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史記 1회》
올 여름은 유난히 장마(長麻)가 길었고 폭염도 기록적이다.
우리 속담에 장마가 짧으면 갑산 (甲山)처녀가 울고, 장마가 길면 보은(報恩)처녀가 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갑산 : 함경도 갑산군, 지금은 양강도 갑산군)
갑산은 삼(麻)의 주생산지여서 비가 많이 내려야 삼이 잘자라기 때문이고, 보은은 대추의 주생산지여서 비가 많이 내리면 대추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인데, 갑산 처녀는 삼을 팔아서 시집을 가야하고 보은 처녀는 대추를 팔아서 시집을 가야 하기 때문이었지요.
여하간 이것은 옛날 일이고 올여름은 장마가 끝나니 연일 밤낮 폭염에 시달리니 마음을 식힐 마땅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하다 책꽃이에 꽂혀 있는 중국 고대 역사서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좀 소개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중국 고대 역사서인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은 어떤 사람일까?
사마천은 중국 한나라 무제(武帝) 때인 기원전 145년에 한나라 대사령(역사를 기록하는 부서의 長) 사마담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 밑에서 사관(史官)으로 일을 하다가 아버지가 운명한 후 뒤를 이어 대사령이 되었습니다.
대사령으로 근무를 잘하고 있는데 친구 이릉(李陵) 장군이 흉노족과 전투를 하다 중과부적으로 항복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 모든 신하들이 이릉을 처벌해야 한다고 길길이 뛸 때, 사마천은 "이릉 장군은 평소에 전과를 많이 세운 장군이기도 하지만 장수가 전장에서 패하는 일은 兵家에서 흔히 있는 일이니, 한번 용서를 해 달라"고 건의를 하였다가 무제에게 찍혀 사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한나라 형법에는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에게는 3가지 선택 조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허리를 잘려서 죽는 것. 두번째는 벌금 50만전을 내고 풀려나는 것. 세번째는 궁형(宮刑)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마천은 50만전이라는 거금을 낼 능력이 없어 궁형을 선택하고 자신의 생식기를 자르는 고초를 겪고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어쩐일로 무제는 사마천을 중서령(中書令)에 임명하고 측근에서 사서(史書) 일을 계속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다시 붓을 잡고 궁형의 치욕을 무릅쓰면서 130권이라는 방대한 사서(史書)를 집필한 인물입니다.
다음 2회에는 사마천이 자신의 스승이요. 친구이기도 한 임안(任安)에게 보내 편지에서 자신의 신세를 탄식(歎息)하는 내용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月 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