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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월매 프로필 : 필명 전하연 한국학 중앙연구원 국어국문학 박사졸업 |
현재 천진사범대학 교수 연변작가협회 회원 재한동포문인협회 평론분과 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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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2. 북방정서 3. 만주체험과 유랑의식 4. 결론
1. 서론
만주 ! 이는 고대로부터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외교, 영토 등 문제로 한국,중국,일본 삼국내지는 러시아, 영국, 독일 등 세계사적으로도 수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지역이다. 한국사에서 광활한 만주벌은 고구려 광개토왕과 장수왕시대가 100년을 걸쳐서 대제국의 흥성을 구가했던 곳이고 더욱이 발해(699~927)가 2세기이상 남쪽 대동강 유역으로부터 북만주의 너른 평원 즉 북쪽 흑룡강 중하류 일대, 우수리강 중하류 유역, 송화강 중하류 지방의 사방 5천리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을 통할하여 흥성했던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시기, 중국(청)은 서구 열강에 의해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는데 러시아가 여순과 대련을 조차한데 이어 독일은 산동반도를, 영국은 구룡반도와 위해위를, 프랑스는 광주만(廣州灣)을 조차하였다. 러시아의 만주점령은 공동으로 출병한 것 외에도 동청철도 보호라는 명목으로 별도로 대병력을 파견하여 만주 북부에서 남하하여 1900년 6월 하순부터 국경 지대를 넘어 7월 중순 훈춘․하얼빈을 점령한 후 계속 남진하였다. 1931년 일본은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한 후 1932년 3.1일 청나라의 말대 황제 부의(溥儀)를 내세워 괴뢰정권 “만주국”을 건립하고 1945년 8.15직전까지 옹근 14년간 잔혹한 식민통치를 실시하였다. 수도는 신경(新京)으로 오늘날의 장춘이다. 한국에서는 일명 ‘북방문학’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단순한 방위개념의 어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변화의 시류성과 의미확대의 복합성을 가진 용어이다. 즉 북방은 옛 조선의 넋이 살아 숨쉬고 조상들의 정신사적의미를 파헤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이토록 수많은 흥망성쇠를 겪어온 만주는 세계의 많은 작가와 시인들에 의해 묘사되어왔다. 더욱이 동아시아의 일본, 중국, 한국을 포함한 문학작품에서도 번번이 등장하는 테마이다. 그 속에는 한국시인 백석이 있다. 백석(본명 白夔行1912-1995)은 1930년 조선일보에 단편소설 <그 母와 아들>이 당선되어 이를 계기로 일본의 청산학원에 진학하여 1944년에 졸업하였으며 그 뒤에는 조선일보에 입사한다.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여 1936년에는 시집 《사슴》을 발표하게 된다. 이 해 4월부터 백석은 함흥 영생고보에 영어교사로 재직하면서 함흥에 거주하였다. 1939년 1월 서울에 올라와 조선일보에 재입사하여 여성지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1940년 1월 조선일보사를 다시 그만두고 만주로 옮겨간다. 백석은 구시가(舊市街) 동삼마로(東三馬路) 시영주택 35번지 황씨 집에 거처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만주생활을 시작하였다. 만주일대에서 그는 만주국 군무원 경제부에 잠시 근무하다가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등을 전전하며 고달픈 생활을 하였다. 45년 해방 후 고향 정주로 돌아오게 된다. 백석은 해방 후 계속 북한에 머물면서 아동문학에 힘쓰다가 1962년 이후로 몰락하게 되며 1995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현재까지 알려진 백석의 작품은 그의 시집인 《사슴》에 수록된 시 33편과 기타 산문과 잡지 등에 실린 시들을 합쳐 110여 편에 이른다. 그중 백석이 만주체류기에 발표한 작품으로는 시간적으로 <목구>, <수박씨, 호박씨>, <北方에서>, <許俊>,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촌에서 온 아이>, <燥塘에서>, <杜甫와 李白같이> 등이다. <목구>는 잡지편집의 관행으로 볼 때 만주 출발이전에 써서 잡지사로 넘긴 것으로 짐작된다. 만주에서의 그의 작품은 예전과 다른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본고에서는 위의 시편들과 더불어 만주로 가기직전 1939년 11월에 평안도 지방을 여행하며 쓴 <安東>과 더불어 <북신>이 포함된 <서행시초>시편들이 북방정서와 중국인의 정서를 반영하였기에 여기에 포함시킨다. 본고에서는 만주체험시를 중심으로 그의 시에 나타나는 북방정서와 이국체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2. 북방정서
북방대륙은 조선의 넋이 살아있는 곳이다. 만주 유이민들에게는 ‘길러준 어버이고 사랑하여 안어준 아내이자 육체의 한 부분’과 같은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운명적 존재이다. 북방에 관한 시편들 중에서도 백석의 <북방에서>는 역사적화자의 목소리로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북방정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득한 녯날에 나는 떠났다 扶餘를 肅愼을 渤海를 女眞을 遼를 金을, 興安嶺을 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익갈나무의 슬퍼하든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이 붙드든 말도 잊지않었다 오로촌의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딸어나와 울든것도 잊지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익이지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해ㅅ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녯날이 비릇하는때 이제는 참으로 익이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녯 한울로 땅으로-나의 胎盤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도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것은 사랑하는것은 우럴으는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北方에서-鄭玄雄에게>전문 (《문장》2권6호, 1940.7)
이 시는 백석의 북방시편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주목된다. 부제에서 보다싶이 이 시는 백석이 조선일보 재직시절의 동료이고 절친한 친구였으며 화가인 정현웅에게 편지글처럼 전달하는 대화체형식을 취하고 있다. 만주를 주된 공간으로 다루고 있는 이 시는 거침없는 시적어조와 웅대한 서사적 화폭으로 이채를 띤다. 흡사 민족적 자아를 대신한듯한 일인칭의 성찰적인 시적 페르소나를 통해 시간적으로 ‘아득한 녯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는 남진 이후의 세월, ‘새 녯날이 비릇하는 때’ 등 세 시기를 넘나든다. 여기서 ‘새 녯날’이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일제가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워 중일전쟁을 일으키던 시기이다. 이 작품을 쓸 무렵 백석이 일제가 세운 만주국의 수도 신경(지금의 장춘)에 머물렀었다는 것은 이러한 시점을 반영한 것이다. 제1연에 보이는 부여, 숙신, 발해, 여진, 요, 금 등은 북만주에서 흥망을 거듭했던 나라들이다. 이 나라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BC 1세기경부터 30년 동안 퉁구스계(系)의 부여족이 세운 부여는 고조선과 같은 시기에 지금의 북만주일대(송화강 유역의 평야지대)에 웅거한 부족국가였고, 일부의 부여인들은 계속 북옥저 즉 두만강유역에 머물면서 점차 자립하여 동부여국을 형성하였다. 동부여의 수도는 지금의 훈춘(琿春)이다.’ 부여는 만주 서북부에 있던 예맥족의 연맹왕국. 부여라는 이름은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 '부루'에서 왔다는 설과, 평야를 의미하는 '벌'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494년(문자왕 3) 고구려에 의해 완전 소멸하게 되었다. 숙신은 고대 중국의 북동방면에 거주한 이민족(異民族)으로서 고조선 시대에 만주 북동방면에서 수렵생활을 하였다. 고구려 서천왕(西川王) 때 일부가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며, 398년(광개토대왕 8) 완전히 병합되었다. 뒤에 일어난 읍루(挹婁)·말갈(靺鞨) 종족이 숙신의 후예이다. 여진은 동부 만주(滿洲)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이다. 여직(女直)이라고도 하는데 이 민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 한(漢)나라 때는 읍루(挹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수(隋) ·당(唐)나라 때는 말갈(靺鞨)로 불리었다. 10세기 초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이라 하여 명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나, 청나라 때는 만주족이라고 불렀다. 발해는 69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유장 대조영(大祚榮)이 세워 220여 년간 지속된 국가이다. 발해는 전성기에 대동강 이북에서 요하를 거쳐 흥안령 아래의 눈강하류 지역, 그리고 흑룡강을 거쳐 연해주 전체를 포함하면서 다시 남으로 내려와 원산 주변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졌다. 926년 거란군에게 패전하여 멸망하였다. 요는 거란족의 왕조(916~1125)로서 창시자는 동호계(東胡系) 유목민인 거란족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이다. 태조시대에 서쪽으로는 탕구트 ·위구르 등 제부족을 제압하여, 외몽골에서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하였고, 동쪽으로는 발해(渤海)를 멸망시켜 만주지역 전역을 장악하였다. 금은 퉁구스족(族) 계통의 여진족이 건립한 왕조(1115∼1234)이다. 창건자는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이다. 여진족은 본래 10세기 초 이후 거란족이 세운 요(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12세기 초 북만주 하얼빈(哈爾濱) 남동쪽의 안추후수이(按出虎水) 부근(지금의 松江省) 아청(阿城)에 있던 완안부의 세력이 커지자, 그 추장인 아구다가 요를 배반하고 자립하여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후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국력이 차차 쇠약해지자 이 틈을 타 여진족은 세력을 확장해 나가다가, 1616년(광해군 8) 여진의 추장 누루하치(奴兒哈赤)가 선양(瀋陽)에 후금(後金)을 세웠다. 이토록 ‘아득한 녯날’의 만주는 부여, 읍루와 옥저의 땅이던 데로부터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그 뒤에는 발해의 영토였던 것으로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느껴졌던 정서 깊은 곳이었다. 흥안령과 음산은 산맥을, 아무르와 숭가리는 흑룡강과 송화강이다. 송화강은 만주어로 ‘숭가리’라 하고, 흑룡강은 ‘아무르’라 한 것은 흥망을 거듭한 나라를 환기시키려는 의도적인 시어선택이다. 길짐승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물고기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떠났다고 제1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이 북만주 옛터에서 자연과 합일 속에서 평화롭게 살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자연은 나와서 자라고, 쇠약해져 사멸하며 그 안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성, 발전하는바 '그 자체 안에 운동의 원리를 가진 것'(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러기에 자연은 조금도 인간에게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생명적 자연의 일부로서 포괄되어 있다. 자연은 인간에게 대하여 이질적·대립적이 아니고 그것과 동질적으로 조화하고 신(神)마저도 거기에서는 자연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내재적이다. 자연과의 친화는 제2연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육지에서 자라는 자작나무와 이깔나무가 떠나는 것을 슬퍼하고 물가에서 자라는 갈대와 장풍이 붙들던 말도 잊지 않았음은 물론 흥안령 북구 소흥안령에 사는 북퉁구스계의 한 종족인 ‘오로촌’(Orochon족)과 남방퉁구스계통의 부족 ‘쏠론’등이 멧돌(멧돼지의 오자)를 잡아 장도를 축하하고 십리 길을 따라 나와 이별을 슬퍼하던 것을 잊지 않았다고 화자는 말한다. 자연과의 친화는 물론 이웃부족들과도 평화롭게 살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시적화자의 개인적 술회만이 아니라 민족공동체의 역사적 체험을 노래하고 있다. 백석이 발견한 민족의 공동체는 정을 나누며 살고 조상들의 전통을 이어받는 영원한 민족의 역사를 이어가는 공동체이다. 여러 종족들은 서로간의 투쟁과 대립보다는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관용함으로써 그리고 자연적인 사랑의 생명력을 서로 나누어주고 가짐으로써 평화스런 세계, 더욱 풍요롭고 강력해진 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이는 ‘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에 의해 나머지 모든 나라들이 종속적으로 되어 지배되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 여러 소국들이 자치적으로 연합하고 서로 조화시킨 연방제’를 보여준다. 이는 한국의 특유한 정치철학과 사상-축제적신시를 말하고 있다. 3연에서 보듯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이후 우리 조상들은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그 영토를 떠나왔다.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나왔’듯이 광활한 영토를 잃어버리고 앞대(평안도 이남)의 축소된 영토에서 ‘따사한 해ㅅ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자며’ ‘갈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룰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그러나 이런 삶은 평화롭고 안락한 것처럼 보이나 오욕과 위선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하여 밤에는 먼 개소리에도 놀라고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아부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몰랐던 삶을 뉘우친다. 남진하여 한반도 정착 후 민족의 역사를 간결하게 요약하였는데 이는 시인의 시적역량이다. ‘금은보화’가 쌓인 옛날의 화려한 역사는 온데간데 없고 ‘참으로 익이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지금은 다시 ‘녯 한울로 땅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해는 늙고 나의 조상과 형제와 이웃은 아무 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이토록 <북방에서>는 자연과의 합일점 더불어 여러 종족이 어울러 화합하는 축제적 신시의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축제적 신시의 의미는 그의 다른 시 <귀농>에서도 나타난다.
白狗屯의 눈녹이는 밭가운데 땅풀리는 밭가운데 촌부자 老王하고 같이 서서 밭최뚝에 즘부러진 땅버들의 버들개지 피어나는데서 볕은 장글장글 따사롭고 바람은 솔솔 보드라운데 나는 땅님자 老王한테 석상디기 밭은 얻는다
老王은 집에 말과 나귀며 오리에 닭도 우울거리고 고방엔 그득히 감자에 콩곡석도 들여 쌓이고 老王은 채매도 힘이들고 하루종일 百鈴鳥 소리나 들으려고 밭을 오늘 나한데 주는것이고 나는 이젠 귀치않은 測量도 文書도 실증이 나고 낮에는 마음놓고 낮잠도 한잠 자고싶어서 아전노릇을 그만두고 밭을 老王한테 얻는것이다
날은 챙챙 좋기도 좋은데 눈도 녹으며 술렁거리고 버들도 잎트며 수선거리고 저한쪽 마을에는 마돗에 닭개즘생도 들떠들고 또 아이어른 행길에 뜰악에 사람도 웅성웅성 흥성거려 나는 가슴이 이무슨흥에 벅차오며 이봄에는 이밭에 감자 강냉이 수박에 오이며 당콩에 마눌과 파도 심그리라 생각한다
수박이 열면 수박을 먹으며 팔며 감자가 앉으면 감자를 먹으며 팔며 까막까치나 두더쥐 돗벌기가 와서 먹으면 먹는대로 두어두고 도적이 조금 걷어가도 걷어가는대로 두어두고 아, 老王, 나는 이렇게 생각하노라 나는 老王을 보고 웃어말한다
이리하여 老王은 밭을 주어 마음이 한가하고 나는 밭을 얻어 마음이 편안하고 디퍽 디퍽 눈을 밟으며 터벅터벅 흙도 덮으며 사물사물 해볕은 목덜미에 간지로워서 老王은 팔장을 끼고 이랑을 걸어 나는 뒤짐을 지고 고랑을 걸어 밭을 나와 밭뚝을 돌아 도랑을 건너 행길을 돌아 집웅에 바람벽에 울바주에 볕살 쇠리쇠리한 마을을 가르치며 老王은 나귀를 타고 앞에 가고 나는 노새를 타고 뒤에 따르고 마을끝 虫王廟에 虫王을 찾어뵈려 가는길이다 土神廟에 土神도 찾어뵈려 가는길이다
-<歸農>전문 (《朝光》7권4호,1941.4)
이 글은 백석이 만주 신경의 근처에 있는 白狗屯에 살면서 쓴 시라 생각된다. 白狗屯의 원래 마을 이름은 白果屯이었는데 마을에 돈 있고 세력 있는 양씨사람이 이사 오면서 의도적으로 흰 개를 많이 키워 온 마을이 개울음소리로만 가득차게 함으로서 마을사람들에게 강박적으로 白果屯을 白狗屯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을사람들은 그 세력에 어쩔 수 없이 白狗屯으로 불렀으며 그 사람이 죽은 후에는 그 이름이 별로 좋지 않아서 新月屯이라 불렀다. 지금은 장춘시에 편입되었는바 위치상으로 청년로북부서쪽(青年路北部西侧) 환성공원근처(环城公路附近) 신월로서단(新月路西端)이다. 이 시기 백석은 “이젠 귀치않은 測量도 文書도 실증이 나서/낮에는 마음놓고 낮잠도 한잠 자고싶어서/아전노릇을 그만두고 밭을 老王한테 얻는것이다”에서 볼 수 있듯이 측량기사 노릇을 하다가 그것마저 집어치우고 老王이라는 중국인 촌부자로부터 땅을 얻어 농사를 짓는다. 그는 비로소 문서를 보면서 분주하게 지낼 때는 생각하기도 어렵던 편안함을 얻게 된다. 즉 근대적 표준화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측량 일을 하면서 정작 잃어버렸던 구체적 삶의 숨결을 귀농하여 농사일을 하면서 얻게 된 것이다. 그의 한가하고 편안한 생활과 더불어 그 속의 자연과 사람들도 그 주변 여건 속에서 합일하면서 나타나거나 살고 있는 모습 또한 흥겹고 벅차다. ‘날은 챙챙 좋기도 좋은데/ 눈도 녹으며 술렁거리고 버들도 잎트며 수선거리고/ 저한쪽 마을에는 마돗에 닭개즘생도 들떠들고/ 또 아이어른 행길에 뜰악에 사람도 웅성웅성 흥성거려/ 나는 가슴이 이무슨흥에 벅차’올라 봄빛처럼 따사롭고 해맑은 이미지를 준다. 그리고 시의 화자는 보잘것없는 소작인의 처지일망정 수박과 감자를 심고 게다가 까막까치나 두더지, 돝벌기(감자밭에서 뿌리나 줄기를 자르는 해충) 그리고 도적까지도 포옹하는 자연친화적 삶을 살겠다고 자신의 의지를 밝히고 있다. 더불어 땅주인인 노왕과의 관계도 매우 화애롭다. ‘눈녹이는 밭가운데 땅풀리는 밭가운데/ 촌부자 老王하고 같이 서서’ ‘아, 老王, 나는 이렇게 생각하노라/ 나는 老王을 보고 웃어말한다’ ‘老王은 팔장을 끼고 이랑을 걸어/ 나는 뒤짐을 지고 고랑을 걸어’ ‘老王은 나귀를 타고 앞에 가고/ 나는 노새를 타고 뒤에 따르고’ 지주와 소작인사이의 화해와 융합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시의 마지막 대목 ‘마을끝 蟲王廟에 蟲王’과 ‘土神廟에 土神’을 찾아 간다는 데서 고조된다. 벌레신, 땅의 신을 찾아 한해의 농사를 잘 짓게 해준데 대해 감사함을 표시하러 가는 길이다. 농부들은 예로부터 벌레까지도 왕으로 섬기고 또한 흙의 신을 숭배함으로 해서 사람과 흙과 모든 벌레까지도 서로 하나가 되어 살아왔던 것이다. 이는 땅을 일구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 그 대상과 일체가 되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비록 이국땅의 소작인 생활이지만 진실한 ‘귀농’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화자는 달관의 자세로 현실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근대의 도시화된 삶속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추상적 표준의 세계 속에서 헤매던 영혼이 이제야 비로소 자기가 거처할 공간을 찾게 된 셈이고 바로 이 상태가 백석이 지향하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3. 만주체험과 유랑의식 여행은 백석에게 있어 자아와 현실에 대한 성찰을 확장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자리 잡는다. 식민지 조국의 비참한 현실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연민을 유발해 그의 삶에 비극적 의미를 확인하게 하였다. 이것은 그가 동족의 고통과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동화시키면서 삶에 관한 통찰을 깊이 하게하고 시에서 면면히 흐르는 동족애의 애정, 현실에의 대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는 평안도 지방 기행시로 <서행시초>를 썼고 만주체류기에 아홉 편의 시를 남겼다. 백석의 시는 크게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삶과 현실의 삶으로 나누어진다, 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매개물이 바로 백석의 시에 빈번히 등장하고 있는 음식물이다. 토속적인 음식은 백석시에 다양하게 존재한다. <북관>,<국수>를 살펴보도록 한다.
明太창난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무이를 뷔여익힌것을 이 투박한 북관을 한없이 끼밀고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꿀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내음새속에 나는 가느슥히 女眞의 살내음새를 맡는다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속에선 깜아득히 新羅백성의 鄕愁도 맛본다.
- <北關> -咸州詩抄1 전문 (《조광》3권10호, 1937.10)
백석은 북관(함경도)을 떠돌며 명태창란젓을 먹으면서 음식 속에서 조상과 조국을 느끼고 있다. 이 음식물들은 단순히 허기를 떼우는 기능을 넘어 조국을 상징하고 있다. 백석은 음식을 먹으며 고향의 정취를 느끼는 동시에 여진이나 신라백성의 살내음과 향수를 맛본다, 음식이란 어머니가 물려준 조상의 맛이며 문화이다. 그 속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조상의 피가 섞여있다. 백석은 음식물을 통하여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자 의도하였고 그 의도는 시대를 뛰어넘어 현실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주체적 삶에의 희구가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를 느끼게 하는 것으로 개인사적인 의미를 떠나 민족사적인 의미망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아, 이 반가운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 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내음새 탄수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샅방 쩔쩔 끓는 아르굴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枯淡하고 素朴한것은 무엇인가 -<국수>전문 (《문장》3권4호, 1941.4)
국수라는 음식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내려오는 음식이다. 또 국수는 ‘으젓한 마음’을 가진 마을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음식이다. 그래서 국수는 ‘조용한 마을과 이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것이다’이고 ‘그지없이 담백하고 소박한것’이다. 국수는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우리 민족과 함께 남아있을 음식물인 것이다. 국수의 이미지를 통하여 조상과 후손의 긴밀한 연결과 민족역사의 영원성을 드러내고 있다. <두보와 이백같이>에서는 이국에서 고향의 풍속을 그리워하며 상실감을 자아낸다.‘나’는 '멀리 고향을 나서 남의 나라 쓸쓸한 객고에 있는 신세'인데 그 나라의 옛 시인인 두보나 이백도 ‘먼 타관에 나서 이 날을 맞은일이 있었을것’이라고 자신의 신세를 중국의 시인에 비겨 보면서 ‘오늘 고향에 내집에 있는다면’ ‘새옷을 입고 새신도 신고 떡과 고기도 억병 먹고 일가친척들과 서로 모여 즐거이 웃음으로 지날것’이라고 고향의 풍속을 회상하며 그리움에 빠진다. 또 외로움을 달래보려고 자신의 ‘한고향사람의 조고마한 가업집으로 ’가서 ‘ 그 맛스러운 떡국이라도 한그릇 사먹으리라’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네 조상들이 먼먼 녯날로부터 대대로 이날엔 으레히 그러하며 오’는 것이며 ‘먼 타관에 난 그 두보나 이백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날은 그어늬 한고향 사람의 주막이나 판관을 찾어가서 그 조상들이 대대로 하든 본대로 원소라는 떡을 입에 대며 스스로 마음을 느꾸어 위안’하였을 것이라고 자신의 외로움을 외로웠을 타인과 동일시하며 달래본다. 그들의 먼 훗 자손들도 그들의 본을 따서 이날에는 원소를 먹을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도 조상대대로 내려온 음식인 ‘떡국을 노코 아득하니 슬플것’이라고 자신의 처지를 쓸쓸한 어조로 토로한다.
異邦거리는 비오듯 안개가 나리는속에 안개가튼 비가 나리는속에
異邦거리는 콩기름 쪼리는 내음새속에 섭누에번디 삶는 내음새속에
異邦거리는 독기날 별으는 돌물네소리속에 되광대 켜는 되앙금소리속에
손톱을 시펄하니 길우고 기나긴 창꽈즈는 줄줄 끌고시펏다 饅頭꼭깔을 눌러쓰고 곰방대를 몰고가고시펏다 이왕이면 香내노픈 취향梨돌배 움퍽움퍽 씹으며 머리채 츠렁츠렁 발굽을차는 꾸냥과 가즈런히 雙馬車 몰아가고시펏다 -《安東》전문 (《조선일보》,1939.9.13
이 시는 백석이 만주로 가기직전 1939년 11월에 평안도 지방을 여행하며 쓴 <서행시초>제목 하에 발표한 일련의 시중의 하나이다. 안동(지금은 단동)은 신의주 맞은 편의 만주와의 국경도시로서 여기에서는 이방에서 느끼는 정취와 새로운 고향탐구의식이 엿보인다. 1연에서 시인은 이방거리의 자연환경을 시각적 이미지로서 잘 제시하고 있다. ‘안개가 비오듯’ 그리고 비오듯 안개가 내리는 이방거리의 자연환경을 시각적인 이미지로써 대구법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1연이 이방의 자연풍경이라면, 2연은 이방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체취와 삶 그 자체를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1연의 시각적 이미지 대신 2연에서는 후각과 청각적 이미지를 함께 결합시킴으로써 이방의 생활모습을 더욱 고조시킨다. 콩기름 쫄이는 내음새와 섶누에 번디를 삶는 냄새를 바로 후각을 통한 삶의 한 모습이고, 도끼날을 벼리는 돌물레소리와 되광대 켜는 되양금(중국 현악기)소리는 청각을 통한 만주족 사람들의 생활 그 자체의 소리이다. 시적 자아는 사람사는 냄새와 그들이 부대끼는 소리 속에서 떠나온 고향을 회상하게 되고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게 되며 나아가 이 공간이 고향이길 갈망한다. 하여 시퍼런 손톱을 기른, 중국식 긴 저고리를 입은 중국인으로 살며 중국아가씨와 쌍마차를 몰고 가는 꿈을 꿔본다. 시인의 소망은 바램일 뿐이지만 백석의 내면에는 더불어 살아가려는 공동체의식이 숨어있기도 하다. 이런 내면세계는 <조당에서>의 시에 더 한층 승화된다.
나는 支那나라사람들과 가치 묵욕을 한다 무슨 殷이며 商이며 越이며하는 나라사람들의 후손들과 가치 한물통안에 들어 목욕을 한다 서로 나라가 달은 사람인데 다들 쪽발가벗고 가치 물에 몸을 녹히고 있는것은 대대로 조상도 서로 모르고 말도 제각금 틀리고 먹고 입는것도 모도달은데 이렇게 발가들벗고 한물에 몸을 씿는것은 생각하면 쓸쓸한 일이다 이 딴나라사람들이 모두 니마들이 번번하니 넓고 눈은 컴컴하니 흐리고 그리고 길즛한 다리에 모두 민숭민숭 하니 다리털이 없는것이 이것이 나는 웨 작고 슬퍼지는 것일까 그런데 저기 나무판장에 반쯤 나가누어서 나주볓을 한없이 바라보며 혼자 무엇을 즐기는듯한 목이긴 사람은 陶淵明은 저러한 사람이였을것이고 또 여기 더운물에 뛰어들며 무슨 물새처럼 악악 소리를 질으는 삐삐 파리한 사람은 陽子라는 사람은 아모래도 이와같었을것만 같다 나는 시방 녯날 晋이라는 나라나 衛라는 나라에 와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맞나는것만 같다 이리하야 어쩐지 내마음은 갑자기 반가워지나 그러나 나는 조금 무서웁고 외로워진다 그런데 참으로 그 殷이며 商이며 越이며 衛며 晋이며하는나라사람들의 이후손들은 얼마나 마음이 한가하고 게으른가 더운물에 몸을 불키거나 때를 밀거나 하는것도 잊어벌이고 제 배꼽을 들여다 보거나 남의 낯을 처다보거나 하는것인데 이러면서 그 무슨 제비의 춤이라는 燕巢湯이 맛도있는것과 또 어늬바루 새악씨가 곱기도한것 같은것을 생각하는것일것인데 나는 이렇게 한가하고 게으르고 그러면서 목숨이라든가 인생이라든가 하는것을 정말 사랑할줄아는 그 오래고 깊은 마음들이 참으로 좋고 우럴어진다 그리나 나라가 서로 달은 사람들이 글세 어린 아이들도 아닌데 쪽발가벗고 있는것은 어쩐지 조금 우수웁기도하다
ㅡ<澡塘에서>전문 (《인문평론》3권3호,1941.4)
<조당에서>는 이국사람들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세상걱정없이 살아가는 삶을 상상하여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나사람들’은 ‘무슨 은이며 상이며 월이며 하는 나라 사람들의 후손들’이며 나아가 ‘참으로 그 은이며 상이며 월이며 위며 진이며 하는 나라 사람들의 이 후손들’이다. 이 가운데 어떤 이는 ‘도연명’과 같고 어떤이는 ‘양자’와 같다. 그들은 모두 비슷하지만 각자 조금씩 다르다. 나는 ‘이렇게 발가들 벗고 한물에 몸을 씻는’일에서 슬픔과 쓸쓸함을 느끼지만 이들의 조금씩 다른 모습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는것만 같다’고 느낀다. 그들은 때를 밀거나 물에 몸을 불리는 일을 잊고 ‘제 배꼽을 들여다보거나 남의 낯을 쳐다보거나’하는 한가하고 게으른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내 분주한 마음과 여유없는 육신과 대조되기에 나는 ‘조금 무서웁고 외로워진다’ 나는 이들이 ‘연소탕’이나 ‘어느 바루 새악시가 곱기도 한것 같은것’을 생각한다고 여긴다. 이들의 한가함과 게으름은 ‘목숨이라든가 인생이라든가 하는 것을 정말 사랑할줄 아는/그 오래고 깊은 마음’의 소산이었던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에게서 위로를 받고 ‘그 오래고 깊은 마음들이 참으로 좋고 우럴어진다’고 토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글쎄 어린 아이들도 아닌데 쪽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스꽝스럽다. 아니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한가하고 게으르다는 점에서 서로 웃어 보일 수 있다. 백석의 유랑의식에서 보여주는 슬픔과 외로움은 음식물이나 인물ㅍ통해 표현되며 인물들은 가난하고 선량한 모습인바 그 구체성을 잃지 않은 채로 오롯하게 나타난다. 백석은 당대의 주류에 휩쓸리지 않고 그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였다. 그는 우리 민족을 주체로 삼아 민족적인 것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