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
윤온강
내게는 분명 여러 개의 다른 얼굴이 숨어 있는가 보다. 가끔 딴 사람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있는 걸 보면 정말 그런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근처에 사는 내가 양복이나 제대로 차려 입고 나서는 날에는 그 학교 학생들에게 가끔 인사를 받는다. 그중에는 인사를 꾸벅해 놓고는 "저희 학교 교장선생님 맞죠?"하며 확인하려고 드는 녀석도 있다. 당황한 나는 시인도 부인도 않는 애매한 표정을 짓다가 그냥 끄덕여 주고 만다. '아니'라고 하면 무안해 할까 봐 그런다. 뭐, 어떤가. 애들이 교장 선생님 얼굴을 자세히 알 턱이 없지 않나. 나도 어렸을 때 그랬는데….
목사로 아는 경우는 더욱 황당하다. 수년 전 워싱턴의 어느 식당에서 옆자리의 어느 교포가 나보고 불쑥 목사님이시냐고 물어온 뒤부터 교회 근처에 가면 목사님 오셨느냐는 인사를 종종 받는다. 정색하고 말하거니와 나는 교인도 아니고, 그토록 거룩하거나 답답하게(?) 생긴 사람도 절대 아니다.
좀 젊었을 때는 형사로 대접받은 적도 여러 번 있다. 한번은 경찰서 앞에서 택시를 타니까 어디 출동하시느냐고 기사가 물었다. 우물쭈물했더니 그 기사는 왜 그러시느냐, 나도 형사님 좀 안다고, 짐짓 섭섭한 표정까지 지었다.
버스 터미널에 갔을 때는 나를 차부 인부로 알고 짐을 내려달라고 일을 시키는 사람도 있었고, 대형 서점에 갔다가 손님에게 점원으로 취급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아니, 더 우스운 것은 동네 산책을 나갔다가 일 나가시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때 입은 내 점퍼가 하도 허름하다 보니까 잡부로 일하는 동네 사람 누군가로 착각한 것이리라.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아내가 듣고 있다가, 당신은 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인가 보지, 하며 웃었다. 참, 그러고 보니까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는 제목의 미국 영화가 있었던 게 생각났다. 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직업이 배우라서 매일 다른 얼굴로 바꾸어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일부러 꾸미는 것이 아닌, 한 사람에게 각기 다른 여러 개의 얼굴이 들어 있는 경우라면, 좀 극단적이긴 해도 다빈치의 모델 이야기만큼 적절한 것은 없을 것 같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 중에 <최후의 만찬>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다. 예수가 열두 제자를 좌우에 거느리고 마지막 만찬을 하면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하는 대목을 그린 그림말이다. 그는 이 그림을 4년여에 걸쳐 그렸다 한다. 성가대원으로 있던 한 청년을 모델로 세워 예수를 그릴 때까지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유다를 그릴 계제에 이르러서는 난관에 부닥쳤다. 마땅한 모델을 좀처럼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랜 고심 끝에 겨우 유다를 찾아낸 다빈치는 무릎을 치며 쾌재를 불렀다. 그 청년의 비열하고 음험한 모습이 영락없는 유다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다 그린 뒤에 알고 보니까, 그 유다의 모델이 4년 전에 예수의 모델이 되었던 바로 그 청년이라는 것이 아닌가! 도시로 떠났던 청년이 그동안 나쁜 환경과 좋지 못한 심성으로 타락해서 그렇게 변했다는 것이다.
헌데 나는 이 이야기에서 그 모델의 얼굴이 변한 이유가 전적으로 환경 탓이라는 주장에는 동조할 수가 없다. 아무리 환경의 영향이 크다 할지라도 본디부터 그런 얼굴이 그에게 잠재해 있지 않고서는 예수가 유다로 변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내게도 여러 가지 다른 얼굴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다만 밖으로 나올 기회가 없다가, 어쩌다가 삐죽 솟아나오는 것을 본 사람들이 나를 이런 사람 저런 사람으로 잘못 인식한 것이리라. 내 말을 못 믿겠으면 이런 걸 떠올려 주기 바란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知人)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가 볼수록 딴 사람으로 보여서 당황한 경험이 없었는지. 그러다 이윽고 자기가 알던 본래의 얼굴을 찾아내고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쉰 적은 없었는지…. 그게 바로 이렇게 숨겨진 얼굴 하나가 고개를 내민 순간에 부딪친 것이 아닌가.
거울을 들여다본다. 무표정한 얼굴 하나가 나를 쏘아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참 얼굴이라는 확신은 가질 수 없다. 바흐친(Bakhtin)의 말에 따르면 '거울 속에서는 보이지만 실제 삶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독특하고도 부자연스런 얼굴 표정'이 거기 나타났을 뿐이니까. 사람은 누구나 타자(他者)를 위한 외양(外樣)을 꾸미며 평생을 살아간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저 남들이 원하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표정으로 그때그때 바꾸면서 살고 있다고.
이로써 보면 사람은 이래저래 여러 개의 얼굴을 지니고 살아야 하나 보다. 그러니 천 개의 얼굴이란 말도 그리 무리한 얘기가 아니다. 이는 필시 삶의 은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수도 되었다가 유다도 되었다가 하면서 자기가 짊어진 삶의 굴곡을 유감없이 드러내야 하는, 인간의 슬픈 실존을 증거하는….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이 지루한 인생길, 단 한 개의 얼굴로만 살아가야 한다면 그 얼마나 따분할 것인가. 여러 개의 얼굴은 어쩌면 신이 내린 축복인지도 모른다.
첫댓글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 윤온강 주간 선생님.. 좋은 글 읽었습니다.." 내게는 분명 여러 개의 다른 얼굴이 숨어 있는가 보다. 가끔 딴 사람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있는 걸 보면 정말 그런 생각이 든다." 누구나 여러 개의 얼굴이 있긴 합니다만.. 교장 선생님, 목사...이런 얼굴들을 가지긴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선생님꼐서는 아주 성공적인 인생을 사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글을 동인지에서 읽고 한 수 배웠습니다. '글은 이렇게 쓰는구나~!' 조용조용, 무릎을 맞대고 앉아 이야기하 듯, 힘을 빼고............윤온강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계셔서 '에세이문학'은 탄탄합니다.
우와~ 동감입니다~
多面을 가지고 살아가나 봅니다))))))))))))))))네 잘 읽고 갑니다
가면을 쓰기도 합니다..
이 다음에 만나면 교장선생님도 되었다가 목사도 되었다가 잡부도 되시는 선생님의 얼굴을 자세히 한번 보겠습니다. 그리고 느낌을......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