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과 리라 / 옥타비오 파스
제1판 서문
글을 쓴다는 것은, 아마도 언젠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서, 그에 대해 답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 더 적절한 정의는 없을 것이다. 위대한 책들, 내가 말하는 위대한 책들이란 꼭 필요한 책들을 의미하는데, 그런 책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심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책들이다. 이 책에 씌어진 나의 대답이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부응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글이 일반적인 동의를 얻을 것인지는 더욱 의심스럽다. 하지만 이 글에서 표현된 내 대답의 깊이와 유효성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필연성에 충실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시를 쓴다는 것이 진정 가치가 있는 일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삶을 소재로 시를 쓰는 것보다 삶 자체를 시로 변화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시는 시적 창조를 통해 글로 씌어지지 않고는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을까? 시를 통한 보편적인 영적 교감은 가능할까?
이 책을 내면서 특별히 고마움을 표해야 할 이름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진 빚이 엄청난 것이어서 책 속에서 어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감사함을 표시하려고 애썼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알폰소 레예스*에게는 감사를 표하고 싶다. *Alfonsd Reyes(1889~1959). 멕시코의 시인이자 사상가로 멕시코에서 가장 풍요로운 결과를 낳았던 지식인 운동 가운데 하나인 '1910년 세대'에 속했다. 희랍의 고전과 유럽, 스페인 그리고 중남미의 문학, 사회학, 지리학, 문화, 철학 등 전 분야에 걸친 박학함으로 중남미의 지적이고 문화적인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두 가지 면에서 나를 격려해주었다. 그가 보여준 우정과 모범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이 책의 주제와 비슷한 주제에 대해서 그가 썼던 책들 『문학적 경험La experiencia literaria』, 『경계 설정El deslinde』그리고 다른 작품들 속에 산발적으로 실려 있는 많은 귀중한 에세이들이 내게 모호했던 것을 명료하게 밝혀주었고 불투명했던 것을 투명하게 해주었으며 복잡하게 얽힌 것을 쉽고 가지런히 바로잡아주었다. 한마디로 나를 환하게 밝혀주었다.
멕시코, 1955년 8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시편을 읽은 동시대인들은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질 뿐, 거의 아무도 그의 작품이 갖는 이정표적인 가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를 탄복시키는 케베도의 많은 구절들이 17세기의 독자들에게는 소름끼치는 것이었으며, 반면에 우리에게 거부감을 주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수식들이 그들에게는 작품이 가지는 매력으로 느껴졌다.
역사적인 공감을 위한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만리케의 「아버지의 죽음에 바치는 노래Coplas a la muerte de su padre」에 나타나는 역사적 사건들의 열거가 가지는 시적 기능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 당시와 막 지나간 과거에 대한 암시들은 당대의 사람들보다 우리를 더 깊이 감동시킨다. 그리고 같은 작품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은 역사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에게서 시편은 포기의 경험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격함의 경험이다.
젊은이들은, 마치 예감하고 있지만 판독하기 어려운 어떤 것, 즉 사랑, 영웅적 행위 혹은 가능성의 면모를 오직 시편에서만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듯, 자신들의 감정을 파악하고 표현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미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화해는 '아난다ananda' 혹은 하나(一) 속에 노니는 쾌락이다. 틀림없이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그러한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언젠가 찰나의 순간에 이와 비슷한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이러한 느낌을 확실히 만져보기 위해서 신비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동중정動中靜.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를 통하여 한 순간 충만한 생명을 엿보는 것처럼, 시편을 통하여 찰나적으로 멈추어 있는 시의 번갯불을 본다. 그 순간은 모든 순간을 포함한다. 흐름을 멈추지 않고 시간은 정지하며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찬다.
시적 창조와 마찬가지로, 시편의 경험도 역사 속에서 주어지며, 역사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부정한다. 독자는 헥토르와 함께 싸우며 죽고 *아르주나와 함께 회의하며 싸우고, 오디세우스와 함께 그가 태어난 바위를 찾아간다. 이미지를 소생시키고 직선적 시간 개념을 부정하고 시간을 역전시킨다. 시편은 중재 역할을 한다. 그 덕분에 시간의 시조始祖인 태초의 시간이 순간 속에 육화한다. 직선적 시간은 순수한 현재로 변화하는데, 순수한 현재란 쉬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하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시편을 읽는 것은 시적 창조와 거의 흡사하다. 시인은 이미지, 즉 시편을 창조하며 시편은 다시 독자를 통해 이미지, 즉 시로 태어난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각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대답을 시도하고 있다. 다른 모든 언설로 환원 불가능한 시적 언어, 즉 시편이란 것이 고유하게 존재하는가? 시편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적 언어들은 어떻게 소통하는가? 되풀이해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 책에서 모색되고 있는 어떤 것도 단순한 이론이나 사색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이 책이 구체적인 시편들과의 만남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다소간 논리적인 체계를 갖추려고 했으며, 그로 인해 이런 종류의 글들이 흔히 안고 있는 불신도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일 시를 공감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에 시와는 다른 요소들, 즉 철학, 도덕 그리고 기타 다른 것들이 끼여드는 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시론의 의심스러운 논리도 시편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에 의지할 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 역시 맞는 말이다. 설령 우리가 시편의 한 구절을 잊어버리고 그 말이 지닌 말과 뜻까지 날아가 버렸다 할지라도, 그 시편을 읽었을 때 높은 파도처럼 분출하여 직선적 시간이 쌓아놓은 둑을 붕괴시키는 그 충만했던 감정은 아직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시편은 순수한 시간에 도달하는 통로이며 실존의 생명수의 잠항潛航이다. 시는 끊임없이 창조하는 리듬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33
피안彼岸
이러한 교감을 통해 분배되면서 재창조되는 성체는 바로 이미지이다. 시는 참여를 통하여 존재하게 되는데, 그 참여란 다름 아닌 원초적 순간의 재창조이다. 이렇게 해서, 시에 대한 분석은 자연스럽게 '시적 체험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게 된다. 시의 리듬은 끊임없이 신화적 시간과 유사해지고, 이미지는 신비주의의 용어와 섞이며, 그리고 시적 참여는 마법적 연금술과 종교적 영성체 의식에 가까워진다. 이 모두는 우리로 하여금, 시적 작용이란 신성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케 만든다.
하지만, 원시적 의식 구조에서부터 유행, 정치적 광신, 심지어 범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신성한 형태를 지닌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정신분석학이나 역사주의라는 말만큼이나 남용된 '신성한'이란 개념이 지니는 의미의 다양함은 우리를 최악의 혼란 상태로 몰고갈 수 있다. 때문에 이 글이 의도하는 바는 신성의 개념으로 시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에 경계를 설정하고, 시란 단지 스스로에 의해서, 그 자체로만 이해될 수 있으며 다른 것으로는 환원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인류학은, 인간이 비정상적인 상태나 신경 쇠약에 빠지지 않고도 꿈과 상상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성의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마음속에는 지적인 호기심을 넘어서는 저 너머에 대한 짙은 향수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주술적, 종교적 제도와 신화에 대한 연구가 유행하는 것은, 원시 예술이나 무의식의 심리학 혹은 신비주의 전통에 대한 최근의 관심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이런 관심들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들은 부재不在에 대한 증거들이며, 그 부재에 대해 느끼는 지적 향수의 편린들이다.
이런 이유로, 내가 이 주제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할 때,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와 부닥치게 된다. 한편으로는 시와 종교는 같은 연원에서 솟아나온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인간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 본래의 의도로부터 시를 떼어놓는다면, 시는 하나의 무기력한 문학 형태로 전락하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시의 프로메테우스적 과업은 종교와 맞서 싸우는 것인데, 이러한 종교와의 교전交戰은 이 시대의 교회들이 우리들에게 제시하는 신성함에 대항하여 '새로운' 신성함을 창조하기 위한 현대시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프레이저Frazer는, 마법이란 '인간이 현실에 대해 취하는 가장 오래된 행동 양식'이며, 그로부터 과학과 종교 그리고 시가 파생되어 나왔다고 믿었다. 그리고 유사 과학이었던 마법이란,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보았다. 다른 한편, 레비-브롤Levy-Brujl은 마법을 참여에 근거한, 전前논리적인 개념으로 해석했다. "원시인은 자신이 경험하는 사물들을 논리적, 인과적으로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것들을 인과의 사실로도 보지 않고, 그렇다고 서로 무관한 것들로도 보지 않는다. 그들은 사물들을,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상호 관련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즉, 인간이 무엇을 만지면, 물론 그 옆에 있는 사물도 변하고 또한 인간 자신도 변화된다고 믿은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관점을 원시 사회 제도 연구에 적용시켜 보려했지만, 실효는 거두지 못했다. 융은 집단 무의식과 보편적 신화 원형론에 근거하여, 고대인의 행동 양식에 대한 심리적 설명을 시도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마도 인간이 자연에 던진 첫번째 거역(NO)인 근친상간에 대해 연구했다.
뒤메질Dumezil은 아리안족 신화를 연구하여 그들의 봄 축제(혹은 그의 책에서 시적으로 명명한 "불멸의 향연")에서 인도유럽어족들의 신화와 시의 원형을 발견했다. 카시러는 신화, 마법, 예슬 그리고 종교를 인간의 상징적 표현으로 간주했다. 말리노 보스키는 또한…… 하지만 계속해서 열거하자면 끝이 없고, 이 글은 새로운 관점이나 발견이 이루어질 때마다 수시로 변하는 그 넓은 세계를 다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전前논리적도 아니고, 그들의 마법 의식儀式 또한 전前종교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라칸돈 사회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일 뿐, 더 진화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는 문화가 어떻게 탄생하느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어떻게 사라지느냐 하는 것을 보여준다. 토인비가 지저한 바에 의하면, 에스키모 사회에서 그러한 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문명이 그대로 화석화되어버린 경우도 있다. 따라서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그 어떤 사회도(그것이 쇠락하는 것이든, 화석화된 것이든 간에) 진정으로 원시 사회라고 불릴 만한 것은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153-156
그것이 훨씬 깊은 차원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신경증의 발생과 신화의 발생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정신 분열증은 마법적 사고와 유사함을 보여준다. 심리학자 피아제에 의하면, 어린이들의 현실 세계는 우리들이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어린이들은 현상에 대한 이성적 설명과 환상적 설명 중에서 거의 틀림없이 후자를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프레이저 또한 현대인들 속에 지속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마법적 믿음에 대해 지적했다.
여기서 더 이상 예증을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논리적 합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참여 행위로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이 비단 시인, 광인狂人, 원시인, 어린이들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꿈을 꾸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혹은 직업적, 사회적, 정치적 행사에 참여할 때, 우리 대부분은 카시러가 말한 마법적 믿음의 연원을 구성하는 광범위한 '생명계society of life'에 참여하고, 그 일부분을 구성한다. 요기에는 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 그리고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원시적 사고방식'은 도처에서 목격된다. 이성에 의해 은폐되어 있거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거나 간에, 이 모든 현상들에게 '원시적'이라는 형용사를 부여하는 것은 옳자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고대인이나 어린이들만의 것 혹은 정신 이상 증세가 아니라, 모든 현대인들에게도 공통된 내재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153-157 어떤 사람들은, 의식儀式이나 제의의 주체가 원시인이나 정신병자처럼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성스러움을 자아내는 본질은 인간이 아니라 사회제도라고 본다. 여러 사회 제도가 모여서 구성하는 성스러움은 이미 하나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제의, 신화, 축제, 전설 등 '물질화'되었다고 적절히 표현된 그런 것들은 저기 우리 앞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대상화되고 사물화되어 있다. 위베르와 모스는, 신앙을 가진 자가 신성함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감격은 개인적인 특수한 범주의 경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존재이며, 사랑, 미움, 외경, 두려움, 배고픔, 목마름 등 인간의 본질은 언제나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변하는 것은 오직 사회 제도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견이 현실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다.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제도 및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 만일 신성함의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사회 제도가 진정 폐쇄되고 유일한 무엇을 구축한다면, 축제나 의식에 참여한 사람은 그곳에 참석하기 몇 시간 전 숲 속에서 사냥하거나 차를 운전하던 그때의 자기와는 무언가 다른 사람일 것이다.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과 동일할 수 없다.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시켜주는, 인간만의 존재 방식은 '변화'에 있다. 오르테가 이 가셋식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실체가 결여된, 비실체적인 존재이다.
확실히, 종교적 경험의 가장 특정적인 사실은 갑작스런 도약, 본성의 돌발적인 변화이다. 따라서 우리가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볼 때의 감정은 신격화된 호랑이를 볼 때의 감정과는 다르다. 또한 춘화春花를 볼 때의 감정과 티벳의 사원에 새겨진 남녀 교접상을 볼 때의 감정과 역시 서로 다르다. 158
2) 이 글이 씌어지고 난 후 10년 뒤, 『야생의 사고』(1962)가 출판되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중요한 저서에서 '원시적 사고 방식'이 현대인의 사고 방식 못지 않게 합리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169 국가 사이의 외교 규범은 가정 내에선 적용되기 어렵고, 반면 가족끼리의 규범은 국제 통상 세계엔 적용되지 못할 것이다. 각각의 영역 내에서 인간사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규범에 따라 처리된다. 따라서 성(聖)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속에서 성스러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선, 그 세계로 직접 들어가보는 수밖에 없다.
이런 인간 탄생의 신비적 체험을 재현하는 것이 각종 제의들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가장 중요하고 심오한 행위는 다름 아닌, 새 생명이 태아로서는 죽고 이 세상에는 살아서 탄생하는 그 일을 반복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피안'의 경험인 '치명적 도약'은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로서,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피안은 바로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 밖으로 끌어내는 커다란 바람에 자신이 떠밀리는 것을 느낀다. 그 힘은 우리를 우리 밖으로 밀어내면서, 동시에 우리 속으로 끌어당긴다. 바람의 비유는 모든 문화권의 종교 경전 속에서 되풀이되어 사용된다. 인간은 마치 나무처럼 뿌리뽑혀서 저 너머 피안으로, 자신과의 만남으로 떠밀려간다.
여기서 또 다른 특이함이 드러난다. 즉, 자신의 의지는 거의 개입되지 않거나, 아니면 매우 역설적으로 개입된다. 만일 거대한 바람에 한번 떠밀리면,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없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의례에 정성껏 참여하더라도, 외부의 힘이 개입되지 않으면 '도약의 경험'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시 창작의 순간과 똑같이, 자아의 의지는 어떤 다른 힘과 절묘하게 결합되는 것이다. 자유와 숙명은 인간 속에서 만난다. 스페인 희곡은 이 갈등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161
잠시 후, 뚜렷한 이유 없이, 그를 따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파울로가 본 모습은 단지 그의 외면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그 악한이 겉모습과는 달리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망설임 없이 신의 품에 자신을 맡길 거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작품의 말미에서 엔리코는 속죄하고 즉시 스스로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바친다. 그는 치명적 도약을 하고, 구원받는다. 고집이 센 파울로는 아주 다른 종류의 치명적 도약, 즉 지옥으로 떨어져버린다.
어떤 의미에선 자신의 내부로 전락했다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의심이 그의 내부를 공허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파울로의 죄는 무엇인가? 신학자인 작가 티르소에 의하면, 불신과 의심이 죄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만이 그의 죄였다. 그는 결코 신에게 자신을 내주지 않았다. 신성에 대한 그의 불신은 자신에 대한 과신으로, 즉 악마로 변한 것이다. 파울로는 귀담아들을 줄 모르는 죄를 저지른 것이다. 침묵으로 말하는 자는 신뿐이며, 악마는 언제나 달콤한 유혹의 말을 건넨다. 자신을 신에게 온전히 맡긴 엔리코는 죄의 무게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얻었으나, 자기 자신을 믿은 파울로는 파멸했다. 자유는 하나의 신비이다. 왜내하면 자유는 신의 은총이며, 인간은 신의 의지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162
다음날 아침 리사르다 아가씨는 그 남자가 성직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대 그녀 역시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다시 태어난다. 사랑의 순간에서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 넘어가는데, 그 긍정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젊은이의 사랑이 그녀를 외면해서, 악을 껴안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현기증이 둘을 삼켜버렸다. 그날 이후 그들의 행위는, 문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두 사람은 그 무엇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4) Mira de Mescua(1574~1644). 로페 데 베가 학파의 스페인 극작가로 종교극을 많이 썼다. 163
훔치고, 죽이고 마침내 리사르다의 부모까지 죽였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파울로와 엔리코의 경우처럼, 심리적인 설명이 필요없었다. 그 어두운 열정을 설명한 마땅한 이유는 없다. 자유롭게 동시에 무엇엔가 떠밀려 그들은 한 순간에 그들을 유혹하는 심연으로 전락한 것이다. 비록 그들의 행위는 스스로의 돌이킬 수 없는 순간적 결정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어떤 다른, 엉뚱한 힘에 이끌린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무엇엔가 홀려,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타인'이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서 떨어져 나옴으로써 가능하다. 그들 역시 엔리코와 파울로처럼 도약을 했다. 그것은 우리를 떠미는 힘이 우리 자신의 것인지 초자연적인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를 이 세계에서 벗어나 피안으로 건너가게 하는 행위이다.
숯불은 황홀하게 번져 나가고
케베도는 그의 소네트에서 교감comunion의 이중성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석쇠는 고문과 요리의 도구이며, 로렌초는 요리와 태양으로 이중적으로 변한다. 도덕적인 면에서도 이중성은 반복된다. 폭군의 승리는 패배가 되고, 로렌초의 패배는 승리가 된다. 어디서 고통이 끝나고, 어디서 쾌락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뒤섞일 뿐 아니라, 로렌초는 교감의 힘에 의해 폭군의 가해자가 되며 폭군은 그의 희생양이 된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모든 것은 성유(聖油)에 젖어 있다. 믿음의 순간, 그는 이 세계 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다. 이 세계는 실재이면서 실재가 아니다. 때때로 그 이중성은 유머스럽게 표현되기도 한다. 어느 스님이 운문(雲門)선사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선사는 "똥막대기"라 대답했다. 선(禪)수련자는 엉뚱하고 자칫 무의미한 대화로 보일 수 있는 그런 간화(看話) 수련을 통해 스스로를 부정하고 갑작스런 깨달음[頓悟]에 이른다. 168
그들처럼 앨리스도 스스로 놀라움을 느낀다. 하지만 대체 무엇 앞에서 놀라워하는가? 바로 자기 자신 앞에서, 스스로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즉 자기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그 무엇 앞에서 놀라는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이 자연―나무, 산, 석상과 목상, 나를 지켜보는 나 자신―은 평범한 현존(現存)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Otro의 거주지이다. 초자연적인 것의 체험은 곧 타자의 체험이다. 169
즉 '무시무시한 위엄'이다. 마지막으로, 그 위엄 있는 힘에 '빛나는 에너지'의 개념이 합쳐진다. 이렇게 살아 있고, 활동적이며,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개념이 세번째 요소로 등장한다. 한편 세 요소 중 나중의 두 개는 종교적 신성의 속성이며, 가공스러움의 본질이라기보다는 그 경험의 부차적 산물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그 둘을 배제하고 논의를 '우리를 전율케 하는 신비'로 집중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 무시무시한 신비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순간, 우리는 미지의 것 앞에서 느끼는 것이 늘상 공포와 두려움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쁨과 매혹 등 그 반대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타자성'을 경험할 때의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형태는 낯설음, 망연자실, 숨이 멈출 듯한 놀라움이다.
그 독일 철학자가 '신비mystetium'라는 용어를 그 체험의 '핵심적 개념'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도 그것을 인식하는 것 같다. 신비―'절대적인 접근 불가능'―는 바로 '타자성', 우리와는 무관하거나 낯선 무엇으로 나타나는 타자의 경험이다. 타자란 우리와는 달리,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존재이기도 한 무엇이다. 그의 출현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첫번째 감정은 망연자실이다. 또 초자연적인 것 앞에서의 막막함은, 공포나 두려움 혹은 기쁨이나 애정으로 나타나기보다는, 두려움으로 느껴진다. 6)오토Rodolfo Otto, 『성스러움Lo Santo』, Madrid, 1928(원주) 170
공포는 우리의 숨을 멎게 하고, 피를 얼어붙게 하며, 몸을 돌처럼 굳게 만든다. 기묘한 현현 앞에서 마비되는 현상은 무엇보다도 숨이 멎는 것같이 느낀다는 것이다. 즉 생명의 흐름인 호흡이 곤란하게 되는 것이다. 공포는 존재에 물음표를 붙인다.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공중에 띄운다. 우리는 무(無)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도 무다. 우주는 심연으로 변하고, 우리 앞에는 움직이지 않는 현현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입을 열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그냥 거기 있기만 한다. 현전하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욱 공포를 자아낸다.
싸움에서 물러서는 것은 그의 판두족(族)을 패배와 죽음으로 몰고갈 것이기 때문에, 결국 아군의 피가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르주나가 처한 입장은 안티고네의 입장과 유사하지만, 그 긴박함은 아르주나의 경우가 훨씬 더하다. 안티고네는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에서 고민한다. 국사범을 매장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만, 오빠를 땅에 묻어주지 않는 것은 인의(仁義)에 어긋난다.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권유하는 것은, 법이나 인의에 근거해서 결정을 내리라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 어느것도 아르주나의 갈등을 풀지 못한다. 마침내 모든 논리가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되자, 크리슈나는 본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신이 무서운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진정한 현현이 일어나면, 존재의 감춰진 모든 형태가 시각적으로 확연하고도 생생히 드러난다. 신의 출현 앞에서 화석처럼 굳어진 아르주나는 자기가 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172
『보들레르의 명시』, 세계출판사, 1944, 118쪽 174
나의 털을 곤두세우는 것이 나를 잡아끈다. 그 '타자'는 나다. 만일 '타자성'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가, 그 뿌리에서는, 이상하고 낯선 그것과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느낌에 이어져 있지 않다면, 두려움과 동시에 그것에 매혹을 느낀다는 감정은 설명될 길이 없을 것이다. 부동 속에서 전락하고, 전락하면서 상승한다. 나타남은 사라짐이고, 두려움은 저항할 수 없는 깊은 끌림이다. '타자'의 경험은 '일치'의 경험에서 정점에 달한다. 반대되는 두 운동은 합쳐진다. 뒷걸음질 속에는 이미 앞으로의 도약이 깃들여 있다. '타자'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우리가 떨어져 나온 무엇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중성이 그치고 우리는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치명적 도약을 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 자신과 화해한 것이다. 175
우리는 때때로 특별한 이유 없이, 혹은 흔히 쓰는 표현대로 '그냥',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제대로 볼 때가 있다. 그땐, 마치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세계는 우리에게 자신의 주름살과 심연을 보여준다. 무심한 흐름 속에 일상이 본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나름대로 일종의 현신(顯身)이나 출현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똑같은 거리와 정원을 지난다. 우리는 매일 오후 도시적 삶에 찌든 저 벽돌담과 눈이 마주친다. 갑자기, 아무 때나, 거리는 별세계가 되고, 정원은 막 창조되고, 피곤에 찌든 벽은 기호로 뒤덮인다. 언제 그것을 본 적이 있던가 하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너무나, 정말 압도적으로, 생생하다. 선명해진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게 진짜인지, 과거의 것이 진짜인지 의심하게 한다.
처음 본 것 같은 이것은 과거에도 분명히 여기 있었다. 우리가 이제야 처음 들어가본 그 세계에는 거리와 정원과 담벽이 들어가 있었다. 낯설음에 이어 그리움이 뒤따른다. 사물들이, 태초에서 오면서도 이제 방금 태어난 것 같은 빛에 세례받고, 모든 것이 변함없는 그곳을 우리는 기억해내고 돌아가고 싶어진다. 우리들도 그곳에서 왔다. 한 줄기 바람이 우리의 이마를 때린다. 우리는 마법에 걸려, 시간이 멈춘 오후 한가운데서 허공 중에 떠 있다. 우리는 저 너머에서 왔다는 것을 느낀다. 그곳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전생(前生)―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176
'타자'에 대해 낯설어하면서도 친숙하고, 거부하면서도 매혹되고, 도망가면서도 안기고 싶은마음은 우리 잣긴에 대해 느끼는 고독과 교감의 상태이다. 진실로 자신과 함께 홀로 있는 사람, 자신의 고독 속에 칩거하는 사람은 결코 홀로 있는 것이다. 진짜 고독이란 자신의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둘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둘이기 때문에, 모두 외로운 것이다. 낯선 자, 타자는 우리의 분신이다. 우리는 자꾸 그들을 붙잡으려 하고, 그들은 자꾸 도망간다. 얼굴도 없고 이름도 없지만, 항상 저기 웅크리고 있다. 매일 밤, 몇 시간 동안, 우리와 살며시 합친다. 매일 아침 우리는 헤어진다. 우리는, 그들의 부재이며, 빈틈인가? 그들은 하나의 이미지인가? 하지만 그들을 배가시키는 것은 거울이 아니라, 시간이다.
그들을 잊기 위해, 일상으로 도망치거나, 업무에 몰두하거나, 혹은 쾌락에 정신을 잃는 것은 소용없다. 타자는 언제나 부재한다. 부재하면서도 편재(偏在)한다. 우리 발밑에는 빈틈과 구멍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인 타자를 찾아, 넋을 잃고 고뇌하며 헤매인다. 하지만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없인 자기 자신에게 돌아갈 수 없다. 치명적 도약은 사랑, 이미지, 현현이다.
출처, 네블,인드라의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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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휘수(徽隋)의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