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번역서 전체 | | 총검색건수 : 36건 | | | 목록갯수 | | | | 정렬대상 | | | | 정렬방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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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 서명 |  | 권차 |  | 문체 |  | 기사명 |  | 저/편/필자 |  | 간행년도 |
1 |  | 고대일록(孤臺日錄) |  | 부록 |  | |  | 인명록(人名錄) |  | 정경운(鄭慶雲) |  | 20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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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부춘산(富春山) 아래에 살았다. 조식은 〈엄광론〉을 지어, 엄광이 벼슬하지 않은 이유를 광무제가 그를 선비로 대우하지 않고 신하로 부렸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적극적인 출사(出仕) 의지를 보이다가 처사상(處士像)을 견지한 조식 자신을 변명한 것으로 해석된다.여우길(呂祐吉) : 원문에는 ‘呂惟吉’로 되어 있으나, 여우길(呂祐吉)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선조실록》 39년 12월 22일 기사 참조.염파(廉頗)와 이목(李牧) :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명장(名將).영규(靈圭) : ?~1592.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기허(騎虛). 속성은 박(朴). 휴정(休靜) 대사의 고제(高弟)로 공주(公州) 청련암에서 수도, 선장(禪杖)으로 무예를 익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명의 승병을 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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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 고대일록(孤臺日錄) |  | 고대일록 제1권 |  | 임진(壬辰, 1592) |  | 겨울 12월 |  | 정경운(鄭慶雲) |  | 20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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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했다. 순찰사(巡察使)가 좌우도(左右道)의 유민(流民)들이 도로에 잇달아 있어 날마다 천 명을 헤아리며 개중에는 전투에 나아가기를 자원하는 자도 없지 않으므로 곽간에게 여러 고을로 다가가서 유민을 불러 모으라고 명령했으나, 한 명도 여기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애를 끌어안고서는 배고픔에 울부짖으며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는 처지에 있는 자들이 어찌 자원하여 전투에 나갈 리 있겠는가.○ 12월 7일 계사(癸巳)초모관(招募官)은 산음(山陰)으로 향했다. ○ 오늘 밤 큰 눈이 내렸다. ○ 전란의 과정에서 사망한 충청도(忠淸道) 의병장(義兵將) 조헌(趙憲)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승려 영규(靈圭)가 동지(同知)동지(同知)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조선 시대에 중추부에 속한 종2품 벼슬.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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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 고대일록(孤臺日錄) |  | 고대일록 제1권 |  | 임진(壬辰, 1592) |  | 가을 9월 |  | 정경운(鄭慶雲) |  | 20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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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大坤)은 겁이 많으며 늙어서 정신이 멍청한 인물이라고 논하고, 두 사람의 죄를 물어 귀신과 사람들의 분노를 말끔히 씻어 주기를 청하는 내용이다. 또 두 선생두 선생김면과 정인홍을 가리킴.과 곽재우(郭再祐)가 병사를 일으켜 적을 토멸한 공로 등을 말했다. [서적(徐迪)서적(徐迪)1556~?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혜중(惠仲). 거주지는 합천.이 지었다. 상세한 내용은 별록(別錄)에 보인다.]○ 9월 4일 경신(庚申)충청도(忠淸道) 의병장(義兵將) 조헌(趙憲)과 충청도 연기(燕岐)의 의승장(義僧將) 영규(靈圭)영규(靈圭)?~1592.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기허(騎虛). 속성은 박(朴).가 금산(錦山)에서 적과 교전을 벌이다 대패하여 전사했다. 처음 조헌과 영규는 군사를 일으켜 적을 소탕하여 남들이 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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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 국조보감(國朝寶鑑) |  | 국조보감 제67권 |  | 영조조 11 |  | 48년(임진, 1772) |  | 신숙주(申叔舟) |  | 19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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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상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태학 유생을 불러보았다. 하교하기를,“예전에 당(唐) 나라의 양성(陽城)이 국자 사업(國子司業)으로 있을 때 제생(諸生)들에게 깨우쳐 준 바가 있었는데, 더구나 임금이 되어서 제생들을 효(孝)로써 권면하는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 새해를 맞이하여 어버이는 고을 문에 기대어 자식을 기다리고 자식은 고향을 바라다 보게 될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를 뵙고자 하는 자는 즉시 허락해 주도록 태학에 분부하라.”하였다.○ 의승(義僧) 영규(靈圭) 및 칠백의총(七百義塚)에 사제(賜祭)하도록 명하였는데, 바로 임진란 때 금산(錦山)에서 절개를 지켜 죽은 자들이다.○ 2월. 상이 덕유당(德游堂)에서 의정부의 진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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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 국조보감(國朝寶鑑) |  | 국조보감 제31권 |  | 선조조 8 |  | 25년(임진, 1592) |  | 신숙주(申叔舟) |  | 19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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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를 파견하여 남병(南兵)을 거느리고 북안(北岸)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대군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낙상지는 용력이 있어 천 근(斤)을 들었으므로 낙천근(駱千斤)이라 불리웠는데 매우 위명을 떨치었다.○ 의병장 조헌(趙憲)이 청주성(淸州城)을 회복하였다.조헌이 처음에 수십 명의 유생(儒生)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뒤 1천 6백 명을 모집하였다. 공주 목사 허욱(許頊)이 의승(義僧) 영규(靈圭)를 얻어 그로 하여금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조헌을 돕게 하니, 조헌이 군사를 합쳐 곧장 청주 서문에 육박하였다. 적이 나와서 싸우다가 패하여 도로 들어가니, 조헌이 군사를 지휘하여 성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서북쪽에서부터 소나기가 쏟아져 내려 천지가 캄캄해지고 사졸들이 추워서 떨자 조헌이 탄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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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 기재사초(寄齋史草) |  | 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  | |  | 임진일록 3(壬辰日錄三) |  | 박동량(朴東亮) |  | 197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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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을 초토사(招討使)라 칭하여, 이들에게 교서를 내렸다. 조헌에게 내린 교서에는 ‘충성된 말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오늘의 지경에 이르게 하였음을 뉘우친다.’라는 말이 있었다. 또 김면 등에게도 교서를 내렸다.상이 이미 자신을 나무라는 교서를 내렸는데, 이르기를,“용만(龍灣) 한 모퉁이에서 국사가 어렵게 되고, 국토는 이에서 다하니 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저 강물을 바라보니 또한 동쪽으로 흘러가누나. 돌아가자고 하는 일념이 저 물과 같이 넘실거린다.”하였다. 이 교서가 내린 것을 원근에서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두 이호민(李好閔)이 지은 것이다.○ 충청 감사 윤선각(尹先覺)이 아뢰기를,“큰 적이 청주(淸州)에 들어와 군사를 나누어 살육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승명(僧名)이 영규(靈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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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 난중잡록(亂中雜錄) |  | 난중잡록 4(亂中雜錄四) |  | |  | 경자년 하 |  | 조경남(趙慶男) |  | 197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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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 벼슬로 그 성명을 상고해 보니, 장군은 곧 이순신(李舜臣)이었다. 고 첨지는 경명(敬命)이요, 최 병사는 경회(慶會), 김 원주는 제갑(悌甲), 임 남원은 현(鉉)), 송 동래는 상현(象賢), 김 종사는 여물(汝岉), 김 창의는 천일(千鎰), 조 제독은 헌(憲), 김 회양은 연광(鍊光), 황 병사는 진(進), 이 병사는 복남(福南), 김 진주는 시민(時敏), 유(劉) 수사는 극량(克良), 신 판윤은 입(砬), 이 수사는 억기(億祺), 이 첨사는 영남(英男), 정(鄭) 만호는 운(運), 심 감사는 대(垈), 정(鄭) 동지는 기원(期遠), 신 병사는 할(硈), 윤 판사는 섬(暹), 박 교리는 지(篪), 이 좌랑은 경류(慶流), 고 임피는 종후(從厚), 고정자는 인후(因厚), 승장은 영규(靈圭)이다. 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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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 난중잡록(亂中雜錄) |  | 난중잡록 2(亂中雜錄二) |  | |  | 임진년 하 |  | 조경남(趙慶男) |  | 197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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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두 장수도 역시 군사들이 해이해질 것을 염려하여, 드디어 본 지방의 군사와 합세하여 강을 건너 장단에서 적을 엿보았는데 적이 군사를 감추고 약한 체하여 우리 군사를 유인하다. 여러 장수들이 급히 군사를 시켜 육지에 내려가 잡게 하였더니 적병이 사면에서 일어나 기세가 바람을 탄 불길 같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고 천일 등은 겨우 몸만 빠져 나와서 쪽배를 타고 달아나다. 수일이 지난 뒤 전장으로 사람을 보내어 당일에 죽음을 면하고 숨어 있는 자 들을 몰래 불러 모으게 하니 겨우 1천여 명을 얻다.27일.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과 중[僧] 의장(義將) 영규(靈圭) 등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치다가 패하여 죽다. 그 뒤 만력 23년 을미년(1595, 선조 28)에 전지(戰地)에 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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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 도곡집(陶谷集) |  | 도곡집 제12권 |  | 비명(碑銘) |  | 밀양 표충사 송운대사영당비명 〔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 〕 |  | 이의현(李宜顯) |  | 20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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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밀 듯한 기세로 몰려와 나쁜 기운이 하늘에 가득할 때에 충의(忠義)의 마음이 크게 일어나 스스로도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이에 한마디의 말로 여러 왜적들을 굴복시키고, 한 자루의 검으로 빼어난 공을 세웠으니 공(空)이니 환(幻)이니 하며 허무한 말을 하면서 혼자서 고목(枯木)처럼 앉아 참선이나 하는 일개 선승들과 나란히 논할 수 없다. 성상이 하교할 때에 옛 영걸(英傑)을 언급하며 대사에게 권면했던 것은 또한 그 포부가 비범함을 깊이 알아서 그런 것이니, 어찌 한 시대의 굳센 장부이자 시대를 뒤덮을 위대한 사나이가 아니겠는가.영남(嶺南)의 밀양(密陽)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워 대사를 제향하는데, 휴정은 맨 처음에 국난을 부지한 공이 있고 영규(靈圭)영규(靈圭)?~1592. 선조(宣祖) 때의 고승으로,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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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 매천집(梅泉集) |  | 매천집 제7권 |  | 제문(祭文) |  | 면암 최 선생에게 제사 지낼 때의 제문〔祭勉菴崔先生文〕 |  | 황현(黃玹) |  | 20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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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싸움에서 패하여 체포된 뒤에 일본 대마도(對馬島)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일절 음식을 거부하고 단식하면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병사하였다. 비록 그렇게 하셨지만 세상에는 다시 선생이 안 계시어, 나라는 폐허가 되려 하고 있고 백성은 사그라지려 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만약 선생을 시켜 천하를 바로 세우려 한 것이 끝내 이 정도에서 그친다면 선생의 죽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혹자는 선생을 중봉(重峯)중봉(重峯)조헌(趙憲, 1544~1592)의 호이다. 자는 여식(汝式)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왜군과 전투를 벌여 분전하다가 결국 전사하였다.이나 동계(桐溪)동계(桐溪)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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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ㅎㅎ
마음속에 깊이 담아 볼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움과 감사함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