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길에서 버스를 내리면 집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걸음을 허정거리게 하는 어석더석한 길이지만, 삶이 헛헛하면 꿈속에도 보이는 포근한 길이다.
삶의 힘듦을 감당하지 못해 간닥이는 걸음마저 감싸 안으면서 푸념까지 곱다시 받아주는 편안한 길, 이 길은 누군가를 막연히 기다리는 길이다.
동살이 잡히면 동네 사람이 들에 가거나 볼일을 보기 위해서 나가는 삶의 길이며 저물녘에는 하루를 힘들게 보낸 사람이 보금자리로 찾아드는 포근한 길이다.
인적이 끊긴 밤에는 소쩍새가 길을 가로질러 사냥을 나가고 뱀이 구불구불 기어가는 길, 들쥐가 분주히 오가고 고라니가 껑충껑충 뛰어가는 길이다.
이 길은 동네 사람의 삶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길바닥에 흘리고 간 달뜬 말이 갈 곳 몰라 서성이면 바람이 앞세워 몰고 간다.
길 위쪽은 산의 경사가 밋밋해 산 중턱까지 오밀조밀하게 밭이 개간되어 있다. 길 아래쪽에는 논이 펼쳐져 있다. 논두렁이 원만하게 이어져 그 유연함이 풍만한 여인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논두렁 밭두렁 모양에 따라 구불구불한 길은 달구지 하나가 다닐 정도로 좁지만, 채송화, 봉숭아, 코스모스와 백일홍이 군데군데 심어져 철 따라 꽃을 피운다. 곳곳이 파인 길은 높낮이가 고르지 않아 자갈이 발부리에 차인다. 파인 길에는 계절이 뚜렷한 잔흔을 남긴다. 봄에는 떨어진 꽃잎이 모여 한 송이 꽃이 핀다. 여름에는 곳곳에 물이 고인다. 농부가 꼴을 지고 가다 떨어뜨린 그 길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초록 섬이 된다. 가을에는 낙엽이 잠시 쉬었다 간다. 밤사이에 가을비가 내리면 낙엽이 착 달라붙어 길에는 그럴듯한 단풍그림이 그려진다. 그 그림에 고라니가 발로 낙관을 찍어 놓는다. 겨울에는 물이 고여 언다. 언 길은 먼지가 뒤덮여 얼음인지 맨땅인지 구별이 되지 않아 오가는 사람이 미끄러지기도 한다.
이 길에 동지섣달 고추바람이 몰아치면 동네 사람 발걸음도 뜸해진다. 길을 가는 사람도 느긋하게 논밭을 둘러보면서 걷는 게 아니라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앞만 보고 종종걸음을 친다. 바람이 제 몸을 할퀴고 지나가면 앙상한 자갈이 드러난 길은 몸서리치면서 봄을 기다린다. 논갈이로 흙이 뒤집힌 틈새로 서릿발이 햇빛에 반짝인다.
음력 이월 초하룻날은 영등할미가 이 길에 내려온다. 그날은 할미 제삿날이라서 지상에 나들이하는 날이다. 나들이할 때 딸이나 며느리 중에 하나를 데리고 오는데 딸을 데리고 오면 바람이 불고 며느리를 데리고 오면 비가 온다고 한다. 새 생명이 움 뜨는 시기에 바람보다는 비가 훨씬 낫기 때문에 농민들은 딸보다는 며느리를 데리고 오길 기다린다. 며느리를 데리고 오는 해에는 풍년이 든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이월 비바람에 흠씬 두들겨 맞았으니 길은 오늘이 어제같이 그대로 변함이 없다.
영등할미가 내려와 비바람으로 대지에 축복을 내리고 올라가면, 을씨년스럽던 바람 끝머리에 봄기운이 스며든다. 얼었다 녹은 질펀한 길에 봄기운이 살짝 깃든 바람이 밤사이 매만지고 지나가면 흙은 꾸덕꾸덕해진다. 아침부터 따뜻한 햇볕을 받으면 길은 보송보송해져 걷기가 편하다. 논밭에 연초록빛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나무 봉오리가 한층 부풀어 오르면, 길을 오가는 사람 발걸음도 느긋해진다. 오는 봄이 못마땅한 삭풍이 마지막 몸부림을 치면서 흙먼지를 몰고 온다. 길 가든 사람은 돌아서서 느긋한 마음으로 먼저 보낸다. 빛바랜 군복에 챙 없는 모자를 쓰고 양팔을 벌린 허수아비는 오래전 체통을 잃어 참새들 놀이터가 되었으나 어깨 위에는 아지랑이가 묻어난다.
보드랍고 따뜻한 바람에 소소리바람이 밀리면 이 길은 봄기운이 완연히 드러나 한결 생기가 살아난다. 나무와 논밭이 여린 연초록으로 뒤덮인다. 그러면 동네 사람의 발걸음과 마음이 바빠진다. 모를 심기 위해 물을 가둬 놓은 논에서는 개구리 알이 햇빛에 반짝이고 일찌감치 알에서 부화가 된 올챙이가 자맥질한다. 못자리에 여린 볏모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슷비슷하게 자란다. 이른 아침에 길 위에서 못자리를 보면 하얀 거미줄이 얼기설기 처져 있다. 거미줄과 볏모 끝에 보석처럼 달린 이슬방울이 햇빛에 반짝인다. 쓰레질하는 농부 종아리에 갈색 힘줄이 불끈 솟았다. 힘들게 일하는 소 주위에 염치없는 까치가 따라다니면서 먹잇감을 다투고 있다.
길 따라 흐르는 구불구불한 봇도랑에는 맑은 물이 넘치게 흐른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이 논으로 들어가는 틈새로 송사리 때가 무리를 지어 다닌다. 장구애비가 송사리를 물고 끼니 때우기에 푹 빠져 있다. 수면 곡예사 소금쟁이가 날렵하게 물 위를 걸어 다니고 등에 알을 잔뜩 진 물자라가 가라앉을 듯이 힘겹게 헤엄을 친다. 물방개가 물 위에 올라왔다가 꽁지에 공기 방울을 매달고 내려간다. 개구리도 통통하게 살이 오르는 여름에는 온 들녘이 갈맷빛으로 물든다.
논두렁에서는 개구리가 긴 기다림 끝에 벌레 한 마리를 넙죽 채어 단숨에 먹는다. 앞발로 눈을 쓱 씻고 입맛을 다시면서 고요 속으로 빠져든다. 밭 은밀한 곳에서는 뱀이 들쥐를 잡아 목구멍으로 들이밀 때마다 비늘이 꿈틀거린다. 잔잔히 불어오는 갈맷빛 바람에 자연의 법칙이 소리소문없이 벌어진다. 여유가 있는 날에는 왜가리가 한쪽 발을 들고 늠연히 서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사냥한 물고기를 긴 목으로 넘기는 광경을 볼 수 있는 길이다. 지게에 꼴을 가득 진 농부가 들녘을 바라보면서 풍년을 상상하면서 걸어가는 길이다.
기승을 부리든 더위가 제풀에 물러서면 아침저녁으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나뭇잎이 곱게 단장을 시작하면 구불구불한 이 길은 황금빛 물결로 넘실거린다. 메뚜기가 후드득 날고 참새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풍경을 보면서 아이들은 손으로 벼 이삭을 훑어 까먹으면서 가는 길이다. 지게에 벼를 잔뜩 진 농부의 힘찬 발걸음에 벼 이삭이 출렁인다. 낭창거리는 벼 이삭의 묵직함이 어깨에 와 닿아 온몸으로 풍년을 느끼는 길이다.
땀이 꼽꼽할 정도로 이 길을 따라 걸으면 초가지붕이 유연하게 맞닿은 동네가 나온다. 집집이 짙은 주황색 감이 가지가 찢어지도록 주렁주렁 달렸다. 마당에는 단풍잎보다 더 붉은 고추가 널려있다. 바싹 말린 고추 속에는 노란 고추씨가 나란히 누워 있다가 바람이 불면 달그락거린다. 그 맑은소리는 고향에서만 들을 수 있는 가을이 익어가는 소리다.
홍시가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땅에 떨어진다. 붉은 속살도 고향에서만 볼 수 있는 가을 색이다. 감 떨어지는 소리에 놀란 개는 하늘 보고 한바탕 짖어 댄다. 그곳에 어머니가 활짝 웃으시면서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겨주는 집이 있다.
집으로 가는 길, 그 길은 어머니 품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