아온 민들레와 개망초가 못다 이룬 욕망을 충족해주고 있다. 인간의 ‘편견’이 욕망의 한 수단이라 해도 매우 신중한 언행을 해야 한다. 그런 일을 당한 누군가는 오랫동안 아픈 기억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유년기 꿈 많던 시절의 가슴 아픈 사연을 숨겨오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어느 드라마의 광고 카피처럼 토로하고 있다. <졸업사진>이란 시에서 1연과 2연까지만 해도 사진을 찍는 아이들의 들뜬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한참 기분 좋았던 시간은 잠깐이고 만다. 선생님이 안타깝게도 아이 이름을 부른 뒤 “고무신을 신었으니/ 뒤로 가라고,”한 뒤 그 자리에 키 큰 학생을 앉혀버린 것이다. 그 순간 ‘졸업사진’ 속 키가 작은 아이 얼굴은 사라지고 없다. “초등학교 앨범을 펼쳐도/ 맨 뒷줄/ 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는 피해의식은 나이 지긋해진 지금도 서럽기만 하다. 상처가 된 추억을 잊으려 하지만, 충격이 컸기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졸업사진’ 속의 소중한 추억을 한 순간에 앗아가 버린 것처럼, 한 생을 털려버린 ‘개살구나무’가 있다.
빛 좋은 개살구란 말은 듣기에도 좋아 보인다. 수십 년 전 유년의 농촌 마을 어느 집 담장 안에서 계절마다 핀 분홍빛 살구꽃은 동심을 자극하곤 했다.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알기라고 한 듯 뜨거운 여름이 오기 전 노랗게 살구는 익어간다. 요즘처럼 알맹이가 크지도 않고 달지도 않은 살구는 시큼한 맛이 훨씬 강했다. 시골의 개살구 맛을 아는 사람들이 과연 요즘 몇이나 될까? 60~70년대 이후의 열악한 농촌에서 성장한 연령층이 고령화로 인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오래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시 <개살구나무>에 담긴 사연도 인생살이처럼 순탄치 않다. 한 해가 다 가기 전 가을, 젖이 불어 오른 개가 어떤 연유인지 살구나무 아래 묻혔다. 죽은 어미 개는 뱃속 새끼를 낳지 못한 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것이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생과 소멸이 반복한다고 하지만, 과정에서 슬픔이 깃든 기구한 사연이 존재한다면 그 후유증은 오래도록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런 사람들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마다 살구꽃이 피고 살구가 익어갈 즈음 “봄이 마을로 내려오고 해수를 앓는 노인이 자루를 챙겨 비탈을 올라갔다 노인이 담배 한 대를 태울 동안// 개살구나무, 다 털렸다”는 시적 종결은 허망한 인생살이의 일면을 말해준다. 주어진 생을 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은 개처럼, 잘 익어가던 살구가 한순간에 털려버린 것도 단순한 풍경적 스토리는 아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삶도 매 순간마다 털리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다음 순서가 언제 될지 모른 인생의 허무가 짙게 깔려 있다. 가진 것을 탈탈 털려야만 끝이 날 것 같은 시적 상상력은 꼭 사물적 대상에만 한정하지 않는다. 털릴 것이 아직도 남아있는 ‘해수를 앓는 노인’은 바로 우리란 것을 알 수 있다.
형상이 없는 사유의 모호성을 실체로 전환하기 위한 몰입은 지독한 관념적 혼돈일 수 있다. 시 한 편을 쓰기 위하여 어느 한순간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없는 업보 같은 고행을 생각해본다. 한 행의 완전한 문장을 형상화하는 것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모든 노력도 욕망의 대가라면 응당 감수해야 한다. 시인은 시에 대한 욕망만으로 사물을 대상화할 수 없다. 고유한 언어를 사물적인 상상력으로 변주할 뿐이다. 무한한 사유의 범주는 시적 상상력 속에서 불가능한 언어를 실재한 형상으로 보여준다. 시적 언어로 유인한 ‘악어’를 겁도 없이 방 안으로 끌어들인 시인이다. <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은 시인만의 서재이자 포악한 악어와 공존할 수 있는 사투의 시간이다. 악어가 좋아하는 먹이는 ‘날것’ 같은 시편들이다. 다듬어지지 못한 시편은 어김없이 악어의 날카로운 이빨에 치명상을 당할 것이다. 시인은 완전치 못한 문장을 악어의 입안에 넣어주기가 싫지만, 어쩔 수 없다. “실패한 시를 묶는다/ 입을 쩍 벌리는 집게클립”을 악어의 입으로 환기하면서 고통스런 창작 과정을 상기시켜준다. 그 고역을 마다하지 않는 “초원을 향해 강을 건너던 어설픈 나의 누 떼가/ 몇 해째 악어의 이빨에 물려있다”는 안타까운 고백은 시 앞에서 한없이 여려지는 연민인 것이다. ‘누’ 떼가 초원을 찾아가는 험난한 여정을 두려워하지 않듯 매 순간마다 피를 말리는 절박함의 산물인 것이다. “일찍 죽어버린 시를 생각하는 밤”은 시인에게 악어와 혼신을 다해 사투를 벌이다 패배한 밤이다. 시인은 악어가 입을 벌리고 있는 늪지대를 밤마다 건너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렇게 탄생한 시가 모여 한 권의 시집을 이룬다. 봉투에 넣어 부쳐진 시집의 운명은 시 <책무덤>에서처럼 간혹 비참하게 끝나는 경우가 있다. “주소를 달고 누런 봉투에 그대로 갇힌 책/ 닫힌 책은 입이 사라지고/ 한 묶음의 침묵이 된다// 냄비받침이나/ 기우뚱한 의자 다리에 깔려 죽어가거나/ 낱장으로 뜯겨 딱지가 되거나/ 끝내 고물상의 폐지가 되”는 현실은 있을 수 있는 사실이다. 누구의 시집이라고 가릴 것 없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인은 우려한다.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한 고통의 시간을 가볍게 봐선 안 된다는 역설이다. 그런 시집만큼이나 우울해지고 가슴 아린 사연이 시 속에 있다.
뒷산에서
바람을 타고 마을로 내려오던 그 소리
어느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있었을까
둥지 하나 짓지 못한 어미 가슴에
발갛게 번진
봄볕에 열흘을 말려도
마르지 않는 울음이 어렴풋이
탱자울타리를 넘어오면
고모는 방아를 찧다 말고
치맛자락으로 쏟아지는 가슴을 받아내고
그때 어린 내게 뻐꾸기울음이 옮겨붙었다
뻐, 꾹, 뻐, 꾹,
오래전 뻐꾸기가 되어 날아간
볕에 다 바랜 고모와
뻐꾹채 피던 그 늦봄을
나는 주머니에 가만히 담아 두었다
-<뻐꾹채는 피고> 전문
‘뻐꾹채’가 피는 시기에 발생한 추억이 시적 서사로 재현되었다. 늦봄 보리가 익어가던 시기쯤일 것이다. 여름으로 넘어가는 5월과 6월 사이 산비탈을 보듬고 울어 젖히는 뻐꾸기 소리는 가슴을 후벼 파듯 울림이 길다. “둥지 하나 짓지 못한 어미 가슴에/ 발갛게 번진” 조마조마한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뻐꾸기 울음이 고모의 가슴을 헤집어 놓은 것이다. ‘둥지 하나 짓지 못한’ 뻐꾸기와 고모의 동병상련의 심정에서였을까? 고모는 일찍이 누군가를 뒷산에 묻은 슬픔을 안고 있다. 그 ‘어미 가슴’ 속 아픔의 대상은 ‘뻐꾸기’가 울어대는 계절에 유명을 달리한 어린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를 잃은 고모의 슬픔은 쉽게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방아를 찧던 그날도 뻐꾸기가 슬피 울었고 “고모는 방아를 찧다 말고/ 치맛자락으로 쏟아지는 가슴을 받아내고/ 그때 어린 내게 뻐꾸기울음이 옮겨붙었다”는 추억이 실재한 서사를 추동한다. 애잔한 추억 속 고모도 이 세상에 안계지만, ‘뻐꾹채’가 필 때면 속절없이 그립기만 한 인정머리가 더 애잔해진다. 사람은 죽음을 맞는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다.
기왕에 살다 죽는데 뭐 그리 사람마다 곡절이 많은지 그것도 운명인가 싶다. 요즘 초상이 나도 상여도 보기 힘들뿐더러 구성진 상여꾼의 소리마저 들을 수 없다. 간혹 있다 하더라도 형식에 그칠 뿐이다. 마경덕 시인의 시 <만가挽歌>가 함의한 시적 의미는 그런 관점에서 눈여겨봐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양이 제각각이듯 죽음의 유형도 다르다. 우리가 죽음을 잊으며 살아가지만, “산동네에서 아랫마을로 내려와 밤바다를 철썩이며 선잠을 흔들던 청승맞은 그 기운”은 어스름처럼 찾아든다. “그 소리는, 이슥하도록 갯가를 떠돌다가 아스라이 멀어”지길 반복한다. 그처럼 우리에게 낯선 것 같은 상여꾼의 만가는 유형만 다를 뿐 공통의 곡절을 담고 있다. 망자에 대한 안타까운 비애와 이별에 대한 아픔이 사무치게 진동하는 노랫가락이다. 만가는 저음과 고음을 오가면서 망자가 누리지 못했던 생애의 굴곡진 시간을 위무하고 맺힌 것을 풀어준다. 일종의 씻김굿 유형으로 죽어서 나마 이승에서 못 다 누린 영생복락의 기원을 담고 있다. 망자에 대한 생전의 애환이 클수록 남아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쉽게 놓아주지 못한다. 그 소리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반복되며 생전에 못다 한 포한抱恨을 되풀이하여 이승에 대한 미련의 여한을 없애준다. 잦아들었다 다시 이는 그 소리는 망자가 생전 인연 맺은 사람은 물론이고 터전으로 삼았던 산과 들 그리고 바다를 배경으로 한다. ‘만가’라는 형식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끄트머리에 존재하며 단절이나 망각할 수 없는 영원성으로 향유된다. 사람들은 살아있지만,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죽음이 주어진 생보다 너무 일러 “풍랑에 남편과 두 아들 잃은 종오 엄마가 다리 뻗고 바닥을 치며 울던 젖은 곡조여서 사무치고 사무치는 것”은 이승에 남은 자의 슬픔이 너무 커서 한이 된 사부곡이자 두 아들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다. 가슴에 묻지 못한 슬픔도 죽음을 외면할 수 없기에 “폐병쟁이 황 씨, 노름쟁이 곰보 천 씨, 지게꾼 학출이 아버지도 그 길을 따라”간 걸 봐버린 눈빛에 각인된 죽음은 슬픔이란 것을 알아버렸다. 너무도 “어린것이,/ 세상을 다 살았다는 얼굴로 눈물을 찔찔 흘리던 밤이 있었다”다는 말이 자꾸 귀에 맴돈다.
지금껏 마경덕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에 올라온 시들을 살펴보았다. 부분을 통해 전체를 아우르는 시의 맥락과 문장의 결이 항상 사람들 곁을 맴돌고 있었다. 그런 유의미한 시적 바탕을 다시 확인해주면서 시가 갖춰야 할 덕목을 상기시켜준다. 좋은 시란 올바른 심상에서 정제되어 발화한 서정으로 감동과 울림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첫댓글 좋은 詩
훌륭한 평론 잘읽었습니다.
사물에 대한 묘사와
기억에 대한 감성이 탁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 글을 읽어야겠다는 정시인의 의지가 더 크다고 보여지네
댓글에서 그 마음이 느껴져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