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6일은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가 화형장에서 순교한지 600년이 되는 날입니다.
부산에서 처음으로 얀 후스를 기억하고 한국교회 개혁을 위한 정신을 되새김했습니다.
다시 광야에서 후스를 만나다
장윤재 (이화여대 기독교학부 교수)
“당신들은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우지만 한 세기가 지나면 태우지도 끓이지도 못할 백조를 만나게 될 것이다.”
- 얀 후스(Jan Hus)
체코의 프라하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곳은 아름다운 블타바 강 위에 놓인 ‘프라하 다리’이다. 이다리는 설립자 카렐 4세의 이름을 따서 ‘카렐 다리’라고도 한다. 한국의 한 TV 드라마에서 주인공 남녀가 이 다리 위에서 낭만적인 키스를 한 이후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 다리는 종교개혁의 역사와 아픔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다리의 탑에는 가톨릭교회에 저항하는 개신교 지도자 11명을 참수해 경고의 의미로 10년 동안이나 이들의 머리가 매달려 있기도 했었다.
올해 2015년 7월 6일은 얀 후스(Jan Hus)의 화형 600주년이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100년 전 체코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이종실 체코 선교사가 말하다시피, 힘없는 소수민족의 이 실패한 종교개혁은 한국교회로부터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2017년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만 바라보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100년 앞선 후스의 종교개혁부터 기념되어야 한다. 절박한 위기에 처한 한국 개신교회는 2015년 후스 600주년 – 2017년 루터 500주년 – 2019년 3.1운동 100주년이라는 세 단계의 일정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후스의 종교개혁은 루터 종교개혁의 전야(前夜)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온전한 종교개혁이다. 후스의 종교개혁을 우리는 ‘제1차 종교개혁’ 또는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다시 후스를 만나야 한다.
언어 혁명과 공간 혁명에서 시작된 체코 종교개혁
체코는 크게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지아의 세 지역으로 나뉘며, 지리적으로는 유럽대륙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동서유럽의 교차로 역할을 한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어원도 ‘문지방’ 혹은 ‘문턱’이다. 그만큼 동서유럽의 교류의 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프라하는 체코의 왕 카렐 4세가 1355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건설한 도시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카렐 4세는 프란체스코의 청빈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은 모계 가문에서 자라나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1348년에 중부유럽에 세운 최초의 대학이 있다. 그것이 카렐 대학이며 바로 이 대학이 체코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체코 종교개혁의 중심지는 특히 카렐 대학의 베들레헴 채플이다. 이 채플은 1391년에 체코어 설교를 위해 건립되었다. 유럽의 첫 번째 종교개혁은 바로 이 ‘언어 혁명’에서 일어났다. 후스의 적대자들이 ‘창고’라고 부른 이 커다란 강당 같은 구조물은 교회 건축사에서 이단아에 속한다. 이 건물은 전통적인 성당 건물처럼 긴 직사각형의 모습이 아니라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공간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실로 후스는 이 공간 안에 대대적인 혁신을 시도했다. 성화와 조각상 대신 십계명과 사도들의 간증 및 찬송가 가사가 대신 걸렸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은 정사각형의 건물 한 면 가운데 위치한 설교단이다. 여기서부터 모든 청중은 이 건물 안 어디에 앉든지 간에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등거리에 있게 된다. 이것은 혁명이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위계질서가 없어진 것이다. 직사각형의 전통적 성당에서는 제단 앞쪽에서 뒤쪽으로 위계적인 질서가 만들어진다. 맨 뒤에 있는 비천한 사람들은 라틴어로 이루어지는 예배와 성만찬을 멀찍이서 ‘구경’해야 했다. 그런데 베들레헴 채플에서는 체코인들에게 체코어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됐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청중은 평등했다. 그래서 이 건물의 건축가는 이 집의 의미를 이렇게 적었다. “베들레헴은 번역하면 떡집이라는 뜻으로, 일반인이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신성한 설교 말씀으로 충만해지는 곳이다.”
비판적 기독교 지성이 주도한 개혁
얀 후스는 1371년에 남부 보헤미아의 후시네츠 마을에서 태어났다. 후스(Hus)라는 이름은 영어의 거위(Goose)이고 후시네츠는 거위를 키우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의 가정은 가난했고 부모들은 검소했다. 후스는 어머니에 의해 사무엘처럼 소년시절부터 하나님께 바쳐졌다. 그는 카렐 대학에서 인문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496년 이 대학의 교수가 되어 철학자와 신학자로 가르치다가 이후 이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체코 종교개혁은 이 대학에서 시작되었다. 이 말은 체코 종교개혁이 비판적 기독교 지성이 시작한 혁명이라는 말이다. 카렐 대학은 전폭적으로 후스를 지지했으며 여러 책들은 체코어로 집필하고 출간하면서 보헤미아의 자존감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학자들에 의해 라틴어가 토착어로 대체되었다. 그들은 체코어로 성서를 읽게 했다. 이렇게 카렐 대학은 후스 종교개혁의 중심기관으로 역할을 했다. 이는 교회와 교권으로부터 비판적 자유의 거리를 상실한 오늘의 한국 신학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카렐 대학의 교수이자 총장인 후스는 ‘대중적 설교가’로, ‘백성들의 교사’로, 그리고 ‘찬송가 작사자’로 명성을 날렸다. 먼저 그는 대중적 설교가였다. 그는 1402년부터 이 카렐 대학의 베들레헴 채플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곧 유명한 대중적 설교자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여기서 12년간이나 목회를 했다. 설교자로서 후스는 체코의 다양한 계층에 영향을 주었다. 많은 설교집도 출간했다. 주로 교육적이고 교리적인 책들을 출간했다. 그러면서 그는 ‘백성들의 교사’가 되었다. 후스는 또한 뛰어난 ‘찬송가 작사자’이기도 했다. 베들레헴 채플은 체코어로 설교가 울려 퍼졌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체코어로 대중 찬송이 울려 퍼졌던 곳이기도 하다. 자기 말로 찬송을 부르는 것의 감동을 아는가. 후스는 실제로 몇 개의 찬송가를 작사했다. 그의 찬송가는 특히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강조한다. 그가 지은 여러 찬송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후스의 노래’라고 불리는 찬송, “예수 그리스도, 관대한 사제시여”인데 현재 체코형제복음교회의 찬송가 308장에 수록되어 있다.
1412년에 후스는 공개적으로 교황의 면죄부 판매, 성직매매, 그리고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그는 교회로부터 추방되어 2년간 지방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 때 그는 생애 가운데 가장 풍성한 집필 활동을 했다. 이 때 쓰인 그의 대표적인 저술 중 하나가 바로 교황권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교회에 대하여』(De ecclesia)이다. 1413년에 라틴어로 완성된 이 책은 체코 종교개혁의 기념비적 작품의 하나이다. 후스의 적대자들이 그를 이단으로 정죄할 때 그들은 후스의 전집에서 약 30쪽 분량의 글을 뽑아냈는데 이중 20쪽이 바로 교회에 대한 것이었다.
교회도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 앞에 선다
사실 후스는 주로 교회를 주제로 연구했던 신학자였다. 중세시대에 교회라는 주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교황의 권위가 시퍼렇게 살아있었고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교회에 대한 신학적 토론보다는 법적인 문제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서방교회가 두 교황으로 난립하여 대립하는 분열하는 시기를 맞이하자 (1309년에 교황 클레멘스 5세는 로마의 파벌주의 때문에 고민하다가 프랑스 왕의 강요로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후 교황인 그레고리우스 11세는 다시 교황청을 로마로 옮겼다. 이에 추기경회는 교황을 따로 선출해 자리가 비어 있는 아비뇽에 그를 앉혔다. 두 명의 교황이 탄생한 이때부터 로마교회의 대분열이 시작되었다), 그 때가 되서야 비로소 교회에 대한 신학적 토론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드디어 뜨거운 이슈가 된 것이다.
후스는 ‘지상의 교회’와 ‘하나님의 교회’를 구별했다. ‘눈에 보이는 교회’(ecclesia visibilis)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ecclesia invisibilis)를 구분했다. 하나님에 의해 예정된 사람들의 모든 모임은 ‘지상의 교회’에 속한다. 이 ‘눈에 보이는 교회’는 각양각색의 몸이다. 사실 중세교회는 마지막 심판을 수행하는 절대적인 권위로 이해되고 있었다. 하지만 후스는 놀랍게도 교회 역시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최후심판 앞에 서게 될 것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최후의 심판 이후의 교회는 지금의 심판 이전의 교회와는 완전히 똑같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참된 교회는 지금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말이 된다. 한마디로 거룩한 보편적 교회는 아직 없었고, 현재도 있지 않으며, 오직 미래에 완성될 것이다. 계급화 된 중세의 제도교회는 자신을 하나님의 교회와 잘못되게 동일시했다. 이에 반해 후스는 교회의 내적 본질을 강조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인 영적인 몸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엡 1:23)이다.
그러므로 후스는 눈에 보이는 지상의 교회에서 첫째가 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꼴찌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것이 복음의 역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좁은 길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후스는 그는 『교회에 대하여』에서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을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면서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매일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자기들의 능력을 확대하기 위해 사용하면서도, 예수께서 같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또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싶지 않아한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고 한 말씀은 잘 기억하면서도 “너희는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기피한다고 비판했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라”는 말씀은 기쁘게 받아들이면서도 “나는 마음이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혹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회피한다고 비판했다. 한마디로 교회 지도자들은 세상에서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들은 좋아하지만 가난, 침묵, 겸손, 관용, 덕행, 인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억압하거나, 멋대로 해석하거나, 혹은 그것들이 구원에 본질적이지 않은 것처럼 취급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가 감옥에 갇혀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는 친구들에게 보낸 그의 유명한 편지(“체코의 친구들에게”)에서 이렇게 썼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사제들은 선한 태도를 사랑하고 찬양하고 존중하십시오. 교활한 사람들, 특별히 선하지 않은 사제들 즉 양의 옷을 입고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구세주가 말씀하신 사제들을 주의하십시오.”
창녀들에게 성만찬을 베풀다
후스의 교회론은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의 『교회론』(1378-79)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위클리프에 의하면 ‘참된 교회’란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 당시 제도교회인 로마교회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의 모임인 참된 교회를 판별하는 근거는 성서이다. 사제의 역할은 성사를 집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위클리프는 1384년에 지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잉글랜드 교회는 1428년에 그의 무덤에서 유골을 끄집어내 그를 화형에 처했다. 그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싶었던지 타고 남은 재를 박박 소리가 나도록 긁어 강물에 뿌렸다고 한다.
후스에 대한 위클리프의 영향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실제로 반(反)후스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사도신경을 패러디해 후스를 위클리프의 추종자로 조롱하기도 했다. 소위 ‘위클리프 미사를 위한 사도신경’이다. “나는 지옥의 주님이자 보헤미아의 수호성인인 위클리프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의 외아들이자 우리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후스를 믿습니다. 그는 루시퍼의 영으로 잉태하사 육신의 어머니에게서 나시고, 악에 관한 한 위클리프의 성육신이자 그와 동등하신 분이며, 보헤미아가 신앙에서 변절하여 프라하 대학이 황폐화 되었을 때 거기를 다스리신 분입니다... 이단인 그는 저승에 가시었다가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사시지 못할 것이며, 영생을 얻지도 못할 것임을 나는 믿습니다. 아멘.”
보통 교회역사가들은 위클리프와 후스를 종교개혁의 ‘전야’를 밝힌 사람들로 묘사하곤 한다. 위클리프는 “죽은 뒤 화형당해 개혁의 불씨를 뿌린” 사람으로, 후스는 “혁명 전야에 시끄럽게 운 거위”로 묘사하기도 한다. 종교개혁의 역사를 ‘위클리프 – 후스 – 루터’의 연속선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한 중세 시대의 그림도 이를 표현한 바 있다. 위클리프는 부싯돌 두 개로 불꽃을 일으킨다. 후스가 그것을 받아 촛불에 옮긴다. 루터가 그것을 받아 횃불로 키운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역사가들은 후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루터의 성공을 예비한 선구자 정도로, 하지만 결국은 실패한 선구자 정도로 인식해 왔다. 하지만 후스는 독자적인 사상가였고 옥스퍼드의 위클리프를 단순히 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중세 후기 체코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 반대의 결론이 내려진다. 후스가 교회를 위클리프의 개념적 언어로 표현한 것은 맞지만 후스의 뿌리는 위클리프가 아니라 체코의 토착적 종교개혁 사상가들인 것이다.
우리는 왜 위클리프의 가르침이 자신의 고향인 영국이나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특별히 보헤미아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후스는 체코에서 새로운 대중적 개혁운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거꾸로 후스는 오랜 체코의 토착적 개혁운동의 절정을 이루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후스주의 운동이 후스보다 선행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보헤미아가 위클리프라는 외래 전통을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만든 요인은 다름 아닌 체코의 토착적 개혁 전통이었던 것이다.
체코 종교개혁의 아버지는 코로몌르지시의 얀 밀리치(Jan Milíč z Kroměříže)이다. 밀리치는 개혁의 중점을 성만찬에 두었다. 그 이유는 성만찬의 개혁이 곧 사회개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나 수도원 담장 밖에서의 영적 개혁을 주장했고 그것을 과감히 실천했다. 그는 특히 프라하의 중심 홍등가에서 창녀들에게 체코말로 성만찬을 베풀면서 체코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겼다. 그 때가 1372년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했던 창녀들이 복음을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마셨다. 그 결과 프라하에서 악명 높았던 창녀촌인 ‘베나트키’(작은 베니스라는 뜻) 지역이 개혁된 창녀들의 중심지로 변했고 그곳이 ‘예루살렘’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무려 200명의 창녀들이 이 작은 베니스에서의 옛 직업을 버리고 새 예루살렘에서 밀리치의 열정적인 지지자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 예루살렘은 땅 위의 하나님 나라의 표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밀리치는 거기서 ‘수시로’ 성만찬을 베풀었다. 왜 수시로 성만찬을 베풀었을까? 창녀들에게 ‘일용할 양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였던 것이다. 그에게 성만찬은 특별한 예식이 아니라 매일의 삶이었다. 결국 밀리치는 아비뇽으로 소환돼 이단선고를 받았고 거기서 1374년에 죽었다. 프라하의 예루살렘은 폐쇄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감명 받은 추종자들이 그가 시작한 개혁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밀리치는 체코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로운 선포를 주장한 사람이다. 거기서 성만찬에 대한 강조, 엄격한 도덕성과 죄에 대한 확고한 반대가 이어졌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앞으로 나타날 후스주의 운동의 ‘프라하 4개 조항’의 씨앗이 되었다.
밀리치의 제자 야노보의 마테이(Matej z Janova)가 스승의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는 파리대학 유학파여서 ‘파리선생’이란 별명을 가질 정도의 지식인이었고 교회개혁을 넘어 봉건제도 타파를 주장하였다. 그도 점증하는 교회의 타락 속에서 성만찬의 문제에 집중했다. 그는 성직자들의 호사로운 생활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생긴다고 보았다. 도덕적 타락은 오직 진정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만 고쳐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밀리치가 시작한 전형적인 보헤미아적 관점이다. 물론 체코의 초기 개혁자들은 화체설이라는 가톨릭교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기적은 제단에서 일어나는 일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 기적은 사회 안에서도 일어나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달랐다. 때문에 마테이는 끊임없이 평신도들이 성만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그것을 위해 수시로 성만찬을 베풀었다. 마테이에게 성만찬은 생명의 빵이었다. 수시로 베푸는 성만찬은 사회 변화의 통로였다. 이 과정에서 마테이는 이종성찬(utraquism)의 이론적 기초를 놓았다. 이것이 이후 후스주의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마테이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자주 먹고 마셔야 한다고 했을 때 그는 이것이 성직자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성만찬은, 특히 이종성찬은 사회변화의 동인(動因)이 되었다. 이러한 밀리치와 마테이가 후스의 사상적 뿌리이다. 후스는 단지 영국의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위클리피의 사상을 독일의 루터에서 전해준 사람이 아니다. 그는 밀리치와 마테이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토착적 체코 종교개혁 운동의 독특한 성만찬 신학에 기초하여 체코 종교개혁의 꽃으로 활짝 피었던 것이다. 체코 종교개혁은 위클리프의 복제품이 아니다. 위클리프의 신학 저술이 보헤미아에 도착한 것은 1402년 후스가 베들레헴 채플의 설교자가 되었을 때이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전개된 토착어로 드리는 예배, 토착어로 번역된 성서, 그리고 카렐 대학과 베들레헴 채플에서 발전하여 사회 속으로 파고들어간 성만찬 신학이 바로 후스와 후스주의 운동의 원(原)뿌리가 되었다.
급진적 기독교 평등주의
가톨릭교회는 평신도들에게 성찬잔을 베푸는 것을 이단이라고 공격했다. 잔은 사제들에게만 주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헤미아 개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만찬 신학, 특히 이종성찬이다. 개혁가들은 아기들을 포함하여 모든 세례 받은 자들에게 주의 살과 피가 베풀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세례 받은 자들을 위한 성찬잔, 그것이 바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후스주의자들에게 주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현 시대가 새로운 종말론적 질서로 변모함을 의미했다. 성만찬은, 특히 성찬잔은 먼 훗날 묵시적으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내 몸으로부터 변혁적인 세상의 종말이 도래함을 알리는 것이었다. 금지되었던 성찬잔이 더 이상 비밀리에 행해지지 않으면서 그것은 보헤미아와 로마 사이의 분쟁의 핵심 이슈가 되었다. 로마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가 결코 평신도들에게 잔을 주려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후스주의자들에게 성만찬은 평신도들에게 베풀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성찬잔은 사제와 평신도 사이의 구별이 철폐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교회의 위계질서에 대한 거부였다. 성찬잔이 그렇게 교회와 사회의 민주화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성찬잔은 사회적 특권의 제거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로 당시의 성직자 집단은 오랫동안 사회적 특권층이었다. 후스와 후스주의자들은 성직자들의 특권이 성서와 하나님의 법과 또한 초대교회의 정신과 맞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물론 그들은 사제집단 자체의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사제집단은 계속 존재하지만 그들의 특권적 우월성은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성찬잔이 교회 안에서의 평등주의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사회 안에서도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했다. 이것은 체코 종교개혁의 핵심이 다름 아닌 급진적 기독교적 평등주의(radical Christian egalitarianism)임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대안적인 교회는 곧 대안적인 사회를 의미했다. 필자는 이것이 오늘의 한국교회에 후스의 종교개혁이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대안적인 교회는 곧 대안적인 사회를 의미했다. 그것은 실제로 나타났다. 후스주의 운동으로 인한 교회개혁의 혜택이 가난한 농민들에게 돌아간 것이다. 후스주의 개혁운동 중에 교회 소유 토지의 75% 이상과 수도원 건물 170개가 사회로 환원되었다. 15세기에 전 유럽을 걸쳐 이렇게 봉건적 권력과 질서가 파괴된 곳은 보헤미아 말고는 없었다. 체코 농민들이 후스주의 운동을 광범위하게 지지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체코 종교개혁 운동이 아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여성들이 영적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실로 후스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여성의 역할은 대단한 것이었다. 전장에서 그들은 남성들과 함께 전사로서 싸웠다. 그리고 영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프라하에는 여성 설교자들도 많았다. 후스주의는 여성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허용했다. 후스주의 운동의 핵심이 가히 급진적 기독교 평등주의임을 우리는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화형 당한 ‘평화의 사도’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고를 받고 1415년 7월 6일에 화형 당했다. 원래 콘스탄츠 공의회의 목적은 3명의 교황으로 분열되어 있는 가톨릭교회를 통일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공의회는 마르티노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해 교회의 분열을 종식시켰다. 하지만 이 공의회는 교회개혁의 화두가 된 신앙의 문제로 다루기로 하고 후스에게 소환장을 발부했다. 후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신변안전 보장을 믿고 콘스탄츠로 갔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콘스탄츠에 도착한 지 3주 후 그는 전격적으로 체포됐다. 화형 당일에 주교들은 그의 사제복을 벗겼다. 머리에는 ‘이단의 주모자’라는 글과 마귀가 그려진 종이모자를 씌웠다. 후스는 노래를 부르며 죽었다. 화형대에 오르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은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우지만 한 세기가 지나면 태우지 못할 백조를 만나게 될 것이다.” 후스가 죽으며 예언한 백조는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로 알려져 있다. 후스의 유골은 라인 강에 뿌려졌다.
후스는 겸손한 사람이었고 ‘평화의 사도’였다. 그는 박해를 피해 피신생활을 하는 동안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가서 할 공식적인 설교의 제목으로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작성했다. 이 설교는 성직자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작성한 설교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가 체포됨으로 이 설교는 행해지지 못했다. 그는 이 설교에서 두 종류의 평화를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평화’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평화’이다. 하나님의 평화는 세 개의 차원을 갖는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평화이고, 둘째는 자신과의 평화이며, 셋째는 이웃과의 평화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평화 없이는 다른 두 평화를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두 평화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웃과 평화를 원한다면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가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평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후스는 이 세 가지 평화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선함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평화와 달리 세상의 평화는 사람들의 교활한 협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법을 포기한 고위 성직자들은 전쟁과 분쟁을 일으키면서 하나님의 평화를 파괴하는 죄 중의 죄를 짓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는 연대이고 겸손이며, 자발적 가난하고 정결이며, 인내이고 복음의 실천적 설교이다. 후스는 선하고 악한 사람 모두가 세상의 평화는 가질 수 있다고 썼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화는 오직 선한 사람들만이 누린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집에 평화를”(마태 10:12)이라는 그리스도와 사도의 인사법에 따라 이렇게 “평화에 대한 이야기”라는 설교를 마무리한다. “이 집에 첫 번째의 평화가 있도록, 즉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간구합시다. 그리고 두 번째의 평화가 이 집에 임하여 거룩하게 다스리도록 간구합시다. 또한 세 번째 평화가 이 집에 임하여 모든 이웃을 구원에 이르게 하도록 간구합시다.” 그렇게 평화를 사랑하던 사람이 참혹한 폭력 앞에 희생당했다.
후스주의 혁명과 체코형제복음교회의 탄생
후스에 대한 화형은 체코에서 민족적인 분노와 폭동을 불러일으켰다. 여러 명의 귀족들이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는 로마교회에 대한 도전과 봉기의 신호였다. 프라하 대학의 교수들과 체코 대중들이 이 결의문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물론 로마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후스가 죽고 난 뒤 더 이상 시끄러운 거위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해야 했다. 교황은 우선 모든 성직자들에게 명령을 내려 후스의 사상을 채택했거나 그의 죽음에 조의를 표한 모든 이들을 파문시키라고 했다. 박해가 극도로 심해지자 보헤미아 개혁자들은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의사당을 공격해 12명의 의원을 의장과 함께 창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밑에서는 뾰족한 창을 든 사람들이 빽빽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위 ‘1차 창문 투척 사건’이다. 이 사건 후 후스주의자들이 보헤미아를 장악했다. 격분한 교황은 십자군을 모집해 1420년부터 1431년까지 5차례나 보헤미아를 공격했다. 하지만 후수주의자들은 얀 지쉬카(Jan Žižka) 장군의 지휘 아래 뭉쳤다. 맹인으로도 알려진 이 장군의 지휘 아래 후스주의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후스주의 혁명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에 입각한 교회 정치를 강조했고 교회에서 평신도의 지위와 책임을 부여하여 노력했다. 이들이 체코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아 교회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두려 노력했다. 실로 이러한 주장은 체코 남부의 타보르 요새에서 실천적으로 완성되었다. 타보르는 성서에 나오는 타보르 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에서 후스주의자들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공동의 소유의 삶을 살았다. 이들의 삶과 신앙은 1420년대에 만들어진 다음과 같은 <프라하 4개 조항> 안에 담겨 있다.
제1항(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 하나님의 말씀이 체코어로 자유롭게 그리고 사제들의 방해 없이 증언되고 설교되어야 한다. 제2항(이종성찬에 대하여) : 그리스도의 제정과 명령에 따라 빵과 포도주 두 가지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몸과 피가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롭게 주어져야 한다. 제3항(사제들의 세속통치를 박탈하는 것에 대하여) :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이 세속법에 의해 거대한 물질을 다스리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령과 자신들의 사제 관청에 반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사제들에게서 적법하지 않은 통치권을 박탈하고 말씀에 따라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제4항(죄의 처벌에 대하여) : 사제를 포함하여 누구든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죽음을 면치 못할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
후스주의자들은 ‘깔리슈니치’ 혹은 ‘우트라퀴스트’로 불리기도 했는데, 그것은 위의 <프라하 4개 조항> 중 두 번째 조항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종성찬이란 성만찬에서 평신도들에게 빵뿐만 아니라 포도주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성만찬은 1414년에 ‘벽속의 마르틴 교회’에서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성찬잔은 이렇게 언제나 후스주의의 종교개혁의 상징이었다.
물론 후스주의 혁명은 종교권력과 세속권력 양자로부터 극심한 저항을 받았다. 하지만 얀 지쉬카 장군이 지휘하는 후스주의자들은 교황이 보낸 다섯 번의 십자군을 모두 물리쳐 승리를 거뒀다. 이를 기화로 후스주의는 오히려 유럽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다. 다급해진 로마교회는 1433년에 바젤공의회에서 후스주의자들과 협정을 체결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협정을 놓고 후스주의자들은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뉘어버린다. 결국 1434년 형제간의 전투로 후스주의는 약화되고 만다. 형제간의 전투에서 승리한 온건파는 로마교회와 평신도의 성찬잔을 허락하는 문제만을 다루는 최종협상을 체결했다. 이 타협에 불만을 품은 급진적 후스주의자들은 ‘체코형제단’을 구성했다. 이들은 이후 독일 및 스위스에서 일어난 종교개혁과 에큐메니컬적인 관계를 맺고 가톨릭의 혹독한 박해를 견뎌나갔다.
사실 역사적으로 체코는 로마교회의 지배뿐만이 아니라 독일인들에 의한 지배도 받던 약소민족이다. 13세기에 체코는 이미 독일인들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후스주의 혁명은 가톨릭에서뿐만이 아니라 독일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그들의 기독교 신앙을 체코 언어와 체코 문화 속에서 자유롭게 실천하며 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헤미아는 1620년의 유명한 백산전투(Battle of White Mountain) 이후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인들과 가톨릭교도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후 체코는 300년 동안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으며 재(再)가톨릭화를 겪어야 했다. 제2차 대전이 끝나서야 체코 땅에서는 비로소 700년 이상 지속된 독일의 지배가 끝났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후스주의 편에 섰다. 후스주의자들 역시 루터의 활동을 후스의 계승으로 이해했다. 루터는 한 어록에서 “후스는 진리 때문에 화형을 당했고 후스주의자들은 좋은 기독교인들이다”고 적었다. 체코형제단은 또한 스위스의 종교개혁자들, 즉 츠빙글리와 부처와 칼뱅과 접촉했고 자신들과 매우 가깝게 생각되는 장로교회의 교리와 정치를 받아들였다. 칼뱅은 1544년 카렐 5세에게 보내는 교황에 대한 “경고의 편지”에서 얀 후스의 유산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그는 콘스탄츠에서 자행된 후스에 대한 화형이 로마교회가 지속적으로 배신의 삶을 살아온 것의 증거라고 규정했다. 이렇게 체코형제단이 독일 및 스위스의 종교개혁과 에큐메니컬 관계를 넓힘에 따라 독일의 종교개혁 찬송가가 체코어로 번역되기도 했고 체코 개혁파의 찬송가들도 독일어 찬송가에 포함되게 되었다. 체코형제단은 스위스 종교개혁의 시편들을 자신들의 찬송가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체코의 종교개혁은 이후의 체코 역사에서 거의 완전한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약 8만 명의 비밀 개혁교도들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에 1백 년 이상 존재했다. 결국 계몽주의 시대의 통치자 요셉 2세가 1781년에 합스부르크 군주국 지역에 사는 비가톨릭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관용의 칙령’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는 아주 제한적인 종교의 자유에 불과했다. 형제단의 전통적인 개혁신앙은 허용되지 않았고 오직 루터의 신앙고백이나 스위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만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체코 개혁교도들은 1861년에 이르러서야 요셉 1세의 ‘개혁교도의 칙령’에 의해 비로소 로마가톨릭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된다. 결국 제1차 대전 이후 1918년에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이 설립되면서 모든 사람에게 완전한 종교적 자유가 주어지게 됐다. 그 때 저 멀리 관용의 시대부터 각기 존재하던 루터교회와 장로교회 그리고 체코개혁교회가 1918년에 하나로 연합하여 오늘의 ‘체코형제복음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 교회가 중부유럽의 첫 연합교회이다. 이 새로운 연합교회의 상징은 성경 위에 놓인 성찬잔이다. 물론 성경은 형제단의 상징이었고 성찬잔은 후스의 상징이다.
다시 광야에서 후스를 만나다
프라하의 구(舊)시가 광장 북동쪽에는 후스 화형 500주년인 1915년에 세워진 후스의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제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에 전 체코인의 재정적 헌신으로 건립되었다. 마치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걸어 나와 우뚝 서 있는 것 같은 후스의 뒤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 상이 있다. 이 아기는 희망을 상징한다. 죽음의 불길 속에서도 새 생명이 태어나 후스의 정신과 신앙을 이어갈 것이다. 동상 뒤쪽에는 후스의 이런 말이 새겨져 있다. “나의 민족이여 부디 살아남으십시오. 당신의 나라가 당신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동상의 앞면에는 후스가 콘스탄츠 감옥에서 “모든 신실한 체코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이에게 진리가 있도록 하십시오.” 이 동상의 제작자 라디슬라프 살로운은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설명한다. “강인했던 후스는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콘스탄츠의 화염 속에서 깨어났다. 그의 육체는 타버렸지만 그의 정신은 살아남았다. 그의 명성은 체코 역사의 정신과 생명이 되었다. 후스의 순교로 인류는 진리로 향하는 길과 인식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 후스의 봉기는 최초의 위대한 혁명이었고, 그 안에서 인류는 중세의 종교적 압제의 멍에를 벗어버릴 수 있었다. 이는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선을 위한 작은 민족의 거대한 투쟁이었다.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힘 있는 첫걸음이었다. 서방에서는 이 모든 근대적 진보에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실로 보헤미아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은 단지 루터 종교개혁의 전조 정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비록 후스주의 운동은 엄격하게 15세기에 보헤미아에서 일어난 현상으로 간주될 수 있겠지만 그것의 영향은 훨씬 먼 곳으로 그리고 훨씬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후스주의 운동은 인류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향한 위대한 투쟁의 역사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의 투쟁으로 체코뿐만 아니라 유럽 문명의 전체의 진로와 모습을 영원히 바꾸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실로 후스주의자들의 반란은 신앙적이고 이념적인 투쟁만이 아니라 체코인들의 정체성을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체코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강조로 후스의 개혁은 근대 체코의 형성에도 기여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까지 후스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요한 바오로 2세가 1999년에 후스의 죽음에 유감을 표명하였고 그를 교회의 개혁자로 명명하였다.
후스는 오늘 우리에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는 교회의 갱신과 신앙의 정화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라틴교회에 대해 근본적인 도전장을 던진 사람이고 그의 삶과 투쟁은 교회를 넘어 낡은 사회적 질서 전체와 맞섰다. 얀 후스는 한마디로 전능한 교회와 전능한 황제에 맞섰던 사람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를 쉽사리 개신교의 렌즈로 보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를 원(原)개신교인으로 불러서도 안 될 것이다. 그는 라틴교회에 헌신했던 중세의 사제였고 그 교회의 개혁에 몸 바친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중세 후기 가톨릭교회의 개혁자였다. 종세 후기 그의 교회는 그를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의 신성한 진리에서 일탈한 분리주의자 혹은 이단자로 매도했다. 하지만 그는 그의 교회를 누구보다 사랑했고 그 사랑의 힘이 비판적 지성과 함께 보헤미아와 유럽 전체를 뒤흔드는 혁명의 불길을 당긴 것이다. 지금 한국의 교회는 이 후스를 다시 광야에서 만나야 한다. 히브리어에서는 광야(미드바르)와 지성소(드비르)와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의 어근이 같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온실 속의 분재(盆栽)처럼 사는 한국교회는 다시 거친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시 서야 한다. 그 광야는 프라하 대학의 베들레헴 채플처럼 신성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지는 곳일 것이다.
<참고문헌>
토마시 부타, 이종실 옮김, 『체코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만나다』 (동연, 2015).
이동희, 『역사를 바꾼 종교개혁가들』 (지식의 숲, 2013).
Thomas A. Fudge, The Magnificent Ride: The First Reformation in Hussite Bohemia
(Aldershot, England: Ashgate Publishing Limited, 1998).
_____, Jan Hus: Religious Reform and Social Revolution in Bohemia (London: I.B
Tauris & Co Ltd, 2010).
_____, The Memory and Motivation of Jan Hus, Medieval Priest and Martyr
(Turnhout, Belgium: Brepols Publishers, 2013).
Victor Verney, Warrior of God: Jan Zizka the Hussite Revolution (London: Frontline
Books, 2009).
|
첫댓글 거위의 꿈 (인순이) - 다시 듣고 들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