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밤의 여행자
구호준
회사에 입사하여 처음으로 차례진 4일의 휴가, 그 휴가를 틈타서 지리산 산행을 떠난다.
군산에서 직접 진주로 떠나는 버스가 없어 서울에서 12시 진주행 심야버스를 탔다. 진주 도착 3시20분, 진주에서 다시 지리산 입구로 택시로 이동하여 등산을 시작할 때는 새벽 4시가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지리산국립공원 입구를 지나니 가로등도 사라지면서 어둠만 무겁게 드리워있다. 그 어둠속에서 모자위의 후레쉬 하나에 의지하여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어둠이 깔린 길에는 내 뒤에서 따라오는 일남일녀까지 등산객이란 겨우 셋뿐이다. 한낮이면 등산객끼리 만나면 서로가 인사를 주고 받는 것이 예의지만 어둠속에서는 그런 것이 생략되고 있다.
밤이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깊은 산중에 짐승을 만나는것만큼 두려운 존재가 되니깐.
주변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후레쉬도 내 발 앞을 비출수 있을 뿐 먼 거리를 조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혀 걱정은 하지 않는다.
4시부터 입산이 허락되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직 보이지 않는 주변이지만 산행을 떠나기 전에 이미 코스는 정해져 있었다. 정해진 내 코스를 따라서 천왕봉에 올라 아침해를 보면 오늘 산행은 끝나는 것이다.
중산리탐방안내소에서 출발했으니 칼바위를 지나서 로타리 대피소로 오르면 5.4키로메터의 거리, 인터넷에 올린 소개대로라면 4시간의 거리다. 등산로가 가장 험한 곳이라고 하지만 한국인들에게 산인이라고 불릴만큼 등산을 즐기고 등산에 프로로 자처하는 내게는 큰 애로가 없을것이다. 4시간의 거리를 2시간30분 정도로 예정하고 길을 조이면 천왕봉에서 아침 해돋이를 볼수있으리라. 정상에서 준비한 건량으로 아침을 먹고 돌아 올 때에는 장터목대피소를 지나서 칼바위 삼거리로 해서 다시 중산리 탐방안내소에서 버스를 타면 하루의 등산은 끝나는것이다. 돌아오는 로정은 7.3키로까지 예정하면 왕복이 10여시간의 로정이다. 휴식까지 예정하면 12시간을 넘을 등산코스지만 여유작작하다.
두치가 아닌 겨우 한치 앞도 희미하게 보면서 걷는 산행길, 그 길을 가면서도 내게는 정해진 등산코스가 있고 지도가 있다는데서 마음의 여유를 만들고 있다.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다가 길옆에 세워진 희미한 안내판에서 걸음을 멈췄다. 로타리 대피소와 장터목 대피소를 표시한 안내판이다. 두 대피소를 오르는 길과 두곳이 합쳐지고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이 표시되여 있었다. 그런데 그 흔한 현위치가 보이지 않았고 거리와 시간도 표시되여있지 않았다. 다만 로타리 대피소는 길 왼쪽에서 입산이 시작되고 장터목대피소는 직진하면 입산로와 이어져 있었다. 아직 얼마를 더 가야 갈림길이 나타날지 몰라 안내판에서 있지도 않은 현위치를 만들어보다가 그대로 길을 떠난다.
안내판을 지나 뒤를 돌아보니 내 뒤를 따르던 사람들의 자취가 묘연하다. 젊은 일남일녀니 어느 숲에서 나름대로 즐기겠거니 하면서 나는 다시 발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늦장을 부리다가 해돋이를 보지 못할것 같았고 길은 어둠이 깔렸을 때 축내야 하는것이다.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니 마침내 포장도로가 끝나면서 산길이 펼쳐졌다. 그런데 입구에 응당 있어야 할 도로표시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장터목대피소 방향으로 잘못 잡은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지만 되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멀리와 있었다. 다시 되돌아간다고 해도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도 묘연하고 어둠이 덮인 산야에서 정확하게 길을 찾는다는 보장도 없다.
선택은 없다.
내 앞에 길은 하나뿐이다.
돌아갈수도 없다. 돌아가는 사이에 날은 밝을것이고 결국 천왕봉에 오르기전에 몸만 지쳐버릴것이다. 선택이 없는 길, 그 하나뿐인 길을 재촉하는것만이 내가 가야 하는것이다.
어둠이 조금씩 밀려간다. 희끗거리던 산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키넘는 갈대숲 사이를 지날 때에는 마침내 아침해가 떠오른다. 천왕봉이 아닌 산 중턱에서 아침해를 카메라에 담으면서 주변을 두릿거리면서 등산의 묘미를 즐기기 시작했다. 선택이 없는 길을 가야 할 때에는 최대한의 즐거움을 찾는것으로 잘못된 선택에 대한 생각들을 털어버리는것이 최상인것이다. 그것이 등산하면서 얻은 답이고 내가 살아오는 동안에 터득한 나름대로의 인생관이다.
인적기가 없는 고느적한 산길, 가끔씩 곰이 출몰하는 지역이란 안내문을 보면서 나는 여유작작 등산을 한다. 곰이야 나오건 말건 그건 나와는 무관한 일이다. 무송이 아니니 맨주먹으로 때려잡을수도 없는 일이요, 무송같은 뛰여난 무장이라고 해봐야 술을 마시지 않았으니 싸움은 불가할것이다. 곰이 나온다면 그냥 곰의 선택에 맡기면 되는것이고 나는 나대로 즐길수 있을 만큼 즐기기만 하면 되는것이다.
인생도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밤의 여행이였으리라.
스스로 선택하고 밝은 내 래일을 만들어간다며 살아온 지난날 결국 두치도 아닌 한치 앞도 바로 보이지 않는 미스터리였으리라. 과거는 늘 어둡기만 했고 현재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어둠이였다. 래일은 오늘보다 더 밝고 아름다울거라는 그 집착이 오늘은 어제보다 더 즐겁다는것을 망각하며 살아온 나는 결국 밤의 여행자였다.
어둠을 허위허위 헤치면서 내가 걸었던것은 선택했다던 그 길들은 모두가 내가 태여나서 걸어야 하는 길이였을 뿐이다. 선택이나 우연이 아닌 필연의 길이였다.
연길에서 사직하고 제일 먼저 떠올랐던 기억은 류학을 포기했던 일이였다. 어느 지인의 도움으로 한국 광신대에 류학의 기회가 차례졌었고 그 수속을 하던 중 방송국에 입사하게 되였다. 입사 5년만에 퇴사하면서 떠올려야 했던 류학, 굳이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결국 나는 늘 과거에 집착하고 미래를 동경만 하면서 현재를 잊고 있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였을가?
그런 집착들에 발목을 잡혀 퇴사하고 몇년을 집구석에 박혀서 별볼일없는 인간으로 허송해야 했고.
태양은 언제건 떠오르고 어디에서건 볼수 있다.
밤이면 태양이 보이지 않을 뿐 사라져버리는것이 아니다. 구태여 밤이라고 태양이 없음을 한탄하면 마음의 태양을 잃고 오늘을 잃고 나를 버리는것이 되리라.
한국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생활, 그 생활속에서 나는 신기루같은 나의 미래가 아닌 현재의 즐거운 나를 만나고 있다.
자동차부품 회사에서 하루에 12시간을 근무하고 18평방메터밖에 안되는 원룸을 세를 맡아 살고 있지만 지금의 나를 보면서 순간순간을 즐기고 있다. 어차피 보이지 않는 길이라면 내가 걷고 있는 그 길에 충실하면서 살아가는것이 참된 내 인생인것이다.
여기에 아직 얼마만큼을 더 체류해야 할지 알수 없지만 나는 내게 필요한 것들을 최선으로 갖췄다. 밥가마 하나도 롯데마트에 가서 최신형으로 샀고 노트북에 정이 들지 않는다는 리유로 컴퓨터도 새롭게 갖췄다.
구전하지는 못해도 최선으로 갖춰진 내 살림살이를 보면서 “오빠는 여기서 얼마를 살건가요?”하는 동생의 물음에 그냥 웃음으로 넘겨버렸다.
동생부부는 한국에 온지가 6년을 넘었지만 아직도 보온도 바로되지 않는 5만원짜리 밥솥을 쓰고 있다. 그 긴 세월을 동생부부는 전철 한번 바로 타보지 못할 만큼 자신들에 인색하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간 모은 돈으로 고향에 아파트 한채 사서 장식까지 멋지게 해 놓았지만 집을 갖춘만큼 잃은것도 많다. 설흔에 한국에 와서 이젠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였고 해빛 한번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열심히 돈을 모았지만 자신들이 갖춰놓은 아파트에서는 향수를 누릴수 없다. 아파트를 사고 딸애의 뒷바라지를 하다보니 손에 남은 돈이 없으니 아직도 얼마를 더 회사에서 먼지와 싸워야 하는지 자신들 모르고 있다.
내 로후를 걱정하는 동생부부에게 해줄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였다.
“늙고 병든 날들을 위해서 지금의 내 젊음을 버릴수는 없잖아?”
미래를 동경하고 래일을 위해 예비하는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보이지도 않는 미스터리한 래일을 위해서 오늘을 망각하면서 살아가는것만이 인생만은 아니니라.
과거에 대한 집착이 현재의 나를 한치 앞도 쳐다보기 힘들게 만든다면 미래에 대한 동경은 그 남은 한치 앞마저 가려버리는것이 아닐가?
래일의 내가 어떤 모습이고 래일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느냐보다는 현재의 내 모습을 돌아보면서 지금의 나에 집착하고 가꾸고 즐기면서 살아가는것도 인생이 아닐가?
나는 밤의 여행자다.
주변을 보지 못하는 밤의 여행자다. 그러나 그 밤의 여행에서 내게는 후레쉬 하나는 갖춰져 있고 그래서 내 발밑의 길을 보면서 내가 가야 할 길을 걷고 있는 밤의 여행자다.
심야등산을 즐길 때만이 떠오르는 태양을 산에서 맞을수 있고 태양은 밤에도 늘 존재하고 있었음을 깨달으리라.
험한 산길을 톱으면서 인터넷에서 난이도가 중이라던 장터목대피소로 가는 길이 이 정도면 상에 속했던 로타리대피소로 굳이 걸으려고 했더면 실족하여 천왕봉에도 오르지 못했을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잠간 해본다.
태양을 따라 천왕봉에 오르면서도 나는 여전히 내 발밑을 깐깐히 살핀다. 험한 산길, 그 산길에서 태양에만 의지하면 실족하기 십상이고 그래서 여전히 나는 심야등산을 하고 있는것이다.
눈앞에 천왕봉이 보일 때 마침내 언젠가 보았던 우화 한편이 떠오른다.
전갈에게 물었다.
“겨울에 밖으로 나오지 않니?”
전갈이 말했다.
“겨울에도 밖으로 나돌면 여름에 얻은 건 언제 먹니?”
그리고 그 밑에 붙은 한줄 메모가 가슴에서 울려나오려고 한다.
겨울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인간의 겨울이. 마음의 겨울이 무척 짧아지고 있다. 이상 기온인가?
내 겨울은 길고 아름다우리라.
나는 언제나 밤의 여행자이니깐.
첫댓글 밤의 여행자
나도 함께합니다
오늘도 비가 오네요
따시게 잘 챙겨 입으시요
반갑습니다.
부족한 글이나마 읽어주셔서 고맙구요.
살면서 환히 밝은 자신심과 으시댈수 있는 조건은 영 없었어요.
항상 아글타글 긴가민가 헤매였었죠. 나름대로 나도 밤의 여행자인걸요.
감수 깊은 좋은 수필 즐감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