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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문배마을 가는 길
문예지<인간과 문학>겨울호
장마가 끝났다는 기상대 예보는 성급한 것이었다. 비구름이 감질나게 푸른 하늘을 분탕질하며 오락가락 한다했더니 급기야 7월 초순에 ‘올 장마 끝’이란 예보를 내놓고 말았다. 그러더니 7월 마지막 주말을 앞두고 장마전선의 남하를 기습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화장실 보고 지퍼부터 내리는 놈들이야, 녀석들이.”
“치마부터 걷어 올리는 년은 아니고?”
“무슨 억하심정인지, 멀쩡하다가 꼭 주말이면 비를 쏟는단 말이야."
우리 둘은 맛도 시원치 않은 소머리 국밥을 얼기설기 입에 말아 넣으며 옆 테이블 사내들의 걸쭉한 투정을 들었다. 그들은 어느새 배낭을 둘러메고 빗속으로 사라져 갔지만 창밖으로 드러나는 빗줄기는 좀처럼 세를 숙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모처럼의 계획이니 일단 떠나 자하여 팔당과 양수리를 지나와 ‘아침 식사됩니다’라는 팻말을 찾아 들어서면서도 굳이 날씨를 탓하지는 않았다. 아침 요기를 하는 동안 하늘이 좀 진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어도 저들처럼 심란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우중인 데도 등산화를 질끈 동여맨 사람들이 심심찮게 좁은 식당 문을 밀치고 찾아드는 것을 보아 그들 사이에는 꽤나 알려진 식당인 듯했다. 모두들 한 마디씩 내뱉는 하늘 원망이 좁은 식당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 같은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물 컵을 비우고 모자를 눌러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는 여전히 수그러들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내가 느릿느릿 차를 돌려 경춘 국도로 진입했을 때는 비가 아니라 양동이로 쏟아붓는다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와이퍼가 혼신을 다해 문질러대는 대도 시야는 삽시에 무너져 내리곤 했다. 속도계가 시속 40킬로미터를 맴돌았지만 내겐 그러한 저속 주행이 더 없는 만족을 가져다주었다. 오늘의 빗속 행차가 더없이 푸근하고 여유를 물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불어난 거대한 몸집을 유유자적 굴리며 흘러가는 북한강 물줄기도 지금의 내 정서와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 선배, 오늘은 완행 한 번 타보시죠?”
“ 완행? 좋지, 오늘 같은 날엔 제격이지… ”
우리는 짧은 한마디를 나누고 입을 다물었다.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만 작은 공간에 가득 차올랐다. 선배와 나는 한차에 동승하고 있으면서도, 같은 강을 바라보면서도 각기 다른 배를 띄우고 있는지 몰랐다. 오늘따라 나는 본성이 천박한 게으름쯤으로 치부해 온 느림에 대해 천착해 들고 있었다. 그렇게 많이 전국의 도로란 도로를 다 다니면서 단 한 번도 최저속도를 유지해 본 적이 없는 나였다. 늘 최고속도를 웃돌다가 왕눈이(무인속도 측정기)에 찍히거나 모롱이 길에서 튀어나오는 스피드건에 재수가 옴 붙어 신분을 불어야 했던 기억이 촘촘할 뿐이다. 그러던 내가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느림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빠름의 철없음을 증오할 때 느림의 미학은 생겨나는 걸까. 어쨌든 나는 디지털 시대의 천덕꾸러기인 게으름을 향수병 마개를 따듯 황홀하게 열고 있는 것이었다.
장대비를 헤쳐 산을 오르면 우리의 목적지인 문배마을이 비에 허리를 잔뜩 숙인 채 우연 속에서 낮은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다. 나는 정 선배와 지금 그곳을 찾아가고 있다. 어릴 적 소풍 전날 밤에 갖는 흥분과도 같은 야릇한 두근거림을 안고. 들짐승도 비가 오면 굴에 들어가 쉰다는 데 이 비를 맞으며 꼭 가야겠느냐고, 난해한 표정을 짓던 아내… 그 얼굴에 낮달 같은 식은 웃음 베어 물고 돌아서던 아침 일도 그때의 빗소리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 경험적으로 익혀온 수많은 문명의 해악들에 익숙한 아내에게 빗길은 결코 길상일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는 이 시간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저 아스팔트를 때리는 빗줄기처럼 펄펄 뛰며 집을 나간 스물한 살짜리 딸 지혜의 행방을 추적하느라 전화통에 불을 내던지, 아니면 물고 또 깨물다가 잘 가꾼 손톱을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직도 감정 조율을 못하고 들썩이고 있을 아내의 작은 어깨가 떠올랐다.
“가끔은 집을 떠나고픈 그럴 때가 있걸랑요.” 어렵게 말문을 연 딸 친구들은 지혜의 돌발적 행동에 대해 그만한 나이에 있을 수 있는 ‘무단 여행’ 쯤으로 양해를 구했던 모양이지만 아내는 스스로 규정한 딸년의 ‘무단가출’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몸을 떨 뿐이었다. 이로 인한 충격파는 아내의 모든 사고를 마비시켜 25년 만에 직장에서 돌아온 가장의 귀가는 차 순위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나쁜 년, 억장이 미어지는 어밀 생각하면 전화 한 통 없이 이럴 수는 없어. 내가 절 어떻게 키워 대학엘 보냈는데, 집을 나가. 저한테 뭘 어쨌다고.”
쪽지 한 장 없이 가출을 결사했다고 심증을 굳힌 아내가 배신감과 허탈감을 물으며 내게 던진 말이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다그쳐 묻기에 한 마디 한다는 것이 “여행을 갔겠지. 친구들도 그랬다면서.” 했다가 말꼬리를 잡혀 고생을 자초하고 말았다. 아내는 여전히 처음부터 단정 지은 가출을 굽히지 않았다. 아내의 말대로 여행과 가출은 개념부터 다른 것이다. 하나는 부모의 허락이 수반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납치라는 최악의 경우까지 상정할 수 있기 때문인지 아내는 온갖 악몽을 조급히 떠올리며 스스로를 옥죄는 듯했다. 자존심이 유별나게 강한 아내는 이번 일이 어떻게 매듭을 진다 해도 쉽사리 상처는 아물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여보, 좀 더 냉정을 찾고 아이 입장서도 생각해 봅시다. 일은 저질러졌고, 뒤늦게 연락하자니 무섭고 그런 거 아냐? 당신이 아이를 그렇게 키웠잖아. 그제만 해도 그렇지 그만한 일로 아이를 쥐 잡듯 했다면서.”
“여보, 다 큰 딸애가 자정이 돼 들어왔는데 그만한 말도 못 해요, 제자식한테? ”
“이젠 대학생야. 자기 앞 지가가 책임져야 할 성인이라고. 언제까지 끼고 잔소리할 거야?”
“잔소리요? 지금 그렇게 한가해요? 우리 딸이 집 밖으로 사라졌다는 현실, 알아요?”
“자, 당신도 좀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봐요.”
그래도 나는 ‘집 나가서 살아보고 싶어. 단 며칠이라도.’ 친구가 전하는 딸년의 마지막 남긴 말을 아내에게 전하지 않는 절제를 보였다. 아내에게 더 이상의 상처나 충격은 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전후 사정을 가늠하기 위해 가슴이 아프다는 아내 대신 그날 어울린 친구들을 만나려고 약속된 커피숍에 나간 것은 지혜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그다음 날 저녁녘이었다.
“특별한 느낌은 없었어요. 잘 떠들고 잘 먹고, 그러다가 시간이 늦었어요. 지혜는 열 시 반이 통금이라면서요.”
“시간을 보더니 얼굴이 창백해지는 거 있죠 갑자기.”
“또 늦었어. 어쩌지 난 지금 가면 죽음이야.”
전화해. 난 못해 넌 알 거다 울 엄마. 하긴 네 엄마 갈구는 데 유명한 건 세상이 다 알지. 그래도 그렇지 열 시 반이 뭐니 우리가 애들이니? 너 반항할 땐 해야 된다. 아이들이 주고받은 대화록을 정리하면 이렇게 이어졌다. 우리 그럼 2차 갈까? 나 아르바이트 월급 받았다 오늘. 정말이야, 지혜 너 웬일이니? 그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더라 얘. 오늘 왜들 이래 다들 화끈하네. 좋아 그럼 내 원룸으로 가서 맘껏 수다 떨며 놀아보자. 그래서 아이들은 다시 뭉쳐 한 친구의 원룸으로 몰려갔다고 했다. 지혜는 말도 많이 하고 아주 명랑한 표정이었다고 전해 주었다. 연신 캔 맥주를 따 친구에게 권하며 평소보다 많은 양의 맥주를 마셨다고도 했다. 그러다가 지혜가 갑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확 떠나버릴 거야.’ 독백처럼 낮게 말했다고 일러준 것은 중학교 때부터 친구인 은정이었다. 나는 이때 충동을 느꼈구나 하는 심증을 갖게 되었다.
내가 집에 돌아와 완곡한 표현으로 편하게 얘기를 해도 아내는 말 한마디 한 마디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걔가 여행 다닐 아이예요 더구나 혼자. 집 밖에 모르는 애잖아요.”
나는 출구가 없는 낙담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갑자기 가장으로서 아무것도 기여하는 게 없구나를 생각하니 모락모락 자괴감이 일었다. 그날 이후 아내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우곤 했다. 그러다가 생각이 나면 새벽 두 시고 세 시고 일어나 딸 방을 뒤져 단서가 될 만한 것은 모두 꺼내 들었다. 아내는 밤낮없이 시간을 가리지 않고 전화를 해댔다.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우리 아이 못 봤어요 하며 매달리는 아이 엄마와 다를 게 없었다.
“심야에 전화를 드려 죄송합니다. 문헌정보과에 입학을 같이 한 지혜 엄마 되는 사람인데요. 혹시 우리 지혜를… 아 네 휴학을 했군요. 잠을 깨워 미안합니다.”
아내는 아이 방에서 나온 이름이 달린 전화번호마다 무조건 통화를 시도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실낱같은 희망이 불씨로 살아나기를 빌었지만 번번이 실망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보니 엉뚱한 전화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 시골에 전화를 다하셨어요 하지만 형은 군대 간 지가 벌써 1년 넘었는데요.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마다 한숨짓는 소리만 쌓였다. 수십 통의 전화를 했지만 좀처럼 희망의 증거는 잡히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미 교통사고를 죽은 집에 전화를 했다가 무안해져 어쩔 줄 몰라하는 아내였다.
“난 그렇게 생각해. 다들 몰라도 넌 지혜 남자 친구잖아. 모른다고만 둘러대면 안 되지. 설령 지혜가 비밀을 요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젠 부모 생각을 해야 해. 그래 지금 어디 있다고 하던가?. 또 몰라야? 이렇게 호소하는데도!”
죄가 있다면 지혜를 친구로 둔 죄 밖에 없다, 아이고 머리야… 수화기를 놓는 아내의 손이 잘게 흔들렸다. 하지만 지혜 일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맞는 격이 된 사람은 언젠가 길에서 인사를 받은 적이 있는 지혜의 남자 친구라는 학생일 것이다. 아내는 그 학생에게 의구심을 갖고 빚쟁이처럼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 달래고 얼리고 호소까지 했지만 소득이라고는 아득함뿐이었다.
“아버님 정말 전 모릅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그 후로 전화 한 번 없습니다. 오죽하면 아버님께 이렇게 전화를 다 드리겠습니까? 저도 알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어머님께서는 너무 절 오해하고 계십니다.”
“그게 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부모 심정 때문일세. 자식이 그런 부모 맘을 백분의 일이라도 알면 좋으련만. 스스로 친구 둔 죄가 있다고 했으니 수고 좀 해줘야지 어쩌겠나 자네가.”
“물론입니다 아버님. 곧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요?”
가출 3일째 딸의 남자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동전화에 문자 매시지가 떴다는 것이다. ‘지금 동해를 나는 중. 꿈만 같다 모든 게 신기하고 재미 빵빵. 전화는 사절’ 어쩌면 온 집안을 들쑤셔 놓고도 딸년은 태평스레 강원도 한 산속에서 몽당연필만 한 짧은 토막말만 남기고 또 오리무중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내는 얹힌 가슴을 쓸어내리긴 했어도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지 연신 숨을 말아 쉬며 눈을 감았다.
“어쩜 부모에 대한 안부 한마디도 없이-.”
“요새 얘들 다 그렇다는 거야. 부모 걱정하며 깊이 생각하질 않아.”
“어쩜 그럴 수가…”
아내의 탄식은 덧난 상처를 끌어안듯 고통스러워했다. 오늘도 내가 방수 재킷을 걸쳐 입고 신발 끈을 동여매고 일어날 때서야 딸 생각에서 깨어났는지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해요 당신 일은 안중에도 없고. 됐네 이 사람아.… 아내와의 미지근한 대화를 나누고 나는 크게 볼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빗길을 나섰던 것이다. 언론사에서 한 달 후에 정년퇴직하는 선배와 길동무하며.
비는 청평에 이르면서 기를 숙였다. 하늘을 짓눌렀던 검은 구름장이 무섭게 요동을 치며 남으로 이동을 시작하더니 수직으로 내리꽂던 빗줄기가 시들해진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바로 뒤에서 빠라빠라 방- 요란한 경적음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나는 성난 코뿔소처럼 차 꽁무니를 밀어붙일 기세로 돌진해온 차량을 백밀러로 확인했다. 나는 왼쪽 방향등을 깜박이며 바깥 차선으로 비껴 섰다. 그러기 무섭게 쌩 하니 코란도 한 대가 질주해 갔다. 그 뒤를 예닐곱 대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화물 트럭까지 알찐거리는 내 차가 밉상스러웠는지 포성과 같은 경적으로 위협사격을 가하며 추월해 갔다. 마지막 나를 추월한 차는 젊은이를 가득 태운 노란색 신형 스포츠카였다. 얼마나 볼륨을 올렸는지 쿵작 대는 테크노 음악이 나의 밀폐된 공간을 순식간에 휘저었다.
“죽기 살기로군. 이 좋은 강변길을 감상하며 가면 좀 안되나. 다 소용없는 짓들이야.”
굳이 지난 세월을 반추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선배는 내 내면의 흐름을 적확하게 짚어냈다. 선배가 다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빠름은 망각이야 죽음이지. 그걸 이제야 알았으니 말이야…”
“선배가 이제 철들었으면 난 무덤에 가서나 되겠죠?”
허튼소리… 선배 특유의 충청도 느린 말투가 강바닥을 흐르는 소리처럼 무겁게 들렸다. 언젠가 우리 민족을 ‘들쥐와 같다’고 빗댄 자가 있었다. 위컴 전 미 8군 사령관이었다. 한 마리가 선두에서 뛰면 덮어놓고 뒤 따라가는 게 들쥐의 습성이라고 했다. 그날 저녁 나는 정 선배와 탁빼기를 나누면서 다분히 백인 우월주의적 발언이라며 종주먹을 쥐고 흥분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언론사 간부였던 선배는 잇속을 보이지 않고 묵연(黙然)했다. ‘행동할 때 침묵하는 것은 비겁하다’는 채근을 들으면서도 선배는 야릇한 웃음을 베어 물뿐 흥분하지 않았다. 매사에 말을 극도로 아끼고 침묵을 지켰다. 자기주장을 앞세우지 않는 대신 언제나 주변의 주장을 경청했고 반론보다는 간결하게 자기 생각을 한 마디 하면 그것이 종언이었다.
“형은 형수와 섹스할 때도 침묵합니까?”
오죽했으면 언젠가 술기운에 그런 말을 다했다. 그때도 선배는 입은 웃었지만 말은 없었다. 그러한 선배를 가리켜 들어가면 안 나오는 크렘린이니 상종 못할 ‘쇄구(鎖口) 주의자’란 신조어까지 달아주는 후배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러한 선배가 싫지 않았다. 선배의 묵언에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모호함이 있었지만 천주교에서 말하는 묵유 같은 것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단언함 같은 건 없으면서도 그 말없음의 여백에 숨어있는 언어를 나름대로 유추하는 일은 내게 있어 즐거움이었는지도 몰랐다.
느림을 만끽하면서 나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내가 세월에게서 얼마나 험하게 휘둘러왔나를. 강자의 논리에 그냥 주구가 되어 뛰었던 20여 년 세월이 그러했다. 당신 대단해, 출세를 두 번씩이나 하구 말이야. 내가 대기업 홍보담당 임원이 되어 저녁자리를 마련했을 때 선배는 첫 잔을 건네며 뜻 모를 말을 내게 던졌었다. 나는 처음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입사 18년 만에 동기 중 가장 빨리 ‘기업의 별’을 달고 다소 흥분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선배의 그 말이 아리아리하게 씹히는 섭섭함으로 들렸었다. 그날 밤 자리가 끝날 때까지 선배는 웃기는 했어도 이렇다 할 축하의 말을 건네지 않다가 헤어질 때 내 손을 잡고는 아리송한 말마디를 남기고 새벽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생명은 천천히 가꿔야 장수해. 빠른 게 능사는 아냐. 튀면 저격수의 표적만 빨라져.”
그 후로 나의 뇌리에 가끔씩 떠올랐던 선배의 말은 언젠가 세월의 유속에 말려 자연스럽게 실종되고 말았다. 그것이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먼 날의 얘기가 되고 만 것이다. 나는 결국 가장 가까웠던 동기생의 유탄에 맞고 상무를 끝으로 레이스에서 탈락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이미 우리는 비에 젖은 이 빠진 개처럼 빗속을 어슬렁거리길 한 시간 넘게 길을 가고 있다. 왜 몰랐을까. 느리다는 것이 이처럼 감미롭다는 것을. 인생 50이 돼서야 느림의 중심에 앉아보는 이 안락함과 편안함이 그렇다. 정년을 한 달 앞둔 선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귀향하여 체감을 나눌 흙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미 선배는 나도 모르는 사이 3개월 귀농학교 입학을 신청까지 해놓고 퇴직 후의 시나리오를 퇴고해 놓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준비했나…. 천천히 차오르는 서러움 같은 것이 있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절에서 말을 금하라며 침묵이라고 써 문 위에 내건 묵언 패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마라토너 훈련 코스를 따르는 감독처럼 정 선배는 느릿느릿 흘러가는 한강에 시선을 박은 그대로였고, 나 역시 일정하게 달려오는 차선과 그 흐름을 한가롭게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두가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딘가를 향해. 곡예를 하듯 질주해 간 스포츠카의 젊은이들이나, 도포 자락 휘적거리는 여덟 팔자걸음의 우리도 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빠름과 느림만 다를 뿐이다. 하나는 구심력에 이끌려 중심을 좇아 줄달음질 치고 다른 하나는 변방을 찾아 나서는 것이 차이다.
나는 모처럼 차를 몰며 느림과 빠름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너도 가고 나도 간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걸까. 갑자기 죽으러 가는 것일까. 살러 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멍청한 생각을 한 것이다. 나는 다른 차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비상등을 켰다. 속도계는 30킬로미터까지로 더 떨어졌다. 낡은 센서 탓에 비상등은 굼뜨게 껌벅거렸다. 비로소 천성의 게으름인 느림은 무중력 상태에서의 자유로운 유영을 시작하고 있었다.
느릴 수 있다는 것도 권리이다. 왜 몰랐을까. 미친놈처럼 급하게 만 달려온 세월이 그렇게 달려온 자신에 대한 실망의 물결로 밀려왔다. 달리는 데만 급급하다가 차표를 잃어버려 겪었던 낭패감 같은 것이 쿵하니 가슴을 친다. 행선지가 어디였더라… 내 주민등록번호가 뭐였더라. 심지어 공중전화 박스에서 집 전화번호까지 까맣게 지워먹고는 암담해했던 그런 기억들이 하나 둘 점등되어 물결이 되어 흘러간다. 스쳐간다.
“커피 한잔하고 갈까요?”
“그럽시다.”
멀리 강 건너 기차역이 바라보이는 지점에서 우리는 휴게소를 찾았다. 방수 자킷 위로 바람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후드득 소리를 내며 흘렀다. 우중에 심란한 건 마찬가지인지 자판기까지 천 원짜리 지폐를 빨아들이고는 커피를 쏟아내지 못하고 헉헉대길 두어 번, 끝내는 살 부러진 우산을 어깨에 걸친 관리인이 쥐어박는 소리를 해가며 나와서야 두 잔의 커피를 손에 들 수 있었다. 휴게소는 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베란다를 갖고 있었다. 우리는 커피를 들고 강을 조망할 수 있는 베란다로 다가갔다. 넓어진 강폭 하며 황토색 물결만 보아도 간밤 산골에 내린 비의 양을 가늠할 수 있을 만큼 크게 넘실대며 흐르고 있다. 강 너머 대각선 상으로 메디슨 카운티 다리 같은 역사가 다소곳 비에 젖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강촌역이었다. 지금의 그곳은 에너지를 발산하기 위해 몰려오는 활활 타는 젊음으로 북적이던 역의 모습이 아니다. 시골 간이역의 쓸쓸함과 적막감이 짙은 잉크 빛으로 풀려 강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저 앞으로 가게 되는가?”
“그렇죠. 역을 끼고 들어가게 되죠.”
그리고 한동안 우리 둘은 말없이 트인 전망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그 위로 낮게 드리우는 애잔함을 느꼈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 가자고 할 것 없이 거의 동시에 휴게소를 걸어 나왔다. 차를 돌려 다시 굼뜬 운행을 이어갔다. 지금까지 오는 동안 선배와 나는 각기 다른 시공에 시선을 두고 있는 것 같으나, 물 위에 금을 긋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굳이 금을 긋는다면 나의 관심은 여전히 게으름에 있고, 선배는 묵언(黙言)에 무게를 얹고 있다는 것뿐이다. 앞으로 내가 얼마만큼 게을러질 수 있을 것인가… 얼마나 느려 터지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빨리의 상극점에서 그 모험을 얼마나 잘해 낼 수 있을까. 두려움이란 것은 이 하찮은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 하찮은 것이 때로는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뇌관이 될 것이라는 예감도 쉽게 떨쳐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세월에 부대끼며 너무 많은 것을 흘리고 왔다는 것으로 휘청거리는 자신감을 추스른다. 빨리빨리를 미덕으로 알고 달리다 보니 흘린 것도 많고 스친 것도 많았다는 변을 쏟아내며. 눈 여겨봐야 할 것들을 너무 쉽게 스쳐 보낸 것에 대한 연민함으로 느릿느릿 연자 맷돌을 돌려야 한다. 이것이 유일한 출구라는 생각으로. 나는 앞으로 결국 스친 것에 대해 연민하며 살게 될 것이다. 막연하게 느낌으로 다가온 이 같은 인식이 지경을 넓히며 골을 깊이 파 내려갔다. 그것이 내가 게으름에 관심을 갖게 한 배경일 수도 있고, 그만큼 게을러진다는 것은 또 버려졌던 나를 향한 관심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내면에 차오르는 갈증을 느끼면서 나는 강에 걸친 다리를 건너기 위해 차의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마침 강 건너로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당신도 옛날 출렁다리 기억나나? 참 낭만적인 다리였는데 말이야…”
“그렇죠. 이 흔들리는 다리 위에 서면 두둥실 공중에 떠있는 느낌이었어요. 발아래 푸른 강이 흐르고, 눈을 들면 강가를 거슬러 올라가는 기차, 그땐 하늘엔 떠 있는 구름도 참 곱고 투명했는데.”
우리는 아쉬움을 밍근한 웃음으로 대신하며 입을 다물었다. 눈을 돌려보았으나 옛 다리의 흔적은 간 곳이 없다. 우리의 기억 하나가 공허한 메아리로 맴돌다 이내 사라져 갔다. 다리를 넘어서자 방금 기차에서 내린 학생들인 모양이다. 10여 명의 젊은 남녀가 왁자지껄 떠들며 흩뿌리는 빗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하얀 잇속을 들어낸 채 삼삼오오 어울리고 있는 젊은이들이 생각보다 많이 눈에 띄었다.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타는 젊은이들도 간간 보였다. 인적만 없으면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길에는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참새 소리처럼 청량하게 퍼져갔다.
“노털들이 나다닐 곳이 아니구먼.”
“아날로그는 산으로나 가야죠.”
나는 스스로를 가리켜 아날로그라고 했다. 내 입으로 스스로를 아날로그로 편입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속도전에서 뒤지고 순발력에서 역부족인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 혹독하게 치른 디지털 시대와의 속도 전쟁에서 완패하고 산업화의 상징이었던 기적소리와 함께 무대에서 초라하게 떠나고 있는 20세기의 마지막 광대들. 참을성이라곤 깡그리 말라버린 디지털 세대 앞에 어디에 정 부치고 앉아 있을거나. 아무리 눈을 비벼 찾아봐도 그럴 공간이 없다고 비탄을 삼키던 한 선배의 탄식이 되살아나다가 빗소리에 묻혀버렸다.
“나야 빼도 박도 못하지만 그래도 자넨 디지털 준회원쯤은 되잖아?”
“다 속절없는 짓입디다. 혈통이 다른 건 뛰어봤자 손오공 손바닥. 벗어날 수 없죠.”
이 말에는 끝까지 아날로그이기를 거부하고 디지털에 접목시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자신에 대한 냉소가 깔려 있었다.
“혈통이라니?”
“디지털 세대와는 결국 그런 차이가 있는 것 아닙니까?”
머리로는 딸을 생각하며 그런 말을 했다. 인 풋과 아웃 풋이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세상 앞에 생각이 많은 아날로그 세대는 그 속도전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비로소 내 입으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년 전 세상을 뜨신 아버지가 불현듯 생각났다. 농경시대에서 공업화로 전환될 때 사회의 중심축에서 밀려나야 했던 또 한 세대의 아픔에 대한 연민이 함께 고개를 들었다. 물론 그때와 지금과는 변화의 속도나 질에서 비교할 수가 없겠지만, 사회적 인식과 전통적 인습에 집착이 강했던 당시 사람들로는 산업화의 거센 물결을 알몸 하나로 감당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러한 면에서 또 하나의 희생 세대였다.
"애빈 시대를 잘못 만나 이래 산다만, 넌 희망이 있다. "
약주라도 거나하게 걸치고 집에 오시는 밤이면 어린 아들을 불러 앉히고 희망론을 펼치던 아버지였다. 자식에게 유일한 희망의 통로를 열었던 아버지. 그 희망의 선상에 올려져 있던 나. 그리고 지금은 내가 그 수직선 상에 자식을 나란히 올려 세우고 있다. 어린 시절, 끝 간 데 없었던 아버지의 즐거운 착각이 내게도 대물림된 것은 아닐까… 객관적인 눈으로 보면 아무리 뜯어봐도 그저 밉상이나 면한 얼굴에 신통할 것도 없는 고만고만한 머리인데도 아버지의 눈에 비친 아들은 또래 가운데 단연 출중한,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장래 뭐가 되어도 될 녀석이었다. 그로 인해 반항 아닌 반항도 하고 괜스레 밉상을 떨면서 아버지의 주관적인 눈을 객관적으로 돌려놓고자 앙탈을 부리던 아들의 사춘기… 그게 어디 내 아버지 한 분뿐이고 자식 나 하나뿐일까. 저마다 세상에서 최고였던 그 아이들은 어느새 어른으로 자라나 잘난 것도 특별할 것 없는 일상으로 세월을 꾸려왔다. 가끔은 그때 아버지의 주관적인 눈을 그리워하기도 하면서 평범한 생활인으로 흘러가는 동안 어느새 한물간 퇴역 병사가 되어 세월이란 물살에 휘둘리고 있다.
느릿느릿 차를 몰며 그런 생각을 했다. 고맙게도 빗줄기는 시간이 지나며 가늘어졌고 강촌 다리에 이를 즈음엔 보슬비 수준으로 약해졌다. 주차장을 저만치 앞두고 오른쪽 길가에 ‘검봉산 칡국수’라고 쓴 커다란 식당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비만 안 왔으면 여기가 산행 기점입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되고, 이젠 맘만 먹으면 하는 것 아냐?”
차는 어느새 주차장 입구에 다 달았다. 2천 원의 주차료를 내고 안쪽 깊숙이 차를 몰아세웠다. 주차장에는 통틀어 예닐곱 대의 차만 주차해 있어 휑하리 만치 넓어 보였다. 주말을 기대했을 상가, 음식점들이 불만 밝혀놓고 있었다. 출발한 지 두 시간여 만에 목적지에 도착한 셈이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가슴이 들썩이도록 심호흡부터 했다. 그리고 여유 있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비에 씻긴 계곡 입구는 인적마저 씻겨내려 싱그럽고 청정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쳤다고는 해도 여전히 옷이 젖을 만큼 내리는 비가 마음을 더 차분하게 해 주었다. 입장료를 내고 계곡에 들어서자 물소리가 장쾌하게 들렸다. 구곡폭포로 오르는 돌길 양쪽으로 수십 년 자란 잣나무들이 군을 이루며 뿜어내는 싱그러운 향이 후각을 현란하게 했다. 닫혔던 가슴이 열리면서 움츠러들었던 심장의 박동도 같이 뛰었다. 정선배도 다소 상기되는 표정이었다.
“아, 좋은데. 사람이 없으니 더 좋군.”
“선배,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 않습니까?”
“허긴 이런 날이 길상이지. 무슨 징조가 보여?”
모처럼 선배의 무거운 입이 가볍게 열린다 했더니 통쾌하게 벌어지는 웃음도 뒤따랐다. 작은 반향으로 들려오는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입 웃음으로 화답했다. 얼마 오르지 않아 오른쪽으로 정갈하게 쌓아 올린 돌무더기가 제법 큰 공간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수천수만의 정성과 기원이 담긴 돌 하나하나가 비에 젖은 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전체의 조형과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경건한 마음을 갖게 했다. 굴곡이 완만한 모롱이를 돌자 산 위에서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운무와 맞닥뜨렸다. 선배와 나는 습한 운무를 헤치며 안내 표시를 따라 폭포가 있는 돌밭길을 걸어 올랐다. 물이 갈수록 많아졌다. 저만치 큰 바위 밑에서 깔깔대는 여자 목소리가 나더니 물에 하반신을 완전히 빠뜨린 앳된 얼굴의 남자가 허둥대며 뛰쳐나왔다. 돌을 잘못 디뎌 빠진 모양이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 것을 비 오는 계곡의 한 풍경으로 바라보며 얼마나 올랐을까 떨어지는 물소리가 거세게 들리면서 한 순간 폭포수의 하얀 포말이 눈앞에 가득 들어왔다. 수십 길 위에서 부서져 쏟아지는 폭포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옛날의 가냘픈 모습이 아니었다. 풍부한 수량으로 밀어내는 폭포의 모습은 한 마디로 장관이었다. 폭포는 어떤 소리도 용납하지 않았다. 먼저 와 신명을 떨던 한 무더기 아낙네들의 수다스러움도 물보라 속으로 잠겨버렸다. 그저 입과 눈을 크게 열고 자신의 위용과 위엄을 바라보게 할 뿐이다. 나는 한참을 고개를 치켜들고 폭포수와 주변을 에워싼 암석을 바라보았다. 내가 바라보는 협계의 젖은 암석들은 그 무질서함이 그대로 생동하는 근육질이었다. 저 우람한 근육질은 언제쯤이면 빠질까, 저 포말은 언제면 사그라질까.
나는 한동안 눈이 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와 암벽의 위세에 압도돼 있는 자신의 왜소함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가슴에 숨겨놓은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그렇게 웅장하지도 장구하지도 못하는, 양철 지붕 위의 풀포기 같은 삶을 살면서 보였던 허세와 허욕이 생채기가 되어 내게 아픔으로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폭포를 왼쪽 계곡에 두고 길게 제트자 형으로 산허리를 타고 누운 산길로 접어들었다. 이 길을 따라 산을 넘으면 우리가 찾아가는 문배마을이 희망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곳에다 이제껏 뒤집어쓴 삶의 분진을 씻고 저 잣나무처럼 청정한 얼굴로 다시 일어서리라. 꼿꼿하게 등을 펴고 발등에 박힌 눈을 떼어 먼 숲을 바라보리라.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그런 다짐의 발자국이 되기를 기원했다. 뒷짐을 쥔 채 깊은 상념에 빠진 정 선배의 발걸음은 나보다도 더 느리게 움직였다. 나란히 서서 오르기 시작한 것이 10여분 지나면서 5미터 정도로 간격이 벌어졌다.
나는 그와 나란히 설 때까지 선 채로 선배의 느린 발걸음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진로를 확실하게 정한 정 선배의 발걸음이 부러웠다. 회사에서는 연말까지 유급휴가를 제의한 모양이지만 선배가 한 마디로 사양했다는 후문이다. 현실은 냉정한 것인데 아직도 은전이나 베풀고 모양새나 갖추려 하는 경영진들에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일축했다고 했다. 회사 규정이 명시하고 있는 다음 달 말까지 하루 한날 더하거나 덜함도 없이 근무하고 귀농하겠다는 그의 신념은 저 잣나무만큼이나 꼿꼿하게 느껴졌다.
“이보게 정 위원, 그렇게 귀향을 고집 피울 텐가?”
“귀향이 아니고 귀농입니다.”
그를 아꼈던 주필이 쉽게 말했다가 정정을 해야 했던 정 선배의 귀농은 흔히 은퇴하여 고향에 돌아가 여생을 보내겠다는 것과는 신념부터 다른 것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생명체로써의 흙에 귀의하겠다는 것을 일찍부터 선언해 온 터였다. 그래서 그는 지난봄 1차로 지리산 칠상사 부근에 있는 귀농학교에서 3박 4일의 영농교육을 이수한 바 있다. 이어 은퇴와 함께 2차로 3개월간의 귀농교육을 받기 위해 지난달 이미 신청을 마쳤다고 했다. 가족들은 그러한 가장의 독단적 결정에 대해 대놓고 반대는 않았지만 생각을 고쳐먹기를 기대했던 모양이다. 아내의 냉소와 자녀들의 침묵 속에서 그가 고집스럽게 밀고 나간 귀농을 가장 반기는 사람은 고향의 노모뿐이었을 것이다. 자식의 귀향 소식에 노모는 잠을 설칠 만큼 살맛을 되찾는 모양이었다.
“어머님이 그렇게 좋아하신다면서요?”
“생각보다 더 좋으신 모양야. 벌써 내방 수리 다하고 도배도 새로 다 끝내셨다는 거야. 효자도 못되는데 되레 송구스럽더라고.”
우리는 다시 어깨를 맞대고 말없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조금씩 차 오른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결코 험한 코스가 아닌데도 그동안 산행을 몰라라 했던 우리는 헉헉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다람쥐 한 마리가 달리던 발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안쓰럽게 우리 모습을 쳐다보았다. 빗소리를 배경으로 몰아치는 두 사람의 숨소리가 깊이 잠든 산속의 정막을 흔들어 놓았다. 우리는 그 짧은 산길을 오르면서 여러 번 허리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마지막 모퉁이인 줄 알고 애써 돌아서면 산길은 여전히 길게 뻗쳐 있고 그 끝에 또 다른 모퉁이가 숨어있었다.
좀처럼 나오지 않는 산 정상을 향해 길게 숨을 토했다. 이제는 고개를 뒤로 돌려 걸어온 길을 보았다. 내려다보는 산허리에는 갈지 자 형의 산길이 녹음 진 숲 사이를 비집고 드문드문 붉은 황토색으로 드러나 있다. 허위허위 숨을 몰아쉬며 올라온 길이 돌아보니 생각보다 길어 보였다. 우리가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 있나 하는 느낌이 들면서 한편으로 뿌듯했다. 이렇게 한가롭게 걸어도 시간이 지나면 정상에 오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남은 여정과 걸어온 길목을 반추하며 떠올렸다. 멀게 가깝게 산 능선과 계곡을 타고 느리게 흐르고 있는 운무의 편안함이 정감을 깊게 해 준다.
남보다 한발 빨리 움직이고 앞서지 않으면 금방 죽는다고 난리들을 치는 곳과 비교하면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산은 단순하고 담백하고 여유롭고 풍요로웠다. 고요와 느림에서 시작되는 것 같은 산의 미학이 느껴져 오는 것이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풍경이 부르는 대로 한가롭게 걸어라. 권태로움도 즐겨라. 천천히 기다려라. 지난 시절의 한 부분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겨라. 자신을 억제하기보다 절제하는 미덕을 익혀라… 이럴 때 느림은 부드럽고 우아하며 배려 깊은 삶의 방식으로 내게 충고한다. 빠름에 적응하지 못하는 무능력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서 산은 삶의 방식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딩동 딩동동-.
내가 무중력 상태에서 산의 미학을 즐기고 있을 때 재킷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날카로운 기계음을 울려댔다. 반사적으로 나의 손이 빠르게 주머니로 들어갔다. 딸아이의 남자 친구였다.
“아버님 이제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김포공항에 나와 있는데요 지혜가 곧 도착할 겁니다. 지혠 닷새 동안 평생에 남을 여행을 했답니다. 강원도 강릉으로 속초로 다니면서 난생처음 호텔 침대에서 잠도 자보고요. 새마을호 타고 목포까지 갔다나 봐요. 세발낙지에 홍어회도 먹고, 여기저기 신나게 구경했대요. 어머님께도 연락드렸습니다. 도착하는 대로 시청 앞 커피숍에서 어머니와 만나기로 했습니다. 마음 놓으세요 아버님.”
전화기 폴더를 덮고서야 나는 비로소 한숨을 잘게 내쉴 수 있었다. 한편으로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건강하게 왔으면 됐지 이 순간 뭘 더 강권할 것인가. 5일간의 행불행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가슴에 몹쓸 끌질을 다해댄 딸을 만나러 가는 아내의 심정은 어떨까. 감정이 칼끝처럼 날카로운 아내가 지혜를 보는 순간, 분한 감정을 못 삭이고 폭발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걱정은 뜬금없이 아내로 향했다.
“건강하다면 됐어, 그 얌전하던 애까지 그런 걸 보면 세상 참 무섭게 변했다는 생각을 갖게 해.”
나는 정 선배의 말에 대해 묵묵부답했다. 피식- 나도 모르게 식은 미소 한 자락이 입가에 끌리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회색빛 하늘이 낮게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곧 정상입니다. 마지막 피치를 내죠 선배.”
다시 발길을 움직여 나갔다. 휴식을 한 탓인지 발걸음이 좀은 가벼웠다. 숨은 이내 가빠져왔다. 숨은 가쁘고 다리는 무거워졌지만 정 선배나 나나 표정은 부드럽고 여유로웠다.
“파스칼도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에서 비롯된다고 했어.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시작된다고. 우리 같은 아날로그나 디지털 세대나 휴식이 필요한 때야. 진정으로.”
그로부터 정 선배는 산 정상에 오를 때까지 평소 볼 수 없었던 말을 많이 했다. 숨이 차면 찬대로 발음이 어긋나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 가슴에 담아놓은 말들이 봇물이 터지듯 쉬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세상이 빛의 속도로 변한다고 하는 데 세월이 강물처럼 흐른다고 하면 낡은 것일까? 난 그 말에 쉽게 동의가 안돼. 속도는 그것을 재는 사람의 눈금에 따라 빨라지기도 느려지기도 하는 게 아닐까. 오늘 산에 오르면서 그런 것을 생각했어. 빨리 사는 것만이 인생을 풍요롭게 사는 길이 아니란 걸. 일상의 리듬을 조율하면서 단순하고 느리게 사는 것이 되레 풍요롭게 사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말이야. 정신없이 변화의 꽁무니나 뒤쫓는 그런 부류로는 더 이상 살지 않겠어. 당신이나 나나 이럴 때일수록 느긋하게 세상을 봐야겠다는 거야.”
그러는 동안 이미 우리는 정상에 발을 딛고 있었다. 그럼에도 올라야 할 길이 남은 사람처럼 감흥의 전환 없이 도란도란 말문을 이어갔다. 한참을 실타래처럼 풀어내던 정 선배는 내 가슴에 짙은 우수를 깔아놓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비와 땀으로 범벅이 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우리는 수건을 꺼내 들어 얼굴을 닦았다. 얼굴에는 엄청난 산행을 끝낸 사람 같은 여유와 즐거움이 있었다.
“바로 저깁니다. 우리가 가는 마을이….”
나는 멀리 뿌연 무연 속에 낮게 엎드러져 있는 작은 마을을 가리켰다. 40년 전 아내와 함께 강촌에 왔던 길에 처음 찾았다가 한눈에 반한 마을이다. 나를 맞아주었던 김씨네 은행나무 밑 평상…. 그곳에 앉아 우수수 떨어지는 은행잎을 맞으면서 기우는 가을 산자락을 정겹게 바라보았다. 시야에 드리운 풍경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이곳에 서면 나도 풍경이겠구나. 그로부터 가을 하면 떠오르는 곳이 되었고 때만 되면 순례길 스탬프를 찍듯 문배마을을 찾았었다. 그러다 김씨네 주인장이 늙고 병들어 마을을 떠나고 은행나무까지 베어지면서 마음의 풍경까지 잃고 말았다. 그래도 마음이 무거울 때는 해걸이 하듯 이곳에 들려 마음을 내려놓곤 했다.
오늘은 귀촌을 앞두고 있는 정 선배와 함께 했다. 내 마음속 송별회 자리로 이곳을 택했다. 서울을 떠나는 그에게 풍경사진 하나를 남겨주고 싶어서다. 예나 지금이나 마을은 넉넉한 여유와 따스함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었다. 정 선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정겨운 눈빛을 흘렸다.
“마을 풍경이 그만인데. 야 이런 곳이 있었네.”
“풍경뿐입니까 탁빼기 맛도 죽여줍니다.”
“자, 풍경이 부르니 가봅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활짝 웃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적막한 산길에 낭랑하게 여울져 갔다. 정 선배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사방이 낮은 산으로 둘러쳐 있는 작은 구릉지 마을은 손을 내밀면 잡힐 듯이 오솔길을 따라 정겹게 다가왔다. 갑자기 시장기가 인다 했더니 어느새 술 익는 냄새가 알싸하게 코끝을 자극했다. 풍경을 채색하는 빗소리도 한가롭게 우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붙었다. (*)
첫댓글 문배마을은 강촌 계곡 검봉산을 넘어
구릉지에 예닐곱가구가 옹기종기 어깨를
맏대고 사는 작은 마을이다.
한 폭의 풍경화다.
사진은 강촌계곡 올 겨울 모습
강촌의 명물 구곡폭포가 물기둥 그대로
얼어버렸다.
겨울등벽을 즐기기에 적기이다.
문예지 <인간과 문학> 겨울호에 실린
신작소설 '문배마을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