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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곽재구,「사평역에서」,『사평역에서』, 창작과 비평사, 1983.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장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2.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잎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3. 김용택, 「섬진강 9」, 『섬진강』, 창작과비평사, 1985.
섬진강 9
강 건너 산밭에 하루 내내 스무 번도 더 거름을 져 나르셨단다. 어머님은 발바닥이 뜨겁다며 강물에 발을 담그시며 자꾸 발바닥이 뜨겁단다. 세상이야 이래도 몸만 성하면 농사짓고 사는 것 이상 재미있고 속편한 게 어디 있겠냐며 자꾸 갈라진 발바닥을 쓰다듬으시며 자꾸 발바닥이 뜨겁단다.
어머니, 우리들의 땅이신 어머니. 오늘도 강을 건너 비탈진 산길 거름을 져다 부리고 빈 지게로 집에 오기가 아까워 묵은 고춧대 한 짐 짊어지시고 해 저문 강길을 홀로 어둑어둑 돌아오시는 어머니, 마른 풀잎보다 더 가볍게 흔들리시며 징검다리에서 봄바람 타시는 어머니. 아, 불보다 더 뜨겁게, 불붙을 살도 피도 땀도 없이 식지 않는 발바닥으로 뜨겁게 뜨겁게 바람 타시는 어머니. 어느 물, 이 나라 어느 강물인들 어머님의 타는 발바닥을 식히겠습니까 어머니, 우리들의 땅이신 어머님.
4. 김초혜, 「사랑굿 7」, 『사랑굿』, 문학세계사, 1985.
사랑굿 7
그곳이 어디든
무심한 곳으로
나는 가고 싶네
세상살이로
흐려진 눈
멀어버리고
혼자서 무어라
지껄인대도
들어줄 이 없는
적막에 싸여
그대를 조금씩 단념하면서
적막을 보태어
살다가 보면
설움도 나를
놓아주리니
5. 도종환,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접시꽃 당신』, 실천문학, 1986.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견우직녀도 이 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함께 묻고 돌아오네
살아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해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께 나눠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6. 류시화, 「붉은 잎」,『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푸른숲, 1991.
붉은 잎
그리고는 하루가 얼마나 길고
덧없는지를 느끼지 않아도 좋을
그 다음 날이 왔고
그날은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붉은 잎, 붉은 잎, 하늘에 떠가는 붉은 잎들
모든 흐름이 나와 더불어 움직여가고
또 갑자기 멈춘다
여기 이 구름들과 끝이 없는 넓은 강물들
어떤 섬세하고 불타는 삶을 나는 가지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졌었다, 그렇다,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하찮았던가, 여기 이 붉은 잎, 붉은 잎들
허공에 떠가는 더 많은 붉은 잎들
바람도 자고 물도 밝은 날에
나의 외로움이 구름들을 끌어당기는 곳
그것들은 멀리 있다, 더 멀리에
그리고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그것들은 멀리 있다, 더 멀리에
그리고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그것들을 겨울하늘 위에 소용돌이치게 하고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 위로 끌어내린다
7. 문태준, 「가재미」,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
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 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로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 준다
8. 박노해, 「얼마짜리지」,『노동의 새벽』, 풀빛, 1984
얼마짜리지
말더듬이 염색공 사촌형은
10년 퇴직금을 중동취업 브로커에게 털리고 나서
자살을 했다
돈 100만 원이면
내가 10년을 꼬박 벌어야 한다
1억 원은 두 번 태어나 발버둥쳐도 엄두도 나지 않은
강 건너 산 너머 무지개이다
나의 인생은 일당 4,000원짜리
그대의 인생은 얼마
우리 사장님은 하룻밤 술값이 100만 원이래는데
강아지 하루 식대가 5,000원이래는데
3천억을 쥐고 흔든 여장부도 있다는데
염색공 사촌형은 120만 원에 자살을 하고
열여섯 우리 동생 공장을 가고
오 오
우리의 인생 우리의 사랑 우리의 생명은
얼마 얼마?
9. 서정윤, 「바다에서」,『홀로서기』, 청하, 1987
바다에서
바다에서 아내의 차가운 손을 건진다.
물보라로 뒹구는 그림자가
나에게서부터 누워 있었다.
소리 질러 잡을 수 없는
낱말들의 죽은 비늘이
살아 있는 모두의 아픔으로 일어서고 있다.
바다 풀잎이 거품을 물고, 파도에 서고
바람에 머리를 날리며
아직 지우지 못한 아내의 일로
그들 속에 서 있는 나를 본다.
아내의 손은 늘 차가웠다.
뼛속까지 한기를 품으며
나는 바닷바람으로 불리고 있었다.
10. 신경림, 「農舞」,『농무(農舞)』, 창작과비평사, 1975.
農舞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11. 신현림, 「나의 싸움」,『세기말 블루스』, 창작과비평사, 1996.
나의 싸움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12. 안도현, 「반쯤 깨진 연탄」,『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동네, 1994.
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은 것이다
나를 끝 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 위에
지금은 인정머리 없이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래쪽부터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한지 손을 뻗어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13. 오규원, 「겨울 숲을 바라보며」,『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문학과지성사, 1978
겨울 숲을 바라보며
겨울 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 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 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罪를 더 얻는다.
한 벌의 罪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14. 유하, 「체제에 관하여」,『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문학과지성사, 1991.
체제에 관하여
횟집 수족관 속 우글거리는 산낙지
푸른 바다 누비던 완강한 접착력의 빨판도
유리벽의 두루뭉술함에 부딪혀
전투력을 잊은 채 퍼질러앉은 지 오래
가쁜 호흡의 나날을 흐물흐물 살아가는 산낙지
주인은 부지런히 고무 호스로 뽀글뽀글
하루분의 산소를 불어넣어준다
산낙지를 찾는 손님들이 들이닥칠 때
여기 쌩쌩한 놈들이 있는 뎁쇼
히히 제발 그때까지만 살아 있어 달라고
살아 있어 달라고
그러나, 헉헉대는 그대들의 숨통 속으로
단비처럼 달콤히 스며드는 저 산소 방울들은
진정 생명을 구원하는 손길인가
투명한 수족관을 바라보며 나는
투명하게 깨닫는다
산소라고 다 산소는 아니구나
저 수족관이라는 틀의 공간 속에서는
생명의 산소도
아우슈비츠의 독가스보다
더 잔인하고 음흉한 의미로
뽀글거리고 있는 것 아니냐
15. 이성복, 「그날」,『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그 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占)치는 노인과 변통(便痛)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16. 이해인, 「어느 수채화」,『민들레의 영토』, 가톨릭출판사, 1976.
어느 수채화
비오는 날
유리창이 만든
한폭의 수채화
선연하게 피어나는
고향의
산마을
나뭇잎에 달린
은빛 물방울 속으로
흐르는 시냇물 소리
물결 따라
풀잎 위엔
무지개 뜬다.
그 위로 흘러오는
영원이란 음악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잡히지 않는 것들을
속삭이는 빗소리
내가 살아온 날
남은 날을
헤아려 준다.
창은 맑아서
그림을 그린다.
17. 장석남,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새떼들에게로의 망명』, 문학과지성사, 1991.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1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
저문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찌르라기떼 속에
환한 봉분이 하나 보인다
2
누가 찌르라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봄 햇빛 너무 뻑뻑해
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서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
찌르라기떼 가고 마음엔 늘
누군가 쌀을 안친다
아무도 없는데
아궁이 앞이 환하다
18. 장정일,「하숙」,『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
하숙
녀석의 하숙방 벽에는 리바이스 청바지 정장이 걸려 있고
책상 위에는 쓰다만 사립대 영문과 리포트가 있고 영한 사전이 있고
재떨이엔 필터만 남은 켄트 꽁초가 있고 씹다버린 쎌렘이 있고
서랍 안에는 묶은 플레이 보이가 숨겨져 있고
방 안에는 파이오니아 앰프가 모셔져 있고
레코드 꽂이에는 레오나드 코헨, 존 레논, 에릭 크랩튼이 꽂혀 있고
방바닥엔 음악 감상실에서 얻은 최신 빌보드 차트가 팽개쳐 있고
쓰레기통엔 코카콜라와 죠니 워커 빈 명이 쑤셔박혀 있고
그 하숙방에
녀석은 혼곤히 취해 대자로 누워 있고
…………
…………
죽었는지 살았는지, 꼼짝도 않고.
19. 정현종, 「내 사랑하는 인생」,『나는 별 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내 사랑하는 인생
우선 나는 그대들의 건강과 영광을 빈다. 아울러 그대들의 죽음을 축하한다. 그대들의 꿈같은 좌절과 화려한 지옥을 축하한다. 모든 것은 절대로 좋고 절대로 나쁘다- 그점을 축하한다. 그대들의 공포 및 동해와 서해의 격랑을 축하한다. 그대들의 이목구비와 발바닥과 신문을 축하한다. 극장과 짧은 즐거움과 애국가를 축하하고, 前進과 後進을, 左進과 右進을, 그대들의 前後左右를 축하한다. 한 잔의 술, 길없는 데서의 질주의 끈기(!), 그 모든 것을 축하한다.
돋아나는 풀잎의 눈물 속에 내리는 비
불 꺼진 창의 검은 눈동자 속에 내리는 비
오 내 사랑
돋아나는,풀잎의,눈물,속에,내리는,비……
20. 정호승, 「그리운 부석사」,『사랑하다 죽어버려라』, 창작과비평사, 1997.
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 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21. 최승자, 「일찌기 나는」,『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일찍이 나는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22. 최승호, 「대설주의보(大雪注意報)」,『대설주의보(大雪注意報)』, 민음사, 1983.
대설주의보(大雪注意報)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23.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작과비평사, 1994.
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24.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혼자 가는 먼 집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25. 황동규, 「조그만 사랑 노래」,『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문학과지성사, 1978.
조그만 사랑 노래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26.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 문학과지성사, 1983.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내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리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이 시들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 전공 2014학번 오수민 학생이 정리해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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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쌤이 이많은 시들을 선별해서 올린줄....감동~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