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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도령과 호랑이
호정: 진용호
“오늘도 무사 하였구나 이것 마셔라.”
“예 어머니”
양(梁) 도령은 어머님이 건네준 좁쌀 막걸리 한 뚝배기를 벌꺽벌꺽 들이켰다.
아침에 좁쌀과 수수를 섞어 지은 밥에 무나물을 비벼서 한 그릇 먹은 후 뱃속에 들어가는 게 막걸리가 처음이었다.
오늘도 여늬때와 같이 질펀하게 펼쳐진 북(北) 제주(濟州) 조천동리 뒷산 완만한 산등성이를 몇 개나 넘고 달렸는지 모른다.
양 도령의 하는 일은 말(馬)을 길들이는 “말 조련사”였다.
제 맘대로 태어나서 아직까지 등어리에 사람을 태어 보지 못한 야생(野生) 말들을 길들이기를 20년 넘게 해온 것이다.
일곱 살 때부터 말과 가까이 하였으니 과히 말에 대해서는 달인(達人)이 되고도 남아 제주도에서는 “양 도령하면 말” ‘말하면 양 도령“을 연상했다.
그 행동의 민첩(敏捷)함이란 상상을 초월하여 산등성이에서 말과 같이 뛰면 말이 뒤처지는 형편이니 그의 달음질 솜씨는 과히 혀를 내 두를 만 하였다.
말(馬)이 태어나서 어지간히 나이가 들면 사람에게 순종(順從) 할 수 있게 하여 가축(家畜)으로써의 용도로 바뀔 수 있도록 길을 들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오늘도 한 마리의 말 등에 올라타서 능선과 계곡을 300여리 쯤 달린 것 같다.
양 도령이 평소 지니고 다니는 도구는 두자 반 길이의 물푸레나무 작대기(방망이)와 댓 발되는 길이의 삼으로 꼰 새끼로 만든 올가미가 전부다.
작대기 손잡이에는 구멍을 뚫어서 팔목에 들어갈 정도의 무명실로 겹겹이 꼬아서 만든 고리가 있어 항상 손목에 걸고 다닌다.
길 들일 말이 정해지면 우선 인자(仁慈)한 눈빛으로 접근하면서 “워 워” 작은 소리를 내며 잘 해 보자는 의미로 추파를 던진다.
그리하면 열에 아홉 마리는 머리를 하늘을 향하고 “휘-잉”소리를 지르며 뒷발질을 하고 달아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시작이다.
양 도령도 같이 뛰기 시작 한다 죽을힘을 다하여 같이 달리면서 거리를 좁히고 올가미를 휘익 던지면 백발백중 말의 모가지에 걸리게 마련이고 말이 놀라서 고개를 드는 반동에 의하여 줄을 당기면서 말 잔등에 사뿐이 귀신 같이 올라탄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을 태운 말이 얼마나 놀랄 것 인지는 짐작이 간다.
말이 죽어라고 달린다. 등어리의 사람을 떨어뜨리기 위하여 치닫고 내리박고 종횡으로 뛰고 날뛴다.
양 도령은 한손으로 갈퀴를 잡고 한손으로는 목에 감긴 줄을 잡아당겨서 숨을 못쉬게 조른다 그 과정을 바라보면 마치 곡마단 에서 말을 타는 곡예사의 몸놀림과 흡사하다.
나무 사이로 말이 달리면 배에 붙었다가 옆구리에 붙었다가 공중에 떴다가 섯다 앉았다 자유자재다.
이러기를 성깔 있는 놈은 한라산을 한 바퀴 도 더 도는 때도 있다.
양 도령이 한번 말에 올라타면 말이 지쳐서 멈추지 않는 한(限)은 절대로 땅에 내려서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 올 때는 그리도 억센 말도 순한 말이 되어서 제 발로 걸어온다.
저녁이 되면
저녁밥을 먹고 군불 집힌 따뜻한 방에서 천정을 보고 누워서 이제껏 꿈꿔 왔던 조선 팔도 유람의 내일을 상상해 본다.
양 도령은 열두 살 때인가 기억된다. 아버지 는 성이 고(高)씨이고 자기는 성이 양(梁)가 인 것이 궁금하여 어머니에게 여쭤 봤다.
머뭇머뭇하시며 쉽게 얘기를 하지 않아서 조르고 조르고 하였더니 들려 준 얘기는 자기가 천애 고아인 것을 알았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양 도령이 세 살 때 양 도령 아버지와 함께 우리 집에 왔는데 고향은 확실 하지는 않지만 함경도 어디라 하였으나 잊어 버렸고 아내와 자기, 아이 모두 셋이서 소작농을 하면서도 가난하나마 단란하게 살다가 아내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고 하였으며 아내가 죽고 나니 이웃 보기도 부끄럽고 살아 갈 의욕도 없어 무작정 고향을 떠나 어느 섬에라도 가서 숨어 살아 보겠다는 결심으로 부산포로 흘러와 섬으로 떠나는 풍선(風船)을 탔는데 몇 날을 배 멀미로 고생, 고생을 하다 내린 곳이 제주도 였단다.
제주도를 전전하다가 농사가 많은 이곳까지 와서 우리 집에 구걸하러 왔는데 껄대도 좋아서 힘깨나 쓸 것 같아서 우리 집 말 목장에서 일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러마고 하여서 함께 살게 되었으며 아이 이름은 집에서 “도령 도령”하였다기에 부르기도 쉽고 하여서 이제껏 도령이라고 부르며 아버지는 우리 집에 온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말(馬)을 다루다가 말 뒷발에 가슴을 채여서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고향이 함경도라는 말을 들은 후론 말 길들이는 이 일을 20년만 하고 육지에 나가서 조선 팔도를 돌아보고 함경도 땅을 밟아 보는 게 희망이었으며 이제 한 달만 있으면 그 시기였다.
그동안 집에서는 장가를 가라고 성화였지만 조선 팔도를 두루 돌아보고 와서 할 참으로 미뤄왔으며 장가 미천 및 팔도유람 경비로 쓸 돈을 한푼 두푼 모아 상당액이 되었다.
이웃집이나 이웃 마을의 말 목장(牧場)주들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말(馬)을 길들여주고 사례금으로 한푼 두푼 받아서 아는 사람들에게 빌려준 돈이 꽤 많은 액수가 되었다.
설도 지나고 2월 초순에 어머니 아버지에게 육지에 한번 다녀오는 게 소원이니 허락해 달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혹시 돌아오지 않을 가 싶어서 처음에는 허락을 안 하셨는데 돌아오면 장가도 들여 주고, 집도 마련 해 줄 것이며 윗 골에 있는 밭도 열 마지기(1000평)와 말도 댓 마리를 줄 터이니 꼭 돌아 올 약속을 하면 허락 하겠노라 하여 그러 마 하고 허락을 받아 놓았기에 육지에 가는 장선의 출발 일만 기다리면서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말이 만반의 준비라지만 입은 옷 외에 솜을 넣고 듬성듬성 누빈 쑥색 겨울옷 두벌 여름옷 세벌을 넣은 괴나리봇짐에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 윤기 나는 물푸레나무 작대기가 전부였다.
작대기는 만일의 경우 도둑이나 맹수들을 만났을 때 호신용으로 쓸 요량이었다.
드디어 출발일이다.
2월 보름날 돛을 올리고 양쪽에 세 명 씩 노를 저으며 파도를 갈랐다.
배의 선창에는 무슨 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마니와 짐 보따리가 가득하고 잘 생긴 말 (馬)도 몇 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서서 코를 벌름거리고 있었다.
배는 바람이 불면 바람에 맡기고 바람이 없는 날은 노를 저어서 갔다.
달이 밝아서 밤에도 항해를 계속하였는데 2월 밤 기온이 보통이 아니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추위가 더 엄습하여왔다.
추위도 이길 겸 지쳐 보이는 노꾼을 대신해서 노를 저으니 한결 몸이 따뜻하고 이마에 땀이 맺혀서 흘러 내렸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로써 잠간 휴식을 취하는 노 꾼이 고맙다고 수수떡을 선물하기에 맛있게 받아먹은 적도 있었다.
처음 닫은 곳이 추자도였고 두 번째로 거문도에 닻을 내리니 고등어가 대 풍어라며 반찬 해 먹으라면서 뱃전에 서너 소쿠리 퍼 담아 주었다 어촌 인심이 참으로 고마웠다.
지나며 정박(碇泊) 하는 포구(浦口) 마다 식수를 잔득 채우는 게 우선 이었다
소리도, 욕지도. 매물도, 그리고 거제도의 남단을 통과하고 가덕도를 지나니 부산포라 하였다.
부산포에 내리니 육지 맛이 났다. 우선 배가 고파서 음식점에 들려서 국밥 한 그릇을 시켰는데 나오는 음식을 보니 밥에 쌀이 꽤 썪여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명절 때나 먹을 수 있는 정도 였다.
무작정 물어물어 함경도가 있는 북쪽을 향하여 걷기로 하고 생소하지 않은 어촌을 찾아 가기로 했다.
부산포를 시발점으로 송정을 거쳐 기장에 가니 동네 사람들이 후리 그물로 멸치잡이가 한창이었다.
남정네들의 하는 일이라 후리 그물을 당겨주고 멸치 회를 곁들인 밥술도 얻어먹었다.
걸어보니 제주도에서 말을 한필 데리고 오는 것인데 그리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말(馬)과 대화(對話)도 하고 같이 걸으면 훨씬 수월 했을 텐데 . . . . . . .
고단하고 힘이 들면 주막에서 쉬어가고 비가 오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비를 피하겠다면 인심 좋게도 허락하여서 비를 피해 쉬엄쉬엄 간 것이 울산을 거쳐 영덕 강구 까지 반년이 더 걸렸다.
주막(酒幕)에서 사 먹는 음식이지만 부드러운 밥에 생선 반찬을 곁들려 먹은 탓으로 속 살이 오동통 찌고 매일을 걷다보니 건강 상태는 아주 양호하여 가고 있었다.
걷다가 길섶에 홀로 있는 벌초를 안 한 무덤을 보면 혹시나 어머니 묘인가 싶어 꼭 목례를 하고 지나치기도 하였다.
속초에 갔을 때는 이제 유람을 접고 이곳에 안주하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어떤 주막에선 중매를 들 터이니 장가를 들라고 권고(勸告)하는 곳도 있어 혼란을 겪기도 하였으나 제주도에서 떠나면서 먹은 마음은 어떻게 해서라도 고향 땅 함경도를 돌아보고 팔도 유람을 마친다는 각오(覺悟) 였기 에 변할 수가 없었고 또 마음속으로 보아 둔 짝사랑한 색시 감도 제주도 조천에 두고 온 터라 더욱 그랬다.
거진, 고성, 금강산 입구 해금강에 접어드니 어민들의 언어가 확 달랐다.
여기가 나의 고향 함경도구나 하고 생각하니 부모님 생각이 났다.
함경도 사투리에 억양이 좀 거칠어서 쉽게 접근(接近) 하기가 어려웠으며 남도사람을 경계하는 눈치도 보였다. 좀 반항적인 기질이었다.
청진에 갔을 때는 정어리가 풍어라서 집집의 마당과 담장에 정어리를 널고 걸어 놓아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사람들에게 조선의 끝이 어디쯤이냐고 물었더니 얼마가지 않으면 두만강이며 그 너머는 만주 땅이라 하였다.
마음으로 상상하던 고향 함경도지만 아는 사람 일가친척도 없으니 역시 타관 이었다.
이제는 발길을 남쪽으로 돌려서 백두산을 먼발치서 구경하고 올 요량으로 나진을 거쳐 회령의 어느 외딴 동리에 가서 주막을 찾았다.
산으로 둘러싸인 동리로 오십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었다.
주막에 들어가서 주인을 찾았다.
“ 주인 계십니까?”
“ 어디메서 왔슴메?”
“제주도에서 왔습니다.”
“그리 먼데서 뭔 일로 이렇게 다님메 ?”
꼬치꼬치 묻는 게 꼭 도둑놈 취급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지만 해도 떨어져 가고 배도 출출하여서 성깔을 누르며 사정을 했다.
“방이 있습니까?”
“있기는 있는데 오늘 저녁에 동리 청년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다고 예약을 해 놓았슴메.”
“날도 곧 저물어 갈 것 같으니 아랫목 발치에서 밤이나 새고 가게 해 주십시오. 밥값과 방값은 후(厚)하게 드리겠습니다.”
돈을 후하게 준다니까 군침이 도는 가 허락을 하였다.
저녁밥은 강냉이가 많이 들어간 잡곡밥과 반찬으로는 감자 졸임, 도라지, 더덕 무침 등 산채 나물이어서 향기가 그저 그만이었다.
저녁은 먹었겠다 이제 방에 들어가서 푹 쉬고 싶어서 방에 들어가니 방이 꽤 커 보이고 군불을 짚혀서 인지 구들장이 뜨끈뜨끈하였다.
손에는 작대기를 쥐고 괴나리 못짐을 베개 삼아 옆으로 약간 구부리고 누웠다.
밖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들리더니 장정들이 방으로 들어오면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앉아서 수군 거렸다.
자는척하면서 실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고 훔쳐보니 턱으로 나를 가르키면서 누구냐고 소근 댄다.
그 중 연장자가 하는 말이 “ 육모 방망이는 아니지만 손에 잡은 윤기 나는 방망이며 품세를 봐서는 아마도 무술 고수로써 암행어사를 호위하면서 관아의 폭정을 수집하고 민심의 동향을 살피는 포졸 같다.”고 하였다.
웃음이 밖으로 튀어 나오는 것을 안으로 삼키고 그들의 회의하는 것을 엿들었다.
옆에 타인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않은 듯 큰 소리로 회의는 계속되었다.
내일까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모레 중참 때 행동에 들어가는데 누구는 아래 동리와 연락책, 누구는 강냉이 대 묶음, 누구는 징, 누구는 괭가리, 등등 일일이 책임자를 지정하고 최대한 주민을 많이 동원하여 호랑이(범 또는 산신령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었음)를 고개 너머 20리 밖에 있는 두만강 건너편 만주로 쫒아 내는 작전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호랑이 라는 동물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 동민이 나서서 멀리 쫒아 낸 다는 게 가소로웠다.
옛날 어릴 적 동리 어른들로부터 얘긴즉 “ 호랑이 담배 피든 시절”“호랑이가 두레박 줄을 타고 하늘에 오르다 중간에서 떨어진 게 수수밭인데 피가 많이 흘러 수숫대에 묻어서 수숫대가 붉다”는 것 외는 들어 본 적도 눈으로 본적도 없었다.
듣다 듣다 궁금하여 견딜 수 가 없어 부시시 일어나 앉으며 말을 걸었다.
“ 실례 하겠습니다. 누워서 들으니 호랑이 라는 동물이 무서운 것인지는 짐작이 가는데 도대체 얼마나 덩치가 큰가요?”
“아 예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호랑이는 중송아지 보다 작지만 산 중의 왕이라 당할 사람, 당할 동물이 없습니다.”
“ 중송아지 만 하다고 요? 얼마 크지는 않은가 봐요 예상 밖입니다.”
“ 덩치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 호랑이가 해마다 우리 동네나 인근 동네의 송아지, 돼지, 염소를 물어가고 작년에는 우리 동네의 처녀를 잡아먹은 적도 있습니다.”
“몇 마리나 있습니까?”
“꼭 한 마리뿐 인데 그 놈이 그런 행패를 부립니다.”
“ 그래요? 내가 그 호랑이를 생포해서 끌어다 드릴 터이니 죽이던지 살리던지 마음대로 하시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 드리지요.”
“ 뭐라 구요?” 당신 정신이 온전 한기요? 호랑이가 어떤 영물인지 몰라서 그러지 알면 입도 뻥긋하지 못 할 거요.“
“ 사람을 해치고 가축을 물어가서 관아에서 현상금을 걸고 포수들에게 잡아오도록 하였으나 포수가 나타나면 100리 밖에서도 화약 냄새를 맡고 숨는 바람에 코빼기도 안 뵈고 산이 흔들거릴 정도의 포효 소리에 놀라 포수가 꽁무니를 뺀답니다.“
“ 긴 말 하기 싫은 사람이 외다. 생포 한다면 하는 거지 왜 그리 의심이 많소? 내가 요구 하는 것 만 주면 꼭 잡아 드리리다.”
요구라니 무슨 큰돈이나 요구 할 것인가 싶어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을 지난 후
“ 대체 그 요구가 뭐요? 알아나 봅시다.”
“요구라니까 무슨 큰 어려운 것인가 하고 상상하는 모양인데 별것 아니외다.”
“그래 뭔 기요?”
“ 내일 중으로 금년에 채취한 삼으로 손가락 세 개를 합한 굵기의 새끼를 튼튼하게 꼬아서 주십시오. 길이는 다섯 발 정도면 됩니다. 호랑이를 묶어야 할 것 아닙니까?“
좌중이 어안이 벙벙하여 키득키득 웃기만 하였다.
“ 자신이 있습니까? 정말로 호랭 일 잡을 수 있어요?”
“내일 모레 ”저놈이 호랑이다“ 하고 알려만 주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는 팔도를 다니면서 허튼말(言) 하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고단하여 좀 자야겠습니다.”
“ 우리가 밖에 나가서 우리끼리 의논을 좀 해야겠습니다. 결과는 좀 있다 알려 드리겠으니 잠간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참이나 있다가 연장자인 사람과 주막집 주인이 함께 방에 들어 왔다.
“ 참으로 고맙습니다. 우리의 원수(怨讐)인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니 대단하십니다. 주막집 주인에게 말씀 드려 놓았으니 오늘과 내일 모레까지 식대와 숙박비를 동네 회비로 지불하겠습니다. 마음 푹 놓으시고 쉬십시오. 그리고 주인어른 이분에게 최고로 맛있는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 해 주세요. 돈은 동네회비로 지급할 것입니다. ”
다들 돌아가고 난 후 양 도령은 가축을 물어 가고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 가 얼마나 무서운 동물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큰소리 친 것이 후회도 되며 잘못 하다가는 호랑이 에게 잡혀 먹힐 수 도 있겠다 싶으니 지나온 세월과 8도 유람에서 겪은 일들이 주마등 같이 떠오른다.
아버지 어머님께서 그렇게 장가들라고 성화 실 때 장가라도 들어서 아이라도 낳아 후손을 남겼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짝 사랑한 옥남이와 . . . .
옥남이는 여섯 살이나 아래인데 아버지는 배타고 나가서 어장일 하다가 풍랑을 만나 돌아가셔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해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억측인 처녀 였다.
옥남이 어머니는 옥남이가 육지에 붙은 섬인 거제도 지세포 선창 부락에 해녀 일로 1~2년 나가면 우리 집 에 와서 일을 거들며 품 싻 으로 감자. 수수, 좁쌀, 등을 받아 가셨다.
어머님은 옥남이 엄마의 손끝이 야물고 성실하여 그 엄마에 그 딸이라며 옥남이 에게 양 도령을 장가보내고 싶다는 말을 슬쩍 슬쩍 내 비치곤 하였으며 양도령도 같은 처지인고로 옥남이가 좋아서 짝사랑까지 하였다. 가만 볼라치면 옥남이도 양 도령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번 8도 유람 만 끝내고 돌아가면 꼭 결혼을 할 것이라고 맘먹고 있었다.
또 이번 유람에서 생긴 일로써
강원도에 들어와서 원덕을 거쳐 두 번째로 들른 삼척에서의 일이 눈물을 적신다.
오십천이 흐르는 강안의 절벽위에 아름답게 자리한 앞면 7칸 옆면 2칸 남쪽면은 3칸인 특이한 겹처마 단층 팔각지붕의 정자인 관동팔경 중 제일루인 죽서루에서 원님들과 양반 선비들이 시화전을 연답시고 많은 기생들의 노래와 춤을 즐기면서 왂자 지껄하기에 먼발치에서 나마 구경을 하려고 가까이 다가가다가 말(馬)의 외침 소리를 들었다.
소리 나는 곳을 돌아보니 말 7~8마리가 매여 있는 중 한마리가 앞발을 치 들고 뛰어 오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말(馬)목소리도 귀에 익었다.
가까이 가보니 2년 전에 말 장수에게 판 “길득”이었다.
길득이는 기르던 말이 길에서 새끼를 낳았다고 “길득”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양 도령이 무척이나 자식처럼 정성들여 기른 말로써 네 살을 먹기까지 한 몸처럼 아끼고 사랑한 말이 였는데 이 곳에서 만나다니 . . . .
먼저 알아보고 고함(?)을 질러 준 게 고마워서 달려가서 뺨을 비비고 콧등을 쓰다듬어 주니 옛 주인을 만나 기쁜지 코를 벌름거리며 좋아 한다.
이곳에서 길득이를 만나다니 돌아가신 어머님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부가 달려 왔다.
“당신 누군데 남의 말을 함부로 쓰다듬고 야단이오?”
“미안 합니다. 저는 제주도에서 온 양도령 이라는 사람인데 이 말은 내가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말인데 2년 전에 말 장수에게 판 게 여기서 나를 알 아 봅니다”
“ 아 그렇습니까? 이 말은 성질도 온순하고 날쌔서 우리 주인님께서도 특별히 아끼시는 말입니다.”
“잘 돌봐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헤어지기 싫어서 목을 껴안고 뺨을 비비고 코를 쓰다듬어 주면서 눈물을 흘려 보지만 어차피 끊어진 연(緣)이라 뒤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길득이도 헤어지기 싫은지 눈물을 주루륵 흘렸다. 얼마나 안타까울까 . . . . .
만약 길득이를 다시 팔겠다면 도로 사서 함께 살았으면 하고 맘먹기도 하였다.
속초에서 일어난 일이다.
몇 개의 마을에서 함께 모여 내일 운동회(?)를 한다고 야단이었다.
씨름, 줄다리기. 단거리 달리기, 장거리 달리기 . . 등이라고 하였으며 참가 자격은 별도로 정한 게 없어서 아무나 자신 있으면 참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막집 주인에게 장거리 달리기를 한번 해 보겠다고 귀 뜸을 하였더니 쌍수를 들고 환영 한다면서 만약 우승하면 우리 주막집 이름도 나고 좋은 일이라며 권하였다.
다음날 아침을 적당히 먹고 옷과 신발을 야무지게 챙겨 입고, 신고 출발선에 섰다.
등어리에 큼직한 도장을 찍어 주었다. 부정 선수를 방지 할 목적이라고 하였다.
자갈 길 왕복 사십리 였다. 앞에서 말을 탄 사람이 길을 안내 하였다.
뛰고 달리는 데는 남에게 뒤진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기에 초반부터 속도를 내었다.
처음에는 우루루 함께 달렸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저앉고 몇 사람 남지도 않았는데 그들도 까마득히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반환점에서 또 등에다 도장을 찍어 주었다.
돌아 오면서 보니 담배 두어 대 피울 정도의 거리에서 헉헉대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믿을 수 없다며 머리를 내 두를 정도로 빨리 결승점에 도착하였다.
빨리 올수록 상품이 많을 것 같아 힘껏 달렸기 때문이다. 단연 1등이었다.
주막집 주인은 흥이 나서 떠들고 야단이었다.
중매를 들 터이니 속초에서 함께 살자고 꼬시기도 하였다.
상품으로는 무쇠로 만든 큰 가마솥과 싸리 소쿠리 그리고 묏돼지 가죽으로 만든 겨울용 가죽신발 남녀 한 컬레 씩 이였다.
무쇠로 만든 큰 가마솥과 싸리 소쿠리는 주막집에 드리고 가죽신은 기념으로 여자용은 옥남이에게 선물하려고 괴나리봇짐에 간직하였다.
이런 저런 생각에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는가 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두고 온 제주도 꿈을 꾸면서 단잠을 자고 일어났다.
밖의 기온이 쌀쌀하였지만 수정같이 맑은 계곡 물로 세수를 하고 아침 운동으로 몸을 풀고 있는데 주막 주인이 식사하러 오시라고 데릴러 왔다.
어제의 주막 주인이 아니었다. 완전이 상전 대우를 하였다.
아침 밥상을 받고 보니 임금님의 수라상이다. 묏돼지 삼겹살구이며, 명란젓, 가자미식해 등 각종 산채나물 들이 열댓 가지가 넘었다.
“별로 차린 것은 없으나 맛있게 잡수시라”고 손을 비비며 굽신 거렸다.
아침을 맛있게 먹은 후 주인을 불렀다.
“ 예”라고 대답 하며 주인과 아주머니가 손을 비비고. 또 앞치마에 손을 감싸며 달려 왔다.
“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진지도 남기시고 얼마 자시지도 않았군요 죄송합니다.”하면서 머리를 연신 굽실거렸다. 말씨가 순 함경도는 아닌 것 같고 경상도 억양이 숨어 있는 것 같다.
“ 아닙니다. 산해진미라서 양껏 먹었습니다. 아주머니의 음식 솜씨가 대단하셔서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음식을 많이 먹질 않습니다. 이 음식이면 사흘도 더 먹을 수 있으니 반찬은 더 만들지 마시고 이것으로 될 수 있고, 점심은 오후 중참 때 막걸리 한 사발이면 됩니다. 저녁에는 밥 만 더운밥으로 내 오시면 만족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하루 두 끼를 먹는 게 습관이니 그리 아십시오.”
“아닙니다. 그러시면 이장님에게 꾸중 듣습니다. 잘 해 드리라고 심심 당부를 받았습니다.”
“ 먹는 내가 됐다면 된 것입니다. 아무 걱정 마시고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저는 음식을 많이 먹으면 몸이 무거워서 도리어 불편 해 집니다.”
“그래도 그렇지요 . . . . . . .”하면서 방을 나갔다.
양 도령은 내일 일을 생각하면서 가지고 온 의복 중 쑥색 누비옷을 꺼내서 손질을 하였다.
호랑이를 잡을 때 순순히 끌려오지는 않을게고 실랑이를 하면 나무에 걸려서 옷이 찢어 질 염려도 있으니 튼튼한 옷으로 입기로 마음먹었다.
정오쯤에 이장께서 손에 삼 새끼줄을 가지고 마당에 들어서니 주인이 먼저 보고 조르르 달려가서 귀속 말로 무슨 보고라도 하는가 싶었다.
“ 식사를 많이 하시지 않았다 구요? 내일 일이 걱정돼서 그랬습니까? 아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입니까?”
“ 아! 이장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걱정 마십시오 양껏 먹었습니다. 벌써 새끼줄을 만드셨습니까? 수고 하셨습니다. 이리 줘 보십시오.”
“ 여깃 습니다. 시키시는 대로 만들었는데 맘에 들 런 지 모르겠습니다.
양 도령은 새끼줄을 받아 들고 유심히 살펴 보드니 주인어른을 불렀다.
“ 헝겊이 있으면 좀 많이 내다 주십시오.”
주인은 급히 방으로 들어가서 낡은 헌 옷 몇 가지를 가지고 나왔다.
양 도령은 새끼줄을 마당에 있는 감나무와 기둥에 양쪽 끝을 묶고 헝겊으로 줄 전체를 빡빡 문질러서 보푸라기를 없애고 매끈매끈하게 만들었다.
이장과 주막 주인은 신기한 듯 보고만 있었다.
양 도령이 묶었던 줄을 풀어서 양쪽 끝에 8자 매듭을 하나씩 만들고 한 쪽 끝으로는 올가미를 만들었다. 손으로 힘껏 당겨 보고서는 이장님을 힐껏 보며 미소를 지으며 손을 멈추었다. 이장님이 예사 솜씨가 아니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우리 이렇게 만났으니 통성명이나 하십시다. 나는 이 동네 이장직을 맡고 있는 홍 삼식입니다.”
“ 저는 양 도령입니다. 팔도를 유람하고 다닙니다. 이장님께서 연세도 저 보다 훨씬 연배이시니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양 도령은 그 동안에 유람하며 익힌 넉살로 붙임성 있게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하였다.
이장님은 양 도령이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하니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었다.
“ 미천한 나를 형님이라고 하시니 영광입니다. 이름이 도령 이라고 하였는데 별명 입니까? 이름입니까? 도령 이라니 그러면 아직까지 총각입니까?”
이장님은 궁금한 게 많은지 여러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쏟아 냈다.
“ 별명이 아니고 이름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미혼이고 이태나 지나고 설흔이 되면 결혼을 할 예정입니다.”
“ 동생 ! 미혼이라니 좋은 색시에게 중매 들어야 겠네.”
이제 터 놓고 동생이라고 부른다. 20년이나 아래 니 그럴 만 도 하다.
이장님이 주인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시켰는지 급히 주인이 집 밖으로 나가드니 한참 만에 장년 세 명을 데리고 왔다.
“ 동생들 오늘 좋은 날이네 뜻 밖에 내 동생이 한사람 생겼다. 인사하게 내 동생 양 도령이야 잘 생겼지?.”
장년 세 명이 함께 인사를 꾸뻑 하였으나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 자!자! 우리 내일 내 동생이 호랑이를 잡는다 하니 현장 설명도 하고 산세도 돌아 볼 겸 범 바위에 가 보세.”
이장님이 앞장서고 넷이서 따라 가는데 이장님이 기분이 좋으신지 연신 웃으시며 지형 설명을 하였다.
설명에 의하면 범 바위 또는 호암(虎岩)은 동리에서 비스듬한 능선인데 동리 뒷산 위 5리나 떨어져 있는 동서남북 십자 사거리로써 호랑이가 제일 빈번히 나타나는 곳이라고 하였다.
현장에 도착 해 보니 설명대로 서마지기 넓이의 평평한 곳으로 옛날에는 화전으로 농사를 지은 것 같은데 지금은 잔디와 잡풀로 덮혀 있고 십자로에 사람들이 일부러 옮겨 놓은 것 같이 세평 남짓한 반반한 돌이 놓여있었다 높이는 1 척 정도 인데 이곳에 호랑이가 앉아서 사방을 살피며 산천을 호령하며 잘 논다고 하였다.
이장님의 내일의 호랑이 생포 작전 설명이 계속 되었다.
“ 동생! 동생은 내일 10시경에 이 범 바위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우리 동네 사람들은 여기 서서 오른 쪽 산꼭대기에서, 아랫마을 사람들은 왼쪽 산꼭대기에서 징과 꽹가리, 양철통등을 두드리고 강냉이 대 묶음에 불을 붙여서 연기를 내면서 호랑이를 이곳으로 몰아 올 터이니 만반의 준지를 하게. 아마도 호랑이가 산세가 험한 오른 쪽 산등성이에 있을 것 같으니 만약 거기 있다면 이 길로 올 거야 괜찮겠나?.”
“ 형님 걱정 놓으십시오. 호랑이가 내 눈에 들어오면 확인하고 오른 손 작대기를 높이 쳐 들 터이니 그것을 신호로 그 때부터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 소리를 죽이고 보고 만 계십시오. 시끄러우면 정신이 혼란 해 집니다. 명심 하십시오.“
이장님은 설명을 마치고 이리 저리 산세를 살펴보고 하산하면서 주막집 에 대하여 말을 하였다.
주막집 주인은 나와 동갑내기로 올해 마흔일곱이고 고향은 저 밑의 남쪽이었다고 하였으며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청진에 정어리 배를 타러 왔다가 술집에서 일 하던 아주머니를 만나서 눈이 맞아 그것들을 청산하고 이곳에 10년 전에 와서 집을 사고 아주머니의 음식 솜씨가 있고 하니 우선 주막을 차렸으며 자식들은 없고 간간이 오는 길 가던 손님이 요구하면 음식과 술을 팔고 밤에는 방에서 노름꾼들의 뒷돈을 받아서 생활 한다고 하였다.
주막에 도착 하여서 막걸리를 청하여 일행들과 나눠 마시고 헤어졌고 장비(?)를 점검하였다.
호랑이 이 놈! 내일 뽄때를 보여 줘야지 . . . . . . 각오를 단단히 하였다.
저녁도 진수성찬이었다. 손님도 없고 노름꾼들도 없어서 혼자 넓은 방 웃목에서 편안이 잠을 푹 잤다.
아침밥을 가볍게 먹고 옷을 챙겨 입었다.
쑥색 바지저고리에 허리에는 수건을 찼다 얼굴에 땀이 나면 딲을 요량이었다. 짚신도 새것으로 갈아 신 고, 바지는 대님을 꽉 조여 묶고 오른 손에는 물푸레나무 작대기 왼 손에는 삼 줄을 말아서 쥐었다. 가뿐하여 날아 갈 것만 같았다. 마당에 서서 어깨도 펴 보고 심호흡도 크게 해 보았다.
이장님이 오셨다.
홍 이장이 집에 들어서면서 마당에서 몸을 풀고 있는 양 도령을 보니 참으로 믿음직 하였다. 키는 6척이 될랑 말랑하고 체중은 120근 정도의 호리호리한 몸매가 부럽기 까지 했다.
저 아까운 사람이 혹시 잘못 되면 어쩌나 하고 생각하니 만류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 동생 ! 준비가 다 됐는가?”
“예 ! 형님 준비랄 게 있습니까? 이게 답니다.”
“ 그럼 출발 하세 우리는 앞산으로 갈 터이니 동생은 어제 갔던 범 바위에서 기다리게.”
“예 형님 염려 마십시오. 먼저 가 있겠습니다.”
혼자서 어제 갔던 길로 올라갔다. 길은 사람들이 많이 왕래 하여서 인지 꾸불꾸불 하지만 황토 흙으로 나 있고 산에 나무는 키가 나즈막 한 잡목이 태반 이었다.
범 바위에 가서 바위 위에 서 보니 매끈 거려서 발놀림이 불편 할 것 같아서 바위를 조금 비켜서서 호랑이가 옴직한 곳을 응시 하고 섰다.
조금 있으니 오른 쪽, 왼쪽 산에서 동시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징과 꽹가리 양철통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와! 와! 하는 함성이 산을 울려서 메아리가 들린다.
한참이나 지나서 “호랑이가 여깃다” 하는 소리와 함께 더 큰 함성이 울려 퍼진다.
예상 했던 대로 오른쪽 산꼭대기 부근 이었다.
점점 가까이 소리가 들렸다.
“ 내려간다. 그리로 내려간다.”는 이장님의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그 쪽으로 눈을 고정 시키고 응시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송아지 보다 조금 커 보이는 고양이 한 마리가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면서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뒤에서 야단을 처도 개의치 않는 모양 이었다.
가까이 오는 것을 확인하고 오른 손을 번쩍 들어 신호를 보냈다. 요란 하던 산천이 갑자기 침묵으로 변하였다. 고요하다.
호랑이도 양 도령을 보았는지 어흥 ! 한번 괴성을 발하고 점점 빨리 다가 온다. 가까이서 보니 고양이는 아니고 털이 얼룩무늬로 덮혀 있고 이빨을 드러 내는 데 보통 놈은 아닌가 싶었다. 갑자기 속도를 내서 뛰더니 20보쯤 앞에서 양 도령을 향하여 소리를 벼락 치듯 하면서 공중으로 뛰어서 덥쳐 왔다.
동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바라보니 호랑이가 어흥! 어흥! 경고성 울부짖음을 발하면서 양 도령을 향하여 덮치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았다. 죽었구나 ! 다들 한숨을 쉬었다.
양 도령은 공중으로부터 공격 해 오는 호랑이를 서너 걸음 옆으로 날렵하게 피하면서 올가미를 던졌다 백발백중이다. 피하여 달아나는 말, 고란이나 노루등도 따라가면서 올가미로 잡는 실력이니 제 발로 가까이 다가오는 호랑이 쯤 이야 식은 죽 먹기다.
호랑이 잔등에 올라탔다. 비단요 위에 엎드린 것 같이 포근하고 너무너무 부드러워서 얼굴을 비벼 보기도 하였다.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서 호랑이 배를 양 발목으로 깍지를 껴서 단단이 조르고 두 팔로는 목을 껴안고 등어리에 납작 엎드렸다. 완전히 호랑이와 일체가 되었다. 순식간에 이뤄 진 행동이었다.
호랑이가 발광을 하기 시작 했다 몸을 한번 거세게 털고 어흥! 하고 괴성을 지르며 뛰기 시작 했다. 다리와 팔을 더 조이며 찰싹 붙었다. 어디까지 가는지 시험이라도 하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 했다. 점점 속도를 높이더니 이제는 뛰는 것이 아니고 나무위로 날라 다녔다.
나무위로 나르다 보니 머리가 나무에 부딪칠 염려가 없어 한결 마음이 놓였다.
어흥! 어흥! 어흥! 하면서 앞산 뒷산 옆 산을 종횡으로 날라 가듯 하니 묏 돼지, 노루, 고란이, 너구리, 여우, 오소리가 굴에서 나와 뛰어 달아나고 심지어 꿩, 까지도 푸드득 날아오르고 온 산천이 짐승들이 놀라서 지르는 괴성으로 가득 찼다.
아랫동네 사람들과 윗동네 사람들이 광바우 라는 큰 바위 밑에 모여서 숨을 죽이고 있는데 호랑이 포효 소리가 동서남북에서 메아리가 쳐 오니 대체 호랑이가 어디쯤에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간간이 볼라치면 나무위로 흭 흭 날라 다니는 것이 보이는데 호랑이 잔등에 뭣이 꼭 붙어 있는 것 만 보였다. 가까이 왔을 때 보니 양 도령의 쑥색 옷만 보였다. 너무나 빠르게 다니니 그것도 눈 시력 좋은 사람에게나 잠간 보일 정도 였다.
그리고 자기들의 주위에 있는 산중에 이렇게 많은 야생 동물들이 살고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온 지천에 동물들이 튀어 나와 갈팡질팡하는 모양이 과관 이었다.
저러다가 양 도령이 떨어지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텐데 걱정이 태산 같고 그리 될 것이 확실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누구하나 양 도령을 구하는 묘책을 내 놓는 사람도 없었다.
양 도령은 호랑이 위에서 오래 엎드려 있으니 현기증이 나고 호랑이 몸에서 열이 나고 땀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이 왔으나 속도가 느려지기는커녕 점점 더 포악해 지고 빠르게 날았다.
양 도령이 호랑이 등어리에 찰싹 밀착 할수록 호랑이는 뛰지 않으면 안될 동기가 부여되었고 양 도령은 얼굴에 흭 휙 하며 스치는 바람에 가슴 벅찬 쾌감을 느꼈다.
말(馬)에 의하여 길들여진 비범한 재주를 동리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확인 받고 싶은 충동(衝動)을 느꼈다. 부끄러운 일종의 교만(驕慢)이었다.
옛말에 “떡 본 김에 굿 한다”고 호랑이 탄 김에 백두산에 올라 천지(天池)를 한 바뀌 돌아 봤으면 하는 마음도 간절(懇切)하였다.
네댓 시간 정도 이랬으면 말 같으면 숨을 헐떡이며 속도가 느려질 만도 한데 영 아니었다. 들은 대로 “산중왕” , “동물의왕” 답다
마음이 초조해 졌다. 얼마 안 있으면 산그늘도 내리고 어두워 질 텐데 끝을 봐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이놈의 기질로 봐서는 생포는 불가능 할 것 같으니 죽이기로 작심하였다.
이왕 죽일 바에야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광바우 가까운 곳에서 결행하여 운반하기도 쉽고 만일에 선살을 마치면 동네 사람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하였다.
고삐를 당겨서 서서히 맘속으로 정한 광바우 부근으로 접근 시켰다.
호랑이가 땅에 내렸다가 다시 뛰어 오르는 순간 그 반동으로 양 도령은 허리를 고추세우고 오른 손에 쥔 방망이로 호랑이 머리 정수리를 정확하게 얍! 하는 기압 소리와 함께 내려 쳤다.
호랑이의 뛰어 오르는 속도와 방망이가 내려오는 속도가 합쳐져서 굉장한 충격 이였나 보다.
퍽! 하는 둔탁 음과 함께 풀썩 꼬꾸라졌다. 함께 나뒹굴었다.
땅에 쓰러진 호랑이 입에서 선혈이 철철 흘러나와 땅을 적시고 코에서는 하얀 김이 굴뚝에 연기 나듯 품어져 나왔다. 다리에 경련을 일으키다가 그것도 멈 쳤다 .
완전히 죽은 걸 확인하고 삼 줄로 네 다리를 칭칭 동여매고 일어섰다.
호랑이 등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옷이 땀에 젖어 쑥색이 검정색으로 변해 있었다.
호랑이 땀인지 아님 양 도령이 긴장하여 흘린 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가까이서 호랑이가 뛰어 오르는 것을 봤으나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적막이 흐르니 불안이 덮쳐 왔다.
사람들은 호랑이 등에서 떨어진 양 도령을 호랑이가 갈기갈기 찢어 먹는다고 기척이 없는 줄 알고 침통한 표정을 짓고 이장님은 무모한 행동을 자제 시키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눈물을 글썽 거리기도 하였다. 가까이 가 볼 엄두도 내는 사람도 없었다.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말이 없는 그때 양 도령이 방망이 쥔 오른 손을 번쩍 들고 왼손으로는 목과 얼굴의 땀을 닦으며 수풀 속에서 유유히 걸어 나왔다.
유령인가 싶었다. 당당한 걸음 거리가 분명 양 도령이었다. 눈을 의심하였다.
갑자기 와아 와아!! 함성이 터졌다. 양 도령 앞으로 달려갔다.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 이장이 동생 양 도령을 껴안고 볼을 부비며 울음을 터트렸다.
모두가 함께 울먹였다.
“ 형님 약속을 지켜 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호랑이를 생포하여 여러분에게 드리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여이 치 않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용서 하여 주십시오. 저 수풀 속에 호랑이를 죽여서 묶어 놓았으니 동네로 가져갑시다.”
누구라 말을 할 수 없이 모두가 우루루 수풀 속으로 달려갔다.
호랑이가 목욕을 한 것 같이 물에 젖어 피를 한 바가지나 흥건히 쏟아 놓고 다리에 삼 줄이 칭칭 감긴 채 누어있었다.
눈을 크다랗게 뜬 것이 금방이라도 일어 설 것 같았다.
다들 겁을 내어 접근을 꺼렸다.
“ 완전히 죽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양 도령이 짚신 발로 호랑이 머리를 지긋이 밀었다.
“ 곧 어두 어 질 것입니다. 빨리 운반 합시다. 다리를 단단히 묶었으니 들고 계시는 나무창을 꿰어서 목도를 하면 될 것입니다.”
앞뒤로 두 사람 씩 네 사람이 목도를 하였다. 와아 와아 ! 소리를 내 질렀다.
여러 사람이 양 도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양 도령을 무등을 태우고 개선장군처럼 윗동네로 행했다.
동네에 다다르니 언제 소문이 났는지 아랫마을 윗마을 어린이들까지 나와서 주막집은 물론 그 이웃집 마당에 까지 가득 찼다.
다들 싱글벙글 하였다. 이제는 안심하고 산에 나무도 하러 가고 약초며, 산나물도 캐러 갈 수 있다고 하시면서 춤을 추는 할머니도 계셨다.
완전 잔치판 이다. 집집마다에서 가져 온 음식과 술등을 여럿이 나눠 먹으면서 마당의 멍석위에 누여 있는 호랑이를 바라보는 구경꾼들의 호기심 어린 얼굴은 한 결 같이 밝았다.
이장이 양 도령을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불렀다.
“ 동생! 오늘 수고 했다. 호랑이를 잡는 사람은 포상을 하겠다는 관아의 방침이니 관아에 신고하는 게 어떻겠니?”
“형님 신고하면 호랑이를 관아로 끌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호랑이 가죽은 저가 가져갔으면 합니다. 천애고아인 저를 먹이고 길러 주신 부모님께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기로 하자 그럴 려면 가죽을 벗겨 기름이 마르도록 까지 한 열흘 정도 걸릴 것이니 그때까지 여기서 푹 쉬었다가 가고 그 동안은 우리 집에서 쉬도록 하지.”
“ 예 형님 고맙습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양 도령은 그곳에서 열흘을 넘게 지내며 제주 조천에서 개미 쳇 바퀴 돌 듯한 생활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같았는지 이번 유람을 통하여 알게 되어서 앞으로의 삶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을 하였다.
고향의 일가친척은 찾을 길 없었으나 함경도 사람들의 원수인 호랑이라도 내손으로 잡아서 화근을 없애고 나니 그래도 마음은 한결 기뻤다.
열흘도 꿈같이 흘러가고 홍 삼식 형님과 동네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호피를 괴나리봇짐에 싸서 묵직하게 짊어지고 남쪽을 향하여 귀향길에 올랐다. 끝
(2013.10.28 ~ 12.3)
첫댓글 아버지, 이 이야기(이바구...) 어디서 옮겼어요? 아니면...아버지가 직접 지으신 거에요?
옛낭 들은것 각색하고 좀 꾸며 보았지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