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40-53
그때에 예수님의 40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41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42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43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44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45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46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47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48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49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51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52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53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누구를 닮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언제나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출신성분입니다.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부터 시작해서 무슨 학위를 가졌느냐 까지 별의별 것들이 인생을 졸졸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악착같이 공부하려고 죽을힘을 다하여 명문대학에 다니려고 하고 졸업장을 받으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실력이 문제입니다. 학벌이나 출신을 문제 삼는 것은 구태의연한 발상입니다. 우리는 그런 낡은 사고방식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아직도 그런 사고방식으로 우리의 아이들을 그런 전쟁 속으로 내 몰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교육비 때문에 공교육이 퇴보되고 아이들의 인성교육이 잘못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창의성은 영점출발(zero base)에서 출발합니다. 스스로 찾아내서 공부하는 것을 탐구생활이라고 합니다. 탐구해서 스스로 깨우쳐야 자기의 것이 됩니다. 모르는 것을 누구에게 물어서 아주 쉽게 알게 되면 금방 잊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공부는 스스로 재미를 붙여서 스스로 찾아내서 탐구해 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주입식으로 답을 알아가는 공부를 계속하고 있고 아이들을 그렇게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영어공부입니다. 영어공부는 말을 하는 훈련입니다. 이것은 공부로써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생활로 이뤄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의 훈련을 공부로 대신하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영점출발로 시작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없이 기초부터 생활이나 훈련으로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영점출발을 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으로서 아주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태어나실 때부터 아주 가난하게 태어나신 것처럼 목수 일을 하시면서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갈릴래야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영점출발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가난하게 사신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손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따라서 실천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출신에 대해서 트집을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갈릴래아는 평범한 마을이었습니다. 극장까지 있는 마을이었고, 대단히 큰 저택이 있는 호화로운 별장과 같은 부유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북쪽 마을이 있는 반면에 남쪽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빈민가들이 즐비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있지만 한쪽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나사렛은 중요한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가파르나움은 또한 수수한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릴래아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은행도 있었고, 법정도 있었고, 여러 부족들이나 이민족들이 모여들어서 어중이떠중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지만 분명한 색깔이 있는 마을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그 마을은 주민이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갈릴래아 호수가 있어서 배를 가지고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어부들 속에서 제자들을 뽑으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그렇게 일거리가 많지 않은 목수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조금 격상해서 말한다면 건축업자라고 해야 하겠지만 주로 문짝이나 식탁이나 의자를 짜 주셨을 것이고, 맞춤 멍에를 깎아주시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이지만 사시기는 갈릴래아 나사렛이었고, 활동을 주로 갈릴래아에서 하셨기 때문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는 언제나 예수님의 출신에 대해서 많은 문제를 삼곤 하였을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은 촌놈이고 ‘개천에서 용이 나올 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목수출신이 무슨 메시아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고, 왕족이나 왕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의 판단 기준이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 중에서 메시아가 탄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사람들의 이기적이며 변덕스러움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비위를 맞춰주셔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런 것을 바라고 있는 바리사이들의 뻔뻔함에 어이가 없습니다. 감히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닮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하게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신앙의 길은 항상 하느님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닮았는지 생각해 봅니다. 바리사이들을 닮았는지 성인들을 닮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1,18-20
18 주님께서 저에게 알려 주시어 제가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그들의 악행을 보여 주셨습니다.
19 그런데도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저 나무를 열매째 베어 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
20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축일4월 2일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 (Francis)
신분 : 은수자, 설립자
활동 지역 : 파올라(Paola)
활동 연도 : 1416-1507년
같은 이름 :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1416년 3월 27일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 지방 코센차(Cosenza)의 파올라에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어린 시절 산마르코(San Marco)에서 프란치스코 회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3세 때에 산마르코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1년 동안 생활하면서 기도와 금욕과 겸손의 삶을 배웠다. 이는 그가 아기였을 때 한쪽 눈에 병이 나서 실명의 위험에 처하자 그의 부모가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전구를 청하며 했던 약속을 이행한 것이다. 그 후 부모와 함께 로마와 아시시를 순례한 후, 15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영지인 파올라 교외에서 홀로 지내다가 바닷가의 한 동굴에서 6년 동안 기도와 금욕을 실천하며 은거 생활을 전념했다.
1435년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와 함께 생활하게 되자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는 작은 건물과 경당을 지어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공동체에 동참하는 이들이 계속 늘면서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했고, 1454년경 코센차 교구의 대주교에게 허락을 받아 새로운 수도원 건물과 성당을 건축했다. 그들의 생활 규칙은 매우 엄격했는데, 극도의 청빈과 금욕을 실천하면서 겸손을 중요하게 여겼다.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수도회는 1474년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로부터 ‘성 프란치스코의 은수자회’로 설립 허가를 받았고, 그 후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에게 수도회 설립을 승인받으며 그 이름을 ‘가장 작은 이들의 수도회’(Ordo Minimorum, The Order of Minims)로 변경했다. 그는 칼라브리아와 시칠리아(Sicilia)에 수도원을 세웠고, 수녀회와 제3회도 설립했다.
그의 생활이 거룩하고 엄격했던 만큼,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적인 영향 또한 지대했다. 그는 특히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예언의 은사를 받아 1480년 이탈리아 남동부의 오트란토(Otranto)가 터키에게 점령당할 것과 나폴리(Napoli) 왕에 의해 탈환될 것을 예언했다.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시칠리아에 갈 때 뱃사공이 항해를 거부하자 자신의 망토를 깔고 한쪽 끝을 돛 삼아 동료들과 함께 메시나 해협(Strait of Messina)을 가로질러 항해하기도 했고,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조카를 소생시켜 어머니에게 돌려주기도 했다. 이런 예언의 은사와 여러 기적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프랑스 전역으로까지 퍼져나갔다. 1483년 임종을 준비하던 프랑스의 국왕 루이 11세도 그의 이야기를 듣고 꼭 한 번 보기를 청했다. 루이 11세 왕은 성 프란치스코만이 자신을 치료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비록 온전히 치유되지는 못했지만, 루이 11세 왕은 큰 위로를 받고 만족해하며 임종을 맞았다. 국왕의 아들로 왕위를 이은 샤를 8세는 성 프란치스코를 흠모해 계속 머물러 줄 것을 요청했고, 그의 친구가 되어 프랑스의 여러 곳에 수도원을 지어주었다.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는 생애의 후반기 25년을 프랑스의 플레시(Plessis) 수도원에서 지냈는데, 마지막 3개월 동안은 투르(Tours)에서 고독하게 지내면서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는 파스카 성목요일에 회원들에게 사랑의 실천과 엄격한 생활을 당부한 후, 다음날 총장 대리를 선출하고 영성체를 한 다음 요한 복음의 주님의 수난기를 들으며 1507년 4월 2일 조용히 선종하였다. 그 후 그의 유해는 그가 설립한 수도회의 여러 수도원에 나뉘어 묻혔고, 1519년 5월 1일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1943년 3월 27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해상 여행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는 그가 행한 많은 기적이 바다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축일을 맞은 파올라의 프란치스코 (Francis)형제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