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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삭제하다
전영임
누구 하나 기별 없는 전화기를 매만지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번호들을 지운다
절두산 망나니 손이
칼춤 추듯, 칼춤 추듯
삭제한 낯선 이름 온 저녁을 붙잡는다
단칼에 날린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아뿔싸, 목을 벤 후에
도착한 어명 같은
산다는 핑계 속에 까마아득 잊혀져간
나는 또 누구에게 삭제될 이름일까
희미한 번호를 뒤져
늦은 안부 묻는다
● [2022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심사평 / 이우걸 시조시인
인간 존재에 관한 사유를 촉발할 여운 머금은 시조
너무 길고 막막한 팬데믹 시대다. 누구도 명쾌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어둠의 터널 속에서 우리의 생활은 2년을 경과하고 있다. 인간의 거만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이러스들은 새로운 변종이 되어 날뛰고 있다. 이러한 전망 부재의 삶 앞에서 투고 작품들의 현황은 어떤 모습일까? 라는 궁금함과 일말의 기대 속에서 작품을 읽는 선자는 떨렸다. 결과를 먼저 말하면 투고작 수는 전해에 비해 소폭 증가하였고 수준은 높아졌다. 형식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다. 그리고 이 시대의 시조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대상을 노래해야 하는 가를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유의해서 읽어본 작품으로는 ‘월력’ ‘어머니의 좌판’ ‘기계치’ ‘원추리 여인숙’ ‘ 삭제하다’였다. 그러나 서정성과 수사 능력의 부족 등을 발견하여 제외한 뒤 마지막 당선작 후보로 남은 작품은 ‘삭제하다’와 ‘원추리 여인숙’이었다. 한 작품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어두운 삶을 예리하게 드러내어 반추하게 하는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시조를 읽는 재미를 소소하게 선사하는 잘 수놓은 수틀 속의 그림 같은 작품이었다. 이 두 시인의 다른 작품들도 탄탄하였다. 오래 심사숙고한 결과 좀 더 신선하고 현대적인 작품을 고른다는 의미에서 당선의 영광은 ‘삭제하다’를 쓴 시인에게 돌아갔다. 정보화 기계화 시대가 된 지금일수록 고독한 사람들은 더욱 고독해지고 잊혀 가는 사람들은 더욱 잊혀 갈 것이다. 팬데믹 시대가 그런 외로움을 더 부추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삭제하다’는 인간 존재의 중요성을 성찰하게 하고 그와 관련한 여러 가지 사유를 촉발할 수 있는 여운을 머금고 있는 수작이다. 대성을 기원한다. (이우걸 시조시인)
● [2022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소감 / 전영임
아버지 말씀처럼 즐기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금빛 모래 쓸리어 내리는 강을 건너, 진달래가 흐드러진 산으로 꽃상여를 타고, 화려하고 호강스럽게 떠나시던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난다. 내 삶의 지침이 되어 준 말씀, “즐기면서 최선을 다해라.”
시조와의 연애는 내가 늘 을이었다. 그래도 설레고 행복했다. 무릎을 치게 하는 시조를 만날 때마다 흩어진 언어들을 씨줄 날줄로 엮어 가슴을 울리는 시조를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사람 복이 많아 감사할 분들이 참 많다. ‘꿈꾸면 이루어진다!’며 시조시인의 길로 안내해 주시고, 칭찬과 격려로 꿈을 키워주셨다. 부족한 글에 늘 ‘잘한다!’는 응원으로 가르쳐 주신 영주문예대학 박영교 학장님, 목요일 밤을 밝히던 문예대학 동문님들, 사이버 공간에서 내 글에 관심 주시고 지도해 주신 백윤석 시조시인님, 코로나19 이후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큰 상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막내가 뭘 하든 자랑스러워하는 친정 8남매, 무한 응원으로 내 가슴을 뛰게 하는 민지, 민기와 함께 기뻐해주는 가족이 있어 기쁨이 배가 된다. 2년 동안 맨살을 만져보지 못한 요양원에 계신 엄마가 보고 싶다.
고뇌하며 쓰기보다 즐기면서 시조를 품는, 수굿한 시조시인이 되어 이 설레는 연애를 오래 하고 싶다. 부족한 글에 눈길 주신 부산일보와 신춘문예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약력 : 1965년 경북 영주시 출생,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과 재학 중, 현 동양대 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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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꽃을 더듬어 읽다
김성애
리어카와 한 몸으로 꾸뻑이는 할머니
먼 길 걸어오셨나, 가슴이 흘러내린다
바람은 소리를 접어 산속으로 떠나고
비 맞아 꿉꿉해진 골목들의 이력같이
소나무 우듬지에 걸려있는 저 흰구름
공중에 새를 날려서 주름살 지워낸다
색 바랜 기억들이 토해놓은 노을인가
중복 지난 서녘에 붉은 섬 둥둥 띄워
초저녁 봉선화처럼 왔던 길을 되묻고
●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심사평 / 이근배, 이우걸 시조시인
코로나 팬데믹 상황서 실존적 고뇌 다룬 작품 늘어
심사 대상 작품들은 다양한 상상력의 하늘이거나 바다다. 수없이 많은 불면의 밤들이 공들여 만든 세계가 모여 있기 때문이다. 올해의 경우 팬데믹 상황에서 더 치열하게 우리 삶의 존재 의미나 전망 부재의 내일을 향한 자세 혹은 실존적 삶을 고뇌하고 이를 바탕으로 창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영향 때문에 오히려 이미지에 허점을 보이거나, 지나치게 사변적으로 흐르거나, 내용이 길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작품도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찾는 것은 결국 시인으로서 자신의 자질과 개성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런 관점에서 마지막까지 거론된 작품은 ‘강물의 탄원서’, ‘갠지스강’, ‘바위 소나무’, ‘진달래 핑계’, ‘꽃을 더듬어 읽다’였다. ‘강물의 탄원서’는 환경오염을 거론하면서도 자연의 힘을 믿는 시인의 자세가 든든해 보였고 ‘갠지스강’은 생태계나 생사의 순환을 일체의 감정 개입 없이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바위 소나무’는 삶의 강인함을 절제된 단시조 속에 잘 담아냈고 ‘진달래 핑계’는 읽는 재미를 선사하는 우리 일상의 부담 없는 노래라는 점에서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위의 작품 중에서 서정성이 부족하거나 기성 시인의 작품과 너무 비슷해 보이는 작품, 시어가 승화되지 못한 작품, 사고의 폭이 너무 좁다고 느껴지는 작품을 다시 제외했다. 그리고 남은 작품인 ‘꽃을 더듬어 읽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 작품의 중요 소재는 노인이다. 리어카와 함께하는 그의 고단한 하루를 무심한 듯 감정개입 없이 섬세하게 그려놓았다. 그리고 이 무심함이 오히려 효과적으로 노인 문제를, 우리 삶의 고충을, 인생의 덧없음을 상상하게 한다. 당선을 축하하며 더 노력해서 의미 있는 성취를 하길 빈다.
(이근배·이우걸 시조시인)
●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소감 / 김성애
병마와 싸운 지난해… 당선 소식에 어둠의 터널 빠져나온 듯
높이를 가늠하기 힘든 그곳을 오르고자 첫발을 디디던 날이 새삼 먼 추억으로 떠오릅니다. 처음 오를 때 깨끗하던 계단은 세월의 얼룩이 묻어 나날이 낡아 갔습니다. 오르고 오르다가 앞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이제는 내려놓으리라, 돌아서리라’ 수없이 주저하고 망설이던 시간을 지나 드디어 오늘, 그곳에 도달했습니다.
지난해 몸을 옥죄는 병마를 견뎠습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하염없이 나부끼었습니다. 일어설 힘도 없이 주저앉아 있던 저를 화들짝 깨운 당선 소식에 여태 괴롭히던 어둠이 모두 빠져나가고 환희와 밝음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이제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겠습니다.
글을 쓰며 바라본 세상은 전엔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또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바람의 결을 살피고 저녁의 안부를 물으며 보도블록에 피어난 꽃의 이름을 되뇌는 하루하루가 행복했습니다. 열정으로 숨차던 시간을 소환하며 다시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해야겠습니다.
날카로운 감성으로 시조의 길을 열어주신 이교상 선생님, 함께 이끌어주고 어깨를 내어준 문우들, 제가 걷고자 하는 길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응원해주고 믿어준 가족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뭉게뭉게 눈꽃을 피운 나뭇가지에서 녹아내리는 물의 눈동자로 주변을 깊이 살피고 따뜻하게 어루만져 아픔을 치유하는 시인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오게 해 주신 동아일보,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1963년 경북 경산시 출생 △대구상서여자상업고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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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길고양이 삽화
배종도
서울역 앞 도로변에 고양이를 그렸습니다.
여기저기 깊은 상처 곤두세울 털도 없이
더께 껴
비루먹은 몸
박제되어 갑니다.
블랙홀 소용돌이 에돌아서 피했지만
오가는 자동차들 곡예 하듯 스쳐 가는
아찔한 순간, 순간은
숨이 턱턱 멈춥니다.
지상의 끝 간 데쯤 눈을 감고 웅크릴 때
심장에서 새는 피가 잔등 위에 그린 장미
그 꽃잎 바로 뒤편에
이정표가 있습니다.
경적의 여운들이 동동걸음 치는 곳에
왔다 가는 전조등이 어둠 몇 술 들어내고
눈을 뜬
개밥바라기
밝은 손을 내밉니다.
● [2022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심사평 / 이근배, 한분순 시조시인
마스크에 기댄 시절, 생존의 절대력을 보여 준 위로
현대 문학 층위에서, 개인은 신화를 넘어선다. 사랑이 혁명보다 위대하며, 저마다 살아 내는 오늘의 편린이 거대 이데아보다 크다. 평안한 삶의 가치가 어느 신념보다 높아졌으며 인간성이 선한 개인주의로 전향된 신세기 르네상스이다.
달라진 시대정신은 기성 문단에 자극을 주던 신춘문예마저 그 야성의 결기를 숨기게 만든 것 같다. 탁마된 필력들이되, 경계를 녹이며 이미지와 상징의 지형을 넓히는 섬세한 반란이 옅어졌다.
예술이든 일상이든 거리두기로 다들 여려진 도시에서, 유일한 마법은 고양이가 지닌 오묘함이다. 당선작이 된 ‘길고양이 삽화’ 속 풍경은 날것의 힘이 깃든 존재를 다룬다. 교차성이라는 겹겹의 특질은, 그저 얇은 마스크에 기대어야 되는 시절, 생존의 절대력을 보여 줌으로써 위로 기제가 된다. 당선권에 오른 작품들은, 과거형이 아닌 물질화된 영원으로서의 전통을 탐람하는 ‘청자 도요지’와 현재 시점 인권처럼 요청되는 동물권 앞에서 공생의 혜안을 포착하는 ‘로제트 식물’이다. 편편마다 정근하게 축조된 내용을 갖추었다.
그러나 선경후정 작법 질서가 변주된 산문성은 친밀한 문체이되 시의 목적은 시여야 된다. 몰입과 여운의 강렬한 헤드라인이 제목이나 결구에 있어야 하며, 더할 것은 운율로 구현하는 형식 리듬과 시적 신비로움이다.
최소 어휘로 최대 시학을 이루는 시조의 텍스트성은 면밀하다. 다만 개성을 욕구하면서도 부드러운 연대감을 찾는 시대, 음풍농월과 애틋함만이 아닌 현대인의 감정선에 건넬 흡족함이 필요해졌다. 작가의 세계관은 입체적으로 진일보함이 옳다.
서정이라는 본령을 잊으면 문장은 계산된 기교에만 머무른다. 바람이듯 등 뒤를 지키며 그림자와 나란히 걸어 주는 문학적 다정함을 지니기를 바란다.
(이근배, 한분순 시조시인)
● [2022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소감 / 배종도
어머니, 이제 정말 효도한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대한 꿈을 갖고 그저 혼자 끼적여 본 글이 몇백 편. 재주가 둔재라 감히 남 앞에 내놓고 보일 만한 글이 못 되었습니다. 색다른 상황을 목격할 때마다 그것을 글로 표현하고자 깨끗한 백지에 그대로 옮기고 싶었지만 따라 주지 못한 필력(筆力) 때문에 늘 좌절하고, 밤을 하얗게 밝힌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었습니다.
한순간 절망의 벽이 다가오기도 하고, 그 벽을 뚫었을 때 벅차오르는 희열에 잠 못 이루다가 아침에 다시 깨어 보면 실망해 버리는 끝없는 자신과의 긴 사투는 감내하기에 참으로 버거웠습니다.
가끔은 후회를 곱씹고 살아왔습니다. 왜 내가 펜을 잡았을까, 훌훌 털고 돌아서면 얼마나 홀가분할까…. 하지만 복장 속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열정이 솟구쳐 오르면서 다시 시조의 열병에 시달렸습니다.
이제 해거름을 바라보는 길목에서 신춘문예의 영광을 손에 쥡니다. 그러나 아직 ‘시인’이라 부르기엔 너무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래도 언제 어디서나 ‘글을 쓰는 아들이 있다’고 자랑하시는 어머니께 이제는 정말로 효도를 한 것 같아 죄스러움을 조금은 덜어낸 것 아닌가 여겨질 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저의 졸작에 ‘월계관’을 씌워 주신 심사위원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늘 따뜻한 눈빛으로 제 작품에 애정을 부어 주신 윤금초 교수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정년퇴직을 하고 글을 쓴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방 하나를 치워 주면서 마음껏 습작을 하도록 서재를 꾸며 준 아내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배종도 ▲1957년 경남 마산 출생 ▲경희대 체육학과 ▲동국대 교육대학원(국어교사 자격취득) ▲서울 광영고등학교 교사로 36년간 재직 ▲2018년 월간문학 시조부문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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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재활 병원
정경화
바장이던 시간들이 마침내 몸 부린다
한 평 남짓 시계방에 분해되는 작은 우주
숨 가삐 걸어온 길이
하나 둘씩 드러난다
시작과 끝 어디인지 알 수 없는 하늘처럼
종종걸음 맞물리는 톱니바퀴 세월 따라
녹슬고 닳아진 관절
그 앙금을 닦는다
조이고 또 기름 치면 녹슨 날도 빛이 날까
눈금 위 도돌이표 삐걱거리는 시간 위로
목 붉은 초침소리를
째깍째깍 토해낸다
● [2022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심사평 / 이종문 시조시인
'재활병원', '말 무덤', '뇌졸증', '몽돌' 남다른 면모 보여
"우와 이거다!" 하고 번쩍 들어 올리고 싶은, 펄펄 살아서 냅다 뛰어오르는 금빛 대어를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당선권에 오른 '재활병원', '말 무덤', '뇌졸증', '몽돌' 등은 모두 남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몽돌'은 잘 다듬어진 작품이지만 너무 무난했다. 정말 난데없는 반전 같은 결정적인 한 방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뇌졸증'은 내려놓기가 조금 아까운 작품이었다. 보폭이 활달하고 리듬이 역동적이었다. 거침없는 패기와 실험정신도 남달랐다. 그러나 감정 과잉의 직설적 표현들이 섞여 있는 데다, 자유시와 유사한 과도한 행 갈이로 인하여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밀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말 무덤'은 말[言]과 말[馬]이 지닌 유기적인 속성을 절묘하게 포착하여 이중적으로 뒤범벅한 작품인데, 말을 주무르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하지만 '말 무덤[言塚]'이 경북 예천에 실재하고 있는 무덤이어서 신선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재활병원'은 시계방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제목부터 의표를 찔렀다. 재활에 성공한 시계가 톱니바퀴에 맞춰 어김없이 착착 돌아가듯이, 전체적인 시상 전개가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안정된 가락을 담보하고 있었다.
게다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응시와 메시지를 말의 밖에다 슬며시 담아놓고 있기도 하다. 시계와 사람을 겹쳐놓은 재활의 중층구조를 통해 우리 시대의 곤고한 삶을 조곤조곤 노래하고 있는 이 작품에 당선의 방점을 찍은 연유다.
당선자에게 뜨거운 축하를 드리면서, 앞으로 좀 더 과감하고 담대한 도전을 통하여 큰 시인으로 성장하시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아쉽게도 낙선한 분들께서는 내년에 3박자를 제대로 갖춘 작품으로 다시 한번 도전해주셨으면 한다.
(이종문 시조시인)
[2022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소감 / 정경화
무척 기뻐도 눈물이 나오나 봅니다.
멀리서 다가오는 낯선 음성이 들리는 순간 담담했던 마음에 잔물결이 일면서 머리에 냉수를 쏟아 붓는 것처럼 또렷해졌습니다. 그리고 당선을 축하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저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의 등을 가만히 토닥이면서 그동안 시조와의 동행에서 결코 쉽지 않았던 지난날의 수고에 대해 위로를 했습니다.
어릴 적 마을사람들은 마을이름을 구름다리라고 불렀습니다. 분명 운교리라는 이름이 있는데 구름다리라고 불러서 저는 초등학교를 오가는 길에 목이 꺾어져라 하늘을 쳐다보며 구름다리를 찾았습니다. 그렇게 바라본 하늘에서 구름다리와 비슷한 구름을 찾았는가 하면 금세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떤 날은 아예 구름 한 점 없는 시린 하늘이었습니다.
산길을 걸어 논길을 지나 십리가 넘는 학교를 오가면서 구름다리를 찾던 그 작은 아이는 지금은 구름다리를 찾지 않습니다. 다만 그때 구름다리를 찾으면서 보았던 변화무쌍한 자연을 소환하고 있을 뿐입니다. 벼 익는 들판을 일렁여놓고 금세 멀리 대숲을 흔들고 있는 바람둥이 바람, 논일을 하다 잠시 오수를 즐기시는 농부의 젖은 발을 따숩게 덮어주던 햇빛, 그리고 사시사철 아무렇게나 피어났지만 그 곁에 쪼그려 앉혀놓고 바라보게 하던 들꽃들은 제 시조창작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조금씩 그것들을 빌어다 쓰고 있지만 화수분처럼 늘 넉넉히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온 느낌입니다. 터널을 지나는 동안 외롭지 않게, 두렵지 않게 늘 함께해준 윤금초 교수님과 문우여러분, 고맙습니다. 이럴 땐 그 말의 무게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열심히 창작에 매진하라고 제 손을 선뜻 잡아주신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 정경화
1963년 전남 담양 출생
호남대 대학원 한국어교육학과 졸업
호남대 언어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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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오래된 꽃밭
정경화
이른 가을 강쇠바람 시린 상처 들쑤신다
움켜쥔 시간만큼 안으로만 말라 가다
까맣게 옹이가 되어 불길 적막 견디는 날
핏기 없는 손톱 끝에 긴 침묵이 묻어나고
비 젖은 목소리로 귓바퀴가 울려올 때
선홍빛 흉터 하나가 겹무늬로 앉는다
벼룻길 하나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끝물 동백 이우는 해 잡았다 놓는 바위 난간
아찔한 순간순간이 모두 다 꽃밭이다
● [2022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조 심사평 / 민병도 시조시인
꽃밭 교본으로 삶 투영, 공감대 자극
100년이 넘는 역사에도 아직 이 땅에서 신춘문예가 건재한 까닭은 문단 지망생들의 집중력을 끌어내는 가치와 미래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희망 때문이다. 더욱이 국시, 시조에 대한 기대가 더없이 절실한 오늘의 문학 풍토를 생각하면 경건하게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예선을 거쳐 올라온 56편의 작품 가운데 시조의 정제된 율격과 완성도, 메시지 등을 고려하려 ‘슬도에서’ ‘어떤 수사학’ ‘오래된 꽃밭’에 주목하였다. 습작 과정이 엿보이는 언어 감각과 자기주장을 이끌어 나가는 논리가 정연하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자기감정이 지나쳐 명징한 주제와 메시지의 전달에서 약점을 보인 ‘슬도에서’를 먼저 내려놓았다. ‘어떤 수사학’은 상징적 이미지를 행간에 옮기는 남다른 능력에도 불구하고 시조의 단아한 절제미를 십분 살려내지 못하였다. 문장에서도 3수 연시조에서 서술형 종결이 하나뿐일 정도로 산문의 분절 구성 또한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남은 ‘오래된 꽃밭’을 올해의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외형적으로 보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쇠락해가는 꽃밭을 소재로 한 평이한 작품이다. 하지만 보다 세심히 읽어보면 이 작품에는 꽃밭을 교본으로 자신의 삶을 투영해내는, 상당히 계산적인 은유가 숨겨져 독자적 공감대를 자극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함께 응모한 작품들로 유추해 볼 때 시조의 정형성과 질서 의식에 대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사색을 통해 긍정적인 삶의 가치와 만나는 시적 자세를 믿기로 한 것이다.
(민병도 시조시인)
● [2022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소감 / 정경화
당선소식 선물처럼 남기고 간 그녀
여고를 졸업한 지 까마득히 지난 어느 날, 여고 동창 모임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곱게 그린 눈썹과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치아를 보고 그동안 살아온 그녀의 삶을 읽고 있는데 위트 있는 유머로 좌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을 보고 그만 그녀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런 얼마 후 믿기지 않은 사실을 알게됐다. 그녀는 지금 힘겹게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지난 번 동창 모임도 투병 생활 중에 잠깐 시간을 내어 가발을 쓰고 온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지우개로 지워진 듯 하얘졌다. 긴 고통의 강에서 건져 올린 웃음이기에 은피라미처럼 반짝였던 것일까.
지금 그녀는 이 세상에 없다. 그녀 없는 가을만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다녀갔을 뿐이다. 하지만 올해는 그렇게 기다리던 당선 소식을 선물처럼 놓고 갔다. 나는 알고 있다. 고통 속에서도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그녀의 몫까지 대신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분명 꽃밭이다.
선뜻 당선 축하를 안겨준 심사위원님, 그 깊은 뜻을 헤아리겠다. 끝까지 믿어주시고 지켜봐 주신 윤금초 교수님과 문우 여러분의 고마움은 어떤 말로 표현해도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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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달의 뒤축
정두섭
굽 닳잖게 살살 가소
얼매나 더 산다꼬
잦바듬한 달이 간다 살 만큼 산 달이 간다
작년에 갈아 끼운 걸음으로 아득바득 가긴 간다
너저분 문자향을 공들여 염하고서
널브러진 서권기 오물오물 씹으면서
골목을 통째로 싣고 살 둥 죽을 둥 가긴 간다
참 서럽게 질긴 목숨이 등허리 휜 달빛을
닳고 닳은 달빛을 흘리지 않아, 시방
만월동
만월 수선소 일대가 무지로 깜깜하다
● [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심사평 / 김진희 시조시인, 장성진 문학평론가
‘간다’의 중의성 활용·명사와 동사의 역설 탁월해
시조의 장르 위상은 시의 하위 갈래로서 자유시와 짝을 이루는 것이다. 두 갈래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 상보적으로 공존하면서 시의 창조성에 참여하기 때문에 시조의 생명력은 정형에 있다. 이때 정형이란 음수율 같은 형식상의 규범을 포함한 구조의 완결성을 뜻한다.
올해 신춘문예 응모작들은 대체로 형식의 규칙을 지키려 하는 한편 실험 의식은 적어서 비교적 온건한 경향을 보였다. 그 중 정형의 완결성과 시적 형상화가 조화를 이루는 작품들을 가려내고, 다시 숙고하여 세 사람의 작품을 두고 오래 고심하였다. 정두섭의 ‘달의 뒤축’, 장수남의 ‘호두의 집2’, 조영란의 ‘숲의 안경’ 세 편은 각자의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달의 뒤축’은 구조적으로 탄탄하고 말을 유려하게 부려썼지만 사설이 다소 늘어졌다. ‘호두의 집2’는 기억이 뜯겨나가 치매 앓는 엄마가 굳은 뇌 달각대는 호두 속 미로에서 헤매는 상태를 절실하게 그렸지만 설명에 치우친 편이다. ‘숲의 안경’은 식물을 소재로 하여 생존의 내밀한 긴장 관계를 이미지로 제시한 작품이지만 시조적 완결성이 좀 약하다.
당선작인 ‘달의 뒤축’은 몇 가지 점에서 높은 성취도를 보여준다. 우선 제재인 달과 그것의 작용인 “간다”가 중의적으로 혼합되었다. 간다는 동사로 인해 달은 하늘의 실물이기도 하고, 시간의 단위이기도 하고, 그에 대응되는 노인이기도 하다. 이들이 넘나들면서, 살아왔음과 살아갈 것 사이에 역설이 이루어진다. 특히 둘째 수는 장마다 명사와 동사가 모두 역설을 드러낸다. 구조적으로도 하늘의 달과 땅의 사람이 계속 얽히면서 흘러가고 걸어가다가 마지막의 종장에 이르면 망월이라는 지명과 만월이라는 장소명을 통해 땅으로 고정된다. 그렇지만 깜깜하다는 어두움에는 달의 속성으로 인해 밝아지는 희망이 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가 도드라지지 않고 유연하게 흘러가는 것은 작품을 관류하는 능숙한 말 부림에 기인한다. 그만큼 언어 감각이 뛰어나거나 오랜 습작을 거친 결과일 것이다. 응모작 네 편이 소재의 폭을 넓게 취하였으면서 수준이 고르다는 점도 당선자의 작품을 뽑는 데 믿음을 주었다. 신춘문예는 발전 가능성에 대한 기대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선자는 물론 응모자들 모두 계속 분발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김진희 시조시인, 장성진 문학평론가)
● [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소감 / 정두섭
하나쯤 있어도 괜찮은 다른 목소리의 작가 될 것
기별도 없이 늦가을이 들이닥쳤다. 또 온몸이 가렵다. 그렇게 새봄 앓이를 다시 시작했다. 이름하여 신춘이라는 병.
부재중 전화, 063-284-0000. 혹시나 해 걸어도 걸어도 다시 걸어도 통화 중이다. 피가 더 마르기 전에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광고다(싫어요 63, 괜찮아요 0). 욕이 나왔다.
손이 울었다. 02-780-0000. 덜컥 내려앉았다. 드디어 때가 되면 온다는 기별이 오시는가.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대통령 후보 허경영입니다.
존경하지는 않지만 이런 양반 하나쯤 있어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욕이 나왔다.
사실 나는 ‘이런 양반’이 되고 싶었다. 하나쯤 있어도 괜찮은 다른 목소리의 양반, 아니 내 목소리라면 상놈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러나 누가 이런 양반놈을 뽑겠는가.
한때는 주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빌고 또 빌어도 한 문장 발기하지 않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것이냐, 詩야!
습관처럼 절망하다, 욕하다, 포기할 때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경남’이었다.
이 턱 저 턱 없다, 연락들 하지 마시라. 쓰기는 쓰되, 함부로 쓰지 말고 아껴 쓰자 새삼 다짐했으니까. 중언부언 지우고, 있어도 그만 빼고, 없어도 그만 버리면서 한 글자 두 글자 정말 아껴가며 딱 세 줄만 쓸 생각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일용할 양식이 없다고 눈치 주는 마눌님, 이용할 언덕이 없다고 떼쓰는 딸내미들, 아무래도 얼마 못 살 것 같은 망백(望百) 지난 엄마, 아직 한참 남은 것도 같고 멀지 않은 것도 같은 망구(望九) 지난 장모와 같이 사는 집에도 볕 들 날이 있기를.
시 쓰는 줄 까마득히 모르는 회사에도 영광이, 라고 쓰는 건 살아남기 위해서다. 너무도 보잘것없는 약력인데 요즘 칼바람이 장난 아니다.
△1966년생 △인천 거주 △서해종합건설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