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오래 전부터 주위로부터 시집 출간 권유를 많이 받아왔다. 시를 벗하며 살아오는 동안 쌓인 작품이 이백여 편을 헤아린다. 사십 년이 넘는 교직 생활을 마감하면서, 손때 묻은 작품 80여 편으로 첫 시집을 묶는다. 정년퇴임의 감회와 처녀 시집의 설레임이 뒤섞이면서, 이 시집을 계기로 시와 더불어 세상 속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가고자 한다. 시의 행간마다 살아온 날들이 되살아나지만, 정년퇴임만 아니었으면 첫 시집은 또 뒤로 미루어졌으리라. 그만큼 서툴고 부족함이 많다는 뜻이다. 훗날 더 좋은 작품으로 기대에 보답할 것을 기약하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시집이 넘쳐나는 시대에 또 한 권의 시집을 보탠다.
2013년 여름
김 원 호
제 1부 그날도 바람이 불었다
1
꽃밭에서
꽃밭엔 꽃이 자라겠거니
그렇게만 여겼는데
언제부턴가 우리 꽃밭에
풀이 꽃처럼
그렇게 자라고 있다.
풀이 꽃 같다가
꽃이 풀 같아지면서
나비도 벌도
슬그머니 풀의 편이 되어버렸는지
온통 풀 속에서만 놀고 있다.
꽃에서 배를 채우고는
풀과 함께 희희낙락하는
저 나비와 벌들의
배은망덕함
그러나 그들을 꾸짖기엔
우린 우리의 쓸개가 너무 가볍구나.
입이 없구나.
(우린 버릇처럼 말해 오지 않았던가. 중요한 건 힘이지 이름이 아니라고.)
아, 그러나 어쩔거나
그래도 자꾸만 눈물이 나는 것을.
꽃이 꽃의 이름을 포기하고
풀의 눈치나 보고 사는 이상
우린 언제까지나
연약한 풀일 수밖에 없는 것을.
2
새벽
날이 새기엔 아직 먼 외곽인데
잠들지 못 한 영혼
녹슨 창을 연다.
창밖엔 시원始原을 알 수 없는 시간이
어둠과 함께 흐르고
어둠을 가르는 낙숫물 소리에
말갛게 가라앉는 상념.
신라 토기처럼 말이 없는 어머니가
호젓하니 비에 젖고 있다.
성긴 잎새에 머문 바람조차
숨죽인 절대적막
문득
천 근 바위 같은 한숨소리 새로
잔뜩 오만해진 교회당 확성기의 성가聖歌가
새벽 네 시를 외친다.
3
줄
테니스 라켓 줄이 터졌다.
비껴 맞은 공 한 방에 팽팽하던 탄력이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열여덟 개의 날줄과 스무 개의 씨줄이
저마다 제 힘으로 버티고 있는 줄 알았더니
한 줄이 끊어지자 온 줄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꼭 그 어디 그 무엇을 보는 것만 같다.
4
하느님의 고민
불신 시대라
믿을 곳은 한 곳밖에 없나 보다.
푸른 집이다, 의사당이다 하는 집들은
예나 제나 그 높이인데
교회당 첨탑은 하늘처럼 높아만 간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마음이
전보다 편치만은 않으실 것 같다.
하늘 나라니까 설마
천국 비리니 천국 사태 같은 거야 없겠지마는
길은 오직 한 길뿐인데 색깔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한꺼번에 덤벼 오는 통에
마음 유하신 하느님께선
그 목소리를 분별하시는 데만도
골치깨나 아프실 것 같다.
높아 가는 교회당만큼이나 근심이 많으실 것 같다.
5
갈대는 억울하다
갈대는 억울하다.
바람에 약하다는 그 말이 억울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게 어디 갈대뿐이랴?
바람 한 번 불어오면
청청하던 솔잎이 발갛게 부서지고
산 같던 천년 고목도 여지없이 흔들리는데
반짝이던 별들이 힘없이 빛을 잃고
당당하던 장부의 말도 눈송이처럼 흩날리는데,
팽팽하던 긴장이 일시에 무너지고
오대양 육대주도 속수무책 흔들리는데,
갈대는 약하다는 그 말이 억울하다.
6
문門
아무리
바람 불어도
문은 문이라야 하는데
너무 쉽게 열리는 문.
열리지 않는다고
답답해하던 그 때가 그립다.
7
불
아무리 발버둥쳐도 산이 낮아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사람이 높아지는 길밖에 없다.
높아지지 않고 막으려고만 하니 불이 튄다.
불이 튀면 사람도 사람이지만 역사歷史가 까맣게 탄다.
불을 끄는 데는 물이 약이다.
오늘 아침 휴지를 태우다가 깨달은 진리다.
그 뜨거운 불도 물에는 약했다.
8
나무
산 아래 마을에서 더운 모습만 보다가 산등성이에 올라 근심 없는 나무를 보니 가슴이 다 열린다. 비 오면 오는 대로 젖어 주고 눈 오면 오는 대로 맞아 주면서도 제 모습 제 얼굴 지키고 사는 나무들. 목이 말라도 바람 따라 속없이 얼굴 바꿀 줄 모른다. 소나무가 수양버들 되지 않는다. 그 어려운 법 하나 몰라도 치고 박고 다투지 않고, 시끄러운 선거 한 번 안 하고도 저마다 제 자리 지킬 줄 안다. 대통령제 내각제 같은 거 하나 몰라도 때 되면 꽃피우고 열매 맺고 잘만 산다. 세상이 무슨 말을 해도 못 들은 척 일편단심 하늘만 믿고 산다.
9
행복
산나물 댓 움큼 뜯어다 놓고 하루 종일 시장 바닥 길 옆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틈틈이 바지 속주머니에 꼬깃꼬깃 접어 둔 지폐 몇 장을 꺼내 보고 또 보면서 혼자서 남모르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 할머니. 귀여운 손 내미는 손주의 모습이 어리는지 주름진 얼굴 골골마다 보름달 같이 화안한 꽃을 피우신다.
10
큰 키가 죄 되는 세상
이 겨울에
키 큰 나무는 모두 목이 잘려 있다.
세상 모르고 솟아오르던 기세 다 잘려나가고
말 못하는 둥치만 남아 있다.
잎 푸른 머리가 무슨 죄 있다고
저리 단죄를 한 걸까.
이젠 바람 불어도
아니라고 흔들어 보일 머리가 없다.
머리가 없으니 애꿎은 배만 부르다.
바람 많은 계절
키보다 배부른 게 안전한 세상
키 큰 게 죄가 되는 세상에선
키 큰 나무는 늘 키 작은 사람들의 표적이 되는구나.
아, 그렇구나.
나무도 너무 크면 저리 목이 달아나는구나.
11
초파일에
도리사桃李寺를 찾았다가 계곡에 발도 못 담가보고 쫓기듯 되돌아왔다. 연등도 도리도 못 보고 흔해빠진 바람만 실컷 보고 왔다. 방생은 옛 얘기인가. 절 오르는 길목 저수지에 앉아 고기 낚는 사람들 웃음소리가 목탁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쭉 뻗은 아스팔트 위로 고급 승용차들이 도통한 듯 내달리고 있었다.
12
무제 1
지층 밑에 숨어살던
바람이
마른 풀잎을 흔들며
슬금슬금 기어 나온다.
바람이 모이면
춘향의 눈물이 되는 것을
눈먼 돌은 그저 가슴만 적신다.
이따금씩
막다른 골목 굽이마다
무더기로 쏟아지는 그림자와 함께
흥근히 고여 오는 뜨거운 숨결이
섬뜩섬뜩 비수로 와 닿는다.
그래도 내겐
섣부른 걸음으로
황막한 땅을 적시며
견고한 성을 넘고 온
가혹한 그리움이
엄청난 자랑이다.
13
무제 2
그날도 바람이 불었다.
능청스러운 바람은
무고한 풀을 흔들어 깨워 놓고는
산을 넘어가 버렸다.
바람이 머물다간 텅 빈 뜨락에
어둠을 밝히는
지등紙燈 같은 별마저 스러지고
순수를 도금한 깃발이 나부낄 뿐
우리의 내용은 어느 곳에도 없다.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듯
부지런히 별을 담아 보지만
빛은 잠시 주변을 맴돌다가는
허망하게 가 버리고,
이슬보다도 먼저 온 안개가
가득히
가슴을 채운다.
14
무제 4
가로등 불빛 때문에 밤을 모르고 자란 곡식이 결실을 못 해 걱정이라고 한다. 자야 할 때 충분히 잠 자지 못 해 열매가 부실하다는 곡식 이야기가 곡식 일만 같지 않다. 누구든 어두울 땐 어두워야 하고 밝을 땐 밝아야 제 노릇을 하게 된다는 계시啓示 같다. 그런데도 죽으라고 밝은 빛만 좇는 사람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있어 이들에게 어둠을 가르칠 수 있을까.
15
상주의 스피노자
선비의 고장 상주에 가면
버스 정류장 한 켠 담벼락 밑 길바닥에 앉아
리어카를 책상 삼아 시를 쓰는 할아버지를 만난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냥 그 자리
밀짚모자 작업복에 고무신 신고
렌즈를 닦듯 시를 닦는 할아버지를 만난다.
눈이 너무 밝은 사람에겐 보이지 않고
귀가 너무 큰 사람에겐 들리지 않는
세한도歲寒圖 노송 같은 할아버지를 만난다.
16
어떤 인생
꽃다운 스물다섯
죄 많은 청상靑孀 되어
눈물로 지켜 온 여든 한 평생
언제 한 번 허리 펴고 누워 볼 날 있었으랴.
불같은 시부모님 지성으로 봉양하고
억새 같은 시누이 형제 가슴 삭여 인정 잇고
두 아들 딸 하나 금지옥엽 키워
하늘같은 손주 손녀 사랑에
등 굽는 줄 모르시더니,
철들자 제 갈길 다 떠나가고
넓은 방 뼈만 남은 다리 움켜쥐고
홀로 누워 계시다기에
소문 듣고 달려가 거친 손 모아 쥐자
더운 눈물 떨구시며
사무치는 회한에 차라리 눈 감으시고
울먹울먹 이르시는 말씀.
웬 목숨 이리 질긴 줄 모르겠다는
한 배인 한 마디뿐.
등 굽혀 지켜 온 한 많은 세월이
종가집 안방 댓마루에 걸려
아슬아슬 정지해 있더니,
텅 빈 그 자리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사람들 속에서
가을이라고
감이 저리 붉다.
17
비
올 봄은 유난히 뜨겁다.
지난겨울의 추위가 혹심했던 탓일까?
울산에서도 동해에서도 뜨거운 소식뿐이다.*
그 열기가 산에까지 번졌는지
자고 나면 산불이다.
산에 불이 나면 산도 산이지만 산보다는
애꿎은 고을 나리의 가슴이 더 까맣게 탄다.
이렇게 가슴이 타면 남이 보지 못하는
산신도 보이는지
어젯밤엔 고을 나리께서 산신제를 다 올렸단다.
돼지 목을 베어다 놓고 내 목 떨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그게 영검이 있었던지 오늘은 고맙게도
비가 내리고 있다.
울산에도, 동해에도, 대학에도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 1989년 뜨거웠던 울산공단과 강원도 동해의 노동자 및 전국 대학의 학생 시위.
제 2부 울릉 단상
18
화양계곡華陽溪谷
손수레가 지나던 길에
어지러운 문명이 덮여
태고의 사투리가
신음처럼 원추리로 피어 있다.
겁먹은 매미 소리가
저음의 금속성을 띠고 흘러나와
미묘하게 산을 흔든다.
부끄러움을 삼켜온 아픈 세월
하늘을 그리며
빛을 그리며
우직스레 살아온 이력이
하얗게 속살을 드러내고
흐드러지게 웃고 있다.
강처럼 긴 계곡 어디에도
우암尤庵 선생은 안 계시고
온통
바위에
물에
부활을 새긴 허명虛名들만 빛나고 있다.
19
가을 서보西洑*
청정한 호심湖心 아래
조각 구름이 날호여 흐르는
술 익는 강마을
겁 없는 숭어 떼가
반짝반짝 은빛 언어를
봄놀이는 오후
어머니의 노래가
노을로 타면
고추잠자리가
빨간 불을 뿜어 대고
근심을 잊은 미루나무
노오란 손을 내밀어
하늘에 닿아 있다.
대룡산 계곡 따라
제여곰 수떠리는
어르눅은 나무들 사이로
수줍은 듯 망개가 볼 붉히고,
바람을 거역하는
청태靑苔 낀 바위 위로
맹랑한 다람쥐가
간대로 기어오른다.
* 서보 : 경북 상주시 내서면에 있는 저수지
20
화동 소식 1
1
화동化東*
내가 오르기엔 너무 높은 산이다.
하늘이 좀 가깝다고는 하지만
구름에 가려 답답하긴 오히려 더하고
사시장철 바람은 또 어찌나 센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2
봄이 와도 봄이 온 줄을 모르고
겨울이 가도 겨울이 간 줄을 모르는 사람들.
비가 눈으로 내리면 그저 희다고 좋아하는 사람들.
햇볕 한 번 지나가면 비보다 더 더러운
흙탕물이 남는 것 그걸 모르고.
3
기이한 골짝만큼이나 많은 방언들.
범상한 표준어에 익숙해 온 나에겐
들어도 들어도 모르는 말뿐이다.
새 소리 바람 소리보다 어려운 말뿐이다.
* 화동 : 경북 상주군 서북부에 위치한 산간 마을
21
화동 소식 2
해발 280미터의 어산재에 올라서면
우리들은 알 수 있지.
뱀 같이 구불구불 휘어진 길의
서슬 푸른 의미,
벗겨진 무릎 매만지고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땀에 젖은 가슴을.
굽이진 산 너머로
밉도 곱도 않은 까닭들을 넘치게 담아
때 없이 흘러가고 흘러오는 구름
산허리마다 전흔戰痕처럼
흘러내리는 검은 돌무더기
그 속에서 흐느끼는 잡목들의 소리 소리들을.
버려야 할 것과 끝내 지녀야 할 것
모두를 태우면서까지
쪽빛 그리움 하나에 목을 걸어두고,
이유만 살아남은 산을 의지하여
오늘도 아슬아슬 탄차炭車가 달린다.
22
임하댐 수몰 지역을 지나며
산 같이 높은 교각 아래
잔뜩 풀이 죽은 폐촌.
두고 떠나지 못 하는
노인들의 눈길이
굽이쳐 온 연륜보다도 쓸쓸하다.
하 많은 사연이 서린 뜰엔
모르는 잡풀이 슬프도록 무성하고,
허물어진 담 너머로
봉숭아 빨간 꽃잎이
울음 울 듯 피어 있다.
죄 없는 나무와 풀,
살가운 인정들을
이렇게 수장水葬시켜 버리는 일이
꼭 무슨
큰 벌을 받을 것만 같다.
23
성산星山 소견
주인이 머물던 서하당棲霞堂이 비를 맞고 있었다.
빗속에 대숲은 어두워지고 산장의 네온이 눈이 부셨다.
부신 빛 속에서 식영정息影亭이 숨죽이고 서서 손을 맞고 있고
소쇄원瀟灑園은 세월을 핑계로 끝내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하릴없이 발길 돌려 나오자
소낙비가 나그네 답답한 가슴을 울컥울컥 쏟아 주었다.
오늘 다시 송강松江이 지나가는 손 되어 성산을 찾는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비를 맞으면서
성산을 성산으로 노래한 송강이 부러웠다.
아득히 높아 보였다.
돌개바람 몰아치는 벼랑의 시간.
산 아래 호수가 저만큼 깊어가고
지실 풍경 하늘 위로 시나브로 비안개가 번져 오고 있었다.
내 언제쯤 사무치게 깊어져 성산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24
요즘 같은 세상엔
요즘 같은 세상엔
돌멩이 하나 없는
아스팔트 곧은 길보다
흙먼지 이는 시골길이 나는 좋다.
구수한 흙냄새 때문이 아니다.
시원스런 포플러 때문이 아니다.
아무도 간섭 못 할
내 걸음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25
울릉 단상 1
- 만각晩覺
이곳에 오니 밖이 보인다.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보지 못 한
사람이 보이고 하늘이 보인다.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면서
지난날 듣지 못 한 십자가의 웃음소릴 듣는다.
26
울릉 단상 2
- 근황
밖에서 멀리 두고
국토의 막내라 애달파하고
천혜의 풍광을 노래하지만
내심은 변죽도 울리지 못 하는
어릿광대들의 무대.
그 놀음에 덩달아 춤추는 세상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갈 수만 있다면
두 눈 딱 감고
춤사위에 휩쓸려 미친 척 한 번
흠뻑 취해보고 싶다는
그 가슴이 보인다.
27
울릉 단상 3
- 비
배 없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바다 창살에 갇힌 한 점 섬
가을비가 밤을 새워
마음 둘 곳 없는 기다림을 내린다.
비에 젖는 것은 보이는 풍경만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더 젖기 십상인데
남의 심사 모르는 하늘이 며칠째 비타령이다.
눈 감아도 보이는 망망대해
습기 가득한 사택 냉방에 누워
추적추적 허적이는 빗소리를 들으며
고운孤雲의 우음偶吟 속을 거닐고 있다.
28
울릉 단상 4
- 풍수지탄風樹之嘆
아들 보러 뭍에서 섬으로 나들이 오신 Y부장 아버님
올해로 춘추 일흔여섯이라는데 쉰이 넘은 아들 손잡고
푸른 성인봉을 청청하게 오르시는 모습 보니
일흔도 못 채우시고 저 세상 가신 아버지가 그립다.
언감생심 산행까지는 두고
이승 어느 하늘 아래 누워 계시기만 해도
선연한 그 모습 가까이 한 번 그려볼 수 있기만 해도
29
울릉 단상 5
- 신호를 기다리며
아침마다 출근길에 만나는 가파른 비탈길. 이젠 어지간히 거쳐 온 줄 알았던 비탈길이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동백나무 숲길 따라 현관 앞에 들어서니 해송을 넘어온 짠 바람이 훅 코끝을 스친다. 생소한 풍경 앞에 마음 추스를 겨를도 없이 어리둥절 낯선 자리 앉은 지 어언 반 년. 지내놓고 보니 순간이다. 무더위가 유별났던 지난 여름 끝자락에 늦장마를 만나 머뭇거리던 사이 어느새 줄기차게 푸른 빛을 더해가던 산색이 속도를 줄여 정지선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신호가 바뀌면 산은 또 금새 노랗고 붉은 색을 향해 질주해 갈 것이다. 앞만 보고 바쁘게 달려온 내 색깔은 어디쯤 와 있을까. 계절이 바뀌면 어김없이 변해갈 산, 나 또한 내 얼굴과 보폭에 맞는 색깔로 바뀌어 가야할 것이다. 벌써 바람이 차다. 서서히 겨울을 맞이할 단도리를 해야겠다.
30
울릉 단상 6
-나리분지에서
나리분지에 서서 삼십 년 전 여영택呂榮澤 시인이 ‘발로 쓴 울릉도’를 몸으로 읽는다. 외륜산이 어머니의 품처럼 감싸고 있는 울릉도의 안방. 개척민들이 거주했다는 너와집과 투막집 앞에서 배낭을 맨 노시인의 온기를 더듬어 본다.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땅배가 무시로 오가고, 소가 한가로이 밭을 갈던 자리 트랙터 소리 귀 익은 들판을 바라보며, 흐린 눈길로 오늘을 예감하던 시인의 모습을 그려본다. 세상이 다 변해가도 하나만은 남아있길 소망하던 시인의 간절한 염원이 한사코 나그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봄이면 눈 속에서 향긋한 고개를 내미는 명이, 여름이면 초록의 평원에 진동하는 더덕 냄새, 가을이면 기슭마다 군락을 이뤄 피어나는 울릉국화와 섬백리향, 겨울이면 산 같이 많은 눈이 내려 북국을 이룬 설원에서 뭍으로의 그리움을 잠재우던 곳. 청청한 성인봉 봉우리를 바라보며, 새삼 팔 년째 병석에 누워 계신 ‘발로 쓴 울릉도’의 그 시인이 그립다.
31
울릉 단상. 7
-갈매기-
울릉읍에 출장 갔다 돌아오는 천부 바닷가 바위 위에 오종종 떼를 지어 모여 앉아 있는 갈매기를 보고 함께 버스 타고 오던 할머니 왈, 오늘은 갈매기들이 무슨 회의를 하는 모양이라고 하시는데 그게 아주 자연스럽게 들렸다. 사람들은 자신들만 생각이 있는 줄 알지만 세상의 눈빛이 날로 달라져 가는데 갈매기라고 생각과 분별이 왜 없겠는가. 적어도 갈매기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을 분별해 먹을 줄은 알고 굶어 죽어도 독이 있는 복어는 먹지 않는다. 삼키면 죽을 줄 뻔히 알면서 아무거나 삼키지 않는다. 사람들은 갈매기가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 하지만, 갈매기1는 아무리 세상이 변해 가도 자신들의 얼굴을 바꾸지 않는다.
32
울릉 단상 8
-속수무책-
배 없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가 없는 절해 고도. 지난 밤 어머니 별세 소식 받은 K선생님. 하루 한 번 오가는 배 타기 위해 스무 시간 넘게 기다린 끝에 어렵게 배를 타긴 했는데, 40분쯤 나아가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 만나 가던 길 되돌아와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 바다 창살에 갇혀 죄 없는 죄인이 된 K선생님 타는 가슴이 저무는 저녁하늘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다.
제 3부 날아가는 시간
33
할아버지의 산
멀리서 바라보면 하나 같이 푸른데
다가가 보면 그 산이 아니다.
오 년생 잡목에
오십 년 노송이 속수무책 밀려나고
바위도 낯익은 바위는 도회지로 가고 없다.
솔바람이 무너지면서
항시 할아버지 편이던 뻐꾹새마저
하나 둘 산을 떠나고
소나무가 있어야 산이라시던
할아버지 말씀이
이 푸른 오월에
때 아닌 단풍으로 지고 있다.
옷이 많아야 사는 세상에서
사시사철 단벌뿐인 소나무의 패배는
예고된 패배였지만
끝까지 소나무이길 지조해온
너의 패배는
철저한 유신론자이시던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우울하게 한다.
오늘 아침
그 할아버지의 증손자인 아들이
산 그림을 그렸다.
파아란 하늘에 흰 구름이 떠가고
산이 온통 소나무로 빽빽한 그림이었다.
놀랍게도
겸재謙齋의 산수화에 그 많던 할아버지의 소나무가
아들의 그림 속에서 파랗게 숨을 쉬고 있다.
34
어버이날에
동성로東城路 쇼윈도가
카아네이션으로 타는 저녁
거리에 나갔다가 어머닐 만났다.
열두 해 전 그 모습대로
말이 없으셨다.
그 숱한 카아네이션도
사치奢侈라 마다시고
물이나 한 대접 달라신다.
옷도 밥도 다 두고
손이나 한 번 잡아 보자신다.
하늘 같은 손주놈은
차마 아까워서
두고두고 그리워나 하자신다.
한 송이 꽃도 달 수 없는
텅 빈 마음은
어머니 잔잔한 미소만
방울방울 엮어서 돌아 왔다.
35
아내
아내가 아프다고 누워 있으니
집안이 다 적막하다.
평소 말 없던 아내의 입술 어디에
그토록 많은 말들이 숨어 있었던 걸까.
덤덤하게 무표정하던 얼굴
어느 구석에 그토록 포근한 웃음이 숨어 있었던 걸까.
작고 야윈 가슴 어디에
그토록 따슨 화목이 숨어 있었던 걸까.
오늘밤엔 나도 아내 따라 깊이깊이
누워 있고만 싶다.
36
근황 2
가을이 떠나갔으므로 귀뚜라미는 더 이상 울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당신의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당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2002 월드컵의 함성은 우리들의 최소한의 자존심입니다.
민들레는 21세기에도 민들레이고,
소나무는 비를 맞아도 소나무 입니다.
한 잔 술에 취하는 사람은 반 잔 술만으로도 비틀거립니다.
돋보기를 끼었는데도 도무지 분간이 서지를 않습니다.
산이 높다고 나무가 물이 될까요.
강이 깊다고 물이 나무가 될까요.
아무리 막고 막아도 나무는 나무고,
물은 물이 되는 이치가 무색해 보이는 밤입니다.
이런 밤엔 차라리 청산 속의 그 사람, 벽계수가 그립습니다.
37
부끄러운 이야기
검은 바탕에 흰 글씨를 쓴 작품 하나를 두고, 테두리를 검은색으로 할까 흰색으로 할까로 하루를 앓았다. 글씨가 흰색이니 테두리가 검어야 한다는 것도 일리가 있고, 글씨의 바탕이 검으니 테두리도 검어야 무게가 나간다는 말도 그럴듯하지만, 어디 색깔이 검은색과 흰색뿐인가. 검지 않으면 희어야 하고 희지 않으면 검어야 한다는 논리가 목에 걸려 고민하다가 흑백 색맹이나 되지 않을까 겁이 나기도 하고, 또 그렇다고 어중간한 회색을 들먹이면 인간 대접도 못 받게 될까봐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보니 내 커 보이던 키가 너무 작구나.
38
비 오는 날 자전거를 타고
마른 날 기름 없이도 가는 자가용이라고 큰소리치던 객기가 속수무책 비를 맞는 출근길. 비 속에서도 거침없이 질주해 가는 자가용 택시를 보면서 남을 웃던 내 자랑이 역설적인 사랑이었음을 웃는다. 거리 어디를 둘러봐도 내 자랑 하나 가릴 우산은 없고 이따금씩 지나치는 낯익은 얼굴들의 화인火印이 D단조로 미끄러져 가지만, 사시장철 바람에 짓밟혀 온 풀잎들은 능청스런 태양보다 시원한 비가 좋다고 파릇파릇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게 비 안 맞는 자가용 택시보다도 만 배나 더 자랑스럽다. 비가 와도 옷이 젖지 않는 사람들, 마른 날에도 옷이 젖는 사람들 모두가 다 한 가지씩의 자랑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요즘 같이 뜨거운 세상에서 젖을 수 있다는 자랑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복인가.
39
소주나 마시고 싶다
밤새 눈이 내렸다. 눈 한 번 내리니 세상이 온통 얌전해졌다. 세상도 세상이지만 무섭게 질주하던 차들도 놀랍도록 순해졌다. 과속 잘 하고 끼어들기 잘 하는 차일수록 제 길 지켜 엉금엉금 기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그 위로 자꾸만 약자 앞에 힘자랑하고 강자 앞에 비굴해지던 눈 밝은 사람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교통경찰 한 사람 없어도 제 속도 제 차선 지켜 질서 있게 가는 차들을 보면서 세상이 무슨 말 해도 걸음 바꾸지 않는 거북이 생각이 났다. 오르는 데 잽싸고 내려가는 데는 어눌한 토끼 생각이 났다. 퇴근길엔 그 놈을 안주 삼아 세상모르게 소주나 마시고 싶다.
40
가을 서정
가을이 여무는 강나루
물안개 피어나는
강물 위로 곱게 내려앉는 새
여백을 수놓는
억새풀 은빛 몸짓
한참을 바라보다 보니
돌아갈 내가 없다
41
가을 앞에서
커피 한 잔에 정이 오가던 때가 있었지.
담배 연기 그윽한 향기 속에
사랑이 여물고
강물의 푸른 길이 일어서던 때가 있었지.
연분홍 실루엣 사이로 어렴풋이
얼굴이 보이던
그곳엔 지금 무슨 꽃이 피고 있을까.
현란한 산문에 가려
시가 발길에 채이는 풍요 속에
시를 두고 시가 고픈 요즘
내 걸음으로는 들어가 볼 수 없는
가을 저녁의 숲 앞에서
진부한 일상 소음 다 벗어던지고
회복기의 환자처럼
그 때 그 보행을 다시 배워가고 싶다.
42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순耳順을 넘기고서야 교감이 된 강 선생님. 교감이라는 자리가 꼭 돈 주고 산 양반 같이 거추장스럽다고 한다. 마음 놓고 쉰소리 한 번 하기도 부담스럽고, 졸립다고 눈 한 번 붙이기도 어려워 교사 적 그 자리가 자꾸만 돌아 보인다고 한다. 그 하나 믿고 우직하게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르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한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세상을 닮아가고 있는 자신이 두렵다고 한다. 나는 강 교감이 세상을 닮아 이젠 그 자리가 두렵지 않다고 하지나 않을지 그게 두렵다.
43
고향집을 찾았다가
몇 년 만에 찾은 비워둔 고향집
텃밭은 도둑고양이 놀이터가 되어 있고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는 폐비닐 몇 조각이
나폴대며 나를 맞아 준다.
허물어진 기둥 우편함엔
빛 바랜 고지서와 광고지가
부재중인 수취인을 기다리고 있고
닫혀 있는 대문 틈으로
지난 여름 무성했던 풀잎더미 어지러운
마당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무심한 세월에 묻혀
이방인 아닌 이방인이 되어버린 나를
사정을 알 리 없는 이웃집 개가
나들이 가다말고 멈춰 서서
수상한 눈길을 주고 간다.
너무 깊이 잠겨 있어
안에 한 번 들지도 못 하고 밖에서만 서성이다가
인적 하나 없는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 걸음이
군데군데 새로 들어선 슬라브집
굳게 닫혀 있는 철대문만큼이나 무겁다.
찬 눈발 흩날리는 스산한 십이월의 저녁답.
44
날아가는 시간
시간의 보폭이 너무 가파르다.
흘러가던 시간이 달리기도 하고
혹은 날아가기도 한다.
세상이 소걸음을 걷고
낙동강 그 걸음으로 흐르던 때는
그런 대로 시간을 느낄 수 있었는데,
세상이 온통 무한 속도로 날아가는 오늘
소유하고 향유할 시간이
흘러가고 날아가는 차이만큼 줄어들어
시간을 도둑맞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건 다 빨라가도 시간만은 그 때처럼
느릿느릿 흘러갔으면 좋겠는데,
말 타고 달리면서 산 보듯 그렇게 말고
낙동강 칠백 리 나룻배 타고 흐르면서
산 보고 들도 보면서
물소리 바람소리도 들으면서
가얏고 가락처럼 유장하게 그렇게.
45
고향 4
흙 묻은 손으로
바지 가랭이 걷어 올리고
첨벙첨벙
도랑 건너면
젖먹이 송아지
음매 음매
저녁을 부르는 산촌
시방 그곳엔
설레는 손길로
비가 내리고
허물어진 탑 위에서
야윈 비둘기가
삼단 같은 전설을 가지고 와서
창 밖을 서성이는데
이따금씩
구름이
돌개바람을 몰고 와
한바탕 굿을 하고 간다.
46
고향 5
울퉁불퉁 흙길이
평평한 시멘트로 포장된 것이
가슴 아픈 게 아니다.
골목길 만난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것이
가슴 아픈 게 아니다.
천 년을 쉬어가던 정자
이끼 낀 공동우물이 밀려나버린 것이
가슴 아픈 게 아니다.
폐옥이 된 서당 숲에서
통곡처럼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가슴 아픈 게 아니다.
47
속이 빈 고향
나무는 많은데 그늘이 없다.
풀은 푸른데 메뚜기가 없다.
물은 깊은데 고기가 없다.
하늘은 높은데 새가 없다.
마당을 넓은데 씨암탉이 없다.
굴뚝은 있는데 연기가 없다.
안방은 큰데 어머니가 없다.
얼굴은 고운데 가슴이 없다.
잔은 넘치는데 노래가 없다.
48
토담을 위하여
고향마을 들길을 걸어도
소 한 마리 보이지 않고
개구리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느니
고향이면 그저 고향으로 알다
오늘 온 세상 문명 냄새 속에서
이제야 눈이 트이는지
시멘트 포장길을 가는
헝클린 바람의 날개
가슴 속 검정고무신 아이가 살아나와
그 투박한 걸음으로
바람 찬 지창紙窓 안에 불을 밝히느니
잃었던 말들을 모아
어머니를 불러 보리라
폐비닐 흩날리는 묵정밭
흐물흐물 무너지는 저 토담을 위하여
49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TV 연속극을 보고 있자니
농사짓고 사는 부부, 자식에게
농사짓지 않는 게 성공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공부 않고 게으르면
농사나 짓고 산다고 한다.
그게 그런 게 아니라고 할 수 없는 현실이
눈물이 나는데도
깃발은 아직도 農者天下之大本이다.
상답 스무 마지기에 황소 두 마리
대궐 같은 종가집 다 버려두고
도회지 나가 날품 팔며 셋방살이하는 김씨
농사 두고 육십 리 밖 공단까지 오가며
돈벌이에 등이 젖는 박씨, 황씨, 오씨
자식 교육 위해 도회지로 이사 가서
시골로 출퇴근하며 농사짓는 윤씨
그걸 보며 속수무책 술만 취하는 영농후계자 양씨
무가 밭에서 무더기로 썩어 가고
쌀값이 만만한 동네북이 되어 가도
이마 부신 나리들 눈엔
일편단심 지조 곧게
農者天下之大本이다.
제 4부 부신 햇살 사이사이
50
산
드높은 푸름
이마받이한 채
어깨로부터 발치까지
저리도 넉넉히
내리뻗은 자태
강보다 질긴
강한 시간 부수어
하늘을 향한 발돋움에
푸른 심지 돋우고
사시사철
휘몰아치는 바람에
옷자락 펄럭이며
길고 긴 세월
무엇을 바라 묵묵히 섰는가.
너의 조용한 듯
긴 침묵 앞에 내가 서면
겨우내 얼어붙었던
개울 물소리 들리고
노루가 넘어간 산등성이께로부터
청청한 솔바람이 인다.
51
가을 소묘 1
이상異常 기압골에 접어든 초가을 오후
수초水草에 잠긴 강마을에
바람이 인다.
온 여름 내내
가슴 속에서만 맴돌던 바람이
포플라 잎새에 닿아
파아란 하늘 흔들어
심장만 남은 대지에
차가운 비를 뿌린다.
촉촉이 젖은 풀잎마다
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노래를 잃어버린 새는
나뭇가지에서 박제剝製가 되어 있다.
어쩌다가
뿌우연 안개 속에
드문드문 드러나 보이는
산등성이 위로
비행기가 묘한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고,
바람에 쫓긴
나비 한 쌍이
붉게 타는 샐비어 꽃잎에 숨어
허기진 가슴을 덥히고 있다.
52
가을소묘 2
각도 높은 축대 끝에
잠자리 한 마리
위험스레 매달려
흩어진 가을을 줍고 있다.
도수 높은 돋보기를 쓰고
서걱서걱
설익은 돌배를 씹으며
바라보는 하늘이
마냥 차가운 물이다.
살아 있다는 이유 하나로
비가 되고
낙엽이 되고
시리도록 맑은 하늘이 되기도 하는데
텅 빈 들판 한가운데
버림받은 어미 소 한 마리
바람을 맞고 서 있다.
53
아침 풍경
비 온 다음 날 아침
부신 햇살 아래
감나무 연연한 잎새가
보석처럼 빛나고
아카시아 알싸한 향내가
내 묵은 감성을 두드린다.
창을 열면
스타카토로 다가오는
까치들의 맑은 노래
아이들의 웃음 소리에
아득히 막혀 있던
귀가 열린다.
끝없이 푸른 하늘 가
무연히 떠가는
조각구름 한 덩이
한 천 년 거슬러 올라가
검실검실
정지상鄭知常의 강 언덕을
넘어서고 있다.
일렁이는 녹색 햇살
솟구치는 분수의 물줄기에
주말의 하루가
우렁우렁 솟아오른다.
54
가을 풍경
바람 한 점 없는 토요일 오후
창 밖으로 눈을 돌리니
갑장산甲長山 머리 위로
석상石像처럼 낮달 하나 걸려 있다.
그게 그런 줄만 알았더니
아득히 잊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소나기를 내리붓고는
거짓말 같이
하늘 가득
햇살을 쏟아 놓는다.
부신 햇살 사이사이
창밖을 기웃거리던
그날의 함성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고
우우우 하나 되어
샐비어로 피고 있다.
55
오월 1
천상병千祥炳의 새가 하늘을 나는 아침
하늘이 제 얼굴을 하고
제 자리에 있어 온
돌이, 나무가
생광스런 언어로 다가오고
물빛 바람 손 흔들어
산다화를 피우는 게
청전靑田의 춘경산수春景山水다.
누구에게 주랴, 끊임없이 출렁이는
아카시아 저 서늘한 향기.
눈 감으면
천 년 인연의 날개
아슴아슴 보일 듯도 하다.
새가 하늘을 나는 자유
이리 감격스러운데도
산을 바라는 마음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앞서는 것은
자유보다 하늘이 높기 때문일까.
자유 속 하얀 깃털이
너무 부시기 때문일까.
56
오월 2
잡풀 속에서
무시로 피는 풀꽃
꾀 없이 수수해서 좋구나.
비 오면 비 맞고
바람 불면
거리낌 없이 흔들리는 자유
가난하지 않아서 좋구나.
계절의 외곽에서
없는 듯 살아오다가
유화처럼 무덕무덕
덧칠을 해 가는 산색
얇지 않아서 좋구나.
맑은 하늘
푸른 말들이
답답하지 않아서 좋구나.
57
겨울산
오늘처럼 기온이 급강하해버리면
산은 홀로 바람을 막아야 한다.
높은 곳으로 높은 곳으로 오르던 사람들도
하산해 버리고
무서리 한 번에
무성하던 잎들도 속수무책 무너져 내리고
하늘은 하늘대로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턱 없이 높아만 가고
아, 누가 있어 벌거숭이 나무의 벗이 되어 주랴.
여름내 소곤대던 개울도 모른 체하고
그 흔하던 새도 한 마리 날아오지 않는구나.
세상이 다 그런 거라며
구름 한 덩이
유연히
산을 두고 산을 넘어간다.
58
지하철 안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촌사람도 지하철을 타 보면 안다
세상이 얼마나 무너지고 있는지를.
자리에 앉아 가기도 힘든 복잡한 전철 안
자리란 자리는 눈 밝은 젊은이들이 차지하고
눈 흐린 어른들은 손잡이에 간신히 의지해 가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의문을 가지지 않는
21세기 동방예의지국 한복판의 풍경
서 있을 땐 자리 찾아 그리도 빛나던 눈들이
자리에 앉기만 하면 금세 눈부터 감고 보는
배우보다 더 배우 같은 사람들
팔순 노인을 앞에 세워두고 앉은 자리에서도
일말의 양심이나 조금의 불편한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너무도 당당하게
자기네끼리 웃고 떠드는 젊은이들 틈새에서
나이 먹은 게 죄다 힘 없고 눈 어둔 게 죄라고
자책하며 사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사람들은
배 타고 강 건너며 살던 그 때가 한없이 그립다.
59
만추 서정 1
흰 이슬이 내린다는 아침
무더위에 숨죽이고 있던 바람이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고
여름내 부지런히 속을 채워온
교실 앞 화단의 칸나가 마지막 꽃대를 뽑아 올려
오가는 학생들을 반기고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보지 못 했던 바람이 그새 옷을 바꿔 입었다.
이슬에 절은 풀잎을 보니
세상이 나를 속이면 너도 속이며 사는 거라며
세월이 흘러가는 게 보인다던 할머니
그 모습이 보인다.
지나간 계절은 그리운 빛으로 남고
사람 한평생 저무는 일도
모르고 살아온 그 시절이
바로 꽃봉오리였다는 것을 아는 데
80년이 갈렸다던 할머니
그 말씀이 보인다.
60
만추 서정 2
가을이 저무는 오후
창 밖으로 보이는
운무에 싸인 산과 마을
잎 다 떨구고
처연히 비를 맞고 있는 호두나무
그루터기만 남은 들판
떨리듯 들려오는
낮은 음의 비행기 소리
파스텔조로 은은하게 번져오는
녹슨 시간의 푸른 추억
젖은 하늘 가로질러
잿빛 비둘기 한 마리
상형문자를 새기며 날아간다.
61
한정閑情
텅 빈 토요일 오후 아파트 거실 소파에 앉아
저무는 시월의 햇살을 즐기다가
멀리 창밖으로 질주해 가는 차량들에게 눈을 주다가
골목길 장사꾼들 호객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빗속에서도 무기질 웃음을 웃던
강 선생 사람 좋은 얼굴을 그려보다가
무죄한 바람 이만큼 내려놓고는 저만큼 가버린
부지런한 세월을 만져 보다가
저무는 햇살 아래 노오랗게 눈이 부신 은행잎에 맞서
마지막 정열 불태우는 샐비어 매운 입술에 눈을 태우다가
62
소녀와 장미
교사校舍 뒤 화단에 핀 분홍빛 겹장미
예쁜 소녀 하나 와서 향기를 맡고 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이 조용한 시간에
무슨 큰 비밀이라도 숨어 있는 양
망설이다가 망설이다가
살며시 다가와
도톰한 작은 손으로 꽃송이를 보듬어 쥐고는
두 눈 스르르 감고
꽃처럼 흐뭇한 웃음을 짓다가
고 조그만 귀에 손나팔을 하고
아름다운 꽃의 얘길 듣고 있는 소녀.
어쩌면 사뿐사뿐 걸음까지 나비를 닮았다.
숨어서 바라보는 죄 많은 나도
불혹不惑의 나이를 잊고
덩달아 꿈꾸는 천진한 아이가 되어
흐뭇한 큰 꿈 깰까봐 숨죽이고 한동안 꼼짝을 못했다.
그림처럼 소녀가 꽃에서 사라져 버리고 난 다음
맨 처음 소녀가 꽃으로 왔을 때
혹시 꽃이나 꺾으러 온 게 아닐까
의심했던 마음을 소녀가 알까봐
걱정이 되었다.
63
불영계곡佛影溪谷
제여곰 생겨나서
간대로 흘러온 계곡
불쑥 솟고
움푹 꺼지고
아득히 막히고
원하게 트이고
검고 희고
푸르고 누르고
나무는 나무로
바위는 바위로
저마다 제목소리
제 얼굴로 앉아
시시한 세상이사
까마득 잊고
비탈마다 고향처럼
옥수수를 심어 두고
푸른 하늘 흰 구름
거느리고 산다.
64
산촌서정
골골이 피어나는
춘양목 그윽한 향내
향내 따라 흐르는
수수한 흰 구름
흰 구름 쉬어 가는
정겨운 산마을
산마을 저녁연기
묵향墨香처럼 번져 가면
수묵水墨빛 풀벌레 울음
고향으로 익나니
65
개값
개가 개값이던 적엔 땀 흘리는 농민들도 복날이 오면 개장국에 막걸리라도 배부르게 마실 수가 있었는데 개장국이 보신탕이 되면서부터 개 값이 금값이 되더니 개는 농촌에 살아도 탕은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만 산다. 탕을 빼앗겨 버린 촌사람들은 개똥 냄새나 맡고 산다. 개똥도 돈이 된다면 탕처럼 구수한 세상에서 개 값이 금값인 게 얼마나 큰 다행이냐며 웃는다. 이젠 복날이 돌아와도 술맛을 잃어버린 촌사람들은 또 무슨 돌개바람이 불어 개 값이 개값이나 되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다.
제 5부 시가 젖고 있다
66
수덕사修德寺
덕숭산德崇山 앞자락에
긴 사연으로 주저앉은
고찰古刹
높다란 층계마다
티끌 묻은 법어가
타오르는 오후
한 세월
인연이 흘러간 그 자리
정토가 저만큼
자연紫煙으로 번지더니
빗속에 문득
범종 소리
연꽃으로 벙글고
한 잎 구름이
몰고 온 바람에
풍경風磬도 일순
몇 송이 수련으로 피어
흔들리고 있다.
67
화엄사華嚴寺의 아침
지리산을 키우며
바위로 앉은 고찰
독경 듣고 자란 새가
술을 깨우는 아침
속진을 씻어온
계곡 맑은 물소리에
각황전覺皇殿 앞 영산홍이
저절로 붉고
도통한 석탑들이
점잖게 고개를 든다.
68
실상사實相寺
역사를 미리 보고
산 아래 앉은
천 년 신라의 고혼孤魂
몇 번을 오고 간
지리산의 몸살
그 진통에도
짐짓 입 다물고 살아온
고집스런 이력이
우뚝 석탑으로 서서
저만큼 서녘 하늘로 푸르고
청태 낀 돌 서리로
또 천 년이 흐르는데
우직한 한 나그네
구태여 풀숲을 뒤져
아픈 역사를 줍고 있다.
69
용흥사龍興寺
파아란 하늘
휘어진 산길 따라
마지막 정열을 뿜어대는
잡목들의 만찬
거기서 내가 만난 건 저무는 가을이었다.
길섶 군데군데
가을을 거두어간 텅 빈 밭두렁
음악인 양 꿩이 날고
여름내 사람들의 등살에 부대껴 온
바위들이
허연 몸둥이를 드러내 놓고
마지막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긴 여로에 지쳐
전설을 잃어버린
극락보전 뜰 가운데
낯선 얼굴의
키 큰 석탑이 버티고 서서
낯익은 가을을 떠나보내고 있었다.
구름도 그걸 아는지
한사코
백운선원白雲禪院을 비껴가고 있었다.
70
직지사直指寺에서
몇 점 그림에 매달려 있던
나를 불러내어
황악黃岳이 드니
이승이 천리나 멀다
아도阿度가 아니라도 손끝이
저절로 머물 전설이
물 속에도 녹아 흐르는 걸까.
신을 벗기도 전에
물소리에 바람이 일더니
발을 담그자 찬 기운이
서천西天을 타고 흐른다.
71
오어사吾魚寺
원효元曉와 혜공惠空이 물고기 한 마리를 두고
서로 내 고기라고 우겼대서
이름을 오어사라고 했다는데
오어사는 과연 이름값을 하고 있었다.
절보다 물이 먼저 나와 반기는 모습도 모습이려니와
호수처럼 넓은 저수지에서
근심 없이 노니는 잉어와 자라가
오어사가 천 년을 썩지 않는
이유를 말해 주고 있었다.
가을빛 물들어 가는 운제산雲梯山 가득
은은하게 피어나는 숨결에 취해
돌길 걸어 원효암에 오르니
버리고서 이룬 대사의 법력 앞에
내 지나온 숲이 저만큼 아득해 보였다.
원효암에서 구름다리를 타고 오갔다는
자장암慈藏庵 푸른 하늘 위로
적멸의 구름 한 덩이 흘러가고 있었다
72
송광사松廣寺
조계산曹溪山 줄기가 흔들리면서
법정 스님도 떠나시고
물 건너온 키 큰 나무 아래
세월 따라 몸만 크는 법당
그보다 더 커 보이는 공덕비와 시주비 행렬
불성佛性을 가린 허명虛名들이
나그네의 발길에 챈다.
바람 따라 다 변해 가도
그 하나는 살아남아야 하는데
하나 같이 흔들리고 있다.
흔들리고 흔들리다가 행여
천 년 승보僧寶 위에 먼지가 덮여
껍데기만 눈이 부신 금보金寶나 남지 않을지.
73
도리사桃李寺에서
세상이 잔뜩 흐린 토요일 오후
시월의 창을 통해
바나나를 팔고 있는 아가씨를 보다가
토담 너머 발갛게 얼굴 내민 감을 보다가
어디에도 눈 주기 싫어 무작정 도리사로 향했다.
가파른 산길 오르다가
길 옆에서 사라 외치는 호박엿 대신에
할머니에게서 누런 호박 하나를 샀다.
산을 내려오던 스님
호박은 사서 무얼 하느냐고 묻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빙긋이 웃어 주었더니
스님도 환하게 웃어 주었다.
세상이 시나브로 밝아 보이기 시작했다
74
단동丹東에서
단동 철교 앞에서 이십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립다. 일제의 수탈 피해 살 길 찾아 건너시던 길목. 아버지 뜨거운 눈물 섞여 흐르는 서러운 강가에 와서 칠십 년 전 아버지 흐린 눈길을 그려 본다. 이 다리 건너실 때 두고 온 고향 생각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셨을 저 북녘 땅.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유리 안 그림 보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정지된 화면 같이 정박해 있는 폐선과 회색빛 집들, 그보다 몇 배나 더 큰 붉은 깃발 아래 희미하게 오가는 사람들, 그 위로 올 굵은 흰 무명 베옷에 가난한 괴나리 보따리 하나 안고 주린 허기 참으며 철교를 건너시던 아버지 쓸쓸한 모습이 선연히 다가온다.
75
천지天池에서
우리가 한 눈 팔고 있는 사이
백두산이라는 이름 위에 장백산이라는 이름 덧씌워
백두산을 팔고 있는 중국 그 먼 길을 돌아
백두산의 심장 천지에 올랐다.
팔월의 무더위 속에서도 천지는
열여섯 영봉을 병풍처럼 거느리고
신비스런 안개를 피워 올리며
뚜렷한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안개에 싸여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건
인간을 벗어나 조용히 있고자 함일진대
돌계단을 만들어 오르는 사람들의 무지를 나무라는 뜻일까.
천재일우로 잠시 안개가 걷히는가 하면
다시 비바람이 몰아치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순간순간 교차하는 햇살과 비바람 따라
비를 피해 이저리 몰려다니는 사람들.
이 무질서 속에서도 천지는
일념으로
억겁의 푸른 바람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76
태조산太祖山에 올라
평지에서 늘 금오산 높은 줄만 알다가
오늘 태조산에 올라
비로소 산을 보았다.
황금빛 출렁임 속에
저만큼 금오산金烏山이 눈 아래로 보이고
꿈길 같은 낙동강 따라
수없는 길들이 쓰러져 왔다.
수묵水墨처럼 번져 오는
도리사 쇠북 소리에
무엇이 높고 긴 줄을 잊어 버렸다.
가진 것 무엇이든
놓아 버리고 싶었다.
77
화조동花鳥洞*에서
꽃과 새가 많아 화조동이라 부르는
이 땅의 꽃과 새는 어디로 갔을까.
이름은 아직도 그 이름인데
그 얼굴 그 노래는 어디로 갔을까.
봉황새 발목 잡아 꿈꾸던 자리
그 자랑 그 향기는 어디로 갔을까.
어명御命도 쉬어가던 그 하늘 아래
오늘은 잡새들이 뒤섞여 날고 있다.
* 화조동 : 구미시 선산읍 화조동. 인근에 봉황새의 형상을 한 비봉산이 있으며, 조선조 때 역원驛院이 있던 마을임
78
2번 도로에서
호기豪氣 넘치던 불야성의 거리.
한 잔 술에 흥청대던 낭만도 가고,
화려한 조명의 주점 앞을
그저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2차나 마셨는데도
술이 취하지 않는다.
네온이 부시고 술이 익으면 뭣 하는가.
바람부터가 그 바람이 아닌 걸
키가 너무 커버린 건물
현란한 간판들
귀가 멍한 록 헤비메탈
넘치는 말의 토막들
흔들리는 불빛 사이사이
후줄근히
시詩가 젖고 있다.
이리 시가 젖는데도
비 하나 가릴 수 없는 비좁은 실존
우산을 쓰면 쓴 만큼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시의 눈빛은 언제나
그 너머에서 빛나고 있다.
79
숭선재崇善齋
세상이 답답할 때면
무시로 찾아
시와 그림과 글씨를 두고
막힌 가슴 풀었는데,
이제도 문 열면
어서 와요, 하면서
그윽한 미소로 반겨줄 것 같은데
귀 기울이면
나직한 그 목소리 들려올 듯한데
숨결 밴 시와 서화
정성으로 쌓아올린
명덕학사 선주문학
그 자리 그대로 눈 밝히고 있는데
하늘과 땅
해와 달
넓은 거리 오가는 사람들.
다 그 모습 그 얼굴인데.
그 한 가지가 없다.
* 고 윤종철尹鍾喆님이 고향 선산에 설립한 상설 문화 공간
80
선산善山
- 언제 그 모습 다시 볼 수 있을지
한 때는 인재의 고장으로
선비 문화의 본향으로
이름 높았거니
무지한 세월의 물결에 밀려
뒷방으로 밀려난 노인 신세 되었구나.
그윽한 묵향과 선비의 기개 서린
장원봉壯元峰과 비봉산 자락
가멸한 인심 키워주던 넉넉한 앞들
사시사철 맑은 물 넘치던 감천甘川은
희미한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고
단계천丹溪川이 복개되면서
뒷골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에
가재 잡고 멱 감던
추억까지 묻혀버렸다.
지금 어디에선 제 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해
복원 공사가 한창이라는데
우린 언제 제 정신 제 자리 찾아
청청한 낙남루洛南樓*처럼
푸른 하늘 맑은 물 다시 볼 수 있을지.
* 낙남루 : 최근에 복원된 옛 선산읍성의 남문
-----------------------------------------
김원호 시집 발문
순수 서정으로 다가선 인생론
김 선 굉(시인)
1. 고요하고 따뜻한 성찰
시는 본질적으로 자아와 세계의 화해를 꿈꾸는 문학이다. 크고 부드러운 손으로 자아와 세계, 세계와 세계가 부딪치면서 생기는 상처를 어루만지는 치유의 문학이다. 이것은 서정시 본래의 관성이다. 시인은 자신의 내면을 향해, 아득히 펼쳐진 세계를 향해 서정의 그물을 던진다. 그 그물이 자신의 내면을 향할 때 작품은 존재론적 의미를 묻는 순수 서정의 형태로 드러나며, 그 그물이 대상 세계를 향할 때는 리얼리티가 강화되면서 삶에 대한 아픈 통찰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김원호 또한 정석에 가까운 서정시 본래의 관성에 기대어, 고요하고 따뜻한 성찰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그의 시가 대상 세계를 향할 때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와 함께 문명에 대한 비평이 강하게 제시되고 있지만, 그는 그 모든 상처와 아픔을 내면화하여 깊이 끌어안는다. 김원호 시의 가장 큰 미덕은 그의 시 정신이 어디를 지향하든 모든 대상을 내면화하여 시의 전체적 흐름 속에 자신의 인생과 삶의 철학을 싣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그의 대부분의 시편에는 휴머니즘의 정신이 짙게 깔려 있다.
연역적으로 말해 그의 작품 세계는 순수 서정으로 다가선 인생론이다. 그의 서정적 스펙트럼이 어디를 향하든, 어떤 대상을 노래하든 그 시의 테마는 대부분 인생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다.
울퉁불퉁한 흙길이
평평한 시멘트로 포장된 것이
가슴 아픈 게 아니다.
골목길 만난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것이
가슴 아픈 게 아니다.
천 년을 쉬어가던 정자
이끼 낀 공동우물이 밀려나버린 것이
가슴 아픈 게 아니다.
폐옥이 된 서당 숲에서
통곡처럼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가슴 아픈 게 아니다.
-「고향 5」 전문
그는 지금 고향에 와서 잃어버린 그 무언가를 <가슴 아>파 하고 있다. 원형을 잃어가고 있는 고향의 풍경 또한 스산하지만, 그것은 시대와 문명의 흐름 앞에서 불가항력적인 상실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울퉁불퉁한 흙길이/ 평평한 시멘트로 포장된 것>, <골목길 만난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것>, <이끼 낀 공동우물이 밀려나버린 것>, <폐옥이 된 서당 숲>. 시인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이런 물리적인 환경의 변화가 아니다. 시인은 그 너머에 있는 그 무엇,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 하고 망가지고 주저앉아버린 인간성의 상실에 있다. 그의 대부분의 시편들은 이처럼 인간을 향한 허무주의에 닿아 있는 서정적 인생론이라고 할 수 있다.
2. 네 개의 서정적 스펙트럼
휴머니즘은 그의 작품 세계를 가로지르고 있는 시 정신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그의 서정적 스펙트럼은 네 개의 범주로 나누어지고 있다. 그 하나는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면서 존재론적 의미를 묻는 순수 서정의 세계다.
가을이 여무는 강나루
물안개 피어나는
강물 위로 곱게 내려앉은 새
여백을 수놓는
억새풀 은빛 몸짓
한참을 바라보다 보니
돌아갈 내가 없다
작품 「가을 서정」 전문이다. 한 편의 곱고 단아한 서정시다. 시인이 <한참을 바라보>는 대상은 자연의 원형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태초의 풍경이다. 이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그 풍경이 그의 내면으로 투영되는 순간 그는 그 풍경 속으로 <돌아갈 내가 없다>고 탄식한다. 이 문장은 <내가> 그 풍경에 동화되어 하나가 된 것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더 깊은 이면에는 그 풍경과 한 몸을 이룰 수 없는 비극적 자아에 대한 아픈 통찰을 담고 있다. 이처럼 김원호는 그 풍경을 <바라보>는 타자일 뿐, 그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그 풍경과 몸을 섞지 못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특히 가슴을 아리게 하는 구절은 시인의 연륜과 겹쳐지고 있는 <억새풀 은빛 몸짓>이다. 이순을 넘어 담담히 풍경과 세계를 관조하면서 그 일부인 <억새풀>에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노시인의 서정적 통찰이 아프게 가슴을 파고 든다.
두 번째 스펙트럼은 고향과 유년에 대한 짙은 향수의 세계로 열려 있다. 이 세계는 그의 첫 시집 『억새풀 은빛 몸짓』의 세계를 굽이쳐 흘러가는 서정적 강물이다. 과거를 향한 강렬한 회귀 의식과 거기에 대비해서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는 드라이한 현실과 문명을 배경으로 시인의 허무주의적 현실 인식이 굵은 선으로 그려지면서 깊고 고요한 파문을 보내고 있다.
무심한 세월에 묻혀
이방인이 아닌 이방인이 되어버린 나를
사정을 알 리 없는 이웃집 개가
나들이 가다 말고 멈춰 서서
수상한 눈길을 주고 간다.
너무 깊이 잠겨 있어
안에 한 번 들지도 못 하고 밖에서만 서성이다가
인적 하나 없는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 걸음이
군데군데 새로 들어선 슬라브집
굳게 닫혀 있는 철대문만큼이나 무겁다
-「고향집을 찾았다가」 부분
커피 한 잔에 정이 오가던 때가 있었지
담배 연기 그윽한 연기 속에
사랑이 여물고
강물의 푸른 길이 일어서던 때가 있었지.
연분홍 실루엣 사이로 어렴풋이
얼굴이 보이던
그곳엔 지금 무슨 꽃이 피고 있을까.
현란한 산문에 가려
시가 발길에 채이는 풍요 속에
시를 두고 시가 고픈 요즘
내 걸음으로는 돌아가 볼 수 없는
가을 저녁의 숲 앞에서
진부한 일상 소음 다 벗어던지고
회복기의 환자처럼
그 때 그 보행을 다시 배워가고 싶다.
-「가을 앞에서」 전문
앞의 작품은 삭막함이 감도는 고향을 무대로 하고 있고, 뒤의 작품은 낭만이 넘치는 젊은 시절을 무대로 하고 있다. 시인은 그 그리운 공간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가슴을 열고 소통하면서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 그러나 그는 <너무 깊이 잠겨 있어/ 안에 한 번 들지도 못 하>는 공간 밖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린> 자신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시인이 돌아가고 싶은 낭만적인 젊음의 시간 또한 <내 걸음으로는 돌아가 볼 수 없는> <가을 저녁의 숲>으로 이미 나의 시간이 아님을 아프게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굳게 닫혀 있는 철대문>을 밀고 잃어버린 고향의 뜰에 자신을 세우고 싶어 하며, 잃어버린 시간의 영토를 향해 <그 때 그 보행을 다시 배워가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내비치고 있다.
그의 세 번째 서정적 스팩트럼은 계절성을 거느린 풍경을 향하고 있다. 풍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원형이 살아 숨쉬는 자연의 세계다. 김원호의 허무주의적 세계 인식은 이 풍경 앞에서 어느 정도 힘을 되찾으면서, 살아 있음의 기쁨을 구가하면서 카타르시스되고 있다.
잡풀 속에서
무시로 피는 풀꽃
꾀 없이 수수해서 좋구나.
비 오면 비 맞고
바람 불면
거리낌 없이 흔들리는 자유
가난하지 않아서 좋구나.
계절의 외곽에서
없는 듯 살아오다가
유화처럼 무덕무덕
덧칠해 가는 산색
얇지 않아서 좋구나.
맑은 하늘
푸른 말들이
답답하지 않아서 좋구나.
-「오월 2」 전문
비 온 다음 날 아침
부신 햇살 아래
감나무 연연한 잎새가
보석처럼 빛나고
아카시아 알싸한 향내가
내 묵은 감성을 두드린다.
창을 열면
스타카토로 다가오는
까치들의 맑은 노래
아이들의 웃음 소리에
아득히 막혀 있던
귀가 열린다.
-「아침 풍경」 전문
「오월 2」는 계절을 배경으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거기에서 피어오르는 생명 에너지를 노래하고 있으며, 「아침 풍경」은 삶의 어느 한 순간 만나는 일상적인 풍경을 그리고 있다. 두 편 다 허무주의의 그림자가 말끔히 걷힌 밝고 눈부신 서정시다. 강한 자정 능력으로 선순환하고 있는 자연 앞에서 시인은 <수수해서 좋>고, <답답하지 않아서 좋>으며, <묵은 감성>을 일깨우고 <막혀 있던/ 귀가 열리>면서 밝고 건강한 생명을 향해 가슴을 열고 있다. 이 범주에서 주목할 것은 시인의 시선이 자연을 향해 열려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시 정신이 문명의 벽을 넘지 못 하고 있는 인간을 향할 때 입을 수밖에 없던 내상이 이 지점에서 빠른 속도로 치유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울릉 단상」 연작을 비롯한 여행 시편을 통해서도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이 힐링의 시학은 앞으로 김원호 시인이 자신의 인생과 세계를 향해 더 힘차게 밀고 나가야 할 문학적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의 시가 추구하는 네 번째 서정적 범주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작동하는 정신의 현장이자 역사의 현장이다. 이 스팩트럼은 계절과 풍경을 지향하는 세 번째 범주와는 그 표정을 달리 하고 있다.
한 세월
인연이 흘러간 그 자리
정토가 저만큼
자연紫煙으로 번지더니
빗속에 문득
범종 소리
연꽃으로 벙글고
한 잎 구름이
몰고 온 바람에
풍경風磬도 일순
몇 송이 수련으로 피어
흔들리고 있다.
-「수덕사修德寺」 부분
단동 철교 앞에서 이십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립다. 일제의 수탈 피해 살 길 찾아 건너시던 길목. 아버지 뜨거운 눈물 섞여 흐르는 서러운 강가에 와서 칠십 년 전 아버지 흐린 눈길을 그려 본다. 이 다리 건너실 때 두고 온 고향 생각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셨을 저 북녘 땅.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유리 안 그림 보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정지된 화 면 같이 정박해 있는 폐선과 회색빛 집들, 그보다 몇 배 더 큰 붉은 깃발 아래 희미하게 오가는 사람들, 그 위로 올 굵은 흰 무명 베옷에 가난한 괴나리 보따리 하나 안고, 주린 허기 참으며 철교를 건너시던 아버지 쓸쓸한 모습이 선연히 다가온다.
-「단동丹東에서」 전문
두 편 다 기행시로서 순수 서경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국내외를 망라한 그의 여정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유서 깊은 사찰에 대한 순례다. 이것은 김원호의 정신적 지향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시의 행간에는 <법어가 타오르>고 있고, <법종 소리>는 <연꽃으로 벙글고> 있으며, 시인은 <구태여 풀숲을 뒤져/ 아픈 역사를 줍고 있>(「실상사 實相寺」)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시 세계의 저변을 흐르고 있는 허무와 순명, 달관의 철학이 불교적 세계관과 닿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단동丹東에서」는 우리 민족의 비극적 근대사 위에 아버지의 초상이 모자이크되고 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아픈 가족사가 스며들면서 시인은 단동에서의 시간을 내면화하여 영원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귀가 멍한 록 헤비메탈
넘치는 말의 토막들
흔들리는 불빛 사이사이
후줄근히
시詩가 젖고 있다.
이리 시가 젖는데도
비 하나 가릴 수 없는 비좁은 실존
우산을 쓰면 쓴 만큼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시의 눈빛은 언제나
그 너머에서 빛나고 있다.
-「2번 도로에서」 부분
이 작품은 그의 시선이 당대의 문화와 문명에 가장 근접하고 있는 기행시다. 2번도로는 구미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시인이 일상 속에서 자주 만나는 도시적 삶의 현장이다. 그러나 그 거리는 서정 시인을 안아주지 않는다. 시인은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언제나/ 그 너머에서 빛나고 있>는 <시의 눈빛>을 동경하고 있다. 그러면 <귀가 멍한 록 헤비메탈>을 넘어 삶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현장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시 정신이 고향과 유년, 원형이 살아 숨쉬는 자연과 역사의 현장으로 회귀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우리의 정신이 바로 거기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인문학적 상상력과 미학적 가치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선산, 학교, 문학 그리고 김원호
김원호를 읽는 세 개의 코드는 선산과 학교와 문학이다. 선산은 그가 태어나서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고향이며, 학교는 사십 년을 넘게 몸담아온 원로 교육자의 삶의 터전이자 교육 현장이다. 그리고 문학은 그의 생애를 휩싸고 있는 또 하나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미당은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했는데, 이 시집을 통해 볼 때, 정년퇴임을 앞둔 교육자이자 시인인 오늘의 김원호를 있게 한 것은 구 할이 선산과 학교와 문학이다. 아니 구 할을 훨씬 넘어설지도 모르겠다. 이런 관점에서 첫 시집 『억새풀 은빛 몸짓』의 세계는 김원호를 읽는 세 개의 코드가 거느린 자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의 서정적 보고서이자 가치관이며 인생론이다.
내가 아는 김원호는 소박하고 겸손한 선배 교육자이자 선산 땅을 호흡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무욕의 선비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년퇴임과 맞물리지 않았으면, 이 시집은 또 하염없이 그의 서재에서 오랜 침묵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겸손하다. 지나치게 자신을 낮춘다. 그러나 나는 교직 인생을 마감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 시집을 신호로 그의 문학이 더 깊이 무르익을 것으로 보고 있다. 평생을 아이들 곁에서 보냈으면서도 학교를 배경으로 쓴 작품이 의외로 적다. 고향과 유년을 향한 끝없는 동경과 회귀, 삶의 본질적 가치를 향한 그의 시적 경향으로 볼 때, 학교는 앞으로 그가 서정의 그물을 던지는 시의 바다가 될 수 있을 것이며, 교육 현장을 모티브로 한 작품은 지금부터 제대로 전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테니스 라켓 줄이 터졌다.
비껴 맞은 공 한 방에 팽팽하던 탄력이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열여덟 개의 날줄과 스무 개의 씨줄이
저마다 제 힘으로 버티고 있는 줄 알았더니
한 줄이 끊어지자 온 줄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꼭 그 어디 그 무엇을 보는 것만 같다.
-「줄」 전문
이 작품은 그의 비극적 세계 인식을 <줄>의 상징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비껴 맞은 공 한 방>의 상징은 현대 문명과 산업화의 물결에 휩싸여 표류하고 있는 전통적인 모럴과 가치관의 실종이 아니겠는가. 그의 시 세계가 고향과 유년, 인문주의적 가치로 회귀하고 있는 것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우리 사회의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는 마스터 키가 거기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그의 시는 순수 서정으로 다가선 인생론이자 일그러지고 사라져 가는 인간성 회복을 위한 구원의 시학이다. 이 글이 시인 김원호의 서정적 아이텐티티를 담보하는 세 개의 코드, 선산과 학교와 문학을 세 개의 중심 축으로 하여, <렌즈를 닦듯 시를 닦는>(「상주의 스피노자」) 선산의 스피노자가 되어 그의 시 세계를 더 깊고 더 넓고 더 건강하게 전개해 나갈 축복의 글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