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이의 행운
오늘은 예나의 생일이예요.
예나는 이제 다섯 살이나 되었어요. 예나는 고사리 같은 손을 펴서 하나씩하나씩 손가락을
구부리며 흐뭇한 표정으로 웃어보아요.
“우와, 내가 이제 다섯 살이나 먹었어요. 엄마”
엄마는 오븐에서 케이크를 꺼내면서 그런 예나의 얼굴을 보고 달덩이처럼 환한 얼굴이
되었어요. 그런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예나얼굴도 꼬마 달덩이가 되었지요.
아침부터 예나는 도무지 차분해질 수가 없었어요. 왈가닥이 별명이지만 오늘만큼은 얌전한
혜리처럼 내숭을 떨어보려고 했어요.
동화속의 그 우아한 공주님을 떠올리면서요. 그래서 예나는 탁자 위의 사과도 먹지 않았어요.
그 속에 독이나 애벌레라도 나오면 오늘 생일파티 때 모처럼 예뻐 보이려고 애쓴 입모양도
나오지 않을 거예요.
아 예 이 오 우
예나는 아침부터 엄마화장대에 앉아서 엄마처럼 얼굴 표정 만들기를 해 봤어요. 머리는 또
왜 지푸라기 같은 거예요.
언젠가 공원에서 본 느티나무 둥지처럼 얼기설기해서 짜증이 났어요. 괜히 파마를 했나 봐요.
이제 보니 생머리가 더 공주인 것 같거든요.
아차차. 엄마의 고대기로 머리카락을 펴 보았어요. ‘치치칙’ 무슨 소리냐고요. 그거야 예나의
머리카락 지지는 소리인 걸요.
정말요? 그럴리가요. 예쁜 손가락이나 인형 같은 피부에 화상 생기면 안 되는 걸요. 그냥
입술만 뾰쬭이 내밀고 치익치익 물도 뿌리고 치치직 고대도 하고요.
이빠진 이빨사이로 새어나오는 고대기의 숨소리는 치이지익...쉬이
엄마가 볼까요? 동화책의 분홍색 입술도 한 번 발라보아요.
어? 엄마입술만 발라지는 게 아니었나 봐요. 쓰쓱 입술에 봄꽃 잎이 들러붙은 듯 정말 어여쁜
백설공주가 거기 있는 게 아니겠어요.
“어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예나는 엄마의 둥그런 분통을 열어서 쿡쿡쿡 엄마의 손짓대로 그대로 흉내를 내어 두들겨
주었어요. 그랬더니 얼굴에 하얀 눈이 내린 양 뽀사시한 얼굴로 바뀌었어요. 마술의
가루였나 봐요.
“아, 어디에 있지? 작년에 입었던 구슬원피스 구슬이”
예나는 옷방에서 여기저기 먹이 찾는 오소리처럼 구석구석 뒤지고서야 구슬들이 우수수
떨어질 것 같은 원피스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나 여기에 있어”
“응? 어디”
“여기라니까. 여기”
깡충깡충 토끼가 두 귀를 쫑긋거리는 그 잠바 뒤에서 물방울이 굴러가는 목소리로 부르는
구슬이가 한쪽 손을 들어 보이는 것이 보였어요.
“아하, 공주 구슬원피스! 오늘 입을 거야.”
작년에 이모가 사주신 상아빛 구슬들이 대롱대롱 달린 하아얀 구슬원피스는 예나를
천사처럼 날개 달아 주었어요. 그래서 이름을 구슬이라고 지었지요.
“아이, 이게 누구야! 우리 예나가 공주님이 되어 나타나셨네.”
쭈우욱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는 거였어요. 싱글벙글 헤헤헤 그렇게 많은 행복한 시간들을
대롱대롱 매달게 해준 구슬이를 꺼내어 거울에 비추어 보았어요.
“에게게! 이게 뭐야!”
갑자기 예나가 벌레라도 씹은 표정이었어요.
‘웬일이지? 뭐가 잘못 된 거야?’
구슬이는 예나에게 물어보고 싶었어요.
“누가 내 원피스를 줄여 놓았어? 엄마아, 엄마아-아.”
울상이 된 예나가 동동거리며 부엌에 있는 엄마에게 한달음에 달려갔어요.
“내 원피스가 이상해? 엄마, 새 것 사주세요.”
“얘가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야. 얼굴은 또 엄마 화장품 만졌구나! 세수라도 하세요.
꼬맹이 아가씨 말짱한 원피스 탓 그만 말고.”
엄마는 예나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막무가내였어요. 예나의 불퉁한 목소리가
구슬이에게도 들렸어요.
“뭐야? 내가 어디가 이상해졌다는 거지?” 구슬이는 갑자기 자기의 몸이 정말로 이상해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예나가 보던 거울에 몸을 여기저기 비춰보았어요.
레이스가 많이 달린 앞은 여전히 초롱이는 별처럼 빛나는 진주빛 구슬이 방그레 웃었어요.
뒤를 돌아봐도 어여쁜 리본이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이었어요.
“엄마아, 오늘 생일파티에 저 원피스 말고. 딴 것 사줘 응? 응? 응?”
“예나야, 작년에 이모가 사준 구슬 탱탱 원피스 너 정말 좋아하잖아?” “이제. 싫어! 싫어! 싫어!”
“아니, 얘가 오늘 왜 그러는 거야? 사촌동생 기쁨이가 만져보지도 못 하게 하더니만”
“엄마아, 새 옷으로 사 줄 거지?” “예나야, 매번 새 옷을 사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
이마에 갈매기가 지나가는 예나의 얼굴을 본 엄마는 난처한 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예나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다는 걸 구슬이는 알고 있었어요.
“예나야, 갑자기 내가 왜 싫어진 거야?”
하지만 혹시나 변덕 심한 예나가 오늘 생일파티 때 자기를 불러주지 않으면 어쩌나 구슬이는
풀이 팍 죽었어요.
그러자 옆에 토끼얼굴의 후두티가 물었어요.
“왜 그렇게 시무룩해?”
토끼 귀를 실룩실룩. 장난끼 많은 얼굴로 건성으로 묻는 질문 따윈 구슬이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어요.
“난 정말 심각하단 말이야. 너야 매일 여기저기 예나가 입고 세상 구경을 시켜 주니까 그런
걸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왜 그래? 너는 나처럼 우아한 생일파티 같은 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놀릴 때는 언제고?”
빠알간 단추 토끼코를 만지작거리며 빈정거렸어요.
“너는 상황을 잘 모르는 게 병이야. 단추 코가 다섯 개면 뭐하니?
제대로 냄새를 못 맡는 가짜코만 잔뜩 달고서 뭘 하겠다는 건지.” 그러자 킁킁 토끼 후두티
코를 벌름거리면서 냄새를 맡아보는 것이었어요.
“냄새를 못 맡긴 왜 못 맡아. 이건 다섯 배가 강력 파워로 맡을 수 있는 걸”
다섯 개의 토끼 코가 벌름대는 꼴이란.
“으하하하, 그만 좀 해.정말 웃겨”
구슬이 쟁반 위를 굴러가는 목소리로 깔깔깔 웃고 보니 구슬이는 기분이 훨씬 나아졌어요.
하지만 정말로 예나가 다른 원피스를 사오면 어쩌죠? 잠시 행복했던 마음은 어느새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사라져 버렸어요,
그때였어요. 구석진 옷걸이에 걸려있던 잠옷이 기지개를 펴면서 말했어요.
“구슬아! 잘난 체 하더니만 제일 예쁜 옷이라며 뻐길 때는 언제고 코가 석 자나 빠진 거야!”
어제만 해도 오늘 생일 파티에 예나에게 입혀질 영광을 가진 구슬이가 실룩거리며 말했어요.
“내가 언제 그랬어?”
구슬이는 그런 기억이 나질 않았어요.
“언제 그러긴? 어젯밤에 예나가 나를 입고 잠자리에 들 때 네가 지나가는 말로 했던 말 기억
안 나니?”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예나가 훌러덩 옷을 벗고 잠옷을 입을 때 한 말이 있긴 했어요.
“넌 참 아프겠어. 잠옷아. 예나가 널 입고 온통 침대 위를 굴러다닐 테니 말이야” “그게 잠옷의
매력 아니겠어? 그래도 나처럼 부드러운 천을 가진 옷은 없어”
잠옷은 구슬이를 흘기며 말했어요. 왠지 말이 좋게 들리지 않았거든요.
“내 하트들을 예나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면 뭐하니? 며칠 전에도 예나는 네게 오줌을
쌌잖아.”
"맞아, 맞아. 아휴 아직도 지린내가 나는 것 같아.”
토끼 후두티가 맞장구를 쳤어요. 잠옷이 홍당무가 되었어요. 안 그래도 분홍얼굴이 활활 불이
타는 것 같았어요.
“니들은 잘해 봐야 예나가 며칠에 한 번씩 입어 주지만 그래도 나는 날마다 예나랑 같이 잘 수
있단 말이야”
화가 나서 잠옷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어요.
“그러면 뭐해? 날마다 몸뚱이는 아프지. 간간히 오줌세례나 받아야 하는 기 저귀나 다름없는 걸.”
거만하게 구슬이가 말했어요. 후두티도 재미있다는 듯 키득키득 거렸어요. 그 바람에 잠옷은
울상이 되었어요.
“너희들 너무해. 으앙”
그제서야 어젯밤 일이 생각난 구슬이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사과를 할까? 말까? 하지만
지난 동안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던 구슬이는 자존심이 상했어요.
“사실 잠옷 너는 그런 거 당연한 거 아니야?”
“너 정말 나빠. 얼마나 오래 예나가 너만 예뻐하는지 내가 두고 볼 거야!”
“그럼 예나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저번에 재롱 잔치 때도 나를 입고 갔었는데 그런데
아마 잠옷 너 같은 것은 가 볼 기회가 영영 없을 걸?”
‘이크 왜 난 이렇게 못 된 거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어요.
“가짜 구슬인 주제에. 너 모양만 가짜 진주인줄 알았지. 마음까지도 온통 거짓인 못된 애구나! 쳇.”
잠옷은 화를 참느라 씩씩거렸어요. 그 모습이 지금은 자꾸만 떠올랐어요. 그나저나 오늘 생일파티에
나를 입지 않으면 어떡하지? 구슬이의 얼굴은 어두워졌지만 희망을 잃지는 않았어요.
저녁이 되자 할머니, 할아버지, 사촌인 기쁨이네 가족도 다 모이게 되었어요. 엄마의 딸기케이크에는
다섯 개의 촛불이 색색이 꽂혀져 빛나고 있어요.
“우리 예나의 다섯 번째 생일을 축하한단다.”
웅성웅성 거실에 손님들이 발 딛을 틈 없이 가득 찼어요. 예나의 생일날은 축제날처럼 시끌벅적
하였어요. 주인공인 예나는 기분이 너무 좋아 날아갈 것 같아요. 글쎄 그냥 한번 졸라본 건데도
이번엔 삼촌이 예나에게 정말 멋진 장미꽃 드레스를 선물했거든요.
“예나야, 이모가 사준 구슬드레스는 이제 찬밥 신세야?”
“장미 드레스가 더 좋은 걸요.”
“요 녀석, 새 것만 너무 좋아한다니까. 작년에 구슬드레스 가지고 난리를 치더구만.”
“애나 어른이나 새것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난처해하는 예나를 대신하여 엄마가 편을 들어주셨어요.
“그래, 아무튼 외삼촌이 네가 이렇게 마음에 들어 하니 뿌듯하실 거야.”
“우리 예나 건강하게 씩씩하게 자라렴.”
할아버지께서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자 모두들 까르르 웃었어요. 음정 박자가 너무 이상했거든요.
그래도 모두가 예나를 축복해 주었어요.
장미원피스는 자신이 바로 예나인 것 마냥 기쁘기 한량없었어요.
“역시 나의 아름다움은 최고야!”
흥겨운 생일파티 소리는 옷장에 있던 구슬이에게도 들렸어요.
“깨소금 맛이야. 구슬이의 몰락을 본다는 건”
기가 펄펄 산 하트잠옷은 신이 났어요.
“오줌 기저귀가 되는 내가 파티에도 못나가는 구슬드레스보다야 훨씬 낫지 않니? 토끼 안 그래?”
“뭐 그렇긴 하지만 오줌 냄새는 좀 그러긴 해” “뭐야?”
잠옷이 성을 냈어요.
토끼 후두티의 다섯 개의 코는 벌름거리며 맞장구를 쳤어요.
“이래봬도 세상을 많이 돌아다니신 만물박사 내가 제일이지. 잠옷이나 드레스나 너무 특별한
용도라 소용없으면 벽장 지키기 밖에 못하잖아. 안 그러냐?
“그것도 다행이지. 벽장 지키기도 마음에 드는 옷이나 할 수 있거든.”
하트잠옷은 구슬이를 힐끔거리며 약을 올렸어요.
“어젯밤의 복수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흐흐흐” “오늘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나 보지?”
“그만해. 그만하라니까. 흐흑.”
구슬드레스는 슬퍼서 말대꾸할 기운도 없었어요. 그저 본 적 없는 예나의 새 드레스가 밉기만 할
뿐이었어요. 친구들이 놀림감이 되는 것보다 이렇게 즐거운 날에 예나를 만날 수 없다는 게 슬펐어요.
달이 뜨고 앞마당에 으스름이 깊어지는 밤이 되자 스르르 옷장 문이 열리며 새로운 장미드레스가
들어왔어요. 하트잠옷은 그 사이 예나와 함께 잠을 자러 갔지요.
“안녕 잘 자. 난 오늘도 예나의 기저귀 되려구.”
잠옷이 신나하며 약을 올렸어요.
“우와, 넌 정말 어여쁜 장미드레스잖아. 어머머 저기 저 구슬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걸.”
예나에게 입혀지는 동안에도 잠옷은 온갖 험담을 하는 듯 했어요. 그 말들이 구슬이에게는 상처가
되어 가슴이 아팠어요.
“너야말로 정말 근사한 옷이야” 후두티도 깡충깡충 뛸 듯이 기뻐하는 거였어요. 구슬이의 눈치
따위는 안중에도 없나 봐요. “호호호. 애들아! 환영해 줘서 고마워. 나야 사실 외국에서 왔으니 싸구려
너희들과는 좀 다르겠지만 잘 지내보자.”
도도한 장미드레스는 옷장을 휘이 둘러보더니 눈살을 찌푸렸어요. 아마도 옷장이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예요.
“싸구려? 너는 처음 보는데 말이 좀 지나치지 않니?”
“아니면 말고 아무튼 앞으로 잘 지내보자. 아휴 이 옷장은 왜 이리 어두워!”
구슬이는 장미드레스의 아름다움을 보는 순간 자신감을 잃었어요. ‘설마, 이제 나를 학교에도
안 입고 가면 어떡하지?’
걱정은 현실이 되었어요. 예나는 생일파티 이후로는 어딜 가든지 장미드레스만 입고 다녔어요.
심지어는 일요일에 교회 갈 때도 또 피아노 연주회를 할 때에도 말이죠. 장미드레스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졌지만 구슬이는 어두컴컴한 옷장에서 갇혀 지내야만 되었어요.
예나와 함께 하던 날이 이렇게 짧을 줄은 몰랐어요. 옛날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던 어느
날 활짝 열린 옷장에서 예나가 구슬이를 데리고 나왔어요.
“야호. 이제야 예나가 나를 찾아 주었구나.”
하지만 예나는 구슬이를 그냥 체크무늬 종이가방에 넣었어요. 구슬드레스는 이웃집 동생에게
주었던 거예요.
“얼마 전까지 예나가 정말 좋아했던 옷이예요. 새 옷이 생겨서 안 입어서 그렇지. 작년에 산
거라서 새 거나 마찬가지예요.”
예나와 예나 어머니는 낯선 집에 구슬이를 두고 갔어요. 그 집은 아담했지만 화초를 많이
키우는 집 같았어요.
“우리 소망이는 어떤 것을 입어도 예쁘구나!”
하지만 뾰료통한 그 아이는 오늘 예나의 장미드레스가 갖고 싶었어요.
“싫어 안 입을 거야”
아이는 힘껏 거실마루에 원피스를 내던졌어요.
“아야.”
너무 세게 던지는 바람에 구슬이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칙칙한 냄새에 그리고 멍멍 짖어대는 강아지소리에 놀라 정신이 들었어요. 퀴퀴한 곰팡이
냄새에 고개를 들어보니
“흥. 뭐야 넌 말짱한 게 왜 이런데 들어와서 잠만 자니?”
옆에 있던 여기저기 닳은 가죽잠바가 수상하다는 듯 바라보았어요.
“그만 둬. 나도 말짱한데 버려졌는 걸” 멜빵바지였어요.
“왜?” “내 주인 한석이가 색깔이 맘에 안 든다며 버린 거야”
“나는 그냥 유행이 지났다고 버렸어.”
훌쩍거리며 롱코트가 말했어요.
그러고 보니 여기에서 그나마 닳은 것은 가죽잠바뿐이었고 모두가 새 것이었어요.
색동저고리 한복도 수영복도 새것, 난초가 가득 핀 투피스도 있었지만 모두가 성성한
것뿐이었어요. 어떤 것은 비닐포장 그대로 안 뜯겨진 셔츠도 있었어요.
“여기가 어디니?”
구슬이가 물었어요. 비좁고 엉키고 얽혀있는 비좁은 공간에서 옷들은 서로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어요. 구슬이는 팔을 간신히 빼내며 물었어요.
“어디긴 어디니? 이곳은 버림받은 옷들의 쓰레기통이지. 이제 우리 인생은 끝난 거야.
여기 온 이상 우리에게 갈 곳은 소각장뿐이겠지” “소각장이 뭔데?” “넌 그런 것도 몰라?
쓸모없는 쓰레기들 활활 불태우는 곳이잖아.”
그 말에 구슬이는 소름이 돋아 구슬이 다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어요. 너무 끔찍한 생각이
들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하트잠옷에게 오줌기저귀니 그런 말을 안 했을 텐데. 장미드레스는
오늘도 예나랑 외출을 나갔겠지?”
장난기 가득하던 토끼 후두티마저 그리웠고, 누구보다도 예나의 초롱이는 눈망울이
아른거려 마음이 무너졌어요.
한편으로 자신을 버린 예나가 밉기도 했지만 그 따스했던 품은 잊을 수가 없었어요.
함께 했던 지난날들이 다 꿈처럼만 느껴졌어요. 슬픔이 몰려와 눈물이 났어요.
그때였어요. 갑자기 헌옷수거함이 열리고 커다랗고 두꺼운 손이 구슬이를 잡았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목이 쇠도록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여기저기 다른 친구들도 끌려와 트럭에 실렸어요.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걸까?”
“이제 우리가 갈 곳은 너나 나나 소각장이겠지 한 줌 재로 끝나는 게 원래 옷들의 인생이니까.
넌 아직 어려서 그런 걸 잘 모르겠지만 난 우리 주인아저씨가 구두쇠여서 무려 25년간이나
입으셨지 뭐냐. 그 아저씨에게 사람들은 모두 다 돈 안 쓰고 성질 안 좋은 나쁜 사람인줄
알았지만 남몰래 불쌍한 사람도 많이 도와주고 착하신 분이야. 지금은 아프고 병원에 계셔서
나를 버리게 되었지만 그분은 옷들도 불쌍하다며 자신이 땀 흘려 일한 50벌의 헌 바지도 다
옷장에 보관했단다.”
덜거덕거리는 비포장 길을 달리는 바람에 가죽잠바 아저씨의 목소리도 덜덜 떨려왔어요.
“정말 좋은 주인이시군요. 저는 고작 일 년밖에 우리 주인하고 있지 못 했어요”
“내가 보기에도 말짱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네가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쫓겨나게 된 거냐?”
“예나는 어린애라서 저에게 빨리 싫증이 났나 봐요. 생일 때 다른 장미원피스 선물을 받은
이후론 제가 이상하다면서 이웃동생에게 줬는데 그 애도 제가 마음에 들지 않다고 저를
버렸어요. 너무 속상해요.”
구슬이는 자신의 처지에 목이 메어왔어요.
“너무 상심하지 마라. 내가 한복 할머니한테 들은 얘기로는 옛날에는 우리 나라가 가난해서
사람들이 옷을 아주 오래 입었다는 구나.”
가을을 맞은 가로수에서 단풍이 든 낙엽들이 날아와 가죽잠바 아저씨는 잠시 말을 멈췄어요.
“얼마나 오래 입었어요?” “글쎄, 나 정도는 보통이었고 자자손손 입을 때도 많았겠지. 그리고
떨어지 고 헤져도 다른 천으로 덧대거나 심지어는 뜨개 옷 같은 것은 덧붙어 짜서 입었단다.
그래서 이렇게 부자나라가 된 건데. 요즘엔 애나 어른이나 통 아 낄 줄 몰라서 말이야”
“맞아요. 그다지 부자나라도 아니면서요.”
“우리 주인 같은 아저씨만 많다면 선진국이라는 일류국가가 벌써 되고도 남았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야.”
색이 바랜 얼굴의 가죽잠바 아저씨는 가을바람이 추운지 파르르 떨었어요.
“그래도 아저씨는 할아버지께서 안 아프셨으면 버리지 않았을 거 아니예 요?”
“그렇다마다. 아 40년 된 바지도 다 가지고 계신 분이거든. 이번에 병원에 갈 때 내가 눈에 띄지
않았으면 의사들 창피하다고 할머니가 버리지도 않 았을 건데. 혹여 너무 가난뱅이 취급할까봐
부랴부랴 버린 거야. 나야 원망 할 일도 아니지. 살만큼 살았으니....그 할아버지 젊어서 힘이
장사일 때부터 여기저기 안 가본데 없이 호강하고 사업 키우는 거 다 지켜본 산 증인이었단다.
그러니 나야 여한이 없지만 아직 젊디젊은 네가 안타깝구나! 쯔쯧.”
이제 트럭은 산모퉁이를 지나서 커다란 창고가 있는 산 밑의 오솔길을 지나고 있었어요. 논밭의
가을걷이가 끝난 휑뎅그렁한 풍경이 더욱 더 구슬이를 슬프게 하였어요.
“괜찮아요. 그래도 예나는 그동안 저에게 너무나 잘해 줬는걸요. 아직 어 려서 그런 거니 원망은
하지 않아요. 흐흑.” 참았던 눈물이 또르르 볼을 타고 내렸어요.
“불쌍한 것, 이 할애비가 힘이 되어 줄 테니 염려 말으렴”
가죽잠바 할아버지는 구슬드레스의 눈물을 닦아 주었어요. 어느새 트럭은 옷들을 산처럼 쌓인
둔덕에 대고 퍼내기 시작했어요.
구슬이는 그만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어요. 여기저기 옷의 산들이 보였거든요. 이렇게 많은
친구들을 구슬이는 본적이 없었어요.
“할아버지, 무슨 옷들이 저렇게 많아요?” 가죽잠바 할아버지도 놀란 듯 주름 많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두리번거렸어요.
잠시 후 노란 상자를 가지고 온 아주머니들이 옷을 골라 담기 시작했어요. 여기저기 푸른 옷을
입은 아줌마들이 우르르 몰려와 옷을 골라 담는 게 보였어요. 마침내 가죽잠바 할아버지는 빨간
상자에 담겨서 옆으로 옮겨졌어요. 푸른 두건을 쓴 아주머니는 가죽잠바를 들고서
“누가 요즘 세상에 이렇게 낡아빠질 때까지 옷을 입었을까? 별일이네 별 일.”
“아휴, 그런 건 빨랑 저기에 버려. 태워버려야지. 재활용할 수가 없잖아.”
그 말에 구슬이는 귀가 번쩍 띄었어요.
가죽잠바 할아버지는 걱정 말라는 듯이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어요.
“할아버지, 잘 가세요. 너무나 고마웠어요.”
눈가가 촉촉해 왔어요.
“그래, 꼬마야. 나도 반가웠구나. 다 잘될게야. 행운을 빌어주마.” 말로만 듣던 일이 현실이
되고 보니 구슬이는 다리가 후들거리지 시작했어요. 이번에는 다른 아줌마가 구슬이를 집어
들었어요. 가슴이 먹먹해 왔어요.
“어머나, 세상에. 이렇게 예쁜 옷을 누가 버렸을까? 될 수만 있다면 우리 손녀딸 가져다
입히고 싶네. 그랴.”
‘그래요. 할머니 저를 손녀딸에게 입혀 주세요.’하고 사정하였어요. 두 손을 모아 기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아악! 소리 지를 틈도 없이 손마디가 나무옹이 같은 그 할머니는 거친
손가락으로 구슬이를 만지작거리더니 노란상자로 던져 넣었어요.
쿵하고 주위를 둘러보던 구슬이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세상은 온통 어둠 투성이의 찜
솥에 빠진 듯이 컴컴할 뿐이었어요. 뜨거운 입김에 구슬이는 깜짝 놀라 정신이 들었어요.
그러나 또 다시 돌돌 말린 채로 포장지에 싸여서 어디론가 끌려갔어요.
“이제 정말 소각장이구나!”
몸이 탈거라는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해졌어요. 아마도 그 소각장에 다 와서 뜨거운가 봐요.
뜨거운 기운에 몽롱해진 구슬이는 꿈의 나락으로 빠져들었어요.
아침햇살이 눈이 부셔 구슬이는 부스스 일어났어요. 갑자기 환해진 창문이 보이고 길가에
수 많은 사람들과 버스들 그리고 야자수들이 가득한 곳이었어요.
“이상하다, 여기가 어디지?”
그러고 보니 방금 창문의 커튼을 연 사람도 까만 피부를 가진 여자였어요.
잠시 주위를 둘러 본 구슬이는 마침내 자신이 아주 먼 곳에 왔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럼 내가 죽은 게 아니었었나?’
까만 얼굴을 한 그 여자는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으면서 뜨거운 열기로 옷을 옷걸이채로
다리고 있었어요.
뜨거운 열기가 올라와 구슬이는 숨이 턱 막혔어요. 아! 이 기분! 소각장이 아니었나 봐요.
이제 보니 구김살을 펴느라 다림질을 해 주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예나를 만난 날처럼 귀엽고 까만 피부의 마네킹에 걸어주는 게 아니겠어요?
“이럴 수가”
구슬이는 너무 기뻤어요. 해질 무렵이 되자 예나만한 꼬마가 엄마의 손을 유리창 밖에서부터
이끌고 들어와 구슬이를 자꾸만 가리키면서 사달라고 떼를 썼어요. 까만 피부에 빨간 원피스를
입은 그 엄마는 마침내 구슬이를 딸의 몸에 입혀 주었어요. 여자아이는 거울로 가서 흡족한
표정으로 한 바퀴 빙 돌아요.
‘아하, 저 표정은 예나가 처음 나를 입어본 날 똑같은 표정이야”
야자나무가 줄지어져 있는 길을 가며 구슬이는 눈시울을 붉히며 미소를 지었어요.
“가죽잠바 아저씨 고마워요. 행운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거든요.”
여자아이는 구슬이를 꼭 안고 엄마와 흥얼거리며 집으로 갔어요. 바람에 야자나무들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하였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