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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산’을 바라보며
2020 겨울, 친구 강종원 형이 권장했던 책, <‘두 번째 산’ : 데이비드 브룩스 저/이경식 역 | 부키 | 2020>
두꺼운 책이라서 먼저 호감이 갔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序文(무려 50페이지)만 보아도 그의 주견이 확실하고 이 책의 전반적 내용을 가늠할 수 있었다.
책 속에 들어가면서 나는 읽기를 중단할 수 없었다. 인생의 막바지에 와 있는 나에게 너무나 절실한 인생말기 안내서였기 때문이다.
책을 돌려주고, 바로 교보문고에 이 책을 주문해서 지금 내 책상 곁에 놓여있다. 지금도 읽고 있다. 자주 읽어 내 삶의 방향을 채찍하기 위함이다.
보통 인생을 산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곤 한다.
우리의 삶에는 올라야 할 여러 개의 산이 있다.
우리네 삶에는 또 하나의 산, 또 하나의 삶이 있다.
그것은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다른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 삶, 같이 무언가를 이루고 도와가는 공동체 적인 삶이 있다. 그것이 우리가
올라가는 두 번째 산이다.
그 두 번째 산에는 기쁨과 감사와 행복이 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인간의 품격』 저자, 데이비드 브룩스 ‘두 번째 산’ 고통의 시대에 ‘함께 살기’의 가치를 일깨우다 |
누구에게나 고통의 시기는 찾아온다. 삶의 위기가 닥쳤을 때 인생은 부조리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부와 명성이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위안과 회복이 되어 주진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런 고통에 맞닥뜨리면 과도하게 움츠러든다. 이들은 겁에 질려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슬픔을 끌어안고 평생을 살아간다. 그리하여 인생이 갈수록 더 쪼그라들고 더 외로워진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이런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이들은 용기를 내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마침내 이 고통을 자기 발견과 성장의 계기로 삼는다. 사람들의 인생은 가장 큰 역경의 순간에 자기가 대응하는 방식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규정된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두 번째 산』에서 우리는 고통의 시기를 겪으며 인생의 태도를 다시 정립한다고 말한다. 삶의 고통을 딛고 다시 시작하는 법을 익히려면 개인과 사회 차원에서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제 우리가 개인의 행복, 독립성, 자율성이라는 허울 좋은 가치를 넘어 도덕적 기쁨, 상호 의존성, 관계성을 회복할 때라고 주장한다. 지난 60년간 앞의 가치들을 지나치게 강조해 온 결과, 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들 사이의 결속은 끊어지며 외로움은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적 고립’으로 부를 수 있는 이런 상황은 삶의 고통을 더욱 심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발견과 성장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든다. 저자는 좋은 인생을 살아가려면 훨씬 더 큰 차원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문화적 패러다임의 무게 중심이 개인주의라는 첫 번째 산에서 관계주의라는 두 번째 산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생이란 두 개의 산을 오르는 일과 같다고 말한다.
첫 번째 산에서는 자아의 욕구를 채우고 주류 문화를 따랐다면 두 번째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욕구와 문화에 반기를 든다. 이들은 자기 욕구의 수준을 한층 높여 진정으로 바랄 가치가 있는 것들을 바라기 시작한다. 세상은 이들에게 독립(independence), 개인적 자유, 세속적 성공을 바랄 것을 요구하지만, 이들은 상호 의존(interdependence), 이타적 헌신, 정신적 기쁨으로 시선을 돌린다(16~17쪽). 고통 속에서 성장한 이들은 자신의 동기 부여를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타인중심적인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좋은 인격이란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과정의 부산물”(28쪽)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회가 오로지 이기적인 관심사로만 지탱될 때 사회 구성원들은 서로 분리되고 고립된다. 바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지금까지 줄곧 벌어지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33쪽).
인생의 여러 문제, 즉 고독과 소외, 가치와 의미의 상실, 공동체의 부재 등은 극단적인 개인주의 문화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결과 사람들은 벌거벗은 채로 외롭게 떨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으로 이른바 부족주의(tribalism)가 창궐하여 각각의 정치적 부족들 사이에서 타협 없는 생존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560쪽). 삶이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이야기임을 깨달아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자아(ego)를 세우고
자기(self)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자아를 버리고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계층 상승의 엘리트적인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 자기 자신을 단단히 뿌리 내리고 그들과 손잡고 나란히 걷는 평등주의적인 것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참조)
<책 속으로>
그 사람의 깊은 내면은 언제 드러나는가?
계곡에 떨어진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통의 시기는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드러내며, 자신이 생각하던 모습이 사실은 진정한 자기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도 알지 못했던 내면이 노출되고 만다. 자기가 겉으로 내걸고 다니던 여러 모습들이 실제 자신이 아님을 비로소 알아차린다. (…)
어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고통에 맞닥뜨리면 움츠러든다. 이들은 평균 이상으로 더 두려워하고 분개하는 듯이 보인다. 이들은 겁에 질려 자신의 깊은 내면을 외면한다. 그리하여 인생이 갈수록 더 쪼그라들고 더 외로워진다.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슬픔을 끌어안고 사는 노인을 주변에서 흔히 본다. 이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을 받지 못한 채, 오래전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잘못된 일을 놓고 끊임없이 화를 내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계곡이 자기 발견과 성장의 계기가 된다. 고통의 시절은 일상이 피상적으로만 흘러가는 것을 방해해서, 자신의 좀 더 깊은 내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자기 기질 깊숙한 곳에 보살핌의 본질적인 어떤 능력, 즉 자아를 초월해서 타인을 보살피고자 하는 어떤 열망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 열망에 맞닥뜨릴 때 이 사람들은 전인적인 인간(whole person)이 될 준비가 완료된 상태이다. 이들은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마침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것도 단지 구호로서가 아니라 현실 속 실천으로. 사람들의 인생은 가장 큰 역경의 순간에 자기가 대응한 방식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규정된다.
--- p.15~16
지금 몇 번째 산을 오르고 있는지 알려면
자신이 지금 첫 번째 산을 오르고 있는지 아니면 두 번째 산을 오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궁극적으로 소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 내면에 있는 자아인가, 아니면 당신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인가?
첫 번째 산이 자아(ego)를 세우고 자기(self)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자아를 버리고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계층 상승의 엘리트적인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 자기 자신을 단단히 뿌리내리고 그들과 손잡고 나란히 걷는 평등주의적인 것이다.
두 번째 산을 오르는 방식은 첫 번째 산을 오르는 방식과 전혀 다르다.
첫 번째 산은 정복한다. ‘나’가 이 산을 정복하는 것이다. 정상이 어디인지 멀리서 확인하고는 그곳을 향해 기를 쓰고 올라간다.
그런데 두 번째 산은 다르다. 두 번째 산이 ‘나’를 정복한다. 나는 어떤 소명에 굴복한다. 그리고 그 소명에 응답해, 내 앞에 놓여 있는 어떤 부당함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한다.
첫 번째 산에서는 야심을 품고 전략적으로 접근하며 독립심을 발휘하지만, 두 번째 산에서는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친밀하며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한다.
--- p.21~22
행복과 기쁨
내가 말하는 요지는 이렇다. 행복은 좋은 것이지만 기쁨은 더 좋은 것이다.
두 번째 산(기쁨)은 첫 번째 산(행복) 이후의 한층 더 풍성한 인생 국면이며, 같은 맥락에서 기쁨은 행복보다 더 풍성한 감정이다.
게다가 행복은 변덕스럽고 찰나적인 경향이 있는 데 비해 기쁨은 본질적이고 영속적일 수 있다. 당신이 더 많이 헌신하는 삶을 살수록 기쁨은 당신에게 더욱더 꾸준한 상태로 남을 것이고, 당신의 이런 감정의 틀 덕분에 그 기쁨은 당신 주변 사람들에게 햇살처럼 뿌려질 것이다. 당신은 기쁨에 넘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기쁨은 우리의 북극성, 우리 인생 항로의 등대이다. 만일 우리가 기쁨을 향해 나아간다면 결국에 는 올바른 지점에 다다를 것이다.
--- p.36~37
경험을 쌓는다고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가?
심미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면 하루하루가 즐겁긴 하겠지만, 무언가가 의미 있게 축적되지는 않는다. 이런 삶을 뒷받침하는 이론은, 사람은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일련의 연속적인 모험으로만 살아간다면, 스쳐 지나가는 감정들과 쉽게 바뀌는 열정이라는 불확정성 속에서 정처 없이 배회하는 꼴이 되고 만다. 이럴 경우 이 사람의 인생은 어떤 성취를 쌓아 가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일시적인 순간들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가 가진 힘을 무작위로 온 사방에다 흩뿌리며 낭비하는 셈이다. 그러면서 소중한 무언가를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끊임없이 휩싸인다. 이 사람의 가능성은 끝이 없을지 몰라도, 의사 결정 풍경은 구제 불능일 정도로 밋밋하다. (…)
인간이 가지고 있는 천성적인 열의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예”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도록 훈련시킨다. 그렇지만 당신이 어떤 것에도 영원히 “아니요”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마 어떤 것에도 깊이 빠져들지 못할 것이다. 헌신하는 인생은 소수의 소중한 “예”를 위해 수천 번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
스마트폰 시대에는 어떤 거래나 인간관계를 맺거나 깨는 데 들어가는 비용인 마찰 비용이 0에 가까워진다.
인터넷은 당신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클릭해서 시험적으로 사용해 보라고 권한다. 온라인에서 산다는 것은 흔히 전환 상태에서 사는 것을 뜻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실질적으로 어떤 것에도 깊이 몰입하지 못한다. 온라인 인생은 헌신의 결단과 몰두를 가로막는 온갖 장치들과 기기들로 가득 차 있다. 만일 당신이 30초 동안만이라도 주의를 집중할 수 없다면, 당신은 과연 어떻게 인생을 위해 무언가를 수행하고 헌신할 수 있겠는가?
--- p.83~84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두 가지 유형
텔로스telos(목적) 위기에 빠진 사람은 자기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쉽게 부서질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철학자 니체는 인생을 살아갈 ‘이유(why)’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과정(how)’이든 견딜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 목적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여정에서 만나는 온갖 고난을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기 목적을 모르는 사람은 아주 작은 고난에도 쓰러져 버린다. (…)
내 경험으로 볼 때 텔로스 위기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걷는 형태, 하나는 잠자는 형태이다.
걷는 형태에서는 고통당하는 사람이 그저 계속 터벅터벅 걷기만 한다. 이 사람은 어떤 충격을 받거나 깊은 권태감에 시달리는 상태이지만,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또는 자기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야 옳은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저 자기가 하고 있던 것을 계속 하고 있을 뿐이다. 똑같은 일거리, 똑같은 장소, 똑같은 일상, 똑같은 인생…. 이 사람은 자기가 안주하고 있다는 심리적 자각과 함께 살아간다. (…)
텔로스 위기의 두 번째 유형은 잠자는 것이다. 이 경우에 고통받는 사람은 그냥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며 넷플릭스 드라마만 본다. 이 사람의 자신감은 바닥이 났다. 이 사람은 자동 초점 설정에 의해 마비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 버렸고 자기 인생이 자기를 이미 스쳐 지나가 버렸다는 전혀 입증되지 않은 이상한 신념에 사로잡혀 있다. 다른 사람들이 거둔 성취가 그에게 실질적인 고통을 주기 시작한다. 남들의 빠른(정확하게는 빨라 보이는) 출세와 자신의 무기력한 처지 사이의 격차가 커질수록 그 고통은 더욱 깊어진다.
--- p.102~103
신은 믿지 않아도 영혼의 존재는 믿어라
의식의 또 다른 부분은 영혼이다. 당신에게 신을 믿거나 믿지 말라고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작가이지 선교사가 아니다. 선교는 내 전공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도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믿으라는 말은 분명히 하고 싶다. (…)
영혼은 도덕적 가치를 품고 있으며 도덕적 의무를 감당하는 당신 의식의 한 부분이다. 어떤 강이 있다. 이 강은 자기가 흘러가는 것에 대해 도덕적으로 책임지지 않는다. 호랑이도 자기가 잡아먹는 다른 동물에 대해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기가 하는 행위 또는 하지 않는 행위에 도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
영혼은 도덕 의식과 윤리 감각의 못자리이다. C. S. 루이스가 말했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나라에서건 전투 현장에서 달아난 탈영병이나 고마운 사람을 배신한 사람이 칭송받은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 어떤 동물이 자기장에 의지해 방향을 잡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이런 도덕 감각들에 의지해 자기 행위의 방향을 잡는다. (…)
--- p.131~133
두 번째 산에서는 어떤 인생을 추구하는가?
개인주의는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힘쓰라고 말하지만, 두 번째 산에 있는 사람은 인생의 의미와 도덕적 기쁨을 추구하는 데 힘을 더 쓴다.
개인주의는 독립성을 찬양하라고 말하지만, 두 번째 산에 있는 사람은 상호 의존성을 찬양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 있는 기회를 찬양하고 그들이 자기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을 찬양한다.
개인주의는 자율성을 찬양하지만, 두 번째 산은 관계성을 찬양한다. 개인주의는 적극적인 목소리로 말하며(설교하기, 주장하기) 결코 수동적인 목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산의 반란은 귀 기울여 듣고 응답하고자 한다. 주고받는 친밀한 목소리로 소통한다.
개인주의는 세속적인 세상, 즉 커리어 선택과 세속적 성취를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번성한다.
두 번째 산의 정신은, 세속적인 세상은 마법에 걸린 세상이자 도덕적, 감정적 드라마일 뿐이라고 말한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용인하고 표방하지만, 두 번째 산의 정신은 사리사욕에 초점을 맞추는 세계관은 인간의 모든 진폭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 인간은 개인적인 이기심으로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랑의 행동을 할 수 있으며 또 이기심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잔인무도한 행동도 할 수 있다.
개인주의는 인생의 주된 행위는 사고파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두 번째 산에 있는 사람은 인생의 주된 행동은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최고 수준의 인간은 선물을 주는 사람이다.
개인주의는 자기를 먼저 사랑해야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 번째 산의 정신은 사랑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하며, 또 자기가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알기 위해 다른 사람을 적극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 산에서는 각자가 개인적인 선택을 하고 또 여러 선택지들을 계솔 열어둔다.
두 번째 산은 약속이 넘쳐 나는 곳이다. 여기에서는 헌신하고,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을 던져 버리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이다. 자기를 버리고 헌신하는 것이다.
--- p.141~142
파편화된 삶에서 통합된 삶으로 나아가려면
힐레숨
(힐레숨은 1943년 11월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에서 끝나는 자신의 정신적 여정을 일기로 기록했고, 이는 대전 후 ‘전복된 삶'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녀의 고백. “나는 집단노동수용소에서 사흘도 못 가 죽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날마다 죽기 위해 잠자리에 들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인생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기뻐하며 살아갈 장소는 충분히 남아있으니까요." 이처럼 완벽하게 개인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은 드물다. 공동체 활동가들처럼 자기를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도 드물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하나의 모범이 된다. 그들이 모범이 되는 이유는 많겠지만 하나를 꼽자면, ‘인생의 한 가지 과제는 통합이다’라는 핵심을 그들이 입증한다는 점이다. 통합이란 단일한 어떤 전망을 향해 일관되게 나아갈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의 파편 난 조각들을 모두 모아서 온전한 하나로 엮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결코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파편화된 삶을 살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낮은 수준에서만 통합을 이룬다. 그런데 힐레숨은 매우 높은 수준에서 통합을 이루었다. 인생의 외부 조건들이 극단적으로 참혹하게 바뀌어 갔지만 그녀의 내면 상태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평온해졌다. 그녀가 통합을 획득한 방식은 자기 천착이라는 끊임없는 내적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온전하게 내려놓고 또 내어 주는 외적 과정을 통해서였다.
--- p.192~193
인생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인생에서 기대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인생이 우리에게서 기대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멈출 필요가 있었다. 대신에 스스로를 매일 매시간 인생으로부터 질문을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의 대답은 대화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처신이어야 한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인생이 던지는 문제들에 대해 올바른 해답을 찾고 인생이 각 개인에게 끊임없이 부여하는 과제들을 수행하는 의무를 지는 것이다.”
소명 의식은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주어진 의무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서 비롯된다. 프랑클은 강제 수용소에서 심리 치료사 일을 수행하면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세상이 여전히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들을 상기시켰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추구할 목적과 의무가 있었다.
--- p.205~206
멘토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들
멘토는 실수를 다루는 법을 가르친다.
경험을 많이 할수록 자기 실수를 한층 더 잘 인식하게 되고 또 이 실수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지 경험을 통해 이해하게 된다. 멘토는 두 번, 네 번, 열 번 원고를 고쳐 쓰는 것에 대한 감각을 멘티에게 제공한다. 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 어떤 실수든 나중에 얼마든지 바로잡을 수 있다는 믿음과 그런 실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신감을 가지고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준다.
--- p.227~228
다른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지금도 여전히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이 결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회학자들이 보기에 오늘날 결혼은 토대로 사용되는 쐐기돌보다는 장식물 기능을 가진 갓돌로 인식되고 있다. 예전에는 먼저 결혼부터 해야 좋은 커리어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자제력과 건실함을 갖춘 사람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자기부터 먼저 자리를 잡은 다음에 결혼을 하겠다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처럼 결혼을 바라보는 사회적인 인식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늘 그렇듯이 개인주의 관점에서 문제가 되는 한 가지는 개인이 ‘자기’라는 작은 감옥에 갇혀 버린다는 점이다. 자아실현을 좇아서 결혼한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좌절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결혼 생활 그리고 특히 자녀 양육은 이 사람이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는 길로 온전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 벗어나도록 끝까지 방해할 테기 때문이다.
개인주의 관점이 안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이것이 가장 깊은 갈망들을 충족할 명쾌한 답안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장(heart)은 다른 사람들과 합쳐져서 하나로 녹아들길 갈망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서로의 자율성을 합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서로가 자기를 버릴 때만 해결된다. 영혼(soul)은 어떤 이상을 좇고 기쁨을 추구하길 갈망한다. 이것은 자아를 초월해서 결혼 생활에 봉사할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 p.295~296
배우지 않으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시카고대학교 교수들은 우리에게 대상을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현실의 실체를 보는 것이 간단해 보일 수도 있다. 그냥 고개를 들고 세상을 둘러보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정치권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파성이라는 왜곡된 안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의 공포와 불안과 자아도취의 필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지 모른다.
대상을 잘 보는 건 자연적으로 되지 않는다. 이것은 겸손함의 어떤 행위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즉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나 자기가 바라는 것에서 온전하게 빠져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보고자 하는 대상을 자기 관심사의 반영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잘 보는 것은 실체를 선명하게 바라볼 줄 아는 다른 사람들(예컨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조지 엘리엇, 조지 오웰, 제인 제이콥스, 제임스 볼드윈, 레프 톨스토이 등)에게서 배워야 하는 하나의 기술이다.
19세기 영국의 예술평론가이자 사회사상가인 존 러스킨은 이렇게 썼다. “인간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수행하는 가장 위대한 일은 어떤 것을 ‘보고’ 또 이렇게 ‘본’ 것을 쉽게 풀어서 말하는 것이다.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수백 명이라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이며,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수천 명이라면 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이다.”
--- p.385~386
공동체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 때
고통의 시기에는 누구나 자기 인생이 나아가는 방향을 어떻게든 바로잡아 보려고 핸들을 잡은 손에 과도하게 힘을 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로는 패배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핸들을 놓아 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아닌 게 아니라 헨리 나우웬도 다음과 같이 썼다.
“자기가 받는 고통의 특수한 환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쉽게 화를 내고 적개심을 품고 복수심에 사로잡힌다. (…) 그러나 진정한 치유는 자기의 특수한 고통이 사실은 인간 전체가 겪는 고통의 일부임을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 자신의 고통을 유발한 외부 상황에 대해서는 관심을 멀리하고 자기가 참여하는 공동체의 고통에 관심을 집중할 수 있을 때 자기가 받는 고통을 견디기가 한결 쉬워진다.”
고통을 통해 습득하는 지식은 분명하게 표현될 수 있지만, 고통의 경로를 견뎌 내지 않은 사람은 그 지식을 결코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내가 그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왔을 때 나는 빈손이 아니었다. 인생이 나를 가혹하게 두들겨 팼기에 비로소 나는 무언가에 감동받기 충분할 정도로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고통은 나 자신의 가장 깊은 원천들을 열어젖혔고, 덕분에 새로운 성장이 이루어질 신선하고 건강한 토양이 드러났다.
--- p.444~445
신앙인이라면 겸손함과 중간의 목소리로 살아가라
신앙인은 겸손한 존경심을 가지고 신에게 다가가며, 공부와 기도와 영적인 훈련을 통해 티끌만 할지라도 신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이 사람은 신의 사랑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 따르며 사는 법을 서서히 배운다. 인생을 지배하는 것은 의지로 채워진 어떤 시도가 아니며, 또한 완전한 항복과 자기 파괴도 아니다. 인생을 지배하는 것은 열정적인 반응이다. 그것은 참여, 신의 더 큰 의지에 자기의 의지를 보태는 복잡한 참여이다.
피터슨이 말하듯이, 그것은 능동적인 목소리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것이 지배이다)도 아니고 수동적인 목소리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것은 굴복이다)도 아니다. 그것은 중간의 목소리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즉 대화와 반응이다. (…)
신앙과 은총은 주체성을 버리는 일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신앙과 은총은 주체성을 강화하고 그것에 권한을 부여하는 한편 그것을 변화시키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은총이 넘칠 때, 은총은 우리가 바랄 더 좋은 대상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또 그런 것들을 바랄 수 있는 더 많은 힘을 우리에게 준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예전에 가지고 있던 욕구들을 버리고서 새롭고 더 나은 일련의 욕구들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 p.487~488
공동체의 미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두 진영의 전쟁
미국 사회의 토대, 즉 국가와 시장을 비롯해 모든 것이 의존하는 신뢰와 인간관계 그리고 헌신의 망이 무너지고 있다. 이에 따른 결과는 그 어떤 전쟁 못지않게 유혈이 낭자하고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어쩌면 지금이 이런 현상을 하나의 전쟁으로 보기 시작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싶다. 한쪽 진영에는 분리와 불화와 고립을 조장하는 힘들이 있고, 다른 쪽 진영에는 애착과 연결과 연대를 강화하는 사회의 모든 힘들이 있다. 바야흐로 우리는 사회적 얼개를 찢으려는 진영과 이 얼개를 강화하려는 진영 사이의 마지막 대결전을 목격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 전쟁에는 특별히 까다로운 점이 있다. 이것은 선량한 사람들의 집단과 사악한 사람들의 집단이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전쟁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두 진영에 동시에 속해 있다는 말이다. (…)
관심과 보살핌이 부족할 때 이웃이라는 집단은 쉽게 깨지고 그 구성원들 역시 파편화된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전과 다름없이 이웃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긴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흐르던 신뢰의 물길은 바짝 말라 버린다.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가깝게 의지할 사람이 별로 없다. 사람들은 다들 소속감을 갈망한다. 그러나 이 소속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분명하지 않다. (…) 관심과 보살핌은 소원함과 불신으로 이미 대체되고 없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공동체를 복원할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는 두 번째 산에 사는 사람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에 의해 공동체는 복원된다.
--- p.510~512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또 다른 길
지금 세상은 전환의 순간을 통과하고 있다.
개인주의 도덕 생태계가 우리 주변에서 무너지고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벌거벗은 채로 외롭게 떨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는 본능적인 반응은 “부족으로 돌아가자(Revert to Tribe)”라는 진화론적 반응이다. 만일 우리가 사회 차원에서 “나는 자유다”의 과잉에 대해 “부족으로 돌아가자”의 시대로 대응한다면, 21세기는 유아적인 갈등과 폭력의 시대가 될 것이다.
소속감을 찾는 또 다른 길이 있다. 의미와 목적을 찾는 또 다른 길이 있다. 건강한 사회에 대한 또 다른 전망이 있다. 바로 관계주의를 통하는 길이다. 이 길은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서 나 아닌 타인을 돌볼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찾아내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쪽으로 자기 존재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 선언문에서 나는 현시점의 초개인주의에 반대하고, 더 나은 삶의 방식인 관계주의를 주장하고자 한다.
--- p.560
추천평
빛은 출발할 때부터 어디 도착할지 알고 있다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방향을 수시로 고쳐야 한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 번째 산』은 그렇게 고칠 때가 임박한 독자와 만났을 때 저력을 발휘한다. 독자들이 이미 들어 보았을 종류의 조언―지나치게 영적이거나, 본성에 반하라고 요구하거나, 새삼스런 동기 부여에 매달리는 것―과 달리, 『두 번째 산』은 주변 세계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려는 태도가 어떻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내 삶에 기쁨과 목적을 제공하는지 설명한다. 넘어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 허지웅 (『살고 싶다는 농담』 저자)
내가 쓴 글인가 하면서 읽었다. 최근 나의 가장 큰 과제는 ‘다시 시작하는 법 익히기’다. 『두 번째 산』 식으로 말하면 두 번째 산을 발견하고 오르기. 이 책은 커리어, 결혼, 철학과 신앙, 공동체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추구하는 삶의 단계를 이야기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어떻게 나 자신이 세계에 반응하는 법을 바꾸고 더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인간관계는 어떻게 힘이 될 수 있는지를 먼저 고민하는 책이다. 이 책을 읽은 당신의 앞으로의 삶이 더 충만하기를 바란다.
- 이다혜 (『출근길의 주문』 저자)
남은 인생은 너무 막막한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은 무엇일까. 또, 어떤 일이 나에게 궁극적인 기쁨을 주며, 내 인생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브룩스는 이 고민에 맞닥뜨리는 시기를 ‘두 번째 산’에 비유한다. 물질적인 ‘첫 번째 산’을 넘은 뒤 찾아오는 진정한 인생의 고민. 그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진정한 관계의 회복이다. 나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하겠지만, 이 책을 읽자 적어도 내 고민의 종류가 무엇이었는지 명쾌해졌다. 또, 해답이 분명한 실체로 다가옴을 느꼈다.
- 남궁인 (『제법 안온한 날들』 저자)
일생을 첫 번째 산에서만 머무르는 삶은 성공한 커리어라는 결실을 얻을 수 있게 하지만 대신 그 명함 너머의 진정한 나를 잃어버리는 대가를 치르게 한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두 번째 산으로의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여정 속에서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 나를 발견할 때 삶은 기쁨으로 채워져 있는 충만함 그 자체가 될 것이다. 허기를 채울수록 공허함을 느껴야 하는, 행복하지만 기쁨을 잊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두 번째 산의 지도가 그려진 이 책이 인생의 훌륭한 이정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신기율 (유튜브 ‘신기율의 마음찻집’ 크리에이터)
데이비드 브룩스의 재능은 예측하기 어렵고 심각한 사회 현상을 이해하기 쉬울 뿐 아니라 놀랍도록 선명하게 만들어 준다.
- [뉴욕타임스]
브룩스는 언뜻 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개인적 경험을,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활기차고 도전적인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는 능력을 발휘하여 대단한 성취를 이뤄 냈다.
-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지금까지 브룩스가 쓴 최고의 저작인 『두 번째 산』은, 이 책이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더 가치 있는 책이다.
- [가디언]
브룩스는 이 책을 통해 직업 우리를 ‘두 번째 산’, 그리고 약속된 낙원으로 이끄는 동력이 되어 준다.
- [워싱턴포스트]
장담하건대, 이 책은 널리 읽히는 데 그치지 않고, 수많은 인생을 바꿔 놓게 될 것이다.
- [더애틀랜틱]
커리어의 씁쓸함과 실존적 무게로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사려 깊은 책이다.
- [커커스리뷰]
(20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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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데이비드 브룩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로 사회문화 현상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풍자적인 문체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 온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이다. 《뉴스위크》와 《애틀랜틱먼슬리》의 객원편집자이자 NPR의 시사 프로그램 〈올 싱스 컨시더드All Things Considered〉와 PBS의 〈짐 레러의 뉴스아워The NewsHour with Jim Lehrer〉에서 시사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시카고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한 후 《시티뉴스》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월스트리트저널》에서 9년 동안 근무하며 유럽 특파원과 수석 기자를 지냈고, 《위클리스탠더드》 편집장을 역임했다. 또한 《워싱턴포스트》 《뉴요커》 《뉴리퍼블릭》 《코멘터리》 등 유수의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해 왔다. 대표 저작으로 내면의 결함을 딛고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을 탐구한 《인간의 품격》을 비롯해 《소셜 애니멀》 《보보스》 등이 있다.
역자 : 이경식
서울대학교 경영대학과 경희대학교 대학원(국문과)을 졸업했다. 《구글의 종말》 《포사이트》 《태평양 전쟁》 《댄 애리얼리 부의 감각》 《플랫폼 제국의 미래》 《에고라는 적》 《소셜 애니멀》 《협력의 진화》 《신호와 소음》 등 10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 에세이집 《1960년생 이경식》 《미쳐서 살고 정신 들어 죽다》 《대한민국 깡통경제학》 《청춘아 세상을 욕해라》와 소설 《상인의 전쟁》 등을 출간했고, 시나리오 〈개 같은 날의 오후〉 〈나에게 오라〉, 오페라 〈가락국기〉 등의 대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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