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에서 보낸 한生
윤인자
우리집 뒤에는 자그마한 과수원이 있다.우리 내외가 짓는 배농사의 현장이다.이곳은 일터이기도 하고,놀이터이기도 하다.날마다 바라보면 지겹기도 할테지만,그러나 그날그날 달라지는 모습에 즐거워한다.마치 꽃밭에 심은 화초들이 움을 틔우고,꽃을 피우고,열매를 맺는 것을 지켜보는 것처럼 그 미세한 변화를 지켜보는 일이 행복하다.삶도 그러하지 않을까?하루하루 일상이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지나고 나면 흘러가는 강물처럼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날그날 다른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늘 새로운 것들이 곁에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낀다.
세상의 이치는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듯이 기승전결의 법칙에 의해 변화하여 완성된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깨닫게 되었다.그래서 과수원 곁에 살면서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계절의 변화를 즐기며 살기로 하였다.봄이 오기 전,쌀쌀한 바람이 불어 앙상한 가지만 바람에 흔들려 아무것도 없는 배밭을 바라보며 나는 우윳빛처럼 뽀얀 배꽃을 떠올리고,무성한 푸르름이 한창인 여름날을 마음속으로 그려본다.그리고 탐스럽게 익어가는 열매와 그것을 수확하는 기쁨을 생각한다.
벌써2월이다.설이 내일모레여서 과수원은 아직 쌀쌀한 한기가 돈다.배나무 등걸을 만지면 나는 뜨거운 피가 도는 것을 알아차린다.나의 온기와 배나무의 숨결이 만나 우리는 하나가 된다.이제 웃자란 가지들을 쳐야한다.이 신성한 의식은 그동안 나태한 내 정신의 잔가지들을 전지가위로 자르는 행위이기도 하다.가지를 솎아내고 잔과를 솎아내어야 실한 열매가 맺듯이 나 또한 쓸데 없는 욕망의 웃자람을 솎아냄으로써 한 해의 시작인 세한에 스스로를 가다듬는다.
아무런 푸르름이 없어 도저히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 같은 한 해의 가장 추운 날 우리 내외는 배나무 밑동 주변에 퇴비를 준다.그래야만 장차 과수원에 꽃이 필 것이고 푸르름을 짓어 벌나비는 물론 새가 날아와 삶의 기쁨을 노래하리라는 것을 잘 안다.우리 내외 역시 비록 늙어가고 있지만 아직 다 맺지 못한 푸르름과 실한 과실의 결실을 준비하는 마음이어서 여간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농부가 불모의 땅에서 풍성한 수확을 얻는 일은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과수원을 바라보면 박화목 선생이 지은 동시에 곡을 붙인 「과수원길」이라는 동요가 입가에 떠돈다.요즘에는 우리 아이들이 동요를 잘 안불러 걱정이지만,한때는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하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즐겨 불렀다.황해도 출신 박화목 선생이 유년에 큰아버지댁의 과수원에서의 추억을 동시로 쓴 이 노래는 우리를 어린날의 동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매우 서정적인 동요이다.과수원을 일구면서 이 동요를 떠올림으로 해서 나는 열 살 안팎의 착하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된다.
뿐만 아니다.봄날 과수원이 환해지는 배꽃 피는 봄이 오면,우리 과수원은 무릉도원이라도 된 것처럼 환상적인 세상으로 변한다.달 밝은 밤이면 그 선경이 보통 가관이 아니다.내가 살았던 세속은 사라지고 선계가 된 듯 우리는 신선이라도 된 듯 마음이 착해진다.꽃밭으로 변해버린 과수원이 일으킨 기적이 아닐 수 없다.바람이 불면 지천으로 날리는 꽃잎들은 눈보라처럼 부드럽고 따스하다.
이렇듯 아름다운 풍경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우리 내외는 허리가 휘어지도록 과수원에 붙어 살다시피 온갖 수고로 배나무들을 돌보아야 한다.무성한 여름이 오고 따가운 햇살은 과일에 단맛으로 스며든다.인간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까지 우리가 볼 수 없는 그분의 손길이 섬세하게 어루만져 주신다.그러므로 우리는 과수원에 꽃이 피고 다디단 탐스러운 열매가 맺히는 것이 순전히 인간의 노력이 아님을 겸허하게 생각해야 한다.
또다시 과수원에 땡볕의 기운이 스러지고 낙엽이 질 것이다.그리고 마침내 한 해의 결실인,우리가 공들인 한 해의 노력이 풍성하여 오진 마음에 기쁨이 주렁주렁 열릴 것이다.이때쯤이면 온몸에 젖은 땀을 씻으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일이다.추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생의 희열을 마음껏 즐기리라.그리고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햇빛과 바람과 비에게,아니 태풍과 벼락에게도 고마움 마음을 드려야 할 것이다.그것들을 주관하는 그분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언어를 골라 경배드리는 것을 잊지 않으리라.
한때는 과수원에서 시화전을 열고 시낭송을 한 적이 있다.몹쓸 병에 걸린 누군가는 몸에 좋다는 하얀 민들레를 캐기도 하였다.봄나물을 캐던 때는 어린 소녀처럼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내 생의 봄·여름·가을이 한창이다.내 인생의 기승전(起承轉)도 결(結)을 향해 달려간다.내게 가장 먼 길이었고 가장 의미있는 동행이었던 과수원에 어느덧 황혼빛이 내리기 시작한다.평생 과수원지기의 몸에도 다디단 단맛이 스며들기를 기도하는 마음이다.
당선소감
세 권의 시집을 펴내는 과정에 시로써는 다 쓰지 못한 이야기,에세이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아 벼르고 벼르던 에세이를 쓰게 되었다.무모한 도전이라는 것을 알면서 나름대로 문장의 칼을 갈아온 지 오래,마침내 당선소식을 듣고 가슴이 벅차올랐다.그 동안의 글쓰기를 인정받았다는 안도감과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부족한 작품을 선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더불어 일생 동안 과수원을 일구었던 마음으로 《시와사람》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다시 한번 《시와사람》과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나의 첫 번째 독자인 사랑하는 남편과 다섯 남매 자녀들과 저를 기억하는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