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李씨 덕천군(德泉君) [1397(태조 6)∼1465(세조 11)] 덕천군의 휘는 후생(厚生)이고 시호는 적덕(積德)이다. 정종대왕의 10남이며 모후는 성빈 충주지씨이다. 일찍이 성빈이 흰 기린 꿈을 꾸고 공을 낳았으며, 선천적으로 효도롭고 우애로웠으며 인후함이 과인하여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형제들과 나누곤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특별히 사랑하여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 7세에 정성(定省)의 예절을 다하였고, 천성이 문묵을 좋아하였으며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에 수(守)를 배수(拜受)하였는데 종친들의 사회(射會)에 나아가 1등을 하였고 종학(宗學)에 가서도 성적이 가장 우수하였다. 따라서 후에 봉군(封君)할 때 태종대왕은 “아무개는 인덕이 출천(出天)하고 모후가 지씨이니 연못에는 맑은 샘물이 있고 샘물에는 물이 마르지 않아 그 물이 곧 복의 물이다. 그러니 `덕천'으로 군호(君號)를 지으라”하고 `덕천군'이라고 석자를 써 주었다. 태종대왕 때 공이 총관으로 임금을 모시고 조회에 참석하였다가 퇴근하려 할 때였다. 임금이 명하기를 모빈(某嬪)의 아들 첫돌이라 간단한 잔치를 베풀려고 하니 음식을 들고 가라”하므로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이 공을 곁에 앉게 하고 수저를 들었는데 갑자기 상을 물리치면서 “음식에 벌레가 있다.”라고 호령을 하며 진노하였다. 그리하여 “음식 만든 자를 처벌하라.”고 하니 궁녀 30명과 음식을 올린 사람 40명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누구도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데 공이 홀로 계단으로 내려가 엎드려 울며 말하기를, “신 이 자세히 보니 그 벌레는 곡식의 벌레로서 독물이 아니오니 인명에는 해롭지 않습니다. 그들을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렇게 공이 간청하였으므로 임금은 그 말을 받아들여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었다. 공은 항상 검약하고 사치를 멀리하여서 봉록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도와주곤 하였다. 공이 일찍이 누이 덕천옹주(德川翁主) 댁에서 누이의 병을 간호할 때에 10여 명의 도둑이 담을 넘어 들어와 곳간을 뒤지다가 창고지기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공은 그때 도적들을 불러 상세한 연유를 물어보고 필요한 만큼 돈을 꾸어주었다. 공은 비록 귀한 왕자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농사에도 힘을 써서 공주에 전장(田莊)을 두고 때때로 내려가 몸소 노동 일을 하였다. 어느 해 여름에 장마가 져서 금강이 넘쳐 수백호가 떠내려가 남녀 수백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공은 가산을 털어 이재 민을 구제하니 이때부터 공을 `적덕공(積德公)'이라 하게 되었다. 공은 1397년(태조 6)에 태어나서 1465년(세조 11) 11월 10일 별세하였으며 경기도 광주군의 남한산성 서문 밖에 장례지냈다. 묘역이 일제시대에 군용지로 편입되어 부득이 1974년 8월 9일 충남 공주시 의당면 태산리 문중묘역 국내로 면봉하였다. 1872년(고종 9)에 광록대부 영종정경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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