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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세 나라(영국. 독일. 러시아) 여행기
(1996. 7. 21 - 1996. 8. 1)
제 1 일 ( 7 월 2 1 일 )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이라 설레고 부푼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비가 내리는 김포공항을 이륙한 지 20여분이 지나자 창밖으로 밝은 햇살 아래 흰 구름바다가 펼쳐지는 것을 보니 하늘을 날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넓은 기내에 500여 명의 승객과 승무원들,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TV 화면에 수시로 안내되는 항로 진행 상황을 보니 놀랍기만 했다. 시속 960-1,000km의 속력으로 10,000Km 높이의 하늘을 날아 중간 경유지인 파리의 샤롤르 드골 空港에 닿으니 현지 시간 18시 55분(한국시간 24시 55분)이다. 서울에서 7월 21일 13시 45분에 출발하여 파리 도착이 우리 시간으로 24시 55분이니 낮 시간만 11시간을 날아온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우리 시간으로 22일 새벽 1시 10분, 한참 꿈나라를 헤맬 시간인데 햇빛 가득한 대낮이라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바꿔 타기 위해 잠시 머문 파리의 오후는 상황이 우리나라와 흡사했으나 무더위를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기다리는 두 시간 여 동안 공항내의 면세점에서 쇼핑을 하기도 하고 휴식을 하고 있는 중에 서울에서 어학연수를 왔다는 중학교 1.2 학년 학생들을 만났는데, 프랑스 청춘 남녀들이 대기실의 의자에서 짙은 사랑 표현을 하는 모습을 흥미 있게 보고 있었다. 어학연수라는 이름의 무분별한 해외여행이 분별력이 부족한 어린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이나 끼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프랑스 현지 시간 21시 15분, 저녁 햇빛을 받으며 드골 공항을 출발하여 1시간 만에 영국의 런던 히드로空港에 도착했다. 프랑스와 1시간의 시차가 있는 영국의 현지 시간 21시 20분이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유럽의 여름은 열 시가 되어도 밤이 아니라 막 어둠살이 퍼지는 초저녁 시간이라 전기불도 채 켜지지 않은 곳이 많았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버스를 타고 호텔(hilton olympia)에 도착하여 (10시 20분) 방을 배정 받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오랜 시간의 탑승의 여독과 시차에서 오는 생활 리듬의 변화 때문인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제 2 일 ( 7 월 2 2 일)
온 밤을 불면으로 새다가 밖이 훤하기에 눈을 떠보니 새벽 4시. 창밖으로 보이는 숲에 덮인 런던의 정경을 보며 아침을 맞았다. 공원을 방불케 하는 우거진 수풀과 그 사이사이 자리한 이국적인 정감을 자아내는 고색창연한 건물들, 간간이 승용차 몇 대가 오가는 한적한 거리 풍경이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달라 보였다. 일찍 잠을 깬 같은 방의 李선생님과 호텔 인근의 거리의 정경들을 둘러보고 신기한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보행자가 신호를 조작하는 신호 체계가 신기했지만, 거리 구석구석 마구 버려진 담배꽁초와 빈 병, 초등학교의 초라한(?) 외형들을 보며 선진국 영국에 대해 가졌던 선입견이 조금은 흐려지기도 했다.
7시 30분, 빵과 과일, 소시지, 각종 고기 요리로 호텔 식당에서의 아침식사를 마치고 전세 버스를 타고 첫 방문지인 옥스포드(Oxford)로 향했다. 옥스포드로 가면서 본 시골의 정경은 그 자체가 공원이었다. 가도 가도 산하나 보이지 않는 끝없이 넓은 평원 곳곳에 숲이 우거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밭과 목장과 집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는 모습이 사진이나 그림에서 본 정경 그대로였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영국은 그린벨트를 처음으로 지정하여 개인 소유 녹지 면적이 세계 제1위이며 수도인 런던에 100만평 이상의 공원이 6개나 되고, 작은 공원까지 합치면 공원만도 60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래서 토끼, 여우, 노루 등 자연 동물들이 많고 심지어 밤이 되면 런던 도심지에까지 여우가 출몰한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국토의 자연 자원을 훼손시키지 않고 아름답게 가꿔 가는 영국인의 자연보호 의식이 놀라웠다.
런던에서 버스로 40여분을 달려 옥스포드에 닿았다. 옥스포드는 도시 전체가 온통 대학촌으로 구성된 인구 12만의 작은 도시로 도시 곳곳에 800년 전통의 명성에 어울리는 서점과 가게들이 늘어서 있고, 방학인데도 공부하러 오가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대학의 캠퍼스가 우리나라 대학과는 달리 한 울타리 속에 있지 않고 각 전공 분야별로 대학과 연구소가 따로 독립되어 있으며, 2개의 여자대학과 7개의 대학원을 포함해 35개 전공 단과 대학에 교직원이 2,000명, 학생 수 12,0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Oxford는 명성에 걸맞게 입학 자격이 까다롭기로 이름이 나 있고 졸업을 할 때에는 대학의 권위를 상징하는 라틴어 졸업장을 수여된다고 한다. 켐브리지와 함께 영국 최고 권위의 대학으로 이 대학 출신들이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전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안내자는 이들 대학의 권위는 졸업장이 아니며, 연구의 성과 여하가 권위의 중요한 관건이 된다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또한 대학은 오로지 공부나 연구를 하는 곳일 뿐 체육, 취미, 오락 등을 학생의 자율에 맡긴다는 방침 아래, 대학 내에 그런 활동을 할 공간이나 시설은 전혀 두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소위 명문대에 입학하기 위해서 목을 매는 일도 없고, 학생이나 학부모 모두가 능력과 적성에 따라 교사가 지도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결정하기 때문에 대학 진학자 수는 전체 졸업생 27% 수준에 머문다고 하니 여기서도 선진국 영국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옥스포드 시내 상가 건물에 있는 주점에서 맥주로 목을 축이고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빵과 고기 요리로 점심식사를 하며 잠시나마 즐거운 휴식시간을 가졌다.
식사를 마치고 오후 1시 20분에 Oxford를 출발하여 버스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BLENHEIM PALACE로 향했다. 처칠 생가로 알려진 이곳은 사실은 처칠의 8대조인 말보르公(John 1st Duke Of Marlborough)이 1704년에 프랑스와의 전쟁 승리 기념으로 앤여왕(Queen Anne)으로부터 하사 받은 莊園이라고 하는데 현재도 그의 15대 손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 규모가 엄청나서 면적이 무려 330만평에 달하며 구역 내에 3개의 큰 정원이 있고 호수, 목장은 물론 철도까지 부설되어 있어 하나의 저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면적이 넓은 고을(邑面)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릴 듯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숲 속의 넓은 밀밭, 양떼가 풀을 뜯고 있는 넓은 목장, 거대한 인공 호수, 그 위를 가로지르는 아치형의 대형 돌다리, 육중한 무게를 지닌 고풍스런 대형 석조 건물들 등 영국 귀족의 부유한 생활의 모습을 짐작케 하는 모습들이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궁전 안으로 들어서자 놀라움은 극에 달했다. 거대한 돌기둥, 대형 천장에 그려 놓은 그림들, 갖가지 사연을 지닌 수많은 방들, 방마다 그려진 대형 초상화와 그림, 거대한 돌에 아로새겨 만든 섬세한 조각들, 말보르公 일가의 초상화와 각종 유품들, 17C에 만들었다는 24K 순금조각, 중국, 영국, 프랑스에서 건너온 각 가지 모양의 화려한 도자기를 보면서 인간이 지닌 힘의 위대함과 함께 한 때 세계를 제패하면서 약자 위에 군림했던 지배자로 말미암아 아픈 역사를 살아야 했던 민중의 삶의 모습이 생각나서 슬그머니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 수많은 방과 유물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은 단연 처칠 기념관이었다. 군인과 저널리스트, 정치가, 문인으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처칠(Sir Winston Churchill. 1874∼1965)의 전 생애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갖가지 기구, 육성, 친필, 만년에 그렸다는 그림들은 물론 처칠의 어머니가 파티 중 갑자기 산기를 느껴 처칠을 출산했다는 산실과 5세 때의 소녀같이 긴 모습의 사진과 그 머리털까지 그대로 보존 전시하고 있었다.
작고 하찮은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소중히 보존해 가는 영국인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옛것을 잘 갈무리하여 그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이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문화인의 자세를 찾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유구하고 찬란한 역사를 가졌다 한들 올바른 역사, 문화의식이 결여되어 있으면 그 의미는 퇴색하고 말 것이다.
처칠 생가 방문을 끝으로 영국 첫날 관광을 마치고, 오후 6시, 런던 시내의 한 식당인 ‘신라’에 가서 콩나물국과 김치 반찬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만리 타국 런던에 우리 식당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거기에서 배낭여행 온 학생들을 만나 잠시나마 대화를 나누고 식당 입구 계산대에 비치되어 있던 한인신문 ‘영국 생활’을 보니 무척 반가웠다. 식당에서 버스로 40분이 걸려 숙소인 힐튼 올림피아호텔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다가 단장님 방으로 가서 한국 소주를 마시며 오늘의 여정을 화재로 환담을 나누다가 늦게야 잠자리에 들었다
제 3 일 ( 7 월 2 3 일 )
오늘부터 런던 시내 관광에 들어간다는 안내자의 지시에 따라 아침식사를 마치고 9시에 전세버스로 호텔을 출발하여 30여분 만에 하이드 파크(Hyde Park) 앞에 도착했다. 공원에 들어가기 전, 도로 건너편에 있는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왕립 음악학교와 제국공과대학, Albert Corart 알버트公 동상 및 세계적인 각종 무도회와 음악회, 미인대회가 열리는 곳이라는 8천여 좌석의 Royal Hall 등을 둘러보았다. 건물 입구에 B.B.C방송이 주관하는 96PROMS'의 현수막이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모두가 역사 깊은 석조 건물들인데, 조형미도 놀랍거니와 그 보존 상태가 완벽함에 경탄하며 불과 10∼20년도 지나지 않아 재건축을 해야 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 겹쳐져 고개를 돌렸다.
하이드 파크는 도심 속의 대표적인 공원으로 본래는 왕실 가족들이 사냥을 즐기던 곳(Kensington Palace)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일반인들의 휴식처가 되어 고목이 듬성듬성 서 있는 넓은 잔디 사이로 난 길에 개를 몰고 나온 노인들과 청춘남녀들이 산책과 휴식을 즐기고 있다. 나무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곳은 겨울에도 푸른 잔디를 볼 수 있을 만큼 잔디가 특히 아름다운데 우리와는 달리 잔디 위를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도 있었다. 잔디는 그 끈질긴 생명력으로 밟을수록 더욱 야무진 모습으로 생명을 이어 간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라고 한다. 어릴 적 책에서 읽은 영국 어린이와 잔디밭에 떨어진 모자 이야기가 떠올라 잠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하이드 파크를 나와 오늘의 특종이라는 곰털 모자를 쓴 근위병의 교대식을 보기 위해 버킹검 궁(Buckingham Palace)으로 향했다. 여왕의 재중(在中)을 알리는 로얄 스텐다드旗가 휘날리고 넓은 광장 앞 빅토리아여왕 동상 부근에 이색적인 이 교대식을 보기 위해 이미 수많은 관광객이 운집해 있었다. 30여분을 기다려 11시 20분부터 시작된 교대식을 본 느낌은 한 마디로 기대 이하였다. TV에서 흥미롭게 본 근위병의 특이한 복장과 동작이 꼭 군국주의 시대의 규격화된 군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이걸 보겠다고 모여든 사람들 속에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 유난히 많다는 게 왠지 부끄러웠다.
11시 30분, 버킹검宮을 떠나 피카델리 廣場을 지나 차이나타운(China Town)에 있는 중국음식점 '東海'에서 중국요리로 점심을 먹었다. 차이나타운의 번성한 모습을 보면서 아직은 미미하게 살아가는 우리 교민들의 밝은 미래를 그려보았다. 런던의 번화가라고 하는 피카델리 광장에 뚜렷한 모습으로 서있는 우리나라 회사의 거대한 광고탑 ‘SAMSUNG’에서 그런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오후엔 그 유명하다는 大英博物館(Brithish Museum)을 찾았다. 워낙 방대한 규모에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전시 품목의 설명을 읽는 데만도 3개월이 넘어 걸린다는 게 안내자의 설명이다. 1753년에 개관하여 전 세계의 진품 명품들은 거의 모두 전시하고 있다는 이 박물관은 웅장한 석조 건물자체만도 이미 귀중한 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구에서 조금 들어간 2층 계단에서 일본을 통해 건너온 우리나라의 대형 탱화와 청동기, 고려청자, 조선시대의 장기판과 바둑판을 만났다. 우리 것이라는 사실이 반가웠으나 한편 귀중한 문화재가 이곳에 전시되기까지의 과정에 생각이 미치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안내자의 뒤를 따라 이집트 유물 전시관에 들어서자 수없이 많은 유물이 또한 우리를 압도했다. 고대 이집트의 수많은 자수, 장난감, 악기, 거울, 빗, 장신구, 종이, 제기, 인형, 자, 천칭, 설계도, 그리고 피라미드에서 나온 각종 순장 유물과 B.C 3400년 이집트의 미라와 미라 제작 과정을 보여 주는 자료는 물론, 클레오파트라의 미라까지 원형 그대로 전시하고 있는 데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 많은 유물들이 대부분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불공정한 매매와 기증을 빙자하여 약탈해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곳이 바로 정복자 대영제국의 실상을 볼 수 있는 지배 역사의 전시장이라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의 열쇠가 된 크레타스톤 역시 웰링톤 전투 전승 전리품으로 프랑스에서 들여온 것이라니 영국인들의 문화 유적에 대한 집착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폭파된 파라테논 신전의 거대한 석조 부조 파편과 그리스 신전의 석조 건물, 1개의 무게가 무려 16t이나 된다는 앗시리아 신전 입구의 기둥과 앗시리아 신들의 모습을 조각한 석조 부조물 등 상상을 초월한 각종 유물을 원형 그대로 박물관까지 옮겨와 전시하고 있는 모습에서 영국인들의 배포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편,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역대 문호, 모차르트를 비롯한 악성, 칸트를 비롯한 위인 명사들의 친필 원고, 악보, 서간문 등과 함께 우리의 앞선 금속활자 기술 수준을 말해 주는「春秋經典集解」와 1885년에 발행한 우리나라의 초기 우표가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영국은 많은 비난과 비판 속에서도 역시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2시간 동안 走馬看山식으로 박물관의 일부 전시관을 둘러보고 3시 30분 템즈江의 워털루다리를 찾았다. 영화 ‘애수’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이 다리가 세워진 지 100년도 더 됐다는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무너진 성수대교가 대조적으로 떠올랐다. 워털루 다리를 건너 버스를 타고 가면서 다우닝가 1번지의 수상 관저와 국방성, 각 공공 기관의 건물을 스쳐 갔는데 역시 대형 석조 건물의 위용과 미적인 기둥과 벽면마다 섬세한 솜씨로 조각된 부조가 우리 일행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버스에서 내려 9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거대한 돔형 지붕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둘러보았다. 세계 감리교 본부 건물로 쓰인다는 이 사원 안에는 3000여 명의 성직자 영웅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찾은 시간엔 마침 기도 중이었고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 입구와 회랑을 돌며 사원의 구조와 조각품 일부와 벽면에 새겨 놓은 이름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런던은 건물도 다리도 온통 돌로 만들어진 느낌이고 도시 전체가 사람의 손으로 다듬고 가꾼, 인간의 땀과 지혜가 창조해 낸 예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원을 떠나 시 중심가로 들어와 4시부터 1시간 30여분 동안 백화점 쇼핑 시간을 가졌다. 소나기가 쏟아져 다른 사람의 우산을 쓰고 다니면서 몇 백화점 매장을 둘러보았는데 운영 형태가 우리와는 달리 전문 백화점 형태로 되어 있어서 한 백화점에서 개성이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른 물건을 구입할 수 없었다. 의류와 어린이용 백화점을 둘러보는 데 제한 된 시간을 다 보냈다. 한국의 유학생들이 아르바이트하는 한국 고객을 위한 의류 백화점이 있기는 하나, 세일 중이라는데도 물품의 가격이 너무 비싸 아이쇼핑만 해야 했다.
비를 맞으며 한국음식점 ‘名家’를 찾아 된장찌개로 저녁밥을 맛있게 먹었다. 역시 이곳에도 한국인 고객이 꽤나 북적대고 있어 한국인 여행객이 많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저녁 식사 후에 Raymond Bar 근처로 자리를 옮겨 쇼핑을 하고 8시부터 1시간 30분 동안 Live Show를 관람했다. 출연자들의 대담하고 거리낌 없는 연기와 그것을 자연스럽게 관람하는 관중들의 모습을 보면서 문화의 차이에 따른 사고의 다양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9시에 Taxi로 호텔까지 와서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제 4 일 ( 7 월 2 4 일 )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든 탓인지 새벽 4시도되기 전에 잠을 깼다. 창밖을 내다보니 훤하게 동이 트고 있건만 사방이 온통 다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아무리 다시 자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아 TV를 켜고 애틀랜타 올림픽 게임 실황을 보니 우리나라 전적이 예상보다 부진하여 금 3, 은 1, 동 2로 6위를 달리고 있었다. 실망하고 TV를 끄려 하는데 놀랍게도 SAMSUNG 광고가 나오지 않는가? 반가운 마음에 다시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6시 30분 방 동료인 이 선생과 함께 호텔 인근 주택가를 둘러보았다. 어떤 골목인가를 지나다가 고색창연한 4층 건물 벽면에 “PHIL MAY(1864∼1903). Artist lived and worked here.”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영국인들은 예술과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임을 다시 느꼈다. PHIL MAY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는 없으나, 예술가가 살았던 집을 기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처음으로 집에 전화를 하였더니 별 일 없다는 아내의 말이 바로 곁에서 하는 말처럼 맑게 들려 반가움이 한결 더했다.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09시 호텔을 출발하여 템즈江을 사이에 두고서 웅장한 석조 건물의 국회의사당을 보고 웰링톤 장군의 동상과 빅토리아 역을 경유하여 런던 브리지(London Bridge)를 지나 11시 30분에 런던의 명물 타워 브리지(Tower Bridge)에 닿았다. 1860년대에 완공했다는 이 다리는 부산의 옛 영도다리처럼 큰 배가 드나들 때는 다리의 중간 부분이 떨어져 위로 들리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입장표를 사서 탑에 오르니 각 층마다 다리의 시공에서부터 완공까지의 과정과 역사를 대형 멀티비전, 실물 등으로 다양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전통과 역사를 존중하는 영국인의 놀라운 모습을 여기서도 볼 수 있었다.
이어서, 시티화재 기념탑을 지났는데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대형화제로 이 지역의 ⅓이 소실되어 지금의 건물은 대부분 그 이후에 다시 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집들은 전통적인 가옥이 즐비하던 다른 곳과는 달리 콘크리트로 지은 고층 건물이 의외로 많았다.
넬슨 제독의 동상, 영국 미술관, 각국 대사관이 늘어서 있는 트리팔카 광장을 거쳐, 10년 전의 고객 이름과 식성까지도 기억한다는 런던 최고급의 RITZ 호텔과 종업원만도 6천여 명에 이른다는 왕실 전통 백화점 Harrods 앞을 지났는데, RITZ 호텔 맞은편에 위치한 대한항공 사무실이 반갑게 다가왔다.
오늘은 런던 관광 마지막 날이라 버스를 타고 가면서 자연사박물관, 크롬웰 hospital 앞을 빠른 속도로 돌아 나와 윈즈城(Windsor Castle)으로 가는 한적한 마을의 한식당 '청송(Chung Sol)'에서 된장찌개로 점심을 먹었다. 이 식당에서 외국인과 상당수의 영국 주재 상사원, 관광객을 만날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식당 주변 상가를 둘러보다가 중고품 가게가 있어 들어가 보았다. 쓰다 내놓은 신발이며 그릇, 가구, 옷가지, 지갑, 헌 책, 안경 등 갖가지 생활 용품이 진열되어 있는데 그것을 사가는 고객도 꽤 있었다. 검소하게 살아가는 영국인의 생활의 한 단면을 보면서 과소비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나라 사람들 생활 모습이 떠올라 씁쓸했다.
오후 1시 식당을 떠나 윈즈城으로 가면서 템즈강 상류의 청정한 물과 강 따라 숲을 이룬 나무들, 넓은 들판, 조화를 이룬 평화로운 시골 풍경이 가깝게 다가왔다. 런던과는 달리 이곳 사람들은 자연 환경만큼이나 심성이 순박하고 대대로 아름다운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는 안내자의 설명이 아니라도 고향을 찾은 것 같이 푸근한 느낌이 든 것은 나만의 감정이 아닐 것 같았다. 영국의 시골 풍경 역시 조용하고 평화롭고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자동차와 행인이 적고 평안하게 쉴 수 있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활동적인 젊은이에겐 다소 답답할지 모르나 노인들이 지내기엔 좋은 곳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처럼 영국에도 시골에서 대대로 전통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대개 노인들이라는 게 안내자의 설명이다.
템즈江을 따라 지붕 꼭대기에 여러 개의 굴뚝이 난 고색창연한 방갈로가 있는 시골길을 따라 30여 분만에 윈즈城에 도착하였다. 1583년 영국 왕의 별장으로 지었다는 이 성은 평원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 가까이에 여왕 전용 직선 도로까지 갖추고 있어 영국 왕의 권위를 실감하게 한다. 한편 이 성 구역 내에서 석유가 발견되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개발을 못하고 자연 환경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안내자의 말을 듣고 주민 위주의 행정을 펴는 민주주의의 본고장 영국의 참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돌로 쌓아 지은 거대한 규모의 이 성 안으로 들어서자 당시의 위용을 과시한 칼과 총, 대포는 물론 그릇, 자기, 침대, 의자, 가구, 그림 등 상상을 초월하는 진기한 갖가지 유물들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어 BLENHEIM PALACE와 대영박물관에서 느끼던 당시 대영제국의 위력과 함께 약소국의 정복자 영국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아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기분이 교차되는 걸 숨길 수가 없었다.
당초 연수 계획서엔 윈즈城을 관람하고 영국의 명문 私學 이튼칼리지를 찾는 것으로 일정이 잡혀 기대가 컸었는데, 지금이 방학이라는 이유로 학교 방문이 취소되어 윈즈城에서 멀리 숲 속에 자리한 학교 건물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440년 70명의 왕실 장학생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전통적인 영국 신사를 양성한다는 목표로 학생 모두가 연미복을 착용하고 최소한 5종 이상의 스포츠를 즐길 수 있어야 하며, 다른 학교에서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체벌도 허용한다고 한다. 세계적인 수재가 운집한 이 학교 출신은 대개 세계 각국의 지도자가 되는 만큼 공부도 공부려니와 재학 중 맺은 인간관계는 자기 성장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입학 조건이 엄격하기로 정평이 나 있어 왕실 자녀 중에도 이 학교 출신은 극소수에 이르렀는데 최근 찰스 왕세자 아들이 이 학교에 입학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이 크게 기뻐했다는 후문이 전해질 정도라고 한다. 연간 학비가 2,000만원이나 되는 이 학교는 현재 1,200명이 재학하고 있으며 한국인 졸업생도 2명이 있다고 한다.
3시 45분 다음 목적지인 독일로 가기 위해 윈즈城을 뒤로 하고 히드로공항(heathrow Airport)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면서 가이드는 영국이 세계 어느 곳보다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라는 말과 함께 현재 런던에만도 900여 명의 유학생을 포함해 상사 주재원, 교민 등 1,000여 명이 거주한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여기서 나는 지금 한창 세계화를 부르짖고 세계를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만큼 우리나라도 멀지 않은 날에 중국이나 일본처럼 교민의 수가 많아지고 그 위상도 한층 높아질 것이라는 희망 섞인 확신을 가져 보았다.
오후 4시 5분, 히드로空港에 도착하여 공항 대기실에 앉아 식당 ‘청송’에서 준비해 온 김밥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탑승 수속을 밟는 2시간 여 동안 공항 내 면세점 상가에서 쇼핑을 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출국 당시 어떤 물건도 사지 않겠다는 뜻을 지켜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볼펜 하나 사지 않았는데 장 선생이 아무리 그래도 부인에게 줄 선물 하나는 사야 되지 않겠느냐는 권유에 못 이겨 영국 돈 30파운드를 주고 스카프 하나 (22파운드)와 아들놈에게 줄 혁대 하나(8파운드)를 샀다. 답답한 대기 시간을 끝내고 6시 35분 히드로空港을 출발, 프랑크푸르트(Frankfurt)로 가는 비행기(Lufthansa)를 탔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30여분이 지나자 기압 차 때문인지 귀가 심하게 아프고 속까지 편치 않아 저녁식사로 기내에서 주는 빵은 입에도 대지 못했다. 고통스러움 속에서 히드로空港을 떠난 지 1시간 30여분 만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렸다. 썸머타임을 적용한 독일 시간으로 21시 05분에 도착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대기실로 나오니 우리 일행을 찾는 팻말을 든 현지 안내자(황영관 씨)가 이곳에서도 공항 내의 운반 손수레와 주변 곳곳에서 낯익은 우리나라 회사의 이름(SAMSUNG, HYUNDAI, DAEWOO....)을 만날 수 있어 만리타국에서 고향 까마귀를 만난 것처럼이나 반가웠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버스를 갈아타고 20여분을 달려 프랑크푸르트 교외에 위치한 호텔 (Holiday Inn Frankfurt Main Tauns Zentrum )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경이었다. 호텔의 규모는 크고 깨끗했지만, 한적한 변두리에 위치한 호텔이라 보이는 것이라고는 넓은 밀밭 뿐 집 한 채 가게 하나 없어 밖에 나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旅裝을 풀고 TV를 통해 애틀랜타 Olympic경기 실황을 보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제 5 일 ( 7 월 25 일 )
전날 밤 일찍 잠자리에 든 때문인지 6시도되기 전 잠이 깨어 창밖을 내다보니 잔뜩 찌푸린 하늘이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만 같았다. 호텔을 나와 주변의 밀밭 길을 거닐며 같은 방의 이 선생과 사진을 찍기도 하고 누렇게 익은 밀 이삭을 관찰하기도 했다. 우리 밀에 비해 이삭과 낟알의 크기가 다소 크긴 하나 밀은 역시 밀이었다.
9시 5분, 버스로 호텔을 출발하여 목적지인 하이델베르그(Haidelberger)로 향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여 3년 만에 완공했다는 8차선의 고속도로[Autobahn]를 달리며 차창으로 바라본 전경은 듬성듬성 보이는 나지막한 구릉과 야트막한 산 사이로 넓은 평원, 그리고 많은 평지 숲과 그 속에 흩어져 있는 마을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독일은 전 국토의 53%가 농경지, 32%가 숲, 15%가 주거지로 국토의 활용률이 높고, 자연 녹지가 많아 쾌적한 생활을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라고 한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 유명한 아우토반은 시속 130㎞를 권장할 뿐 제한 속도는 없으나, 우리 일행이 탄 버스는 내내 버스의 제한 속도인 시속 100㎞를 넘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의 강’이라는 이름의 라인江을 등지고 100㎞를 달려 공업과 대학의 도시 하이델베르그에 도착하자 끝내 참았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이델베르그는 인쇄, 면방공업이 발달했지만, 대학의 도시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인구 13만 중 3만 이상이 학생이라는 이 도시의 중심 대학은 1196년에 설립되어 9백 여 년의 역사를 지닌 하이델베르그大學이다. 하이델베르그는 古城과 대학이 위치한 舊시가지와 공장과 신식 건물이 즐비한 新시가지로 나뉘어 있다. 도시 중앙으로 넥카江이 흐르고 강 양안(兩岸)으로 독일 전통 양식의 가옥들이 그림같이 놓여있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우선 하이델베르그의 자랑인 하이델베르그城에 오르기로 했다. 비가 내리는 중에 굽은 산길을 돌아 오른 거대한 규모의 이 성은 선제후들이 300여 년에 걸쳐 왕궁으로 축성했다고 하는데, 예텐불 산의 가파른 중턱에 자리 잡은 높은 위치와 수많은 방어 시설, 대포, 총검 등이 요새를 방불케 한다. 궁원 안에 들어서면 1,400년부터 1,620년까지 건축된 궁전과 부속 건물을 통해 당시 성주들이 살았던 주거문화의 실상을 알 수 있고, 파괴된 성곽의 빈 창문을 통해 문화와 역사와 자연이 교차하는 신기한 광경을 볼 수 있다. 이 고성은 팔츠공국의 왕위 계승 전쟁과 1,764년의 낙뢰로 인해 두 번이나 파괴되어 19세기 후반에 폐허가 된 古城을 완전하게 복원하자는 여론이 있어 훼손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고 한다. 만일 그때 폐허가 복원되었더라면 대부분의 원형이 변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정교하게 세공된 건축물 전면이 오염으로 인해 심하게 손상되어 외벽에 조작된 예술품 몇 가지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건축물을 살펴보면 단일한 건축 계획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고 일률적인 건축 기준이나 공통된 건축 양식도 없다는 것이 즉시 눈에 띈다. 서쪽과 남쪽은 거의 장식이 없는 고딕식 건축물임에 비해, 북쪽과 동쪽은 주로 인물 장식으로 가득 찬 르네상스식 웅장한 궁전의 화려한 사각 석조 벽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서 여름 내내 노천 공연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합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흥분을 자아내는 무대가 되고 국내외로부터 몰려 든 수천 관객들은 그 정경에 크게 감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시간을 머무는 동안 우리는 붉은 석재로 쌓아올린 두께가 무려 7m나 되는 이끼 묻은 성벽과 대포정원, 시성 괴테와 뒷날 성주의 부인이 되는 무희 마르인느와의 사랑의 사연이 서린 정원과 비석이 있고, 1460년경 측면 엄호용 성탑으로 건축했다는 동남쪽 구석의 화약 塔이 보인다. 이 탑은 외경이 24m, 외벽의 두께가 6.5m에 달한다. 1693년 프랑스군이 폭파를 단행하여 두 동강이 나면서 한 쪽이 무너져 내려 내부가 훤히 드러나 보인다. 그리고 이탈리아 출신의 익살광대 술통지기 페어케오(Perkeo)의 손때가 묻은 초대형 술통( ‘GROβES FAβ)이 보인다. 이 술통은 1751년에 큰 떡갈나무 등걸 130개로 만들었다는 이 술통엔 공물로 받아들인 포도주 221,726 L을 담았다고 한다. 이 성이 역대의 왕궁이면서 튼튼한 방어 시설이 많은 요새라는 점이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을 잊고 지낸 날이 많지 않음을 시사해 준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는 말이 떠오른다.
약속된 출발 시간에 쫓겨 성의 뒷 정원에 있다는 괴테의 胸像을 보지 못하고 아쉬움을 안은 채 城을 내려와 시청과 교회와 헤라클레스 분수대가 있는 시장 광장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쇼핑을 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걸어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하이델베르그大學街를 찾았다. 이 대학 역시 Oxford처럼 校門이 따로 없고 대학 건물 사이사이 상점과 식당, 주점이 있어 시민과 학생이 한데 어울려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대학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우리가 먼저 찾은 新 대학은 900년 전통을 간직한 독일 최고의 대학다운 옛 건물도 안 보이고, 그렇다고 우리네 대학 같이 넓은 캠퍼스와 높은 담도 없어 안내자의 설명이 아니라면 이곳을 대학이라고 여길 만한 어떤 모습도 찾을 수가 없었다. 舊 대학에는 바로크식 지붕과 예술감이 넘치는 정문과 사자 분수대가 있으나, 역시 규모는 크지 않다. 거리 여기저기에 평범한 건물의 무슨무슨 연구소와 강의실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겉모습만으로는 이 대학이 세계 지성들이 모여든 학문과 교육의 전당이라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대학은 루터, 슈만, 체르니, 막스 베버, 칼야스피스 등 수많은 세계적인 인물들이 거쳐 간 자랑스러운 전통과 역사를 간직한 知性의 고향이다. 연일 세계 각국에서 모여 든 사람들이 지성과 낭만을 즐기는 곳이다. 그래서 하이델베르그를 학문과 교육의 도시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리나라 대학의 외형과 내실의 문제 그리고 우리 대학의 현주소가 떠올라 눈을 감고 싶었다.
대학 신관 앞에 새겨진 ‘움직이는 정신’이라는 건학 이념과 총장의 600주년 기념 캐치프레이즈 “전통과 함께 미래로”를 배경 삼아 일행이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영화 ‘황태자(칼 하인리히)의 첫사랑’의 무대라는 거리를 거닐며 지성과 낭만이 함께 숨쉬는 도시, 학문과 교육의 도시에 사는 하이델베르그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여기서도 한국의 간판 식당 ‘황태자’와 선물 가게, 한국어판 안내책자를 만날 수 있었다. 독일은 여러 유럽 국가 중에서 우리 교민의 수가 가장 많은 곳이라고 한다. 20여년 前 간호원으로, 광부로 이곳에 왔다가 정착해 살고 있는 사람, 유학생, 상사 주재원 등 우리 교민의 수가 수천 명에 이른다는 안내자의 말이 아니라도 곳곳에서 한국 사람들과 한국 회사 광고판을 발견할 수 있어 우리나라 국력의 伸張度를 실감할 수 있었다.
오후 1시 중국 음식점인 ‘中國亭酒褸’에서 맛있는 중국요리로 점심을 먹고 프랑크푸르트인 마인(Frankfurt in Main) 시내로 돌아 왔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는 두 곳으로, 하나는 마인江의 프랑크푸르트, 다른 하나는 오데르江의 프랑크푸르트인데 우리가 찾은 프랑크푸르트는 마인江 프랑크푸르트였다
천 이백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프랑크푸르트는 2차 대전 때 도시의 70%가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라인江, 모셀江, 넥타江의 연결 지점으로 낭만과 이상적인 상업 관광의 명소 구실을 하고 있다. 유럽 원거리까지 연결되는 국제공항이 있는 항공 교통의 중심지로 많은 기업 회사와 은행, 국제 전시장, 연방 정부 등이 있으며 주 정부의 각종 협의회와 국제기구 대표회의의 개최지이기고 하다. 또한, 프랑크푸르트는 경제 중심지로서 역사 깊은 건물과 맨하탄 풍의 고층 빌딩이 함께 어울린 도시이다. 40개 이상의 각종 박물관과 20개 소의 국제적인 극장, 수많은 도서관과 각종 연구소, 괴테대학, 공과대학을 비롯한 많은 명문 대학이 위치한 독일 최고의 문화 도시이다.
프랑크푸르트 시내에 들어와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김씨상가’에 들러 한 시간 동안 쇼핑을 하고 대문호 괴테의 생가를 찾았다. 당초 계획엔 괴테 생가 방문이 없었으나 우리 연수단 일행이 국어 교사라는 말을 듣고 문학에 남다른 관심과 식견을 가진 안내자가 특별히 이곳으로 안내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괴테 생가는 고딕양식의 5층 건물인데, 엄밀히 말해 생가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괴테가 6세 때 당시 황제의 관리(시의원 급)이던 아버지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본래의 건물을 대폭 개축하였고, 또 다시 2차 대전 때 많은 부분이 파괴되어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집 안에 들어서자, 7년 전 MBC가 기획 취재하여 방영한 세계 문학 기행에도 참여했다는 안내자는 시종 차분하고 조리 있는 말로 괴테의 생애와 문학에 대해 깊이 있는 설명을 해주어 일행 모두가 감동 속에 괴테 문학 세계로 빠져들었다. 특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바탕이 된 롯데와의 사랑 이야기를 할 때는 자신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상황에 어울리는 어조로 작품 속에 나오는 대화 내용까지 인용해 가면서 우리의 귀와 눈을 사로잡았다. 부모들은 어린 괴테를 위해 미술, 음악 교사를 두었고, 프랑스가 독일을 침공할 때 점령군 사령관이 그 집에 머물게 하여 그로 하여금 괴테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칠 수 있도록 배려한 이야기와 흔적 등을 듣고 보며 그 같은 부모가 없었다면 과연 시성 괴테가 있을 수 있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괴테 부모가 괴테의 공부하는 모습을 살피기 위해 만들었다는 감시창(監視窓) 이야기와 할머니가 선물해 준 상자 속의 인형극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가 직접 인형 극본을 써 보곤 했던 것이 훗날 괴테가 글을 쓰기 시작한 하나의 동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우리의 관심과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와 같이 할머니와 부모의 남다른 교육적 관심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낸 괴테는 이탈리아 등지로 많은 여행을 다니며 경험과 사고의 영역을 넓혀감으로써 훗날 시성으로 대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행처럼 많은 것을 정확하고 쉽게 말해 주는 것은 없다. 인생의 많은 부분을 여행을 하며 즐겼다는 괴테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모두는 이번 여행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도 했다. 이 밖에도 서재와 거실, 식당 등이 괴테가 살던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고, 괴테가 직접 쓴 원고도 보였다. 1층은 식당, 거실, 2층은 객실, 음악실, 3층은 괴테 양친의 서재, 4층엔 괴테의 서재 등이 있으며, 여기서 18세기 프랑크푸르트 상류 계급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당시에 사용했다는 주방, 가구와 벽난로, 서있는 그랜드 피아노, 그림교사가 그렸다는 괴테가 여섯 살 때의 가족 그림, 괴테의 성장에 깊은 영향을 끼친 외조부의 초상, 괴테의 아버지가 사용했다는 중국스타일의 ‘북경房’ 등 관심을 끌만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4시 45분, 1시간이 훨씬 넘도록 머문 괴테 생가를 떠나, 다음 방문지인 聖바울교회로 향했다. 이 교회는 독일 제1회 국회가 열렸던 곳이라고 하는데 교회 앞의 넓은 광장 주변으로 황제 선출 성당과 지금은 영웅들의 환영 장소로 쓰인다는 황제홀을 지나 넥카江邊 길을 따라 늘어선 영화, 민족사, 수공예품, 조각, 건축 등의 전문박물관과 현대미술관을 차창으로 보면서 한적한 교외의 한 식당인 ‘만나’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나지막한 야산 초입의 우리나라 시골 풍경을 연상시키는 길을 따라 들어가서 만난 식당의 여주인(홍순자 씨)은 친근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선산중학교 출신이라고 했다. 22년 전 독일 파견 간호사로 왔다가 현지의 한국인과 결혼하여 그 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함께 갔던 장재성 선생과는 같은 교회 교우로서 집안의 내력까지 훤히 아는 터이라 정담과 홍소(哄笑)로 한 때나마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활달한 성격으로 우리 일행에게 맥주까지 서비스하는 훈훈한 인정을 베풀어주어 박수로 화답하고, 같은 동문인 장 선생과 셋이서 사진을 찍고 아쉬운 마음으로 식당을 나와 호텔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 막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일행인 이용섭 선생이 찾아와 정담을 나누다가 호텔 안의 식당으로 내려가 이, 민 선생을 함께 불러 커피와 맥주를 마셨다. 커피는 한 잔에 3.5 마르크, 맥주는 한 병에 5마르크씩이라고 했다.
제 6 일 ( 7 월 2 6 일 )
오늘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날이다. 전날 밤 늦게 잠자리에 들었건만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던 때문인지 6시도되기 전에 잠이 깨었다.
여느 때보다 이른 7시 50분 호텔을 출발하여 9시 30분 베를린行 비행기를 타기 위해 프랑크프르트 공항으로 갔다. 비행기가 예정 시각보다 30여분이나 지연 출발하는 바람에 혹은 쇼핑을 하고 혹은 잡담을 나누기도 하면서 공항 대합실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다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출발하여 한 시간쯤 걸려 11시 20분에야 시야에 들어온 베를린 시가지의 모습은 숲 속에 싸인 도시였다.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베를린은 서울 크기의 면적에 인구는 350만, 42%가 숲과 호수라고 한다. 날씨의 변화가 심하여 연중 해를 볼 수 있는 날이 60일 정도에 지나지 않아 베를린 시민들은 완벽한 사회 보장의 혜택으로 틈만 나면 해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베를린은 통독 전 동․서방 진영이 분할 통치하던 지역답게 외국인이 전 시민의 10%에 이르는데 한국인 거주민의 수만도 5000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통독 후 東베를린 사람들이 대거 이주해 오고, 2000년 수도를 본에서 베를린으로 이전한다는 계획에 따라 행정기관이 옮겨오는 바람에 심각한 주택난과 교통난을 겪고 있다고 한다. 통독 이후 동서독의 실질 화폐 환율이 1:7정도였던 것을 1:1로 바꾸어 주자 동독인의 부(富)가 급증, 이 돈으로 모두들 자동차를 구입하는 바람에 통독 이후 자동차가 30%나 증가했다고 한다. 또, 통일 전의 엄청난 교육적 경제적 격차를 평준화시키기 위한 정책에 따라 세금이 높아지고, 물가가 오르는데다가 실업 문제까지 겹쳐 지금 베를린과 독일은 심각한 통독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설명이다. 우리의 통일 문제를 검토하는 데 있어서 독일의 경험은 값진 타산지석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일 이전에 인적 물적 교류가 비교적 활발했던 통일 독일의 경우도 후유증이 이러하거니와, 만일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통일이 다가온다면 그 후유증과 치유 문제는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리라. 우리의 통일에 대비하는 준비와 교육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서 간단한 통관 절차를 마치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현지 안내자를 따라 11시 50분 버스 편으로 중국식 레스토랑인 ‘송도’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를 하였는데 말로만 듣던 비싼 물 값을 여기서 실제로 경험하였다. 식당에서 물조차 사서 먹어야 하고 그것도 물 1L에 현지 휘발유 값의 6배나 되는 10 마르크(한화 5400원)나 되니 놀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물을 아니 먹을 수도 없어 “Evian"이라는 상표가 붙은 물 2병을 사서 " 비싼 물 건배! ”를 외치며 한바탕 웃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12시 30분 식당을 나와 1936년 올림픽이 열렸던 올림픽스타디움을 찾았다.
일제 치하인 1936년, 우리의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어 마라톤에서 우승을 했던 곳이다. 1933년 히틀러가 올림픽을 개최하여 나치의 정통성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기 위해 건설한 것으로 9만 관중을 수용했다는 스타디움은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주변 시설도 시민들의 취미 생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우리가 찾은 시간에도 중앙 스타디움에서는 종교 집회가 열리고 있었고, 수영장에선 제법 서늘한 날씨인데도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은 스타디움 우측 한 쪽에 있는, 베를린 올림픽 영웅들의 이름을 새겨 놓은 비문이었다. 孫基禎이라는 이름 뒤에 새겨진 JAPAN이라는 글자를 보며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흘렸을 눈물을 생각하니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이십여 년 전 우리나라 국회의원 한 분이 이곳을 찾았다가 울분을 삭이지 못해 밤새워 JAPAN을 지우고 그 위에 KOREA를 새겨 넣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훗날 독일 정부에서 다시 JAPAN으로 환원시켰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고쳐 쓴 그 부분의 글자색이 다른 것을 보며 손기정 선수와 일장기말소사건과 조국의 의미를 다시금 반추하였다. 가까이 들어 갈 수 없다는 걸 그곳을 관리하는 분에게 특청을 넣어 비 바로 앞까지 들어가서 기념 사진을 찍고, 60년 전 그날 스탠드를 가득 메운 수많은 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트랙을 달렸을 손기정 선수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한 시간 여를 머문 다음, 나치스 독일의 히틀러가 전 유럽을 차지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건설했다는 모스크바, 파리와의 직선 통로인 8차선 도로를 달려 구 동베를린 지역으로 향했다. 이 길 양편으론 히틀러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건설했다는 계획도시답게 별도의 안전한 자전거 전용도로가 마련되어 있어 100년 앞을 내다보는 그들의 안목이 부러웠다. 가는 길에 ‘큰 별 광장’의 戰勝塔(1873년 건립,163m의 높이)과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동상을 차창으로 바라보며 동서독 분단의 상징, 브란덴부르크門을 넘어 옛 동베를린 지역에 들어섰다. 문을 넘어서자 서베를린 시가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낡고 허물어진 건물, 문을 닫은 공장, 버려진 빈집들 사이에서 도로를 보수하고 고층 콘크리트 건물을 신축하는 등 재기의 몸부림이 한창이었다.
극심한 교통 체증으로 서행과 정차를 반복하는 답답한 버스 속에서 통일 후 독일 사람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불편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서베를린 사람들은 그들대로 과중한 세 부담과 천정부지로 뛰는 물가, 가중되는 주택비와 교통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동베를린 사람들은 또 그들대로 통일의 대가가 기대에 못 미치자 이제는 ‘장벽을 다시 쌓아야 한다. 그것도 2배 정도의 높이로’라고 할 만큼 불만의 소리가 높다고 한다. 브란덴부르크門을 넘고 사십여 분쯤 지나자 동서베를린을 가로막았던 장벽이 보였다. 이 장벽은 1961년 舊소련이 동베를린 사람들의 서베를린으로의 유출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데(45km), 통독 후 다 허물고 지금은 분단의 상징물로 200여m의 벽만 남겨 두었다. 생각과는 달리 공장의 담벽 같이 그리 높지 않은 벽, 벽면 가득한 독일인의 통일에 대한 열망과 기쁨을 담은 갖가지 그림과 글씨가 시선을 끌었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되던 날 로시니의 음악이 쾌활한 멜로디로 울려 퍼지고 하나의 바다를 이룬 깃발과 횃불, 불꽃놀이 그리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끊임없이 통과하는 수만 명의 인파를 TV를 통해 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우리의 분단된 조국은 어떤가? 세계 어느 민족보다 피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우리가 지상에 남은 마지막 분단국이 되어 있다. 하루 빨리 우리도 마의 휴전선을 걷어내고 한데 어울려 통일의 기쁨을 나누는 벅찬 그날이 오기를 기도해 본다.
교통 체증으로 예정시간보다 사십여 분이나 늦은 2시 45분 소련군 공동묘지에 도착했다. 2차 대전 당시 베를린 진군 때에 사회주의 국가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2,500여 명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구 소련군의 요청으로 동독에서 조성한 묘지라고 하는데 묘소 입구에 세워진 어머니상과 묘소 정문 양편에 세워진 늙은 병사상과 젊은 병사상이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남편과 아들을 전쟁터에 내 보내고 걱정하는 어머니와 2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숨진 병사의 모습이 결코 그들만의 모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묘소를 돌아 베를린 시내를 들어오면서 베를린 동부역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알렉산드르 광장에 내려 19C에 지었다는 시청 건물과 아슬아슬한 높이의 TV 전파 송신탑을 원경으로 구경했다. 통독 직전 이 광장에 매주 월요일에 50여 만을 헤아리는 군중들이 모여 베를린 장벽의 철폐를 요구했고, 이것이 독일 통일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이 안내자의 설명이다.
광장 안으로 들어서자, 마르크스와 레닌 상을 함께 조각한 동상과 돔 양식의 동베를린교회, 베를린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12 C 양식의 교회 건물이 가까이에 있고, 길 건너편으로 독일의 명문 훔볼트대학이 있다. 이 대학엔 한국어학과도 설치되어 있는데 이곳이 구동베를린 지역이라 교재 내용과 말씨 모두 평양의 것을 배우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 이제는 상황이 급전된 만큼 우리 정부에서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해외에서의 한국학의 연구 및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알렉산드르 광장에서 브란덴부르크門을 넘어 서베를린 지역에 들어서면 길 오른편에 1941년에서 1946년 사이의 전쟁을 기념하는 소련군 전승기념비가 있으며 소련군 묘지를 겸하고 있다고 한다. 통독 전에도 영국 관할 지역인 이곳만은 소련군한테 빌려주어 서베를린 지역 중 유일하게 소련군의 경비병이 주둔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화려한 양식의 소피 샤르테 궁전이 있다. 당시(17C) 빌헬름 황제비의 여름 별궁으로 지었다는데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문이 닫혀 있어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외관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5시 30분 베를린 시내에 있는 한식당 ‘風味’(Koreana)에서 불고기로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인 Holiday Inn Berlin Airport-esplande에 돌아와 여장을 풀었다. 이 호텔 역시 시 외곽지에 위치해 있지만, 주변 환경이 아름답고 규모와 시설도 비교적 좋은 편이다.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호텔 건물 내에 남녀 혼용 사우나탕이 있다는 안내자의 말에 호기심이 생겨 일행 몇 사람과 함께 사우나 룸에 들어가 보았다. 구조와 운영 방식은 우리나라의 목욕탕과 흡사한데 남녀가 알몸으로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같은 탕(사우나 룸)에서 사우나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게 보였다. 오후 9시가 되어도 해가 지지 않아, 이용섭, 여전상, 손수성 선생과 베를린의 밤 풍경을 보기 위해 택시를 타고 중심가라는 Europe Center에 나가 보았다. 음식점이나 주점을 제외하고는 가게문이 모두 닫혀 있었는데 6시 30분이 되면 모두 문을 닫는다고 한다. 불 켜놓은 쇼윈도를 둘러보며 한 시간이 넘게 거리를 거닐다가 돌아왔다. 담배를 피워 문 젊은 여성들, 거리에서 거리낌 없이 포옹하는 청춘남녀, 거리 곳곳 가게 앞 노변 의자에 무리를 지어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제외하면 우리의 여느 도회지 밤 풍경과 흡사했다. Europe Center광장 건물의 지하상가를 둘러보고 나오다가 건물 위에 우리 나라 회사의 이름 ‘SAMSUNG’ 이 빛나고 있어 반가움에 그걸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11시께 숙소로 돌아와 손수성 여전상 선생과 준비해 온 한국 소주를 나눠 마시며 환담을 나누다가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제 7 일 ( 7 월 2 7 일 )
푸른 하늘 밝은 햇살 아래 나무숲 사이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도시 정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오늘은 러시아로 가는 일정만 계획되어 있어 평시보다 늦은 9시 30분에야 호텔을 출발하여 모스크바행 비행기가 뜨는 아름다운 이름의 공황 ‘쉐네펠트(Schonefeld)’로 향했다. 40여분만에 공항에 도착하여 지루한 출국 수속 절차를 마치고 12시10분 쉐네펠트공항을 이륙하여 모스크바를 향해 날았다. 러시아 국적의 비행기라서 스튜어디스의 외모와 말씨부터가 다르고, 기내의 모든 안내문도 영어로 병기하긴 했지만 러시아어로 되어 있어 생소한 데다가 승객들이 대부분 부리부리한 눈의 러시아인이라 까닭 모를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불과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러시아(소련)라면 우리에겐 무시무시한 공산주의의 종주국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생각을 바꾸려 해도 옛 공산소련에 대한 기억이 스멀스멀 살아나서 숨을 죽이고(?) 있는데 기내에 들어와 있던 파리 한 마리가 겁도 없이 내 코앞을 날아간다. 분명 한국에서 보던 그 파리이다. 사람의 모습은 나라마다 이리 다른데 파리야말로 국제적이라는 기발한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다. 온통 파리에 정신을 쏟고 있는 사이 비행기는 어느덧 모스크바 상공을 날고 있다. 시계를 보니 2시 10분(러시아 시간으로 4시 10분, 이하 러시아 시간), 베를린 공항을 이륙하여 2시간을 날아온 것이다. 고도가 낮아지자 창 밖으로 모스크바 근교의 모습이 점점 뚜렷이 드러나는데, 나지막한 산자락 아래에 형성된 마을과 밭, 울창한 삼림과 저수지, 유람선이 떠 있는 호수가 우리 나라의 시골 모습과 흡사하다. 꽤 긴 시간의 착륙 시도 끝에 비행기가 4시 25분 모스크바의 세르메째르 제2공항에 무사히 착륙하자, 승객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이 박수를 치는데, 영문을 몰라 안내자에게 물으니 무사 착륙을 축하하는 의미라고 한다.
비행기에서 내려 보딩 통로를 나서니 권총을 휴대한 여군들이 검색을 맡고 있어 위압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창 밖 공항 활주로 한 쪽 끝으로 탱크와 군용차까지 보이고, 기관총을 든 군인이 공항 주차장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출국할 때에 입국 때에 비해 增額된 분을 압수하기 위해 소지한 돈 액수까지 신고하게 하는 까다롭고 지루한 입국 절차를 마치고 공항 대기실에서 현지 안내자를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니 지저분한 화장실, 무질서하고 우중충한 분위기가 우리 나라 60, 70년대의 어느 도회지 종합 버스 터미널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도 개방의 물결로 인해서 그런지 꽤나 많은 외국인들이 붐비고 어둡고 침침한 공기로 가득한 홀 곳곳에 TV가 설치되어 올림픽 중계방송이 한창이다. 모두 우리 나라 회사(DAEWOO)의 제품이다. 반가워서 모두들 그곳으로 모여들어 올림픽 방송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30여 분을 기다려도 가이드는 나타나지 않고 날씨까지 후덥지근한 가운데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 서서 미아처럼 허둥대던 우리들의 꼴이 우습기만 했다. 5시 40분이나 되어서야 어렵게 여행단을 연결시켜 주는 현지 안내자를 만나 버스를 타고 샹트페테르부르그行 비행기를 타는 세르메째르 제1공항으로 갈 수가 있었다.
6시에 공항에 도착하여 탑승 수속을 밟는 내내 러시아는 무덥고 답답하고 짜증스런 나라였다. 모스크바는 서늘하다는 말만 듣고 잠바를 입었는데 후덥지근한 공기가 우리 나라의 한여름 그대로다. 비행기 탑승 시각을 기다리는 동안,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1학년을 마치고 어학 연수차 모스크바에 와서 우리나라 여행단의 안내를 맡고 있다는 유학생은 오늘의 러시아 현황을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인플레가 급증하여 물가가 비싸다. 예를 들면 US $ : 루불화의 환율이 1:5100에 이르고, 된장찌개 한 끼 값이 15$, 우리나라에서 2000원 하는 필름이 10$ 정도나 되며 사회체제가 안정되어 있지 않아 가게마다 물가도 다르다. 백야 현상으로 인하여 여름엔 밤 열 시가 넘어도 해가 지지 않고 새벽 4시면 날이 새기 때문에 해가 뜨고 지는 것에 관계없이 시계를 보고 생활한다. 대중 교통 수단은 전철과 전기차(전차)이고, 자가용과 영업용 택시의 구분이 불분명하여 자가용도 숭객이 타면 금방 영업용으로 바뀐다. 교통 질서가 문란하고, 도로에서는 사람보다 자동차가 우선 통행을 한다. 개방 이후 북한인은 만나기 힘들 정도로 드물어졌고, 유학생, 주재원들은 모두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열차는 대부분 침대차이고, 외국인에겐 본국인의 1.5배의 요금을 받는다. 우리 나라 상사의 점유율이 높아 전자, 자동차의 점유율은 일본을 앞지르고 있으며, 삼성, 대우, 현대, L.G를 SONY보다 더 잘 안다. 전자 제품은 무관세로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나라보다 싼데 우리나라에서 싼 것은 비싸고, 비싼 것은 싸다. 한국 관광객의 수는 매주 500~1000명에 이르는데 한국에 대한 인식이 좋은 것만은 아니며, 러시아인들은 한국인은 ‘너무 쉽게 약속하고 너무 쉽게 뻥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하루 8시간, 주 5일로 정해진 시간 이외의 일은 하지 않으려 하고 오후 6-7시만 되면 가게의 문을 닫는다. 가난하게 살아도 억척스럽게 일하려 하지 않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사회주의 생활 방식의 영향이다. 보드카를 즐겨 마시며 이혼율이 70 % 에 이를 정도로 아주 높다. 한 마디로 러시아는 흥미로운 일도 많고 어려움도 많은 나라다.
러시아 여행에 유용한 사전 지식이 될 것 같아 메모를 해 가며 경청하였다.
7시 쯤 탑승권을 주기에 받아 보니 탑승권의 내용과 지질이 엉성하기 짝이 없다. 우리 나라 버스 승차권 크기의 갱지에 확인인 하나 없이 간략하게 행선지와 좌석 번호만 사인펜으로 적어 놓았는데 그마저 회수권엔 아무 내용도 기록하지 않은 채였다. 탑승 안내 방송을 듣고 밖으로 나가니 타고 갈 비행기가 저만큼 멀리 떨어져 있어 중고 트럭을 개조한 공항버스를 타고 비행기 가까이 가서 이동식 계단 탑승대를 통해 비행기를 탔다. 문짝이 허술한 중고 비행기인데다가 좌석 배치마저 무질서해서 과연 이 비행기가 무사히 샹트페테르부르크까지 날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붉은 색의 출발 저지선, 총을 든 여군, 탑승대를 수동으로 조작하는 여성 운전사, 탱크와 군용차가 있는 황량한 공항 주변, 거저수나무 숲 위를 날며 우짖는 까마귀 등이 하나같이 생소하고 스산하게 다가왔다.
7시50분, 드디어 비행기 이륙, 1시간을 날아 기상에서 내려 본 샹트페트르부르크 교외의 정경은 숲이 우거진 넓은 평원에 신축한 고층 아파트가 듬성듬성 서있고 도로가 사통팔달로 뻗어 있는 계획된 도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고도가 낮아지면서 가까이 다가가자 길은 넓은데 달리는 자동차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8시 50분, 공항 대기실을 들어서자 군데군데 패인 바닥, 고물이 된 의자, 너덜너덜 떨어져서 물이 듣는 천장 등 음산한 분위기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음산한 공항 대합실을 나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들여와 핸들의 위치가 서로 다른 중고 자동차 수십 대가 주차해 있는 황량한 공항 마당에서 현지 안내자를 기다려야 했다. 30여 분을 기다려도 끝내 안내자가 나타나지 않아 대기해 있는 버스를 타고 저녁 식사를 할 한국 식당 ‘아리랑’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면서 본 샹트페테르부르크의 모습은 사람이 살지 않는 음산한 유령의 도시 바로 그것이었다. 잡초 무성한 버려진 땅과 허물어진 집들, 불이 꺼진 건물, 움푹 패인 도로, 간간이 오가는 트롤리버스(전기 버스), 도로변 곳곳에서 차를 고치는 사람들을 보며 일행 중 어떤 이는 사회주의의 시신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이 많은 집들을 두고 어디로 갔는지 도심지에 들어서도 거리가 너무 한산해서 혹 우리가 길을 잘못 든 것이나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우여곡절 끝에 식당에 도착하여 거기서 현지 안내자를 만나 육계장으로 식사를 하면서 단장님이 베푼 러시아산 보드카를 나누어 마시고 호텔로 향했다. 안내자에게 공항에서 식당까지 오면서 우리가 보고 느낀 점을 말했더니 이 곳도 사람 사는 곳이니 편안한 마음으로 사실을 바로 보라고 했다.
식당에서 호텔로 가는 길의 정경은 공항에서 식당까지 오면서 본 정경과는 판이하게 달라 보였다. 도시의 중심으로 들어서자 행인의 수가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네바江에 이르자 강변이 온통 사람들로 붐볐다. 산책하는 사람들, 아베크를 즐기는 청춘 남녀들, 유람선을 타고 강을 오르내리는 관광객들, 거기다가 강 곳곳에 정박해 있는 군함과 무슨무슨 이름의 배들이 떠 있는 모습이 우리의 서울이나 부산의 야경 그대로였다. 조금 전에 보았던 폐허처럼 음산한 모습과 지금의 활기 넘치는 모습 중 어느 것이 진정한 러시아의 모습일까? 어리둥절한 가운데 밤 11시 40분 해변에 자리잡은 PRIBALTIYSKAYA호텔에 도착했다. 웅장한 규모, 넓은 광장과는 달리 호텔 프론트에 들어서자, 희미한 불빛 아래 어두운 색조를 띤 분위기가 마음을 눌렀다. 20여 분이나 기다려 방을 배정 받았는데 내부 시설과 용품도 호텔 급으로서는 수준 이하였다. 여장을 풀어놓고 밤바다를 보기 위해 해변으로 나갔으나 피곤하여 이내 되돌아 왔다. 오늘은 온통 하루를 비행기와 자동차 속에서 보낸 셈이다. 가까운 베를린에서 이 곳까지 오는데 하루나 걸렸으니 아직도 러시아는 먼 나라만 같다.
제 8 일 ( 7 월 2 8 일 )
러시아에서 맞는 첫 아침. 희미한 구름 아래 햇살이 밝다. 창을 여니 멀리 나무 숲 사이로 드문드문 높은 건물이 보이고 넓은 도로에 이따금씩 관광객을 실은 버스와 승용차가 오가고 있다.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이 도심지에서 떨어진 외곽지라서 그런지 거리의 모습이 한산하고 주변에 잡초 무성한 공터가 많다. 러시아식 양식(빵, 소시지)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9시 30분 샹트페테르부르크 관광에 나섰다. 인구 480만 명의 러시아 제2의 도시 샹트페테르부르크는 제정러시아의 상뜨페테르 대제가 건설한 도시로, 200년간 제정러시아의 수도였는데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겨가고, 도시 이름도 이 곳 출신인 레닌의 이름을 따서 레닌그라드로 고쳐 부르다가 지난 91년 개방 이후 본래의 이름인 샹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엔 당시의 사원, 동상, 광장, 기념관이 많이 남아 있는데, 샹트페테르(피터) 대제와 레닌의 이름을 붙인 유물 유적이 유난히 많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의 대부분은 샹트페테르 대제를 최고의 영웅으로 받들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도시의 중심을 흐르는 네바강을 비롯해 크고 작은 하천이 수없이 많아 다리만도 650여 개에 이르고, 운하도 60여 개에 달한다.
도시의 중심을 흐르는 네바강은 발트해의 핀란드만과 접해 있는 러시아 해상 진출의 관문으로, 수심이 200m, 강폭이 500-800m에 이르고 항시 맑고 푸른 물이 흐르며 강 위를 가로지르는 위로 들리는 다리만 7곳인 갖가지 조형미를 갖춘 다리와 강과 조화를 이룬 전통 양식의 건물 등과 숲이 절경을 이루어 北歐의 베니스라고 불린다고 한다. 오늘은 마침 러시아 해군 창설 300주년 기념일이라 러시아 해군의 발상지인 이곳에서 대대적인 축하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네바江 가득히 만국기를 단 각국의 군함들이 들어와 있고 거리엔 온통 축하 행사를 구경하러 나온 시민들과 군인, 경찰 등 강변과 인근 도로, 광장이 사람으로 가득하다. 특이한 것은 군인과 경찰은 복장이 같고, 모자 띠만 검은색, 붉은색으로 달라 군경을 구별한다고 한다. 잠수함에다 군함까지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이 배만 다 가져가면 우리 해군이 세계 제1의 강군이 될 것 같다며 한바탕 웃기도 했다. 혼잡한 거리를 피해 이 도시의 발상지라는 베뜨로바울 요새와 2차 대전 때 전사한 1000만 명의 러시아군 추모하는 ‘영원의 불’이 타고 있는 무명용사의 탑, 돌 모자이크를 붙여 세웠다는 ‘피의 구원’ 성당을 지나와 궁전 광장에 도착하니 모여든 구경꾼들로 광장이 온통 인산인해다. 바닥을 모두 벽돌 크기의 돌을 깔아놓은 넓은 광장 중앙에 60t이나 되는 통대리석을 깎아 세웠다는 알렉산드 원기둥과 승리의 여신상이 있고 중앙 북편에 프랑스 루불 박물관을 능가한다는 예르미따쉬 궁전이 있다. 변덕스러운 날씨로 비가 뿌리는 가운데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11시에 문을 연다는 궁전 입구에서 20여분을 기다리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궁전에는 ‘피터의 방’을 비롯해 1500개의 방이 있다고 하는데, 제한된 시간 때문에 주마간산으로 몇 개의 방만 구경해야 하는 것이 몹시 아쉬웠다. 입구 가까이에서 황제의 마차는 12마리, 왕비와 왕자는 10마리의 말이 끈다고 하는 화려한 장식의 황금마차를 보고 피터의 방에 들어서니 독수리 문장을 한 가구와 공식 연회장, 19C 양식의 각국 황금 기류(器類)들이 눈길을 끈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60년이 걸린다는 300-500년 전의 벽걸이 카페트, 자수 그림, 모자이크의 방에서 본 색이 다른 대리석을 모자이크로 붙여 만든 사실적인 그림을 보면서 이들의 예술 창작에 대한 놀라운 정열과 끈기에 탄복했다. 황금 공작과 화려한 장식의 샹들리에 밑을 지나 관심이 큰 ‘그림의 방’을 찾았다. 세계 미술사에서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가들의 예술에 대한 정열과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명작들을 작가별로 방을 달리 하여 전시하고 있는데, 그 많은 작품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었던 그들의 힘이 부러웠다. 따지고 보면 이들 대부분이 힘을 무기로 약탈해 온 지배자의 유물이긴 하지만, 수많은 정변과 전쟁 속에서도 고스란히 지켜왔다는 사실 하나만은 높이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작품 중에 특히 관심을 끈 것은 다빈치의 “꽃을 든 성모”, 노골적인 에로틱화로 평가되어 이 작품 때문에 작자가 파문을 당했다고 하는 줄리오 노마스(15C, 이태리)의 ‘사랑의 장면’, 구부린 상태의 근육을 잘 표현한 미켈란젤로의 조각 ‘소년상’, 험악한 빚쟁이의 모습이 인상적인 라파엘로의 ‘성(聖)가족’, 찌찌아니(15C 이태리)의 ‘막달라 마리아’, 그림 속의 인물이 보기에 따라 6-9명으로 달리 보이는 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와 동적인 순간 장면을 잘 표현한 ‘아브라함의 제물’, 루벤스의 정물화 ‘십자가상 예수’, 르느아르의 ‘귀부인’과 ‘부채를 든 소녀’와 ‘나부(懶婦)’ 세잔느의 ‘스모크’ 고호의 ‘에떼네 정원의 추억’, 원주민의 모습이 천경자의 작품과 흡사한 고갱의 ‘풀밭 위의 여인들’, 이 밖에 피카소의 그림과 도자기, 모네, 마티스의 그림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많은 작품 중 우리 나라 화가의 작품은 왜 없느냐고 하니까 안내자가 우리 일행을 미술의 방 끝 계단 벽에 걸린 작품 앞으로 데리고 가더니 만세를 부르라고 한다. 자세히 보니 우리 나라의 원로 화가 김흥수 화백의 ‘僧舞’(1979년작)가 거기 있지 않은가! 너무 반가워 만세 대신 박수를 쳤다. 어떤 경로로 이 작품이 여기 전시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 나라 화가의 작품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반가웠다. 쫓기듯 ‘그림의 방’을 돌아 나와 ‘황금의 방’과 대형 통대리석 벽화로 장식한 ‘말라히의 房’을 둘러보고 궁전 밖으로 나오니, 일행과 떨어져 헤매다가 궁전 안에 들어가지 못한 우, 박 선생이 기다리고 있다. 굉장한 작품을 보고 나왔다니까 찌찌아니의 ‘막달라 마리아”를 꼭 보고 싶었다는 박 선생은 몇 번이나 아쉽다는 말을 했다.
‘아리랑’에서 점심을 먹고 러시아 정교의 알랙산드로넵스끼 수도원으로 갔다. 외형은 여느 수도원의 모습과 비슷한데 본당 중앙에 성상이나 십자가가 없고 성화만 걸려 있는 것이 특이했다. 넓은 실내의 기둥과 벽 곳곳에 성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 앞에 금은으로 장식해 놓은 이콘이 걸려 있고, 촛불을 켜 놓은 기도대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기도를 하고 있을 뿐 사람들이 앉는 좌석은 없었다. 신도들은 물론 교황이나 황제도 서서 예배를 올린다고 했다. 聖號를 긋는 방향이 카톨릭과 반대라고 하는데 수도원 안에 성인이나 영웅들의 무덤이 있는 것은 서양의 다른 수도원과 같다. 대체로 말해서, 교리는 신교에 가깝고 제도는 구교에 가깝다는 게 안내자의 설명이다. 마침 우리가 찾은 때가 주일 예배 시간이 막 끝나는 시간(오후 2시)이라 수도원 내부의 모습을 비교적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본당 밖에서 막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떠나려는 아름다운 신랑 신부를 만나 함께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리고 마냥 행복해하는 저 부부들이 중도에 70% 이상이나 이혼을 한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이혼을 예사로이 생각하며 이혼하게 되면 자녀 양육은 초급학교를 마칠 때까지 남편의 보조를 받아 여성이 맡는다고 하며, 또 짝이 있는 여성은 반지를 오른쪽 손가락에 끼고, 짝이 없는 여성은 왼쪽 손가락에 낀다고 안내자가 들려준다. 여기에서 30여분을 머물다가 변덕스러운 날씨가 비를 내리는 속에 10월혁명 당시 레닌이 숨어서 혁명을 지휘했다는 스몰리 수도원으로 갔다.
수도원 입구 광장에 이르자 떠돌이 장사꾼들이 몰려 와서 관광사진첩과 러시아, 북한우표첩을 파는데 가격이 전날 에르미따쉬 궁전에서와 비겨 엄청난 차이가 있었으며, 궁전에서 25$하던 관광 사진첩이 여기서는 18$이라고 했다. 러시아에선 물건값이 지역마다 다르고 가게마다 다르다고 한 말이 실감으로 와 닿았다. 18$를 주고 샹트페테르부르크의 명소를 담은 사진첩 한 권을 샀다. 숲에 싸인 수도원을 돌아 나와 네바江의 강변길을 달려 10월혁명 당시 첫 발포를 했다는 순양함을 보러 갔다. 1900년에 제작하여 1905년 러일전쟁 때에도 出征했다는 군함이다. 해군 창설 기념행사로 안에 들어갈 수가 없어 밖에서 그 배를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예술의 광장’으로 갔다. 가는 길에 강변의 건물 위 사회주의의 구호가 있던 자리에 우리 나라 회사(DAEWOO)의 대형 광고판이 빛나고 있는 게 보였다. 샹트페테르부르크에선 한국은 몰라도 DAEWOO는 안다고 한 한식당 주인의 말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어디 대우뿐이겠는가? 시가비 곳곳에 삼성, 현대, LG, 선경 등 낯익은 광고들이 우리가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해 주었다. 달리는 버스에서 차창으로 내다보니 어떤 건물의 벽에 낯선 러시아말로 “우리의 대통령 엘친, 러시아의 영광”이라는 낙서를 해 놓은 것이 눈에 들어 왔다. 최근 실시된 대통령 선거 후유증으로 혼란스럽지나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이처럼 평화스런 낙서라니 러시아의 앞날은 희망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후 4시 뿌쉬킨의 동상이 서 있는 예술광장에 닿았다. 동상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돌아 나오는데 선한 인상의 여학생이 다가와 자기가 그린 수채화를 사라고 한다. 미술학교의 학비를 벌기 위해 그린 그림이라는 말을 듣고 10여 장의 그림 중에서 네바江을 배경으로 사원에 이르는 길을 그린 소품 1점을 15$를 주고 샀다. 알랙산드로 2세가 스웨덴 바이킹을 물리치고 피를 흘리며 죽은 곳이라는 피의 구원 성당을 돌아 노벨상 수상자를 9명이나 배출했다는 레닌그라드종합대학을 차창으로 보며 식당으로 향했다. 건물 하나의 폭이 15m인데 길이가 700m나 되는 특이하고 웅장한 크기의 건물이 눈길을 끈다. 이 대학에도 독일의 훔볼트대학처럼 동양어(한, 중, 일)학과가 설치되어 있는데 아직도 북한 교재로 우리말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한식당 ‘아리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호텔에 닿으니 6시 20분, 응당 해가 떠 있을 시간이건만, 흐린 탓에 저녁때나 된 듯이 어둠침침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하루 종일 비와 해가 오락가락했다.
제 9 일 ( 7 월 2 9 일 )
어제와는 달리 하늘이 맑다. 식탁마다 빵, 주스, 치즈, 과일 등을 정확히 사람의 수만큼만 차려 놓은, 뷔폐식이 아닌 분배식(?)으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했다. 이런 방식도 사회주의 잔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 프론트로 내려오니 한국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들이 법석대고 있어 꼭 우리 나라의 어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주에서 왔다는 한 아주머니의 익살과 재담이 재미있어 한바탕 웃고 떠들다가 가방을 챙겨 버스에 싣고 호텔을 나섰다. 오늘 일정을 마치면 밤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간다고 했다.
오늘의 첫 여정으로 혁명 유적지인 제까브리스트廣場에 도착했다. 제정러시아의 귀족들이 ‘황제여, 우리에게 약간의 권리를 달라!’며 시위를 벌였다는 이 광장엔 피터 대제의 동상과 러시아 최초의 동상이라는 청동 기마상이 있다. 후남(后男) 70명을 거느렸다는 까따리나 2세가 남편(피터 대제의 증손자)을 죽이고 정통성을 확보할 목적으로 자기가 시증조부인 피터 대제의 위업을 이어 받았음을 과시하기 위해 세웠다는 사연이 깃든 청동 기마상을 보면서 권력과 탐욕에 눈먼 까따리나 2세의 모습과 함께 역사의 아이러니가 되새겨졌다.
이어서 거대한 대리석 기둥과 황금으로 도금한 돔 양식의 지붕으로 유명한 이삭성당을 둘러보았다. 까따리나 2세가 2,000km 밖 시베리아 동북부 지방에서 대리석을 운반하여 건립했다고 하는데 문 하나의 무게가 20t이나 나간다고 하며. 2차대전 때 147,878개나 되는 포탄 세례를 받았으나 기본 골격은 건재한 것이 신기했다. 광장 중앙에 있는 말탄 모습의 알랙산드대왕 동상, 레닌 시청 건물을 차례로 둘러보고 샹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로스트랄 등대가 있는 등대공원을 찾았다. 등대에는 사방에 해신상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수호신상이라 했다. 맑고 푸른 물이 흐르는 네바강과 강 양안(兩岸)으로 그림 같은 나무숲과 집들을 보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공원 한 쪽 벤치를 보니 초점 잃은 눈의 실업자들과 초췌한 모습의 여자 청소부와 떠돌이 잡상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30여분을 머물다가 길 건너편에 위치한 동물학 박물관으로 갔다. 넓은 실내 공간에 4만5천 년 전의 매머드와 철갑상어, 반달곰, 악어, 타조 등 수많은 진귀한 동물, 조류, 어류들의 박제와 골격을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배치하여 전시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박제를 만든 지 300년이 넘는 것도 있다고 하니 경탄을 금할 수 없다. 박물관을 나와 2차대전 전승기념탑을 둘러보고 오전 관광을 마감했다.
오후에는 K.G.B. 건물을 지나 네바강변의 여름정원으로 향하는데 거리 곳곳에 꽃을 든 화사한 차림의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안내자의 말이 이곳 사람들은 꽃 선물을 좋아하며 이성에게 사랑 고백도 꽃 한 송이를 선사하는 것으로 표시한다고 하며, 살아 있는 사람에겐 홀수 죽은 이에겐 짝수의 꽃을 선사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다고 한다. 실업률의 증가, 밀린 연금, 높은 물가 등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멋과 여유를 즐기며 사는 모습에서 러시아인들의 낙천적인 성격의 일면이 엿보였다. 웅장한 돌기둥으로 울타리를 한 여름정원에 들어서니 거목 우거진 숲 속에 잘 정돈된 산책로 양편에 300여 개의 대리석 여신상이 서 있어 눈길을 끈다. 정원 중앙쯤에 시인 이반 크릴로프가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의 동상 앞에서 뱀을 목에 감고 재주를 부리는 사람을 보며 쉬다가 전 날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본 베뜨로바오로요새를 찾아갔다. 네바강의 동변 도로에 접한 이 요새는 170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740년에 완공했다고 하는데 거대한 석재로 쌓아 올린 규모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하지 못하게 한다. 요새 안으로는 이 요새를 쌓은 피터 대제의 동상과 천사상이 얹혀 있는 성당의 높은 탑이 있고, 요새 밖 강변 모래사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네바江은 도시의 중심을 흐르는 강이면서도 물이 맑기가 서울의 한강에 비길 바가 아니다. 생활 오․폐수를 분리하여 흘려보내고 또한 시민들의 환경보전에 대한 의식이 남달리 높은 결과라고 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가운 햇살을 쏟아 붓던 하늘이 금방 또 소나기를 내린다. 듣던 대로 러시아는 기후의 변화가 매우 심하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여름에도 4계절의 옷을 준비해 두고 산다고 한다. 비를 피해 서둘러 요새를 벗어 나와 버스를 탔다. 3시 20분 까잔성당 앞에 이르자 또다시 비가 쏟아져 버스 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폴레옹을 물리친 러시아의 영웅인 꾸두초프 장군 동상이 서있는 광장을 지나 220m 지하 속을 달린다는 지하철을 보러 갔다. 우리 나라 지하도 깊이에 있는 개찰구를 통과하여 다시 아득한 깊이를 오르내리는 에스칼레이트를 타고 내려가니 전철이 다니는 철로와 승강장이 있다. 이처럼 거대한 공사를 이미 70년 전에 완공했다니 놀랄 수밖에 없다. 과학적 공법과 기자재가 발달된 지금도 쉽지 않을 이 공사를 완벽하게 설계하고 시공한 그들의 앞선 토목공학 기술 수준과 배포가 놀랍기도 했다.
6시 20분, 한식당 ‘아리랑’으로 돌아와 샹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고 네바江으로 나왔다. 일행이 함께 乘船料 1인당 50$의 유람선을 탔다. 긴 강줄기를 따라 핀란드만 근해에까지 오르내리는 배 위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보드카와 포도주를 마시며 강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는 것이 배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요란한 선상 쇼보다 더욱 즐거웠다. 오후 7시부터 8시 30분까지 한 시간 반 동안의 유람선 관광을 끝내고 아쉬움을 남겨둔 채 모스코바로 가는 밤 열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달렸다. 후덥지근한 열차 속에서 1시간을 기다리다 9시 55분 모스크바로 향했다.
제 1 0 일 ( 7 월 3 0 일 )
밤 새워 침대열차를 타고 8시간을 달려 모스크바驛에 닿으니 아침 6시. 차를 타고 내리는 승객들로 붐비는 모습이 우리나라의 여느 역의 아침과 흡사한데, 플랫홈 앞에까지 접근하여 호객을 하는 택시와 탱크 소리를 내는 갖가지 중고차, 화사한 차림의 사람들 속에 양말도 신지 않은 채 남루한 모습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예약해 두었다는 버스가 오지 않아 역사 밖에서 또다시 지루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어떻게 된 셈인지 러시아에 들어오면서부터 어긋나던 일들이 가는 데마다 엇갈린다. 안내자의 말대로 아무리 ‘러시아에선 4시간 정도 기다리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에선 4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기다리는 것도 아니며, 영하 40도의 추위는 추위도 아니며, 40도가 안 되는 술은 술도 아니며, 400km의 거리는 거리도 아니라는 이야기로 말해주는 러시아와 러시아인들의 특징을 들으며, 러시아에 와서 배우고 가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라는 짜증 섞인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
2시간을 기다려 어렵게 2대의 봉고차를 맞춰 타고 일행이 묵을 코스모스(KOCMOC)호텔에 도착했다. 여장을 풀고 러시아식빵으로 조찬을 마친 후 모스크바 관광에 나섰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는 스탈린에 의해 계획된 방사형(放射形)의 도시로 교통망이 발달되어 역과 공항만도 각각 5개에 이르며, 현재 인구 980만 명에 180만 대의 차량이 운행되고 있다고 한다. 도심 곳곳에 스탈린 시대에 세웠다는 석조 건물과 아파트, 무슨무슨 이름의 광장들, 동상, 기념탑 등에 옛 공산주의 종주국의 역력히 흔적이 남아 있는데, 최근 개방의 물결을 타고 옛 건물을 개보수 공사를 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렇다고 건물의 외양까지 다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역사성과 도시의 미관을 고려해 내부 구조만 바꾼다고 하니 이들에게도 역사 보존을 위한 안목이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이 러시아의 대문호 톨소토이가 모스크바를 일컬어 ‘어머니 같이 느낀다’고 했듯이, 모스크바는 여러 면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나폴레옹이 잠시 점령했던 이후 아직까지 어느 군대도 이 도시를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을 이루면서 그 고유성을 잃지 않고 있으며, 러시아 특유의 건축 양식이나 미술품 등 유적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모스크바 여행 중 오늘 오전 일정의 핵심은 학교 방문이다. 도심의 K.G.B 본부 건물과 1991년 8월에 철거된 K.G.B의 창설자 째렌스키 동상이 있던 광장, 모스크바 영화제가 열린다는 러시아호텔, 레닌 동상이 있는 10월 광장, 가가린 광장을 지나 모스크바 남서부의 도보야세니스끼에 위치한 모스크바790번 학교로 향했다. 잘 닦여진 직선 도로를 따라 버스를 타고 달리면서 차창으로 본 모스크바의 외곽은 한 마디로 우리 나라 여느 중소도시의 모습 그대로다. 백자작나무 숲 사이사이 곳곳에 새로 지은 듯한 신식 고층 아파트가 무리 지어 서 있고, 구역 중간 중간에 노천시장이 열리고 있는데, 복숭아, 사과, 바나나, 감귤을 파는 과일가게가 유난히 많고, 길 가 곳곳에 수박을 무더기로 쌓아 놓고 파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넓은 잔디밭을 거니는 노인들, 유모차를 모는 부인네, 시장을 보러 오가는 아낙들의 모습이 꼭 우리의 어느 신축 아파트단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심에서 떨어진 외곽지인데다가 대부분 새로이 형성된 주거지라 학교의 위치를 찾지 못해 얼마를 헤매다가 호텔을 출발한 지 두 시간 여만에 간신히 찾아가니 방학 중인데도 교장, 교감을 비롯해 몇몇 교사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서양의 대부분의 학교가 그렇듯이 밖에서 본 학교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같이 넓은 운동장도 없고 건물의 규모도 시골 초등학교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관을 들어서자 규모 있게 잘 정돈된 시설과 환경이 우리의 시선을 모았다. 교장의 따뜻한 환영사와 학교 소개를 들었다. 교장은 환영사에서 한인 2세 성악가인 루드밀라 남(南)이라는 사람과 14년간이나 교분을 맺어 오고 있다며 우리를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이나 반갑다고 했다.
1학년부터 11학년까지의 초․중학교 과정을 가르친다는 이 학교는 학생이 747명, 교사 45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데, 교사들은 대부분이 석사 학위 소지자이고 박사 학위 소지자도 2명이 있다고 했다. 상급학교 진학률이 97%에 이르고 각종 대회에서 금메달을 받은 실적이 많다며 자랑이 대단했다. 학생의 취미와 소질을 계발하여 전문화시키는 흥미유발 교육에 치중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실험․실습 위주의 학습과 현장 탐방 학습, 능력별 자율학습을 통한 과제학습 방법을 적용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러시아의 교육 현황과 자기 학교에 대해 수없이 많은 자랑을 늘어놓았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중에 안내자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이 중 상당 부분은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된 것도 있다고 한다.
ㅇ 학제는 취학 전 2년의 예비과정(4-6세)과 1-11학년의 초․중등과정으로 되어 있고, 9학년을 마치면 2년 동안(10-11학년) 각기 적성과 능력에 따라 대학 진학 예비과정이라 할 전문과정(운전, 정비, 컴퓨터, 예술, 회계, 법률 등 )을 이수하고,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전문과정을 선택할 때 교사가 학부와 상담하여 전공을 유도하면 학부모도 이에 잘 따른다. 전문과정을 이수할 때 기관이나 회사(공장)에서 실습을 받고 이수증을 받아 오면 수업 시수로 인정한다.
ㅇ 학반 교실이 따로 없고, 교과별 교실과 특별교실, 일반 교실이 있어 학생들이 수업시간표에 따라 해당 교실을 찾아가서 수업을 받는다. 교사 또한 교무실이 없고, 교실이 바로 연구실이다)
ㅇ 학생들은 주 5일 수업을 받으며, 하루 수업 시수는 저학년(1-6)이 5시간, 고학년(7-11)이 8시간이고 교시당 수업 시간은 40분이다. 교시 사이 쉬는 시간 중 30분 휴식 시간이 두 번 있다.
ㅇ 학기 중 수시로 쪽지시험을 쳐서, 5점 만점 중 4.5이상을 받아야 기말고사 응시자격이 주어지고 3번 이상 5점을 받으면 기말고사가 면제된다. 성적이 부진한 학생은 별도로 학년 구별 없이 능력별 수업을 받는데 선후배간 상호 도움으로 성과가 좋으며, 적성에 따라 미술, 체육, 음악 등 다른 학교로 전학도 시켜 준다.
ㅇ 모든 일반 학교의 학비는 무료이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별도의 국가장학금을 받게 되며 유학도 가능하다. 교과서도 무료 제공되며 참고서는 학기 동안 무상 대여한다.
ㅇ 문학, 무용, 음악, 미술 등 일반적인 교양 교육을 중시하며 동양 예술 분야도 가르치는데 한국 음악은 교민인 남(南) 목사가 가르치고 있다. 러시아어와 문학 시간만도 합해서 주당 12시간 이상이다.
ㅇ 개방 이후 교재 내용과 교육과정이 많이 바뀌었으며, 학교별로 각기 다른 프로그램이 가능하다. 담당교사나 학교가 만든 교재도 상부기관에 보고만 하면 교재로 채택이 가능하다. 교재 개편은 정기적으로 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시행한다.
ㅇ 국가 재정상 교사의 외양은 허술하나 내실 있는 교육을 하고 있으며 전공별로 필요한 교재는 풍부하다.
ㅇ 학생의 흥미 유발을 위해 교수 학습의 첫 단계에선 ‘보여주기’(영화, 비디오, 그림, 모형, 실물 등) 교육부터 시작하여 점차 수준을 높여 나간다.
ㅇ 일과 외의 특별활동을 권장하며, 필요에 따라 지원도 해 주고 허가를 받아 반을 편성하여 활동하면 점수도 부여한다. 단, 학년별 시간은 제한된다.
ㅇ 학생 문제는 학생을 담당하는 경찰이 있어 학부모, 교사와 협의하여 지도하며, 경찰과 학생들의 관계가 아주 좋다.
ㅇ교사 5명, 학부모 5명, 학생 5명이 참가하는 ‘샤르베뜨로’라는 모임(우리의 학교운영위원회 역할과 흡사)이 있으며, 이 모임에서 학생 생일잔치와 학교의 시설과 재정 운영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나 근래에는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 4년간이나 시설 지원이 없는 실정이다.
ㅇ 교사는 모스크바 사범대학 출신자 중에서 소정의 시험을 거쳐 학교 자체적으로 채용하는데, 학사 學位者(4년졸)는 저학년, 석사 학위자(5년졸업)는 고학년을 맡는다. 교사의 보수가 낮기 때문에 교사의 대부분이 여성이며. 남교사는 전체 교사의 10% 정도이다.
ㅇ 교사는 주 4일을 근무하며, 퇴근 시간은 원칙적으로 오후 6시이나, 부업을 위해 대부분 3, 4시가 되면 퇴근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학교 가까이에 교사의 아파트가 있고, 식사가 무료 제공된다.
ㅇ모스크바 市議會의 결정으로 모든 학생에게도 교내 식당(150명 수용)에서 점심은 물론 아침까지 제공하며, 점심시간 20분이다.
설명을 마친 교장선생님은 교과별로 나누어진 각급 교과교실(생물, 역사, 외국어, 러시아어, 문학, 화학, 수학 등)과 안전교실, 열린교실, 놀이교실, 민속교실, 세미나실 등을 안내하였는데, 특기할 점만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ㅇ 생물교실 : 한 달에 한 번씩 박물관 식물원 등에서 현장 학습을 한다고 하며 교실 창 가득히 식물을 재배하고 있음.
ㅇ 역사교실 : 등급(학년)에 따른 3개의 서로 다른 교실이 있으며, 수시로 현장 탐방 학습을 한다고 함.
ㅇ 외국어교실 : 2개의 영어교실과 1개의 독일어교실이 있으며, 학습 집단은 10명을 넘지 않는다고 하며 ( 초등과정 2학년 때부터 외국어 교육 실시함.
ㅇ 문학교실 : 시 쓰기와 시 낭독을 중점 지도하여 정기적으로 학부형 초청 발표회를 가진다고 하며 문학을 중시하여 주당 시수가 가장 많다고 함.
ㅇ 러시아어교실 : 언어학습을 위한 단계별 카드를 비치하고 있음.
ㅇ 화학교실 : 실험 실습위주의 학습으로 학생의 흥미를 유발하고 필요한 경우 개별지도를 한다고 하며. 정책적으로 과학교육을 중시하여 수준이 높다고 자랑하나 변변한 실험기구 하나 보이지 않음.
ㅇ 수학교실 : 학생들이 풀어볼 문제가 단계별로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으며, 이 중 각기 수준에 맞는 문제를 골라 여러 학생 앞에서 설명하게 한다고 함.
ㅇ 열린교실 : 갖가지 기초 교재와 기구, 게임기, 장난감 등을 준비해 두고 하고 싶은 공부나 놀이를 스스로 찾아서 하게 한다고 함.
ㅇ 놀이교실 : 우리의 놀이방과 흡사하나, 투명 창으로 되어 있어 밖에서도 관찰이 가능함이 특징.
ㅇ 민속교실 : 학생들이 현장 탐방 학습 중에 구입해 온 갖가지 물품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게 특징.
이 밖에도 현관 벽면을 가득 채운 학부모들의 수준 높은 미술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러시아의 학부모들의 교육에 대한 열의도 결코 우리에 못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에 걸쳐 교실을 둘러보고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학교측에서 준비해 둔 다과를 들며 질의 응답 시간을 가졌는데, 잡음 많은 녹음기를 내놓고 자랑을 늘어놓는 표정이 웬지 어색하게 보이기도 했다. 학교에 전달할 선물로 하회탈을 가져갔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녹음기나 한 대 사 오는 건데.’ 라며 일행 중에 어떤 이가 아쉬워했다.
학교 방문이 계획보다 길어지는 바람에 3시나 가까워서야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엔 모스크바 중심가 관광 길에 나섰다. 개방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구석구석에 사회주의의 그늘이 남아 있고, 굳은 느낌의 규격화된 건물들이 많았다. 도심으로 들어가자 차량의 수가 많아지고 이따금씩 고급 승용차도 눈에 띄기는 하나, 전선으로 뒤엉켜 있는 거리가 어딘지 무질서하고 생동감이 없어 보였다. 버스에서 내려 러시아 혁명 50주년 기념으로 건립했다는 차이코프스키홀과 모스크바城을 쌓고 확장을 했다는 유리돌보르키 동상, 세계 3대 극장 중 하나라는 1776년 건립된 그 유명한 볼쇼이극장이 있는 거리를 돌아, 220t 통돌을 깎아 조각한 K. MARX의 석상, 혁명광장의 레닌박물관, 마샬쭈코프 장군 기마 동상을 듬성듬성 둘러 본 다음 곧장 ‘붉은 광장’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아름다운 횃불(양파 머리?) 모양의 지붕을 한 모스크바의 상징적인 건물이며 이반 대제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聖바실리聖堂과 레닌墓를 돌아보고, 광장 입구의 국영 백화점에서 한 시간 동안 자유로운 쇼핑 시간을 가졌다. 모스크바 최대의 백화점이라기에 기대가 컸었는데, 큰 규모의 외형과는 달리 가게마다 벽을 쌓아 칸막이를 한 내부 구조가 우리의 일반 상가건물과 흡사하고, 진열되어 있는 상품의 종류와 수준 또한 우리의 백화점에 비겨 낮은 편이었다. 관심을 가지고 둘러 본 피혁제품과 전자제품도 별다른 것이 없고, 일본 전자제품의 전문 판매점이 두어 군데 있을 정도이었다. 우리나라 회사의 진출이 많다기에 우리 상표가 붙은 제품을 찾아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 나오다가 많은 사람들 속에 무리 지어 다니는 한국 관광객들을 만났다. 하도 외제 물건을 마구 사 들이는 분별없는 여행객이 많다기에 손에 든 쇼핑 가방부터 살펴보니 다행히 물건을 산 사람이 별로 없는 듯 했다. 비싼 외화 들여 이곳에 와서 우리 제품의 우수성을 제대로 보는 식견이나마 키워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바실리聖堂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모스크바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라는 레닌언덕으로 갔다. 언덕 위에 서서 멀리 숲으로 뒤덮인 모스크바 강변의 아름다운 정경과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주경기장이었던 레닌운동장과 모스크바 시가지를 조망했다. 언덕 위에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인형과 우표첩과 사진첩을 팔고 있는 사람들이 놀랍게도 우리말로 호객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말을 너무 유창하게 하기에 우리말을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한국 유학생과 관광객들한테 배웠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을 찾았으면 이들이 이처럼 우리말을 능숙하게 잘할 수 있게 되었을까에 생각이 미치자 결코 자랑스럽다고만 할 수 없는 묘한 상념이 한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여기서 한 시간 정도 머물다가 언덕 도로 너머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웅장한 모스크바 종합대학교 본관 건물과 교정을 버스를 타고 가면서 둘러보고, 북한 대사관 앞을 지나 ‘아리랑 서울’로 향했다. 넓은 부지, 큰 건물 위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 인공기가 변화하고 있는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았다. 호텔로 오면서 본 아름다운 숲과 건물이 늘어서 있는 모스크바 강변, 그 속에서 빛나는 우리나라 회사의 광고판이 한층 큰 모습으로 다가왔다.
제 1 1 일 ( 7 월 3 1 일 ) 어느덧 이번 여행 일정의 마지막에 이르렀다. 눈을 뜨니 아침 7시이다. 창 밖을 내다보니 밝은 햇살 아래 길 건너편 우주 탐사 기념탑 로켓트가 막 발사된 듯 창공을 차고 있고, 그 너머로 지상에서 460m나 되는 아슬아슬한 높이의 아스탄끼노 TV 송신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
안내자의 배려로 러시아 호텔에서는 드물게 분배식이 아닌 뷔폐식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여장을 꾸려 호텔 밖으로 나오니 호텔 광장 한 모퉁이에 거리의 악사들이 우리의 아리랑을 연주하고 있어 일행인 황 선생과 가까이 다가가 3$를 주니 고맙다며 연신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였다. 얼마나 많은 한국 여행객이 투숙하기에 아리랑을 연주하고 있는 것일까? 옆을 돌아보니 열에 셋은 한국인 같이 보였다. 세계화도 좋고 국제화도 좋지만 어쩌자고 이처럼 밖으로만 쏟아져 나오는지? 이 많은 사람들 모두가 목적의식이 뚜렷한 의미 있는 여행객이길 믿고 싶었다.
9시 30분, 호텔을 나와 버스를 타고 크레물린宮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러시아 공산주의의 상징인 러시아호텔 앞을 지났는데, 이 호텔은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여러 개의 성당을 부수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공산주의 이념의 참 모습을 이보다 더 극명하게 말해 주는 것이 또 있을 것 같지 않아, 다시 돌아보니 역시 위압적인 규모이었다. 이젠 세상이 바뀌었으니 호텔을 부수고 이 자리에 다시 성당을 짓게 되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는 말을 나누며 쓴웃음을 지었다.
10시 20분, 오늘 연수의 핵심 코스인 크레물린宮에 닿았다. 크레물린은 러시아어로 원래 ‘성벽’을 의미하는데 사회주의 대국으로서의 면모와 러시아 문화의 최고 정수로서의 위용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1812년 나폴레옹이 불을 지르고 나간 길이라는 뜨로이츠가를 걸어 들어가 궁 입구에서 고궁에 들어 갈 때 인원 점검을 위한 간단한 검문을 거친 다음, 더 이상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궁 안으로 들어섰다. 궁 안에 들어서니 입구 쪽 길 옆 언덕에 나폴레옹이 퇴각할 때 두고 갔다는 785문의 대포가 전시되어 있었으며, 포신을 만지며 사진을 찍는데도 누구하나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의 총본산인 크레물린宮이라면 무시무시한 감시와 삼엄한 통제로 위압적인 분위기가 감돌 줄 알았는데 이리 자유롭다니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산주의 전당대회가 열린 곳이라는 대연회장 건물 앞을 지나 연방 내각관과 대통령궁 앞 광장까지 근접하여 사진을 찍었다. 건물 주위에 흰 선을 그어 놓고 그 밖에서만 통행을 허가했는데, 본관 건물과의 거리가 30m정도 될 것 같았다. 그 제한선 밖에서나마 이야기를 나누며 자유로이 오가는 관광객은 물론 건물 입구 통로에 몇 명 서 있는 감시원(경찰관?)의 자연스런 태도 또한 우리에겐 생소함과 의아함으로 다가왔다. 이 안에 정말 대통령 집무실이 있기는 있는가? 때마침 시계탑에서 울리는 요란한 종소리를 들으며 궁 광장을 돌아보았는데, 곳곳에 강성했던 옛 제정 러시아의 자취가 남아 있었다. 광장 앞쪽에 이반 대제가 러시아의 청동 주조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황제의 종’이 있었다. 청동 140t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일부가 깨진 채로 있었는데 깨진 조각만도 12t이나 나간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역시 기술력 과시용으로 만들었다는 ‘황제의 대포’가 보였는데, 포신의 길이가 530cm, 포구 직경이 89cm, 포알 크기가 1t이나 되는 전시용 대포라고 한다. 이반 대제가 자신의 결혼식을 위해 세웠다는 성당도 있었다. 이 밖에도, 본관 동편 잔디밭에 레닌 동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개방 이후 옐친 대통령이 철거하고, 그 자리에 꽃밭을 조성했다고 한다. 버려두었던 성당을 수리하고 궁을 자유로이 개방하는 모습에서 러시아의 변화해 가는 일면을 볼 수 있었다. 1시간을 머물다가 궁을 나와 걸어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영원의 불’을 찾았다. 2차대전 때 전사한 2,000만 러시아 군인들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이곳의 불은 400년 동안 꺼지지 않으며, 러시아를 찾는 각국 원수가 이곳을 찾아 헌화한다고 한다. 영원의 불을 보고 나서 개선문이 있다는 광장으로 가기 위해 지하도를 걷는데 우리가 러시아에 처음 도착하는 날, 현지 안내자가 경계를 당부하던 꼬지꼬질한 차림의 걸인 모습을 한 집시들이 달라붙는다. 대부분이 이를 업은 여자들이다. 이들을 동정을 하게 되면 주변의 다른 집시들이 떼거리로 달라붙어 주머니를 뒤진다더니 과연 주머니에 손이 마구 와 닿는다. 안내자의 당부를 지켜 매정하게 뿌리치고 버스에 올라 개선문으로 향했다.
러시아의 영웅 쭈꼬초프 장군이 프랑스의 나폴레옹軍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웠다는 이 문은 외양이 파리의 개선문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프랑스는 그들대로 유럽 정복의 기념으로 개선문을 세웠고, 또 러시아는 그들대로 프랑스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개선문을 세웠다니 이건 분명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문 안에 들어서자, 廣場 정면 중앙 끝에 141.8m 높이의 전승 기념탑이 있고, 탑에 이르는 광장 양편으로 학살된 유태인을 기리는 조소상이 보였다. 독가스에 학살된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을 청동으로 조각한 것인데, 잘린 손발과 부러진 안경, 모자, 울고 있는 아이 등이 처참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곳을 끝으로 이번 해외 연수가 마감된다는 아쉬움에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 두자는 민 선생의 권유로 사진을 찍고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아리랑 서울’로 향했다.
식당에 도착하여 부대찌개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곧장 모스크바 국제공항에 닿았다. 도착하는 날, 낯설게 다가왔던 풍경들이 다소 익숙해진 때문인지 공항을 들어서는 기분이 그리 생소하지 않고, 대기실 곳곳에 서울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낯익은 얼굴들이 무리 지어 서 있어 설레는 마음이 한결 더했다. 관광이나 연수를 위해, 혹은 유학이나 연구를 위해 이곳에 왔다가 돌아가는 사람들 틈에 대한민국 국군 복장을 한 군인들이 있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어 보니, 軍 장비 인수와 조작을 위한 교육 훈련차 이곳에 왔다가 6개월 만에 고국에 돌아간다며 무척 기쁜 모습들이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동포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너무 반가워 연신 악수를 나누며 반가워했다. 두 시간이 넘게 까다로운 출국 수속을 마치고, 예정보다 20여분이나 늦은 오후 6시, 비가 내리는 가운데 공항을 이륙하자 만감이 오고갔다. 비록 꽉 짜인 일정으로 피곤하기는 했지만, 많은 새로운 것들을 보고 간다는 만족감과 함께 십여 일만에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기쁨이 속 깊이 파고들었다.
짧은 기간 동안 보고 느낀 경험만으로 어느 나라 어느 사람들의 어떤 의식이니 문화니 하고 말하는 것은 경솔할지도 모른다. 극히 제한된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이란 새로운 환경과 문물을 직접 접해 보고 느낌으로서 무한한 자기발전의 원동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이번 연수는 내게 있어서 두고두고 소중하고 값진 경험이 될 것이다.
이번 旅程을 통하여 얻은 모든 체험들이 앞으로의 삶을 더욱 윤택하고 풍부하게, 그리고 더욱 의미 있고 보람되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그 인상과 감동을 다시 한 번 새겨 본다.
영국은 역시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는 老대국이었다. 찬란했던 옛 모습을 간직해 가면서 天惠의 넓은 평원과 숲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자연 속에 질서를 지키며 여유롭게 살아가는 그들이 인상적인 나라였다. 많은 녹지 공간의 확보와 함께 1500여 개의 공원을 가지고 있고, 도심에 여우가 살 만큼 자연이 잘 가꾸어져 있으며, 분별 있는 사람들이 분별 있게 살아가는 나라였다. 쾌적하고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여가를 즐기며, 수수한 옷차림과 낡은 소형차, 중고품을 사서 쓰는 시민들의 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고색창연한 가옥들과 압도적인 규모의 대영박물관, 수없이 많은 궁전, 사원, 광장, 기념탑 등 역사적인 유물 유적에서 옛 조상들의 유산을 간직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긍지를 가진 국민임을 엿볼 수 있었고, 古稀를 넘겼을 나이의 할머니가 호텔과 식당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일하는 모습과 중고품 가게에서 본 할아버지의 밝고 건강한 얼굴, 거리를 闊步하는 노인들의 의젓한 풍모에서 영국의 튼튼한 底力을 읽을 수 있었다.
또한,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꿈과 야망을 품고 모여들어 살아가고 있는 도시, 런던에서 자유와 질서를 사랑하고 소리 없이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가꾸어 가는 그들의 힘찬 발걸음을 보면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선진 영국의 밝은 내일을 헤아려 볼 수 있었다.
독일 또한 많은 숲과 강, 넓은 평원으로 이루어진 복 받은 땅이다. 잘 닦여진 넓은 고속도로, 계획된 도시 환경, 그 속에서 질서를 지키며 부지런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무서운 독일의 힘을 볼 수 있었다. 패전의 잿더미 위에서 절망과 허기를 딛고 꿋꿋이 일어서서 오늘을 이룩한 그 절약과 근면, 준법정신을 그들의 일상의 삶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재생 휴지를 사용하고 고층 건물의 규제하며, 자전거 전용 도로의 확보하여 활용하고, 나무를 사랑하며 환경보전에 힘쓰는 그들의 의식을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자신들의 문화 예술 유물 유적은 물론 舊소련軍 전승 기념 유적지까지 그대로 보존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돌아 보였다. 하이델베르그城에서 독일의 힘을 느꼈고, 괴테 생가에서 괴테를 대문호로 키운 교육의 힘을 보았다.
분단의 상황을 극복하고 그들 특유의 민족성과 통일에 대한 열망, 꾸준하고도 체계적인 계획과 준비로 마침내 통일을 이루어 낸 그들, 그리고 통일로 인한 갖가지 어려움과 부담을 묵묵히 감내하며 안정을 정착시켜 가고 있는 그들에게서 훌륭한 교훈을 읽을 수 있었다. 또한, 서로 다른 모습의 동․서 베를린을 둘러보면서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건물, 도로, 공원 등 잘 정돈된 도시 환경, 그 속에서 활기 넘치는 사람들로 붐비는 서베를린과 버려진 집, 문을 닫은 공장, 잡초 무성한 공터, 그 위에서 재기의 몸부림이 한창인 東베르린의 모습은 그대로가 하나의 반공 교과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베일에 덮여 있던 공산주의의 종주국 러시아는 개방 이후, 엄청난 변화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서히 일어서고 있으나, 아직도 구석구석에 사회주의의 그늘이 남아 있었다. 폐쇄 사회에서 개방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지고 있는 어둡고 무질서한 모습들, 혼란기에 등장하는 일확천금한 졸부들의 행태와 극심한 貧富 差, 높은 인풀레 현상, 교통, 사회, 경제의 사각지대에서 정의와 질서를 어지럽히는 갖가지 어두운 모습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반면, 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문화적 자존심이 강하고, 예술과 멋을 즐기며 사는 그들 특유의 여유도 읽을 수 있었다. 우리와는 달리 우수한 인재가 대부분 법, 의학 분야보다 어문계나 예술계를 선호하고, 대학 교수의 월급이 100$ 내외인데도 학자를 존중하고 있다고 한다. 학문과 예술 그 자체에 가치를 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물질 위주로 평가하는 사고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교육을 중시하고, 녹지 공간을 확보하여 환경보존을 생활해 가고 있는 점도 높이 사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되었다.
앞으로 러시아는 개방 이후 도도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야기되는 문제점들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광활한 대지와 풍부한 자연 자원, 인적 자원을 개발하여 제대로 활용하면 선진대국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한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