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57세.
생애 처음으로 외국여행을 갔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는 어린 날 지도찾기에서나 본 나라들이다. 특히 코펜하겐과 스톡홀롬이 가장찾기가 어려웠다. 꿈결 같이 아스라한 나라는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와 북극에 가까운 덴마크 식민지 그린랜드와 대영제국 위쪽의 아이슬랜드 그리고 우리나라의 격렬비열도나 마라도 아래의 꿈의 이어도가 그렇다. 그리고 가끔 못이룰 꿈들이 바싹 다가오다가 거품이 되기도 한다.
나는 평교사로 정년퇴임을 목표로 삼는 굽은등의 훈장이다.
젊은 한때 세상의 변혁에 투신하고자 했고 그렇게 움직였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빨 틈새가 벌어지고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고 언제부터였나, 고깃국과 따뜻한 구들장에 익숙해졌다. 벗들은 교장이나 교수가 되기도 했고, 더러는 대기업에서 사오정으로 팽을 당한 채 '조직의 쓴맛'에 빠지거나 ......일찌감치 하늘나라에 자리잡아 뭉게구름으로 바라보기도 한는데.....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있다. 어깨가 아파 칠판 꼭대기가 닿지 않으면서부터 ....학교에서의 대화가 대폭 줄었다. ....그래도 이국땅에서 한 열흘 정도 함께 지내다 보니 사람들과 친해졌고.
그 자리에는 여성동지가 80프로 이상을 차지했었다. 수수꽃다리 그미들이 꼭 편하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젊은 벗들은....사진을 찍을 때마다 친한 포즈를 잡았다. 길을 헤맬 때마다 그미들이 이정표로 화사하게 웃어줘서 서서히 옷깃이 스치는 게 자연스러워졌고 풍경이 나타날 때마다 틈새에 낄 수 있었다. 가장 자신있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노익장의 술자리였다.
'일어서라, 일어서라'
술로 다져진 기십 년의 몸이 빈 시간마다 옆구리를 쑤셔대면서 은근히 밤이 두려워지기도 했다.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느냐가 삶을 결정짓기도 한다. 스칸디나 반도의 왕족으로 태어나면 최상류층으로 살아가고 아프리카 사막의 움막에서 태어나면 밀림에서 적응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여자들은 더 약자다. 히잡을 두른 중동여인이나 동유럽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출장나온 걸인들을 보며 울컥 올라오기도 했다.
2004년 올림픽 때였던가. 아프카니스탄에서 출전한 단거리 여자 선수는 추리닝을 입고 달렸다. 100미터 14초의 기록이었는데(여학교 대표 정도의 실력) 당연히 꼴찌였고 여자는 펑펑 울었다.
'행복해요'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고 군중들 앞에서 달렸어요.
그미에게 히잡은 선택일까, 억압일까.
위의 사진은 춤을 추라고 떠밀려서 일어선 꺼부정한 포스...누군가 머풀러를 동여주었다. 노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파트너인 안나영 선생이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풍경을 보고싶었는데 쉬임없이 율동과 노래의 분위기로 가고 있었다......가끔 코리아를 떠올리며 관념적 애국심을 키우기도 했다.
젊은 날 나는 몇 가지를 포기하려고 했다. 외국여행을 가지않는 거고, 핸드폰을 구입하지 않는 거고 운전면허증을 갖지 않겠다는 거였다. 그 바람에 항상 남의 신세만 졌고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두 가지는 깨졌고 지금은 승용차 면허증만 없다. (이것은 결단이 아닌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이루지 못할 것이다.)그래도 젊은 동지들은 명랑쾌활했고 노래와 춤에 익숙한 지식인들이었다. 열심히 사진을 찍어줬고 밀짚모자도 씌워주며 놀아주어서 나는 점차 마음이 편안해졌고 동굴 속에서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노르웨이 백야의 호텔에서 '짝지어 달리는 게임'(나는 이런 걸 아주 못한다)을 하다 의자도 부쉈다. 의자와 내가 동시에 넘어졌는데, 나는 기우뚱대며 일어섰고 의자는 다리가 절단되었다. 부숴진 의자는 나무 밑에 밀어넣었는데 고요히 침묵을 지켜줘서 나는 꽁꽁 숨기기로 마음먹었는데.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나를 도와줬다.(학교에서처럼....도우미가 없으면 불쌍하게 헤매는) 나는 카메라가 없었는데 남들은 마치 사진찍기 경연대회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밤마다 소주 맥주로 뱃속에 불을 질렀다. 북유럽은 술집을 거의 찾을 수 없었으므로 ..... 동행인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술추렴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아예 내 숙소가 술집이 되었다. 동행인들의 배낭속에서 소주팩이 꾸역꾸역 기어나왔고 면세품 맥주를 안주 없이 잘도 마셨다. .....그 나라 술을 마셔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나중에 생겼다,
우종정 선생이 아침마다 화장발을 세워주었다. 바르고 찍고 머리카락에 뭐를 뿌리기도 한 기록들이 이제 추억이 되었다. 가끔
"선생님 부서진 의자 어떻게 하지요."
해서 폭싹 주저앉고 싶기도 했다. 오래된 나무의자였는데 조악했고 원래 쬐끔씩 삐끄덕거렸던 거다, 라고 위안했다.
의자는, 씨앗에서 나무로 성장했다가 벌목꾼의 전기톱에 베어졌다가 목수의 못질로 가구가 되었다, 고 속삭였다.
다리가 절단된 그녀는.... 이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씨앗을 움트게 하는 자양분이 되리라, 라고 '대자연의 법칙'을 오버랩시켰으나.....솔직히, 미안하다. 사랑한다.
20분전에는 꽃이 피어있었는데 금세 눈밭이다. 북유럽은 그랬다. 먹고 살만한 나라여서 행복할 것 같으나 일년 내내 날이 흐려서인지 우울증 환자가 많다고 했다.산꼭대기는 만년설이고 바닥에는 아름다운 꽃이 지천이었다. 민들레(추운 나라여서 '봄의 꽃'이 가장 생존력이 강했으리라.)는 우리나라 꽃보다 훨씬 컸고 루피꽃이 지천이었다.
'꺾어 주세요'
천사표 여교사의 부탁으로 루피의 목을 잡았다. 루피는 다리가 없었으므로 도망칠 수 없었고 팔이 없었으므로 막을 수도 없었다. 오로지 인대에 힘을 주고 꺾이지 않으려고 바둥거렸다. 모가지를 잡아당기자 '아아악' 비명이 터졌던 것 같다.
북대서양에서는 그 배경으로 소주를 마시고 싶었다. 마찬가지다. 꽃밭에서도 주안상을 떠올렸고 빙하나 크루져배 후미에서도 그랬다. 저기다가 물개고기 몇 점에 소주 두어 병 쪼개면 딱인데.....저 루피꽃 벌판에 앉아 통닭과 소주를 들이키면 정말 죽여주는 풍경인데......행복한 몽상으로 입맛 다시며 ......우리나라의 여관급 정도의 호텔이 몇십만원씩 하기 때문에 그 나라 사람들은 호텔에 머무는 경우가 드물다고 했다. 그 대신 산장이나 별장 캠핑카를 이용란다고 했고 .....길거리에는 간판도 없었고 우리나라처럼 수십층 빌딩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스웨덴에서 거리의 쓰레기를 보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예전에 내 친구 망자가 된 시인 윤중호가 그랬다. '사람 사는 데는 담배꽁초도 있으야 혀. 잉.' 그래서 북유럽에 내 꽁초의 흔적을 남기디도 했다.
북유럽은 백야현상이 강하게서 밤 10시가 넘어서도 대낮처럼 환했다. 반대로 1년에 몇 달은 흑야현상으로 '밤 같은 대낮'이 일어난다고 한다. 날이 저물지 않아서 술을 더 많이 마셨고 또 아침에 일찍 일어난 것 같다. 화장발의 아침이 되면 여교사들이 '아, 얼굴이 하얘지셨어요.'라고 칭찬해줘서, 나를 설레게 했다.
그런디 하얘지면 뭣헌뎌?
언제부터였나, 고스톱, 당구, 수영, 기타, 바둑까지 모두 잃어버렸다. 취미는 가사일과 술마시기였다. 집안 청소는 열성적이지 않지만 아주 지저분한 건 견디기 힘들어서 가끔 걸레질도 한다. 술은 상위 10프로 수준.....어느 학교를 가든 나보다 강한 교사가 한 명 정도 있었던 것같다. 밤 한 시에 이제 그만 집에 가겠다고 사정도 했다.
사진은 노르웨이 어디쯤에서 노재경 선생이 포착한 나의 관음증 현장
주름살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생겼다. 청년시절에는 장발의 앞머리로 가리고 다녔는데...머리카락이 빠지면서 정체가 드러냈다. 25년지기 최은숙 시인(그미의 글에서는 풀꽃 냄새가 나지만....내 방의 회식자리에서 몰래 캔맥주 두 개를 잠바에 숨겨가다가 우종정 선생한테 들켜서 "선생님, 맥주 놓고 가시죠" 하는 바람에 저녁노을처럼 새빨개졌다)의 밀짚모자를 빌려쓰니 얼굴이 조금은 살아나는 것 같았다. 맨 왼쪽은 천사표 박선숙 선생님(불룩한 부분은 뱃살이 아니라 배낭 색깔이 옷색깔과 똑같아서 그런 거고).....효도관광처럼 '15분 뒤에 모입니다' '30분 뒤에 모이세요' 연신 발목을 잡아당겼다.
모가지가 잘라진 루피는 불과 한 시간 뒤에 파리하게 시들었으므로 이제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꽃'이 될 것 같다. 그 꽃을 피우기 위해 캄캄한 흙속에서 뿌리털 내리며 혼신으로 자양분을 빨아올렸을 것이다. 북유럽 눈보라에서는 움츠렸다가 햇살이 보니는 순간 엽록소를 품어내먼서 꽃을 피웠을 것이다. 앞으로는 들꽃을 꺾지 않을 것 같지만 그도 이제는 과거가 되었다.
지금 나는 날마다의 순간이 인생의 가장 젊은 찰나일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중이다. 현재는 순간이고 과거는 영원한 것일까. 우리들의 인연은 은유일까, 리얼 동영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