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 시비 이전에 담긴 뜻
서범석(김종삼 시인 기념사업회 회장)
김종삼 시인의 시비를 옮기던 날 눈은, 일을 시작할 때부터 일이 끝날 때까지 펑펑 내려 사람들의 마음을 푸근함으로 채워 주었다. 서설은 서설이었다. 세상을 다 덮을 것 같이 내리던 눈은, 일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밝고 따뜻한 햇볕이 옮겨 놓은 시비를 쓰다듬어 주었다. 분명 일을 하는 동안 누군가의 뜻에 따라 상서로운 기운이 눈과 함께 찾아왔던 것이다. 2011년 12월 21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누군가 우리들에게 보낸 신호였다.
이 시비는 조각가 최옥영 교수(글씨는 박양재 서예가)의 작품으로 2개의 타원형 상빗돌과 하빗돌로 이뤄진 특이한 모양으로 일반 시비에 비해 작품성이 뛰어나다. 그런데 하빗돌에는 <민간인>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고, 상빗돌 뒤에는 <북치는 소년>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앞의 것은 분단문학 뒤의 것은 순수문학이라는 김종삼의 시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이 시비는 명륜동에서 <쇠죽가마>라는 카페를 운영하던 박중식(朴重湜) 시인이 앞장서 건립을 추진하여 김종삼 시인이 타계한 지 9년만인 1993년 12월에 세운 것이었다. 박 시인은 김종삼 시인을 지극히 흠모하고 김종삼의 시를 무척이나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는 김종삼 시인을 모델로 하여 <가을날>이라는 시를 써서 안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로 김종삼 시인을 짝사랑하였다. 그러던 1978년 어느 날 우연히 길음시장에서 지나가는 김종삼 시인을 알아보고 말을 건네며 그 시를 보여 주며 알게 되었는데, 그 후에도 우연히 같은 장소에서 서너 번 더 만나게 되었다니, 두 사람의 인연이 끊기 어려운 줄로 결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박 시인은 '김종삼 시비 건립 추진 본부'를 카페 2층에 마련하고 5년 동안 이 일을 추진하여 나갔다. 인사동 <돌> 갤러리에서 펼친 '고 김종삼 시인 시비건립을 위한 39인전'이 가장 핵심적인 사업이었다. 여기에는 김종삼 시인을 좋아하는 문인, 조각가, 화가 등이 참여하여 글씨, 그림, 조각품 등을 내어 놓고 이것들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구중서, 황명걸, 신경림, 김구용, 박두진, 이제하 등의 문인들은 물론 많은 조각가, 화가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이 참여하여 건립된 뜻 깊은 시비였던 것이다. 박 시인의 친구가 운영하는 신탄진의 석재공장에서 최옥영 조각가의 손에 의하여 시비는 만들어졌으나 이를 세울 만한 땅을 마련하기는 어려웠다.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당시 광릉수목원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던 시인 한 분이 수목원에 바로 붙어 있는 <수목원 가든>을 소개하여 김종삼 시비가 거기에 자리를 잡고 18년간 서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시비는 포천시 소흘읍에 있는 국립수목원 도로변 한 음식점의 정원에 세워져 수목원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세워지게 되었다. 어찌 보면 김종삼 시비가 포천 땅에 서게 된 것은 우연이었던 것이다. 아니다, 생전에 그의 작품 <시인학교>에서 꿈꾸던 김종삼 시인의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이 실현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국립 수목원 일대의 풍광이야말로 실재하지 않는 이상향으로서의 젖과 꿀의 땅 레바논 골짜기를 닮은 곳일지 모른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관리는 소홀해졌고 주변의 나무들이 시비를 가려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그 위치가 국립수목원 주차장 확장 부지에 포함되어 이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유족들은 여러 모로 이전 장소를 물색하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모시에 있는 모처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시비가 이전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질 것이라는 정보를 접수한 소흘읍주민자치위원회 문화여가분과장인 김산동 씨가 이 사실을 주민자치위원회(위원장 이제승)에 알림으로써 주민들은 타지로의 시비 이전을 저지하고 문화적 가치가 높은 김종삼 시비를 관내에 유치하는 데 함께 나섰던 것이다. 주민자치원회 이제승 위원장은 같은 지역에 있는 대진대학교 교수들에게 유족 설득에 힘을 보태 줄 것을 요청하고, 포천시청에 이전 경비 지원을 요청하는 등 적극적이고 재빠른 대처를 함으로써 결국 소흘읍 고모리 저수지 친수 공간 조성사업 부지에 있는 '축제의 장' 건립 부지로 이전하여 시비는 다시 포천 땅에 남게 되었다. 김종삼 시비가 우여곡절 끝에 포천 땅 소흘읍에 다시 남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의 결과일까.
타지로의 시비 이월을 막기 위하여 포천시민들은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한시적으로 '김종삼 시비 이전 추진위원회'의 성격을 겸하는 '김종삼 시인 기념 사업회'를 구성하여 활동하였던 것이다. 이 조직은 크게 두 줄기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시민 대표들이고 또 하나는 대진대학교 유관 교수들로 되어 있다. 전자에는 이제승(소흘읍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장) 공동대표를 비롯한 김재창(소흘읍주민자치위원회 자치기획분과장), 김산동(소흘읍주민자치위원회 문화여가분과장), 임관영(시인), 김자현(시인/소설가), 임승호(조각가), 박인준(고모3리 이장) 위원 등이다. 후자에는 서범석(시인/문학평론가) 공동대표를 비롯한 이병헌(문학평론가), 홍은택(시인), 양균원(시인), 심재휘(시인), 허훈(행정학과 교수), 한우정(영화감독) 위원 등이다. 그리고 권명옥(시인/전 세명대 교수) 공동대표도 유족을 대리하여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시민들의 자율적 문화 활동에 서장원 포천시장을 비롯한 신석철 포천부시장, 홍윤기 경제생활지원국장, 박진석 문화관광과장 등 포천시청 관계자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고모리로의 시비 이전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윤희철 대진대 교수, 조각가 최옥영 교수 등도 분에 넘치는 애정을 보태 주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들은 세차게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2011년 12월 21일에 시비 이전을 마쳤다. 그리고 눈을 맞으며 시비 앞에 주과포를 차려 놓고 간단한 기념의식을 가졌다. 일동 묵념에 이어 김종삼 시인의 부인 정귀례 여사와 둘째 사위 권영 씨가 헌주했고, 권명옥 교수는 김종삼 선생이 평소 즐기던 담배에 불을 붙여 비 앞에 놓았다. 주민 대표로 박인준 고모3리 이장이 헌화했고, 시비를 조각한 최옥영 교수도 헌주했다. 포천시청의 홍윤기 국장과 박진석 문화관광과장 등도 참석하였다. 그리고 다수의 포천지역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대진대학교 교수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함께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다른 지자체로 옮겨져야 할 운명에 있던 김종삼 시비는 이전에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소흘읍 고모리의 저수지 옆 '축제의 장'에 자리를 잡고 그의 고향이 있는 북쪽을 그리워하며 포천 땅에 다시 서 있게 되었다. 주변 조경 사업이 끝나면 정식으로 시비 이전 기념 제막식을 가질 예정으로 있지만, 이 시점에서 이러한 일련의 이전 경과를 보면서 그 숨겨진 의미를 생각해 본다.
김종삼 시인은 생전에 무신론자였지만, 시비 이전하는 날 내리던 함박눈은 하늘의 계시 같기만 했다. 박중식 시인의 말에 따르면, 홍수가 크게 났던 어느 해 여름 송추 율대리 공동묘지에 있는 김종삼 시인의 유택이 수해를 입어 이장을 하는데, 관을 여니 유해 위에 한 마리의 황금색 두꺼비가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이건 좀 비약하면 김종삼의 시 「두꺼비의 轢死」에 나왔던 그 두꺼비가 환생이라도 한 것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 도로에서 차에 치어 죽은 두꺼비를 애절한 눈으로 바라본 시혼이 그 두꺼비와 함께 지하에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또 박중식 시인이 경영하던 카페가 화재로 전소되던 날은 그의 시집 <집도 절도 주민등록증도 없이>가 발간된 날이었는데 보관하고 있던 모든 것이 타 버리고 새로 나온 그 시집도 불에 타고 남은 것은 재와 물에 젖어 못 쓰게 되었지만, 김종삼 육필원고등의 유품이 들어 있는 방만은 타지 않아 그대로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다행하면서도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놀라운 일이 시비 이전 며칠 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것은 김종삼 시비가 포천 땅에 오고 그리고 떠날 뻔했는데 다시 남게 된 사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필연이었단 말이다.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소년기에 학교를 다녔고,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청소년기 교육을 7년 동안 받다가 해방 후에 귀국하고, 1947년 월남하여 죽는 날까지 고향을 그리워하며 서울에서 가난하게 디아스포라의 노래를 부르며 살다간 김종삼이 가장 미워한 것은 전쟁이었으며, 가장 사랑한 것은 음악이었고, 가장 그리워한 것은 고향이었다. 앞의 둘은 김종삼 시세계를 분단문학이나 순수문학으로 만들어 준 동력이었고, 마지막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어머니에 대한 시편들을 남기는 원인이 되었을 것인데, 「어머니」라는 시에서 저 필연성을 찾아내게 된 것이다. '나는 속으로 치열하게 외친다/ 부인터 공동 묘지를 향하여/ 어머니 아직 나는 살아 있다고'라는 시구가 그것이다. 여기 나오는 부인터 공동묘지는 김종삼 시인의 양친 산소가 있는 곳인데 바로 포천시 소흘읍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불치의 지병으로 중태에 빠져서 더 살겠다는 의지를 어머니를 불러가며 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김종삼 시인이 최후로 그리워한 것은 어머니이며, 어머니가 계신 곳은 포천 땅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포천은 김종삼의 마지막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1993년에 부모님 묘소가 있는 부인터와 가까운 광릉수목원으로 시비가 찾아왔던 것이고, 옮겨야 할 처지가 되었을 때 다른 지방으로 가지 못하고 부모님 묘소로부터 직선거리로 불과 1.5㎞밖에 떨어지지 않은 고모리에 2011년 12월 시비가 다시 서 있게 된 것이란 말이다. 필연이었던 것이다.
순수한 영혼을 지향했던 시인 김종삼, 그러나 전쟁과 이산 그리고 가난의 고통 속에서 언제나 향수 속에 살던 그는 죽어서 마지막 고향으로 포천 땅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의 시비가 서 있었고 또 앞으로 영원히 서 있을 포천 땅은 산자수명의 아름다운 이상향으로서 김종삼 시인의 영혼을 포근히 언제까지나 감싸 줄 것이다. 포천과 더불어 그의 시문학의 예술성이 길게 멀리 눈부시게 빛나게 될 것이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부모님의 유택이 있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