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중에는 겨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시가 유독 많았다. 첫 추위가 온 날, 그때의 당선작들을 읽어본다.
그 시절에는 문예지가 많지 않았고, 국내 유수의 출판사인 창작과비평사와 문학과지성사 등이 신군부에 의해 강제폐간된 상태였다. 등단할 꿈에 부푼 문인 지망생들이 대거 신문사 공모 신춘문예에 몰렸다. 신문사마다 수천 편의 투고작 중에서 딱 1편을 가려내는 심사를 열흘 만에 끝내야 했으므로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대학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연초에 신문 가판대를 돌면서 신춘문예 당선작이 게재된 신문을 사 모았다.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몽땅 필사했던 나는 이때도 역시 노트에 한 편 한 편 필사하면서 신춘문예 당선을 꿈꾸었다. 1983년 신춘문예는 낙선하였고 1984년에 당선되어 대학 재학 중에 당선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었지만 순전히 운이 좋아서 당선되었을 따름이라 시련의 날이 그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꿈에 보는 폭설暴雪
문형렬
갑자기 코피가 옷섶을 적시고 우리는 눈 내리는 산을 오른다
쓰러지고 꺾어지고 산을 오르며 이 달겨드는 눈발로도 몸을 파묻지 못하거니
어느 불꽃인들 몸을 말릴 수 있는가?
둘러보아도 산마루마다 번쩍이는 눈보라는
살아 있는 것들의 핏줄을 한 가닥씩 비우고
하룻밤의 평화를 위하여
자작나무 껍질 한 짐과 참나무 등걸을 지고 돌아와
젖은 나무에 불을 지피는 우리는
한 마리씩의 쓸쓸한 딱정벌레,
불꽃은 젖어서 손바닥 껍질을 한 겹씩 벗기고
어딘가 이 겨울밤을 타오르는 넋들이 그리워
젖어서 우리는 불꽃 속으로 떠난다
눈이 내린다, 불꽃 속으로 창자를 긁어내는 오늘밤의 눈보라는
꿈꾸는 속눈썹에 방울방울 쉼없이 솟아 오른다
젖어라 나무들이여, 딱정벌레 몸뚱이여
천지사방 우리는 외로워서 온몸에 불꽃을 달고
그 불꽃 갈피 없이 눈보라 속으로 흩날리어,
어딘가, 그리운 넋들의 사랑은
젖은 어깨 가득히 적막(寂寞)의 불꽃은 갈기갈기 쓰러지고
아아 우리는 눈사람이 되어 숨죽이며
스물다섯 해 자란 등뼈를 깎는다
눈길을 간다, 천둥을 치면서
얼마나 많은 가뭄이 우리의 가슴을 적시는가
서로의 가슴에 벼락을 때리면서
눈 내리는 산에 불을 지른다
지치도록 눈보라는 온산을 헤매고
한 삽의 그리움도 쳐내지 못한 채 우리는 퍼질러 앉아
다시 터져 흐르는 코피를 훔치면
목 놓아 아른거리는 꽃잎의 불꽃
보이나니, 눈보라 속에
저 퍼붓는 그리움 속에 서럽고 싱싱하게
산등성이마다 살아오르는 넋들의 불꽃이 보이나니,
더욱 기승을 부리는 눈보라의 살갗이여
말 없어라, 말 없어라
우리의 살갗은 아프지 않구나
우리의 두 눈, 우리의 두 귀, 우리의 어깨뼈,
말 없는 스물다섯 살, 푸르디푸른 등뼈 조각 조각이
이 밤 저리도 흐느끼는 눈발로 퍼붓나니,
산등성이마다 불을 켜는 넋들아
우리는 하나씩 도깨비불이 되어,
눈물 흘리는 도깨비가 되어
꿈결에 지는 폭설의 화살, 목메는 불꽃으로 온산을 헤매다가
이제는 통곡의 산등성이에 이르러
꽃잎같이 타올라 넋이 되는구나.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겨울새
강태형
1
그 겨울의 바람 속에서
나는 깃발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한없이 나부꼈다.
강물처럼 바람이 흐르고
하염없이 쓸려가는 사람들의 거리를
꿈속을 오르내리듯
주머니 속의 몇 개의 지식을 셈하며
수세기(數世紀)를 지나온 빙하기의 바람 속을
날고 있었다.
발아래 교회의 종소리가 얼어붙은 채 구르고 있었다.
어두워진 하늘을 열고 내리는
눈송이들
세상은 하얗게 떠오르고
사람들이 길모퉁이 모퉁이로
심연의 물살처럼 사라져 갔다.
2
소리없는 거리에 내리는 찢어진 깃발, 종소리
흐린 가등(街燈) 위로 내리는 눈송이 몇 개
가장 빛나는 음계(音階)를 딛고
새의 울음은 어둠 속으로 치솟았다.
그때, 서서히 일어서는 백마의 무리
하얀 갈기를 쓸며 꿈틀대는 도시를 보았다.
어둔 하늘에 뛰어올라
붉은 아침바다에 앞발굽을 딛고 선
세상을 보았다.
3
겨울 하늘에 차갑게 빛나던
내 하나의 별이 부서져 내려 온 세상에 흩어지고
지상의 곳곳에서 눈뜨며 반짝이는 빛, 반짝이는 강물.
목마른 자의 가슴 아래로 잠적하듯
가장 낮은 땅으로 흐르는 별 무리들
이제 나는 원한다
가슴에 새겨진 별빛을 돌며돌며
내 속살을 적시며 떨구는 눈물도
낮은 땅으로 흐르기를
이름 잃은 풀잎의 한 점 이슬이기를
타오르는 아침바다에 투신하기를
일어서는 빛,
밤새 내린 눈발 위로
무수히 쏟아지는 하늘이여
*198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
양애경
1
입동 지난 후 해는
산 너머로 급히 진다.
서리 조각의 비늘에 덮인 거리
어둠의 입자가 추위로 빛나는 길목에서
나는 한 개비의 성냥을 긋고
오그린 손 속에 꽃잎을 급히 피워낸다.
불의 의상을 입으며
사물은 하나하나 살아나기 시작하지만
불은 가장 완벽하게 피었다 지는 꽃
화사한 절망.
절벽으로 떨어지듯 꺼진다.
2
기침을 한다
탄불을 갈며
달빛 밑에 웅크리던 아궁이 옆으로 희미하게
흩어지는 그림자.
한밤중 여자들의 팔은
생활로 배추 속처럼 싱싱하게 차오르지만
좀처럼 불은 붙지 않는다.
식구들은 구들에 언 잔등을 붙인다.
어떻게 된 것일까 옛집의 불씨는
영원히 꽃피우는 전설의 나무와 같이
순금으로 제련된 불씨,
화로에 잘 갈무리되어
주인을 지켜주던.
3
이제 불은 때묻고 지쳤다.
누가 불을 거래하고
누가 불에게 명령하는가
불길한 모반의 충동에 몸을 떨며
콘크리트 보일러실에 갇혀 웅크리고 있는 불의 꿈
밤 열 시 공원(工員)들은 흩어지고
불은 또 재 위에 몇 길이나 쓰러진다.
4
짧은 인사의 잔손 목을 흔들다 말기
부딪치다 와아 터지기
안개 속에 서 있는 불
문을 열고 길길이 솟구치는 불
산맥 속에 잠들어 있는 원시림의 불.
5
모란 마른 가지에서 올라오는
불의 빛깔은
사과나무 장작에 옮겨 붙으며 만발한다.
쓰레기 더미에서도 불은 꽃핀다.
들끓으면서 평등한 불의 속
열은 순수하여 평화롭다.
6
열은 빛나지 않고
소리내지 않는다.
그러나 따갑게 퉁겨져 나와 손바닥을 쏘는
열기
우리의 입다문 진실.
바람 부는 도시의 밑둥을 떠받치는
건강한 당신
일곱 시 반에 집을 나와 아홉 시 반에
휘파람 부는 당신
당신의 불.
7
이 속에 잠자는 불이 있다.
작은 성냥 골 안에.
성냥은 불을 꿈꾸고
불은 성냥을 태운다.
순간의 불꽃은 기다림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바꾼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꿈을 시작한다.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영산포
나해철
1
배가 들어
멸치젓 향내에
읍내의 바람이 달디달 때
누님은 영산포를 떠나며
울었다
가난은 강물 곁에 누워
늘 같이 흐르고
개나리꽃처럼 여윈 누님과 나는
청무를 먹으며
강둑에 잡풀로 넘어지곤 했지
빈손의 설움 속에
어머니는 묻히시고
열여섯 나이로
토종개처럼 열심이던 누님은
호남선을 오르며 울었다
강물이 되는 숨죽인 슬픔
강으로 오는 눈물의 소금기는 쌓여
강심(江深)을 높이고
황시리젓배는 곧 들지 않았다
포구가 막히고부터
누님은 입술과 살을 팔았을까
천한 몸의 아픔, 그 부끄럽지 않은 죄가
그리운 고향, 꿈의 하행선을 막았을까
누님은 오지 않았다
잔칫날도 큰집의 제삿날도
누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들은 비워지고
강은 바람으로 들어찰 때
갈꽃이 쓰러진 젖은 창의
얼굴이었지
십년 세월에 살며시 아버님을 뵙고
오래도록 소리 죽일 때
누님은 그냥 강물로 흐르는 것
같았지
버려진 선창을 바라보며
누님은
남자와 살다가 그만 멀어졌다고
말했지
갈꽃이 쓰러진 얼굴로
영산강을 걷다가 누님은
어둠에 그냥 강물이 되었지
강물이 되어 호남선을 오르며
파도처럼 산불처럼
흐느끼며 울었지.
2
개산 큰집의 쥐똥바퀴새는
뒷산 깊숙이에 가서 운다
병호 형님의 닭들은
병들어 넘어지고
술 취한 형님은
강물을 보러 아망바위를 오른다
배가 들지 않는 강은
상류와 하류의 슬픔이 모여
은빛으로 한 사람 눈시울을 흐르고
노을 속에 운곡리(雲谷里)를 적신다
냉산(冷山)에 누운 아버님은
물결 소리로 말씀하시고
돌 절벽 끝에서 형님은
잠들지 않기 위해 잡풀처럼
바람에 흔들린다
어머님 남평(南平)아짐은 마른 밭에서
돌아오셨을까
귀를 적시는 강물 소리에
늦은 치마품을 움켜잡으셨을까
그늘이 내린 구진포(九津浦)
형님은 아버님을 만나 오래 기쁘고
먼발치에서
어머님은 숨죽여 어둠에
엎드린다
*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설야雪夜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밑에 호롱볼 야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써늘한 추회(追懷)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출처] 겨울에 읽기 좋은 신춘문예 당선 시|작성자 이승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