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이름 본촌
본촌에 사는 사람들을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외지에 나가면 연세가 든 외지거주 어른들은 곤명사람이라 불렀다. 그리고 본촌에서 자라 타 지역으로 시집간 여인네의 택호가 대부분 곤명댁이었다. 그것은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전까지 본촌을 곤명으로 불렀던 것이다.
구한말 때까지 지금의 곤명면은 작은 네 개의 현(縣)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곤명면으로 이름을 통합하면서 면소재지는 송림으로 정하고 이름은 제일 중심의 현이었던 곤명의 명칭을 따서 곤명면으로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본촌(本村)이라는 이름도 그 의미가 깊다. 곤명면의 근본이 되었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本(근본 본) 村(마을 촌)을 써서 본촌으로 이름을 개명하게 된 것이다. 결국 우리 본촌 사람들은 원래의 고을 이름 곤명을 행정단위 이름으로 제공하면서 그 행정단위의 근본인 마을이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알 수 있는 이름 본촌을 얻은 셈이다.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志),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 곤명현(昆明縣)의 설치 기록이 있다.
곤명현에는 지금의 수곡면 광명지구 일대인 원당이 곤명현에 포함되어 있었다. 현(縣)이 설치되면 중앙 행정기관에서 현령(縣令)이나 현감(縣監)을 파견하여 정사를 맡도록 했다. 대개 현(縣)의 규모가 크면 종5품인 현령을 파견하고, 보통 단위의 현(縣)에는 종6품인 현감을 파견했다. 이들을 원님이라 불렀다. 현령이나 현감의 권한이 지금의 행정 수장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그들에게는 입법, 행정, 사법의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자기가 관할하는 구역의 백성들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곤명현의 존재를 뒷받침 할 수 있었던 유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동헌(東軒)터로 추정되었던 ‘돌호박’이라는 주초석(柱礎石)이 그대로 있었고, 옥터(獄地)로 알려진 흔적들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본촌 들녘의 밭에는 기와 조각 옹기 조각이 밭을 갈 때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그 조각들을 다 처리할 방도가 없어서 밭둑에 집채처럼 곳곳에 쌓아 놓았었다.
본촌 윗 들녘에 있었던 우리 집 밭에서도 밭을 갈다가 주둥이가 깨어진 항아리가 출토된 적이 있었다. 밭의 위치는 본촌 마을과 두인 오룡(五龍) 덤의 중간 지점쯤 되었다.
또, 훼손된 돌부처가도 있었다. 크기는 성인의 몸통 정도 크기였다. 우리 윗 밭 부근에 있었는데 목이 떨어져 나간 돌부처였다. 그 지점을 부처거리라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고을의 현리(縣吏)들이 음력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석불 앞에 가서 태평세월 도래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는데 폐현(廢縣)이 되자 석불끼리 서로 수호를 잘못해서 폐현이 되었다고 다퉈 한 석상은 목이 달아나고, 한 석상은 어깨가 떨어져 나갔다는 전설이 회자되어 전해 내려왔었다.
그 훼손된 석불은 경상대학교 경내로 옮겨져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양월을 장자터라고 불렀다. 부자가 살았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옛날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부자가 살았다는 곳은 지금 양월 부락 동산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면 규모가 큰 대밭이 있었는데 그 대밭이 부자의 집터였다고 했다.
지금 본촌에는 선산 김씨가 주류를 이루고 살고 있지만 사실 이곳으로 입주해 살았던 씨족의 순서를 보면 윤(尹), 신(愼), 류(柳), 조(曺), 김(金)씨 순이다.
오늘 날 본촌과 양월의 모습은 너무나 변했다. 남강댐이 건설된 직후만 해도 본래의 모습이 있었는데, 남강댐 저수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댐 보강공사를 하여 제방 둑을 높였다. 이로 인해 마을을 옮기고 강폭을 넓히고 강둑도 높이 쌓고, 하도 사업으로 논밭을 돋아 올림으로 해서 옛 모습은 상상 속에 맴돌 뿐이다. 그래도 고향은 항상 어머니 품과 같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