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를 들라면 캐나다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캐나다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마을 콘테스트에서 첫손가락에 꼽혔다는 엘로라, 거리를 거닐고, 집들을 살피고, 주변 공원을 산책하노라면 캐나다가 천당은 아니어도 999당쯤 된다는 여담도 그럴듯해 보인다. 그 마을 사람들의 넉넉함과 마을 풍경의 그윽함은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푹 적신다. 첨탑을 가진 교회와 조화를 이룬 집들, 깨끗하게 정돈된 길거리, 마을을 관통하는 시냇물은 있는가 싶더니, 천혜의 폭포를 만나고 계곡을 만나 철철 흘러내린다. 여름날 엘로라 공원의 멋을 아는 젊은이들은 그곳 전나무 밑에 텐트를 치고, 흐르는 계곡에 튜브를 띄운다. 아직 철이 덜든 아이들로 더불어 소리치며 요리조리 물결을 탄다. 2Km 남짓한 물 타기에 진한 아쉬움을 안고 다시 또 튜빙을 하노라면 어느새 한 나절이 훌쩍 간다.
들꽃도 화원의 꽃처럼 멋들어지게 핀 이 마을 분위기에 젖어 여기저기 거닐다 보니, 마을 중앙,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기념비 앞에 이른다. 참전용사를 기리는 기념비다. 세계 1,2차 대전에 참여하여 세계 평화를 지키다가 순국한 분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현충비.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보이는데, 영웅들을 많이도 배출했구나. 이 고장이 캐나다 일등 마을일 수 있는 내공을 읽는다.
무심히 현충비를 내리 읽던 눈이 한 곳에 머문다. 한국전쟁? 다시 보아도 맞다. 이 현충비에는 6.25 한국 전쟁에 목숨을 바친 순국한 영령들 이름 열 분이 적혀있다. 캐나다 전역에서 516명이나 되는 캐나다 젊은이들이 6.25한국 전쟁에서 생명을 바쳤다는 말을 들고, 놀랐던 적은 있지만, 이 조그만 고장에서 열 분이나.........!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고 있다. 이 고장 현충비에 적히지 않은 사람, 이 고장이 배출한 게일 선교사님이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 별로 없지만, 이 고장을 영원히 빛나게 하는 숨은 영웅이다.
우리는 그를 만나기 위해 엘로라에서도 10분쯤 차를 타고 북쪽에 위치한 엘마로 간다. 걸어가면 더 어울리겠다 싶은 전원풍의 시골길을 간다. 120여년 전에 이곳을 떠나 Korea에 갔다는 그분의 생가(위 사진), 그리고 그를 파송했다는 교회를 만난다.
그가 태어나 의사, 박사가 되고 또한 선교사, 목사가 되어 Korea를 찾았을 때에도 그가 살던 집은 오늘처럼 5월의 무성한 밀 밭 속에 서 있었을까? 사(士), 사, 사가 되어 그에게 더 이상 성취할 꿈이 또 있으랴 싶던 그가, 보장된 부귀영화를 헌신처럼 벗어놓고, 120여년 전의 KOREA, 당시로는 아주 폐쇄적이고, 너무나 열악하던 나라를 자신이 있어야 할 나라로 선택하였다니. 당시 조선이란 사람들의 평균 연령이 마흔 살 조금 넘던, 사람 살 곳이었나 싶던 열악한 환경이었는데 말이다. 말이 통해? 글을 알아? 음식이 맞아? 생활 풍습이 비슷하기라도 해? 사고방식이 같아? 신앙이 같아? 어느 한 가지 동질성이라도 잡혀야 그 낙으로 삽니다 하겠는데 말이다. ‘이거요?’ 아니면 ‘저거요?’ 물어도 모조리 고개를 옆으로 저을 수밖에 없는 KOREA로, 이 귀한 신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들까지 키울 각오를 한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생가를 방문하고, 그를 한국으로 파송했다는 교회를 찾는다. 1865년에 세워져 게일이 다녔던 ALMA PRESBYTERIAN CHURCH 교회당은 여기에 원래 서 있었구나 알리는 흔적 푯말이 서있다. 마을 한 가운데 오똑 선 ST. ANDREW'S PRESBYTERIAN CHURCH는 새로 단장한 새악씨처럼 다정하게 우리를 맞는다. 하지만 우리가 놀란 것은 그 교회의 안내판에 새겨진 담임목사 이름 때문이다. REV. ANDREW SONG! 한국계 목사님이다. 내한 캐나다 첫 선교사 게일 선교사님이 이 교회에서 자라, 이 곳 성도들의 배웅과 기도 가운데 한국을 찾으셨다는 사실 만으로 충분히 감동하고 있는데, 그런 선교사님들로부터 복음을 받은 지 120여년이 지났을 뿐인데, 이제는 한국인 후예가 받은 신앙을 키워 이곳 주민들을 목회하고 있구나! 상전벽해라 해야할까? 불과 120여년 만에 피선교국에서 세계 20,000여 선교사님들을 파송한 것도 부족하여, 이곳 캐나다 시골마을 앨마에 사는 캐네디언 목회자를 세우고, 그들을 목양하도록 목회를 맡긴 것이다.
그래서일까? 캐나다 선교사님들이 처음으로 KOREA에 선교하러 온 해를 게일 선교사가 KOREA에 도착한 1888년 12월까지 올려 잡는다. 공식적으로 캐나다장로회에서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한국선교를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1898년 9월이지만 말이다.
믿음 있는 용장들은 한민족 수난기에 캐나다로부터 속속 입국하였다. 한두 명이 아니라 180명이 넘게 KOREA에 왔다. 한국 백성을 살리려는 선교사적 사명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
필자는 학자도 아니고 역사적 고증을 할 만한 실력도 없다. 그렇지만, 이 믿음의 용장들이 남긴 기록이 책들으로 나와 있고, 또 이분들에 관하여 연구하여 남긴 주옥같은 글들(예:유영식교수 저술 등)이 있다. 또한 내한 캐나다 선교사들의 생애를 정리한 하여 전시한 선교전시관 Vision Fellowship(2-26th St. Toronto)이 우리 곁에 있다. 이 소중한 자료의 도움을 따라 내한 캐나다 선교사님들의 발자취를 잠깐 살펴본다.
1. 내한 캐나다 선교사들의 선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국 기독교 초기에 캐나다에서 한국에 오신 선교사님들은 미국에서 일어난 무디 부흥운동의 빚을 크게 지고 있다. 미국에서 불타오르던 부흥의 불씨는 믿음 있는 젊은이들의 심장을 강타했고, 그들은 복음 전파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끓었다. 그런 젊은이들 중, 캐나다인들도 포함되었다. 내한 캐나다 선교사들의 선교는 그 연속선상에 있었다. 그들은 캐나다 교회가 선교사를 후원할 준비가 부족하였을 때, 미국 선교회 후원을 받았다. 한국이 그들에게는 미지의 땅이었지만, 마다하지 않고 찾아 왔다. 당시 한국 상황은 압박해 오는 일제 강점 속에 온 국민이 구원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던 때였다. 한국인들의 갈급한 상황에 선교사님들의 입국과 도움은 가뭄 속 단비와 같았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울부짖던 한국인들에게 캐나다 선교사들의 도움은 메마른 광야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스며들었다.
이때에 소중하게 쓰임 받은 내한 캐나다 선교사님 몇 분을 감동의 현장 중심으로 찾아간다.
하크니스 선교사 부부, 1888년 한국 도착! 역사적 가치를 지닌 분들이다. 다만 내한한 지 1년도 못되어 캐나다로 돌아가셨다. 무엇이 그 고귀한 사명을 접게 만든 것일까? 역사적 정황을 살펴볼 때, 당시 한국은 땅에 떨어져 죽을 각오를 하지 않은 선교사님들에겐 머물만한 나라가 못되었기 때문이었을까?
게일 선교사(Gale, 한국명은 기일 奇一, 1863~1937.1.31)님은 좀 달랐다.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1888년, 토론토대학 학생기독청년회(YMCA)의 선교비 후원을 받아 한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1891년, 선교비 후원이 끊겼다. 한국 사역은 계속해야겠기에, 부득불 그의 선교사역을 지속적으로 후원해 줄 수 있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소속을 옮기기로 했다.
부산을 중심으로 전도사업을 시작했다. 이어 1892년부터 1898년까지 서울연동교회(蓮洞敎會)를 중심으로 전도했다.
그분의 사역은 특히 초기 문서전도 사역에서 독보적인 빛을 발했다.
(위 사진) 레널즈, 언더우드, 게일, 존스와 문경호, 김영준, 정동영 등이 함께 한 사진으로 볼 수 있듯이 성서 번역자회 선교사들은 열화 같은 현지인들의 성서 요구를 받아 1900년 신약, 1910년 구약 전체를 ‘한글로 성서를 번역해 냈다!’. 31년간이나 매달려 이 대작을 몇 사람의 역량으로 이루어냈다니..... .
또 《천로역정》과 같은 서양고전을 한글로 번역 소개하였다.
(위 사진: 게일선교사님과 함께 있는 길선주목사) 한국 교회사의 보배, 길선주 목사님은 게일선교사님이 번역한 전로역정을 접하고 기독교에 귀의 했다.
그가 기독교 문화를 한국에 잘 이식한 선교사 이상인 이유는 한국 문화의 탁월함을 서양에 알린 일에서 만나볼 수 있다.
한국의 고전을 영어로 번역하여 세계에 알린 것이다. 《한국풍속지》 《구운몽》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등, 재미나고 값진 고전을 영문으로 번역함으로 세계화시켰다. 그는 직접 《한국어의 변천》 《한국근대사》 《한양지》 《한국결혼》 등을 저술하여 한국을 세계에 소개 했다. 그는 단순히 한국인을 위한 복음 전달자로 그친 게 아니고 한국과 한국문화를 세계화시키는 탁월한 작업으로 한국인 사랑을 표현한 문화 선교사이기도 했다.
그는 동서양의 다리를 또 하나의 기념비적 사역, ‘한영대자전(韓英大字典):Korean-English Dictionary’편찬으로 연결시켰다. 1896년에 출간된 이 사전은 한국에서 나온 최초의 영어사전이다.
우리는 우주의 주재자 ‘여호와’를 누가 ‘하나님’으로 번역하였을까 궁굼할 때가 있다. 그는 국어학자 주시경의 연구에 근거하여 ‘하’에 ‘님’을 붙이고 다시 유일신이라는 의미까지 담아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제시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한국의 토착신과 혼동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여호와의 유일신 개념을 담아낸 것이다. 이로 보면 그는 한국인들의 하늘을 경외하는 심성을 이해한 분임을 알 수 있다. 단지 한국어 구사 능력이 유창한 선교사님이시구나 하는 감탄을 넘어, 지극히 한국을 사랑하였던, 아주 한국적인 선교사이시다.
그의 목회 사역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게일 목사의 임 공진 장로에 얽힌 일화 한 편을 열어 보자.
연동교회(위 사진)는 천민출신인 제1대 고찬익장로 (1904년 장립)와 제 2 대 이명혁 장로(1908년 장립)에 이어서 1909년 역시 천민출신인 임공진(林公鎭) 조사를 제3대 장로로 장립했다. 병역도, 부역도, 세금도 면제됐던 양반에 의한, 양반을 위한, 양반들의 사회, 그리고 양반들이 적지 않게 지체를 이루는 교회의 장로를, ‘양반이 아닌 천민으로 더불어 당회를 구성한다?’ 양반 계급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사회에서 천민의 장로 장립은 이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서민은 양반 앞에서 안경조차 써서는 안된다는 양반 사회에서 게일 선교사님의 목회방침은 성경적 관점이 아니라면 이해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상민이건 중인이건 양반이건 다 하나님 나라 자녀로 거듭나야 한다. 사회적 통념이 어떻든 간에 억눌린 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 직분에 반영하였다. 장로를 택하는데 신분의 높고 낮음이 그리 중요한가? 옛사람이 광대 출신이면 어떤가? 그는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신분을 받지 않았나?
예수 안에서는 세상에서 부당하게 차별을 당하던 천민들까지 죽은 것이고, 새로운 신분으로 회복됨을 보여주고 싶었다. 진정한 선교가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남으로 새로운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아닌가! 교회의 바른 사명을 세우는 일에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복음적인 사역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광대출신인 임공진 장로의 장로장립은 양반교인들의 반발을 자져왔다. 이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모인 1909년 6월 25일 연동교회 제직회에는 원더우드 선교사, 아펜셀러 선교사·헐버트 목사 등 장·감 양교파의 선교사들까지 참석할 만큼 역사적이고 심각한 자리였다. 이 회의에서 게일 목사는 임공진 장로는 신분을 떠나 장로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원긍·함우택·오경선 세 영수가 천민 출신의 장로장립에 심히 분노하고 교회를 떠났다.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1백여 명의 성도과 함께 묘동교회를 세웠다. 연동교회 역사상 단 한 번 일어난 이 분열 사건, 1년 내내 한국 초대 교회가 진통을 겪어야 했던 쓰라린 사건이었다. 당시 연동교회에는 상류계급의 양반출신이 있는가 하면 중류계급 상민출신, 그리고 하류계급의 천민출신이 공존했었다.
펜윅선교사(Malcolm C. Fenwick, 1865 ~ 1935)는 독립선교사로서 1889년 James S. Gale선교사를 이어, 한국에 왔다.
펜윅 선교사는 1865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 토론토 마캄에서 자란 그는 철물도매 사업을 하던 중 1889년 7월 귀한 말씀을 만났다. ‘사막에서 갈증에 목말라 죽어가며 물을 찾기 위해 울부짖었다’는 말씀을 통해 선교사를 소원하는 길을 가게 된다.
1889년 12월 조선 제물포에 도착한 그는 독립 선교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 ‘떠돌아 다니는 선교사’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공주 원산을 중심으로 교회를 설립하며 활동하였다. 그러나 선교사역의 한계를 절감하였던 것일까? 1893년, 귀국한 후 3년간 선교 훈련을 받고, 189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선교사로서 직접 복음을 전하는 직접 전도보다 조선인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토착적인 선교를 추구하였다.(위 사진) 1901년, ‘엘라딩 기념 선교회’는 좋은 사례다.
충남 강경에 한국 침례교 전신인 ‘대한 기독교회’를 조직하였다. 대한기독교회는 동아기독교회, 동아기독대로 발전하였다. 일제 말기엔 강제로 해산되기도 했다. 그는 독자적으로 찬송가와 성서를 번역 출판했다. 자급자립의 초대교회의 선교원리를 실천하였다. 31개의 개척교회를 세웠다. 그는 한국에 침례교를 세운 개척자가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많은 침례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았다. 농촌 선교를 하면서, 과수원을 경영하며 원예기술을 한국인들에게 알려서 과수 농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도 그다. (아래 사진: 펜윅 선교사, 개척한 교회를 방문)
1933년 1월 20일 부인 Fanny가 원산의 집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부인이 숨을 거둔 후에도 끝까지 원산에 남아 사역을 감당하였다. 남은 사역을 3년 가까이 더 이어가다 1935년 12월 6일, 아내가 순교한 나라 한국에서 숨졌다.
절반의 성공과 함께 한국 땅에서 선교하다 천국으로 이민을 떠난 펜윅 선교사 부부를 생각하면 너무 고맙고, 하지만 가슴이 메어진다. 한 편으로 한국 땅에 기념비적 사역을 꽃피운 에비슨선교사(Oliver R. Avison, 아래 사진)님을 생각하면 저절로 힘이 난다.
그는 토론토대학 의대 출신으로 그 학교에서 강의를 하셨던 분이다. 그 출중한 학자 출신의 의사께서 미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 선교사로 지원했다. 한국에 오기 위해서였다. 이미 제중원이란 드라마로 널리 알려졌기에 여기에 상술하지 않을 뿐, 그의 업적은 제중원과 세브란스병원 사역에 찬란하게 남아있다. 의료 선교사로서 독보적인 활약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교비를 후원해준 세브란스 이름을 기념하여 세브란스 병원이라 이름하고, 자신은 끝까지 사역만 하나님 앞에 감당한 에비슨 선교사, 그 놀라운 의료 사역, 오늘날까지 세브란스 병원이 존재발전하게 기초를 놓은 분이 에비슨 선교사님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내한 캐나다 선교사님을 생각하노라면, 참으로 가슴이 쓰리고 그래서 고마운 분은 맥켄지선교사(William J. McKenzie, 1893)다. 독립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황해도 장연의 소래교회에서는 11개월 활동하다가 숨졌으니 말이다. 단지 일찍 하나님 나라로 갔기 때문에 마음이 아픈 걸까?
맥켄지 선교사가 한국에 온 것은 모두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가 1898년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전이었다.
맥켄지 선교사는 캐나다 노바스코시아 주에서 스코틀랜드계의 부모 슬하에 태어났다. 1880년 할리팍스에서 달하우지대학 문학부를 졸업하였다. 1891년 4월, 할리팍스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캐나다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캐나다 북극 지방의 캐나다 원주민를 찾아가 사역하기를 18개월, 그는 학창시절부터 해외 선교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래브라도섬 지역에 선교 여행을 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자신을 선교사 생각했고, 그에 걸맞은 훈련을 하고 있었다.
동북부 현지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선교하는가 하면 Moravian 들과 생활하면서 귀한 선교의 훈련을 받기도 했다. 그는 선교사들의 전기를 읽는 가운데 한국선교에 관한 정보를 얻었고, 한국에 대한 강력한 선교 소명을 느꼈다. 마침내 한국선교를 결심하였다. Nova Scotia로 돌아와 Stewiacke East 에 소재한 연합교회에서 2년간 준비사역하고 특별히 의료 기술로 무장 하였다.
준비가 되었다 싶었을 때,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를 찾아갔다. 한국에 자신을 선교사로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해외선교부는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선교지로 보낼 여력이 없다 거절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인지라 포기할 수 없었다. 순회강연을 하며 스스로 모금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을 때, Korea를 향해 출발했다. 수일 밤낮을 달리던 기차가 록키 산맥을 헉헉러리며 오르고 있었다. 토요일 밤이었다. 그는 깜깜한 밤에 주섬주섬 짐을 챙겨 기차에서 내렸다. 그와 함께 여행을 하던 사람들이 놀라서 말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일에는 절대로 여행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황량한 허허벌판에서 하룻밤 묵어갈 숙소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기차역 멀찍이서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주점을 겸한 숙박소였다. 그 안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술과 도박으로 밤을 새우는 곳이었다. 낯선 사람의 출현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나타나 이것저것을 묻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을 보낸 그는 그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자신은 취침 전에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습관이 있으니 그 시간에 그들이 참여해줄 수 있는가. 놀랍게도 그의 말을 들은 그들은 술과 도박을 중단하고 침묵을 지켜주었다. 경건의 시간에 귀를 기울여준 그들을 그는 다음날 주일 예배에 초대했다.
주일 아침 11시, 그들은 놀랍게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나타났다. 성령께서 저들의 심령을 녹이셨다.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마음으로 새롭게 되어 보다 나은 삶을 약속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음날 그가 마을을 떠날 때, 회개한 마을 사람들은 눈물로 그를 배웅하였다.
Korea를 향해 가는 그는 이런 글을 남기고 있다.
“지상 어떤 나라 대사로서가 아니라, 영원하신 왕 중의 왕의 대사로서 조선 땅에 서서히 접근해 가는 나의 마음엔 경의와 두려움으로 벅차 오른다.”
1893년 12월 12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는 서울을 거쳐 벽지인 소래 땅으로 들어갔다. 편한 서양 옷 대신 불편한 조선인 옷을 입었다. 입에 도무지 맞지 않은 맵고 짠 조선 음식을 입에 넣었다. 낯설기 그지 없는 조선말을 배웠다. 그가 제일 빨리 배운 조선말은 ‘빨리빨리’였다.
기도와 수고를 교회 세우는 일에 집중했다. 조선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서낭제를 지내던 바로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워갔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세워갈 때, 조선 사람들의 손을 빌었다. 소래 교회가 세워지는 데 교인들의 헌신이 절대적이었다. 80일간의 피땀 어린 교인들의 무료 노동을 쏟아 부은 결과 교회당이 아담하게 자태를 드러냈다. 조선의 첫 교회가 조선 사람의 힘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힘이 절대적이었지만.
1893-1895년, 동학란이 마을을 휩쓸었다. 교회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소래를 떠나지 않았다. 교회에도 생명의 위협이 시시각각 다가 왔지만, 황해도에서 당시 조선 사람들과 의식주를 같이하며 그 마을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동란으로 다친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돌봐주었다. 동학혁명의 난리 속에서도 피신하지 아니하고 청나라 군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선인들을 보호하면서 선교사역을 계속했다.
당시 의지할 곳이 없이 절망적이던 조선인들에게 예수님 믿는 사람의 본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말만이 아닌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 섬기는 방법과 진정한 목자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는 가난한 심령을 가진 진실된 그리스도인이자 선교사이며 신앙의 선배였다. 무엇보다 조선 사람들의 아픔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들 사이에 파고 들어갔다. 그들의 문제를 함께 나누었다. 여러 사람들이 그를 따라 예수님을 좇기 시작했다.
그의 사역지는 동학란 중에 휩쓸려 있었다. 어떻게 이 환란에서 교회와 성도들을 지킬 수 있을까? 고심하며 기도하던 그는 십자가를 새긴 깃발을 장대에 높이 달아 교회당 앞에 세웠다. 우리는 십자가 깃발 아래 사는 사람들입니다 알렸다. 십자가 깃발은 동학군에게도, 그들을 평정하는 정부군에게도, 원정 온 청나라 군사들에게도 그 깃발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적이 아니라는 평화의 깃발이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십자가를 새긴 그의 지혜를 배워 교회를 세울 때면 십자가 깃발을 세웠다.(아래 사진 참조)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최초의 조선 교회당을 설립하던 그는, 교회헌당을 불과 11일 앞둔 채, 그는 영양실조와 과로로 쓰러졌다.
1895년 6월 22일, 그는 거의 읽어볼 수가 없는 흐려진 필체로 일기를 적었다. 그의 마지막 일기는 이렇게 끝나고 있다.
“카나다를 떠난 것이 잘못인가요? 절대 아닙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을 시작하자마자 지금 나를 데려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나는 아주 건강해서 아프리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현지의 음식을 먹었습니다. 아마도 뜨거운 햇볕을 쪼이며 여행하는 부주의를 범한 것 같습니다. 밤은 너무 춥습니다. 그리고 이럴 수가? 할 것은 너무 많고 온 지는 겨우 2년도 안되고 한국 사람들이 이제 겨우 자신들의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는데….. 그들은 육신의 의사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의사도 필요한데....... .
내가 그들을 위하여 더 일할 수 있다면 좋겠읍니다. 그러나 나는 너무 약하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픈 것이 너무 이상합니다. 나는 아직도 젊고 다음 달까지 살수 있다면 겨우 35 살이 되는데… .. 나는 이제 쓰는 것을 중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 너무도 피곤하고 춥습니다… .
어두움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나의 사역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떠나면 다른 사람이 내 자리를 채울 것입니다. 사역은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나의 친구들은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은 나의 친구들을 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친구들은 응답할 것입니다. 나는 오직 갈 길을 가르킬 수 있을 뿐입니다. ….너무나 졸려요.. 유일하게 쓸 수있는 말은 …. “예수님은 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Korea여 ! 안녕!.
영양실조로 심히 몸이 쇠약해 있던 그는 토속 일사병에 걸렸고, 정신이상을 일으킬 만큼 심한 열에 시달리다 숨졌다.
1895년 6월 22일, 한국에 온지 불과 2년도 안된 34세의 꽃다운 나이로 한 알의 밀알되어, 소래 땅에 떨어졌다.
경신학교의 1회 졸업생이었던 서병호 어린이(훗날 새문안교회 장로)가 그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다.
1895년 12월 26일, 한국장로교 초대 7인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이 된 서경조(서상륜의 동생이자, 서병호의 부친)를 대표로 하는 소래교회 성도들은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에 맥켄지 선교사와 같은 선교사를 파송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멕켄지 목사는 조선에 도착한 후 황해도 장연군에 있는 소래로 오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업을 위하여 열심히 일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주를 위해 살도록 인도해 주셨읍니다. 소래마을은 원래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몰랐던 매우 부도덕한 마을이었읍니다. 현제 이곳에는 메켄지 선교사의 모범된 삶의 뒤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읍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 부복하여 기도하면서 그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카나다에 있는 우리의 믿음의 형제인 여러분이 우리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해주시고 우리에게 신앙의 지도자를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경신학교의 설립자인 미국 북장로교단의 언더우드 선교사가 그의 편지를 번역하여 캐나다 동부 장로교단 앞으로 보냈다. 신학대학 학생이었던 Alexander F. Robb은 1896년 파인 힐 신학교 신학지에 맥켄지 선교사의 사망 소식과 소래교회의 선교사 파송 호소문을 기고했다.
맥켄지 선교사의 헌신적인 활동과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 지역 주민들은 물론 편지를 통해 소식을 들은 모든 이들에게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선교지로부터 보내온 한 통의 편지는 카나다 장로교단에 선교의 횃불을 높이 들게 만들었다.
그의 순교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고 당시 한국선교를 포기했던 캐나다 교회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잠든 다수의 캐나다 선교사들이 깨어났다. 그리고 그가 잠든 한국 땅에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맥켄지 선교사의 급작스럽고 애석한 죽음은 캐나다장로회가 한국 선교를 결정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맥켄지의 죽음의 소식과 한국인들의 요청을 받은 캐나다장로회는 1897년 10월 7일 한국 선교를 결의하였다.
신학교 때부터 맥켄지 선교사와 알고 지냈고 그로부터 직접 한국에 선교사로 나오라는 편지를 받은 바 있던, 파인힐 신학교 동문 그리어슨은 물론이고, 같은 학교 동문 푸트 그리고 멕켄지와 동향인 던칸 맥래 목사가 1 차 교단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맥래는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했다가 교단으로부터 거절당했는데 그의 열정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I will go to Korea! If I have to swim the ocean to get there.”태평양을 헤엄쳐서라도 조선에 가겠다니.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Korea를 향한 열정 앞에 교단은 파송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맥켄지 선교사님과는 달리 이젠 교단 후원까지 등에 업고, 고독한 한 사람이 아니라, 든든한 선교팀으로 한국을 향해 나아갔다. 내한캐나다선교사님들의 사역은 더욱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1898년 8월 2일 배로 캐나다 밴쿠버 항을 출발하였다. 일본을 거쳐 9월 4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9월 7일 제물포로 입국,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 소래교회는 이미 자립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뉴브런즈윅주에서는 랍목사와 맥밀란 의사가 원산 지역을 위해 선교사로 자원헀다.
Elizabeth McCully는 맥켄지 선교사의 일기를 정리하여 “한 알의 밀알” 이라는 전기를 발간했다. 저자인 맥컬리도 1909년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갔다. 세상에 드러난 비밀! 그녀의 동생 Louis는 Mackenzie 선교사의 약혼녀였다. 그녀 또한 Mackenzie선교사가 죽은 후 선교사 준비를 하고 1900년 한국에 들어갔다. 그녀는 최초로 한국에 간 캐나다의 여선교사로서 원산을 중심으로 마르다 윌슨 기념학교를 세웠다. 한국의 기독교 여성 발달사에 큰 업적을 많이 남겼다.
줄지어 일어난 많은 선교사님들의 헌신을 보면서 자꾸만 어른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요한복음12:24] 말씀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헌신된 맥켄지 선교사의 죽음을 너무 아쉬어 하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너무 귀하고 많은 선교사님들로 채우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뜻을 이해하게 된다.
평양에 불어온 대부흥 운동을 말할 때, 익숙하게 인용되는 하디선교사(Robert A. Hardie, 1890)가 토론토대학 의대 출신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YMCA 선교회의 지원으로 활동하다가 8년간의 계약기간이 끝나자 1898년 미남감리회로 선교부를 옮겨 계속 한국에 파송 받았다. 더욱 겸손하고 싶었고, 좀더 회개하고 싶었던 하디 선교사님이 20세기 초의 한국 부흥운동의 불씨가 되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하디 선교사님을 기점으로 일어난 부흥현장(위 사진, 원산남산동 교회, 중앙에 하디선교사)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못판이 된 Louise H. McCully 선교사를 좀더 소개하고자 한다. 캐나다장로교 여성 해외 선교위원회가 파송한 여선교사님, 맥켄지 선교사의 사랑과 선교열정을 그대로 이어받아 한국 땅에 부흥의 불을 지핀 사람이기 때문이다. 앞에 기술한 하디 선교사님이 회개를 쏟아낸 현장은 맥컬리 선교사 주도로 이루어진 기도모임에서다. 이 기도회에 참석한 선교사님들은 모일 때마다 조선인들 가운데 신앙의 부흥이 일어나기를 간구하던 중이었다.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MaCully의 제안에 따라 12명의 선교사들이 일주일 간 사경회를 가졌다. 이 기도 모임에 주도적으로 참가한 화이트 선교사를 통해 중국 의화단 사건을 전해 들었다. 이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자신들도 별로 다르지 않은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들의 한국 선교활동에 대한 심도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선교방법을 수정하고, 자신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주 강사로 초빙된 하디선교사님과 그들의 눈물어린 회개 기도는 원산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위 사진- 하디가 중앙에 앉아 있음) 한국 교회 역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부흥이 회개한 저들 모임에 불붙었고, 더 나아가 1907년 평양대부흥으로 이어갔다.
유독 하디선교사가 회개의 중심에 서 있게 된 것은 그때까지의 지지부진한 그의 사역 때문이기도 했다, 부산에서 게일과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던 그는 서울에서 에비슨 선교사님과 제중병원 사역으로 연결되었다. 1901년부터는 강원도 김화 등에서 3년간 사역하였다. 하지만 열매는 너무 지지부진했다. 사역침체로 인해 그는 정신적 공항상태를 겪고 있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 힘으로 안되고, 몸부림쳐도 나타나지 않는 참담한 결과를 되풀이 하며 절망 중에 있었다. 그런 하디선교사가 기도모임 강사로 설교요청을 받은 것이다. 그는 성령 안에서 회개가 터져 나왔다. 자신 사역의 열매 없음이 조선 사람들의 완악함 때문이려니 탓하던 그가 조선 사람들을 무시한 교만과 백인으로서 가졌던 우월감, 완악함 때문이었소 하고 설교석상에서 죄를 통렬히 회개했다. 자신의 선교동기와 신앙상태의 잘못에 있었음을 밑바닥부터 회개한 것이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속에서 하디의 뼈저린 회개는 기도회에 참여한 선교사들의 심장을 흔들었다. 참여한 선교사님들도 내탓이오 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회개의 불길은 최종손, 강태수, 진천수 등 한국 교회지도자들에게도 옮겨 붙었다. 하디 선교사는 원산 감리교회에 초대받아 가서도 교인들 앞에서도 고백하였다. 성령의 강력한 은혜와 거듭나는 역사가 파도처럼 휩쓸어갔다. 집회하는 곳마다 선교사들은 말할 것 없고, 집회에 참여한 교인들까지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며, 대성통곡했다. 큰 성령운동이 불타올랐다.
Rob 선교사 역시 이때에 성령의 강력한 경험하였다. 그 은혜를 감당할 수 없어 눈물로 온종일 거리를 회개하며 걸어 다녔다는 기록을 만난다. 그는 며칠 동안 금식하며 통회했다. 길가에서 기도하는 그의 모습은 술취하였다 하여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하니, 오순절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임한 성령 운동을 생각나게 한다.
결국 이런 성령체험은 이듬해 여름 원산제직사경회에서 계속되었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그 후 전국으로 파급되면서 한국교회에 전반에 커다란 영적각성과 부흥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1934년 한국선교 50주년을 맞았을 때, 하디선교사님은 이런 말을 남겼다.
“조선교회 부흥 불길은 감리교와 장로교의 두 여선교사가 연합하여 기도하는 중에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하디선교사는 전국적으로 부흥회를 이끌며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선도했다. 하디선교사는 1935년 은퇴하는 날까지 45년간이나 영적각성을 외치는 선교사로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
1903년 한국교회에 불어닥친 회개 자복운동은 1904년 각 교파연합으로 번졌고, 순회전도를 불 일 듯 일어나게 했다.
내한 캐나다 선교사님들을 통해 교회의 수적인 부흥만 있었나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 하여 꼭 소개해드리고 싶은 선교사 가문이 있다.
홀선교사 가문이다.
William J. Hall 선교사는 물론 내한 캐나다선교사다. 미감리회 소속 의료선교사로 가족과 함께 한국에 왔다.
평양지역에서 활동하던 중,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수없이 죽어가던 병사들, 거기에 전염병까지 돌아 환자들은 거리에 넘치고 있었다. 그는 모든 걸 뒤로 하고 치료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염병 앞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린 아들과 복중에 있는 딸이 고아와 같이 남았다. 그들이 죽기도 하고 또 살아 남아서 3대에 걸쳐 한국인을 섬겼다. 그리고 선교사의 전설이 되었다.
다음은 그의 생애를 조명한 '조선회상'이란 책에서 홀 선교사 가문의 감동적인 모습을 읽고 은혜를 입은 한국민족의 후손으로 '당신 가문에 감사드립니다' 란 제목으로 필자가 적어본 졸고다.
‘언젠가 고국에 가면 양화진에 가 보리라’ 몇 년을 두고 벼르던 터였다. 내 민족을 위해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님들이 잠들어 있는 그 동산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꼭 보고 싶은 분의 묘지가 있었다.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
나는 그분의 비문 앞에 서서 99%의 순금 목거리를 생각했다. 14k 목거리만 몸에 걸어도 진짜 금목거리처럼 아름다운데, 그의 삶을 읽었던 나에겐 순금목거리만 생각났다.
당신의 흉한 상처를 가려주기 위해/ 100년 하고도/20여년 전/어느 날, 과년한 처녀가 찾아왔다. 15세가 되도록 결혼을 못하면 문제가 있다는 조선 땅에서/ 16세가 넘도록 시집을 못간 처녀가 찾아왔다.
맙소사!/ 그녀의 손가락은 세 개가 손에 붙어 있었다. 불난 집에서 이 끔찍한 화상을 입은 것이로구나. 의료 선교사로 오지를 찾아온 홀 선교사는 손가락을 떼어 펴 주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하고, 한숨을 쉬었다. 볼상 사나운 수술자국을 피부 이식으로 덮어주고 싶으나, 무지몽매한 조선 원주민에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피부를 벗겨내어, 그녀의 상처 위에 붙임으로 수술을 마쳤다. 놀란 조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자기 껍질을 벗겨 병자를 치료해주는 사람이라고. 온전해진 그녀의 손을 보는 사람들의 가슴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불붙었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제 그 조선 사람들은 이만여 명의 선교사를 땅 끝까지 파송하고, 자기들의 껍질을 벗겨 선교지 상처를 덮어주고 있다. 선교란 상대의 흉한 상처를 가려주기 위해 내 껍질을 벗기는 것이기에........
그가 하나님께 맡은 지경, 평양에 전쟁이 왔다. 그리고, 싸움이 끝난 지 3주가 지났어도, 의사인 그의 일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아들 셔우드가 정말 보고 싶구나!
그러나 너의 첫돌에도 난 서울에 갈 수 없다."
아빠가 부재 중인 서울의 가정에서는 첫 생일을 맞은 아기 셔우드 앞에 진기한 물건들이 놓여있었다. 조선의 풍속대로 아이가 평생의 직업을 선택하는 장면 연출이었다. 상징을 따라 누더기 인형(거지), 책(교사), 성경(목사), 괭이(농부), 청진기(의사)가 놓여졌다. 어린 아가는 어떤 물건을 잡을 것인가? 아기 셔우드는 꼬막손으로 청진기의 고무호스를 잡았다. 사람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해피 버스데이'를 불렀다.
홀 선교사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부인과 아들 곁에 도착했을 때, 그의 온 몸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중병에 걸려 있었다.
"건강할 때 돌아와 아내를 만나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병이 났을 때 집에 돌아와 눕는다는 게 얼마나 편한가를 알게 되었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쟁터를 헤매며 사람을 구하러 자신을 불태우던 그는, 더 이상 태울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끝냈다."
미국에서나 조선에서나 '아이들의 친구'였던 그는 하나뿐인 자신의 아들과는 말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영원한 작별을 고하려 하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부인에게 말하고자 애썼던 말은 이것이었다.
"내가 평양에 갔었던 것을 원망하지 마시오. 나는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이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소."
1894년 11월 24일, 석양이 물들 무렵, 그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 고요히 잠들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서울 한강변 양화진에 한국인을 살리기 위해 다 소진한 그의 몸을 뉘었다. 영원한 안식일에 다시 깨어날 때까지 평안히 잠드소서.
그는 자신의 껍질만 조선인에게 벗겨 준 것이 아니었다.
부인 로제타 홀 선교사
건강한 사슴은 목이 마를 때, 시내를 찾고, 배가 고플 때, 푸른 풀을 찾는다. 그러나 늘 푸른 시냇가에서만 살지 않는다. 푸른 초장만 거닐지 않는다. 그는 암벽 위를 뛰어다니고, 때로 절벽과 절벽 사이를 넘나든다.
1898년 5월 1일,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이 사역하다 쓰러진 평양에, 청일전쟁이 휩쓸고 간 그 황무한 죽음의 땅에, 그 부인인 닥터 로제타 홀 선교사는 그가 남겨놓은 두 자녀(셔우드와 에디스)와 함께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무서운 이질이었다. 세 사람이 모두 이질에 걸렸다. 그리고 이제 갓 세 살이 되어 가는 어린 딸 에디스에게 그 고통은 더욱 심했다.
유복자 에디스는 먼저 간 남편 대신 주신 선물로 알았건만. 그 곁에는 친어머니처럼 에디스를 돌본 유모, 박 에스더 부부(위 사진 참조)가 눈물을 쏟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무서운 질병들과의 전투에 동참하기 위해 로제타 선교사님의 가르침으로 대로 의술 공부에 헌신했다.
여기 에디스의 마지막 순간을 적은 어머니의 일기를 소개한다.
5월 23일 새벽 3시 30분, 다시 고통스러워 했다. 병이 난 후 처음으로 에디스는 안아달라고 했다. 심히 고통스러워하는 이 작은 얼굴..... . 아침 10시 경, 나는 흰 민들레를 에디스의 손에 쥐어 주었다. 오후 3시 아이의 손과 발이 차다. 얼굴과 몸은 뜨거워 섭씨 39.5도. 오후 6시 45분 아이는 쉬지 않고 숨을 물아 쉬고 메스꺼워 했다.
7시 15분 열은 40.5도/ 8시 25분 열은 섭씨 41도. 숨이 가쁘다. 나는 에디스를 팔에 안고 전에 낮잠 재울 때 하던 것처럼 흔들어 주었다. 아이는 훨씬 조용히 숨을 쉰다. 만족한 것 같아 보인다.
아이의 얼굴은 평화스러워졌고 호흡의 간격도 길어졌다. 크게 뜬눈으로 엄마를 보면서 이 작은 영혼은 이렇게 떠나갔다.
오후 8시 40분. 에디스는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에디스가 남편대신 보내준 하나님의 위로인 줄 알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보석 에디스는 평양의 새 집에 정착하기도 전에 품을 떠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디스를 데려갔다고 하자 그의 오빠 네 살배기 셔우드는 첫 마디에 말했다.
"아빠가 에디스를 너무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데려가셨을 거예요."
장미꽃들을 관 위에 얹고 아펜셀러 목사님은 성경을 읽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그리고 말씀을 전해주었다.
"당신의 사랑하는 딸 에디스는 지금 아빠 품에 안겨 잠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 때,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 가족의 절반은 이미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로제타 홀 선교사는 68세가 되기까지 43년간 우리 동족을 위해 봉사했다. 조선 처음 맹인 교육을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 부인 병원(현, 이대부속병원), 경성여자의학 전문학교(현, 고대의대) 등을 세우셨다.
나로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시18:32)
우리는 닥터 로제타 홀 선교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진정 아름다운 사슴의 의미를 만난다.
어머니 로제타 홀 선교사님은 1897년, 청일전쟁 때 전쟁부상병자들을 돌보다 희생된 남편 윌리엄 홀을 기념하여 평양에 기홀병원을 건립했다. (아래 사진 뒤편 건물) 그리고 1898년에는 여성전용병원인 광혜여원(아래 사진 오른편 건물)을 개원했다.
로제타 선교사는 어려서 죽은 딸 에디스를 추모하는 뜻에서 에디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을 설립하고 어린이 진료 사업을 시작하였다. 앞서 언급한 박에스더(본명; 김점동)는 광혜여원의 첫 번째 수료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로제타 선교사님의 수제자였음은 물론이다. 박에스더는 셔우드 홀과 동생 에디스를 사랑으로 돌본 유모 같은 마음으로 의료사역에 헌신했다.(위 사진, 어린 셔우드와 에디스 로제타 선교사, 박에스더 부부) 로제타 선교사는 동족을 뜨겁게 사랑하는 박에스더를 훌륭한 여의사로 키우기 위해, 광혜여원에서 공부를시켰다. 미국까지 유학시키고, 의사자격증을 취득하도록 도왔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된 후, 1902년 광혜여원에서 함께 사역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폐결핵이 그 소중한 박에스더 선교사를 덮쳤다. 당시 한국땅에 결핵이란 병은 요즈음 에이즈나 암처럼 무섭게 생명들을 앗아가고 있었다. 로제타 선교사를 비롯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깝고 소중한 박에스더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처럼 따르고 사랑을 받던 박에스더의 죽음을 17세의 나이로 지켜보던 셔우드 홀은 속으로 피눈물을 쏟고 있었다. 이 소중한 사랑의 천사를 그들의 곁에서 앗아가는 결핵의 정체는 무엇인가? 한국인을 폐결핵에서 구해 낼 길은 없는가? 그는 결핵 전문의가 되기로 결심하고 의학을 공부하였다.
아들 닥터 셔우드 홀과 그 부인 닥터 메리안 홀 선교사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도 젊은 나이에 천국 가고, 그 어린 동생 에디스까지 애처롭게 죽어간 조선 땅인데, 셔우드 홀은 1893년 서울 생으로 신고 되었다.
그가 조선 땅에서 자란 후, 미국과 캐나다의 최고의 명문대학에서 의사 수업을 마치고, 부인 의료 선교사 메리안 홀까지 데리고 다시 조선에 올 줄을 누가 알았으랴!
그러나 그는 황해도 해주 땅까지 왔고, 1933년,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조선의 폐결핵과 싸울 구세 요양원을 처음 세운다. 그가 해주에 세운 구세 결핵요양원이 결핵퇴치에 선봉이 된 것은 물론이다.(아래, 해주결핵 요양원 )
믿음의 사람들 바다 건너서 헌금을 보내오고, 가진 것이 없는 나라에서 될 성싶지 않던 '크리스마스 실' 운동을 이끌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들이 주관하는 '실' 운동, 성공시켰으니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복음의 텃밭 되었으랴!
불쌍한 민족 사랑한 것도 죄라고, 강점한 일제에 의해 추방당하기까지, 2대에 걸쳐 희생으로 믿음을 표현한 홀 선교사 가문, 박해 속에서도 의롭게 썩은 기독교의 밀알이었기에, 비웃어도 30배로, 시달려도 60배로, 죽여도 100배로 결실을 얻어, 선교 대상국이었던 이 나라가 오늘날 선교 강국이 되었으니,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하나님께 감사를,
땅에서 당신 가문에 감사를 올립니다.
내한 캐나다 선교사님들, 당신들은 우리 한국인을 얼마나 감동으로 울게 할 작정입니까?
2. 내한 캐나다 선교사들, 이렇게 한국에서 사역하다.
1] 함경도 지역에 선교 센터를 설립하다.
1892년 7월, 캐나다 출신 미북장로회 소속 게일선교사는 원산에 자리를 잡았다. 1894년, 그와 합류한 스왈른 선교사와 미북장로회 선교센터를 원산에서 운영하였다.
1898년 11월 4일, 미북장로교회가 원산 선교지부를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함에 따라, 푸트 선교사 가족이 원산으로 이사 왔고, 캐나다 선교부는 원산 중심으로 선교를 전개하게 되었다.
그리어슨 선교사는 맥래 선교사와 함께 1900년 11월 성진 지역을 여행하다 성진이 선교기지로서 훌륭하다는 판단을 하였다. 그들은 함흥보다 선교하기에 더 적합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성진에 한 두 명의 선교사를 상주시킬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1901년 5월 가족을 데리고 그곳으로 이주하여 성진 선교 센터를 열었다. 1902년에는 럽 목사 부부가 원산으로부터 성진으로 전임하여서 그리어슨 선교사와 함께 선교활동을 하였다. 1904년에는 럽 목사의 여동생도 그들과 합류하여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리어슨 선교사님의 활동 영역은 아주 넓었다. 음악 축구 야구 보급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미쳤다. 그는 제성악단, 제성 합창단을 조직하여 순회음악전도를 하였다.(아래 그림)
함흥은 미북장로회 스왈론 선교사와 그의 조사 전군보·이기풍의 전도로 1896년 8월에 이미 함흥읍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 지역을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이 담당하게 된 후에는 맥래와 그리어슨이 1900년부터 이 지역에 선교지부를 설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1903년 맥래 선교사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1904년, 선교지부가 설치되었다. 맥래 선교사 부부는 함흥으로 이사와 정착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하려던 중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으로 인해 잠시 원산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다시 돌아와서 선교활동을 계속했다.
1906년, 여의사 맥밀란 선교사와 매이어 여선교사도 선교사역에 합류했다.
1907년, 영(L. L. Young) 선교사가 이어서 선교대열에 합류하였다. 조선 땅은 정치적으로 암울하였지만, 함흥 지역을 찾아온 선교사님들의 선교 활동은 봄을 맞고 있었다.
2] 현지인 교회를 세우다
캐나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를 세우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메켄지 선교사님이 소래교회를 현지인 중심으로 세운 것을 이미 살펴 보았거니와 이어 온 다른 선교사님들도 1898년, 한국 도착과 함께 "오직 하나의 복음적 교회를 조직"하는 일에 앞장섰다. "대한예수교회"라는 깃발 아래 교리가 다른 교단 특성은 인정하였지만, 초교파적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1893년부터 서로 협력하던 연합공의회는 1901년, 양성된 한국인 장로와 조사들까지 참여하는 합동공의회로 발전하였다.
최초의 한국인 장로교 7인 목사가 배출되던 1907년 9월, 4개의 장로교 선교부 선교사 38명과 한국인 회원 40명이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를 창설하였을 때, 캐나다장로회 함경대리회 대표들이 독로회 조직에 참여하였음은 물론이다.
1898년 캐나다 선교부가 원산지역 선교를 인수받았을 당시, 함경도 지역 장로교회는 14개 예배 처소, 교인 약300여명이 있었다.
그러나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이 이 지역을 맡고 교세는 많이 확장되었다. 1910년 9월, 제4회 예수교장로회조선노회에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예배당이 81개, 예배처소가 285개처, 교인이 도합 9,889명으로 나타난다. 불과 10여년 사이에 30배 열매가 맺힌 것이다. 당회가 있는 조직교회가 5개요, 한국인 장로는 7명이 있었다.
교회 수는 1908년 이후에 급격히 증가한다. 캐나다장로회 한국선교 통계(1910. 6. 30)에 따르면, 전체 신자 수는 9,379명으로 전년도(1909. 6) 신자 수 5,594명과 비교해 볼 때, 가히 폭발적이다. 이러한 현상은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나 백만구령운동의 영향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한국 교회는 한국인들 스스로의 힘으로 이런 성장을 주도하고 있었다.
3] 복음 전파에 현지인들을 앞세우다.
선교사들은 자신이 고용한 어학선생이나 매서인들을 데리고, 자신이 담당한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선교사들은 신자들을 심방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구원의 도리를 설명하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곤 하였다. 가지고 간 성서와 전도문서들을 팔기도 하며,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성경을 읽어주고 예수 믿을 것을 권면하였다. 그러나 복음 전파 사역에서 선교사들이 직접 본이 될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을 주로 앞세웠다. 먼저 복음을 접한 한국인들이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들은 그들을 방문하여 격려하고 교육하였다.
(아래 사진은 현지인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러 가는 중, 자전거와 함께 선 맥민란 선교사)
4] 교육 기관을 세우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교육을 필수 도구로 생각했다. 당시 한국은 일부분 특권층에 교육이 쏠리고, 전통적인 서당교육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일반 국민들은 문맹들이었다. 선교사들이 문서로 선교하고자 하더라도 글을 읽을 수 있는 교육이 필요했다. 믿는 사람들에게 성서를 읽히고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도 교육이 필수였다. 무엇보다 한국인 스스로가 선교사들에게 학교교육을 요청했다. 교회들은 학교를 운영하며 교육에도 기여 하였다.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는 안 믿는 사람들의 자녀들도 참석했으므로 복음을 전하며 선교하기에 더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1900년에는 월급을 주는 교사를 고용하여 학교를 설립하였다. 1901년, 함흥읍 교회는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푸트 부인, 맥래 부인 등 선교사 부인들과 여선교사들은 그들의 집에서 여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호응이 좋자, 1903년에 원산과 함흥에 각각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1910년 제4회 독로회에 보고된 통계에 의하면, 중학교가 3개, 소학교가 57개, 학생은 신학생이 8명, 대학생이 1명, 중학생이 186명, 소학교 학생이 1,715명이었다, 교육을 통한 선교가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나를 미루어 알 수 있다.
5] 의료 기관을 세우다.
홀 가문이 의료 선교사로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1898년 광혜여원을 세워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를 로제타 선교사님이 양성한 사실을 이미 살펴보았거니와 캐나다장로회 소속 초기 5명의 선교사 가운데 그리어슨은 목사였지만, 의사이기도 했다.
1901년 파송된 맥밀란(Dr. Kate McMillan)선교사는 여의사였다.
1910년에 파송받은 맨스필드(Dr. T. D. Mansfild) 선교사 역시 의사였다.
그들은 늘 의료사역과 함께 복음 사역을 병행했다. 의료활동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기에 정성을 다 기울여 현지인들을 치료했다.
맥밀런 여선교사님이 자전거를 타시고 순회전도를 한다고 해서 맥밀런 자전거의 창시자는 아니다. 마르다 윌슨 기념학교에서 교장으로 사역하셨고, 원산, 회령 성진 성경학교에서 복음 사역을 전한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위원회 파송 선교사다. 자전거를 타신 맥밀런 선교사은 의료 사역을 통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그리어슨 선교사는 1899년 2월, 원산에 도착했다. 그리어슨은 한국 선교 역사에 특기할 만한 발자취를 남겼다. 한국에 도착하여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원산 세관의 의사직을 맡아 의료활동을 하였다.
1901년 5월, 함북 성진으로 임지를 옮겨서도 자신의 집에 소규모의 진료소를 열고 틈틈이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이 진료소는 나중에 성진 제동병원(濟東病院)으로 발전하였다.
캐나다장로회 선교부가 1901년 여의사 맥밀란(Dr. Kate McMillan)을 선교사로 임명하여 파송할 때 "그녀는 그녀 자신을 의료 사역에 제한하지 않는다"고 할 만큼 의료사역과 복음 전파를 병행하였다.
1901년 10월, 원산에 온 여의사 맥밀란 선교사는 새로 부임하자 부인들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자신의 집에서 진료활동을 하였다.
나중에는 아버지가 보내준 선교후원금으로 건물을 빌리고 진료소를 차렸다. 그곳에서 의료 활동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다음 해에 그녀는 성진에서 그리어슨과 합력하여 진료소를 맡아 사역하였다.
1903년부터는 함흥에서 맥래와 함께 선교사역을 하면서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이 진료소는 후에 함흥 제혜병원(濟惠病院)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의 의료활동은 러일전쟁과 안식년 휴가 등으로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의료 사역은 복음전하는 일에 매우 유익했다.
한국인 의료 조수를 키워 그들로 하여금 진료하게 하기도 하여 위급한 환자나 질병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에게 영육간의 건강을 선물했다. 그들의 의료선교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3. 내한 캐나다 선교사들, 한국 국민들 편에 서서 일하다.
캐나다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때는 한국이 일본의 침략을 당하고·지배당하던 시기였다.
그들은 한국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였지만, 선교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일제와 충돌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들이 한국민을 중심으로 한국인을 위해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1905년, 강제적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는 과정에, 재한 외국인에 대한 관리도 통감부에서 맡도록 했다.
캐나다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은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집단적으로 한국민에게 친밀하였고, 반일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캐나다장로회 선교부가 3·1운동 때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長谷川好道)에게 항의서를 결의하여 보냈던 것도 선교부의 차원에서 보면 유일했다.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가운데 일제와의 갈등도 감수했다.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은 주로 함경도 지역과 간도·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했다.
해방 후, 그들은 주로 한국기독교장로회와 연결되어 있어서 한국 장로교의 주류에서는 좀 푸대접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와중에서도 캐나다 선교사들의 자세는 우리에게는 감동적이다.
맥캐이 총무가 헐버트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있다.
"나(맥캐이)는 선교사들이 곤란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정치적인 일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비인도적인 잔인함과 불의 앞에서 침묵한다는 것은 비겁하게 보였다. 어떤 선교사들은 침묵 정책을 고수하지만,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억압에 대해서 반대한다. 정의와는 관련이 없는 강탈이며, 때로는 거의 믿을 수 없을만한 잔혹함이다."
1] 때로는 일제와 맞서다
캐나다선교사들은 일제로부터 KOREA가 독립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다. 해방 후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로 외국인 선교사 7명이 선정되었는데 그 중 4명이 캐나다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일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이에 연유한다.
이는 미국이나 영국 등에서 파송된 많은 선교사들과 비하면 소수에 속하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이 왜 이리 독립유공자가 많은가에 대한 답이다. 그들은 한국의 독립에 대하여 동조하고 있었다.
그 열정의 예를 맥래 선교사에게서 본다. 1905년, 그는 함흥에 교회와 병원, 학교를 짓기 위한 선교부지를 매입하였다. 이는 일제의 눈에 가시였다. 일제는 그 부지를 어떻게든 강탈하려 하였다. 결국 그는 그 부지 대신 그들이 제안한 다른 땅에 1,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ㄱ"자 예배당인 신창리교회를 건축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외국인의 권리를 이용하여 일제와 최대한 맞섰다.
2] 일제의 탄압을 세계에 폭로 하다
KOREA가 가장 처절한 고통 속에 있을 때, 선교사들은 이곳을 찾았고, 그들은 면책특권이 보장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한국 땅을 돌아보며, 일제의 잔학상을 세계에 알렸다.
1907년, 일제가 강압적으로 실시한 부당한 염전세 징수를 함흥 연포 주민들이 거부하다 처벌당한 사건이 있었다.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맥캐이선교사(Rev. R. P. McKay, D. D.) 는 당시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던〈대한매일신보〉의 영자 신문인 The Korea Daily News지 1907년 7월 10일자에 폭로했다. "함흥에서의 무서운 대량 학살"(Terrible Massacre at Hamheung)이라는 제목이었다. 그는 캐나다에 돌아가서 그의 보고서를 Montreal Daily Star지에 기고하였다.
이는 스코필드 선교사의 제암리 학살 사건을 사진에 담아 세계에 알린 사건과 함께 캐나다 선교사들의 일제만행 폭로 사건으로 기록된다.
3] 애국 운동을 직간접 후원하다.
한국에 온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직간접으로 후원하였다. 특히 캐나다 선교사들은 신앙을 세상과 구별하지 않았기에, 독립 운동과 같은 첨예한 사건을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맥래선교사는 그 대표적인 분이다. 일제 식민지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한국 민족의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대안교육을 실시한 의식 있는 선교사였다. 그가 한복을 입고 함경북도 일원에서 선교와 교육에 힘쓴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대안 학교에서도 신사참배 문제가 부각되자, 신사참배에 타협하기 보다는 학교교육을 포기하여야 함을 주장하였다.
1909년 맥래선교사가 시무하던 교회에서 맥래의 조사를 맡고 있던 김창보와 맥래의 한국어 어학선생인 조희림이 말씀을 맡았다. 영흥군과 정평군에서 온 신도 약 60명이 연설을 들으러 온 약 20명과 함께 앉아 있었다. 김창보는 그들에게 "만약 한국 국민으로서 애국정신을 가진 자가 있다면 누구나 속히 우리 기독교에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기독교 입교를 권유하였다. 조희림도 당시에 널리 유포되던 양계초의《월남망국사》를 낭독하고 기독교를 전했다. 그러나 이 집회가 단순한 전도 집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민족의 각성과 애국정신이 깊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애국적 신앙이 맥래 선교사님과 같은 분의 깊은 배려로 교회 모임을 통해 불붙었고, 힘 있게 전개될 수 있었다. 이런 집회가 있을 때마다 일제는 선교사들을 눈의 가시처럼 생각했다. 한국인의 애국 운동 이면에 선교사의 배려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곤 했다.
4] 애국 운동가의 울타리가 되어주다.
"무너져 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예수를 믿으십시오 예배당을 세워야 합니다.……삼천리 강산 마을마다 교회와 학교를 하나씩 세워 3천 개의 교회와 학교가 세워지는 날 독립되는 날입니다. 저는 일찍부터 기독교를 믿어왔습니다. 스스로 생각할 때, 기독교가 아니었다면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내 안에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아니었다면, 나에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아니었다면 나에게 나라의 독립을 원하는 마음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력을 키워 강해지고 싶은 마음도 기독교에 기인하고, 나라와 임금께 충성하는 일도 기독교에서 배웠습니다. 서로 단결하여 독립하여야 한다는 마음도 기독교에 기인하고, 학문을 갈고 닦는 교육도 기독교에서 배웠습니다. 우리 동포들은 힘써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1903년 강화진위대장이었으나,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군직을 사임하고 국권수호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던 이동휘의 연설 일부다. 구한국 군대의 참령이기도 했던 그는 이미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1909년 봄 고향인 함경북도 지역,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그리어슨선교사를 찾아가 그의 조사가 되겠노라 자청하였다. 그리어슨은 기꺼이 받아주었다. 그의 민족주의자 성향을 잘 알면서도, 함경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도록 배려했다.
이동휘는 1910년 8월 성진에서 '한일합방' 반대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고, 1911년 3월에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결국 국외로 망명! 이 모든 일에서 그리어슨 선교사는 그의 든든한 울타리였다.
[조선독립포고문]을 발표하고 이어 만세시위를 감행하며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조선동포들들을 후원하는 선교사의 모습을 우리는 그로부터 본다.
5] 3.1 독립 운동의 한 복판에 살다.
캐나다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던 함경도의 경우, 3.1운동은 성진에서부터 일어났다. 성진에서 활동하던 그리어슨 선교사에게 있어 일제는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여 일어난 불의한 나라였다. 기독교인이 일제의 부당한 탄압과 지배에 저항하는 것은 정의요 애국이었다. 그는 3.1 독립 만세 운동 역시 의거로 생각했다. 3.1운동을 피지배국 입장에서 이해했고 후원했다. 성진에서 시위 도중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 부상을 당했다. 그리어슨 선교사는 이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섬기던 교회와 제동 병원, 그의 집을 도움이 되는 일에 오픈했다. 그는 성진 교회 교인들이 만세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으면 숨겨 주었다. 시위 중 부상당한 사람들은 보호하고 치료하였다. 시위대들의 모의가 치외법권을 갖고 있던 그의 일터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발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옥에 들어간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교회 종을 평소보다 오래도록 울렸다. 옥중의 성도들은 그 종소리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그리어슨 선교사는 일본 당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그가 7인의 선교사 출신 독립 유공자 중 첫손가락에 꼽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 이른 바 3.13 만세 시위가 크게 일어났다. 17명이 사망했다. 스텐리 H. 마틴 선교사는 킹스턴에 있는 퀸즈대 의대를 졸업하고 1915년 만주 용정 제창병원에서 의료선교 사역 중이었다. 그는 독립 운동에 적극 협력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응급환자를 그가 사역하던 제창병원에 입원시켰다. 만세 시위를 하다 상하고 찢긴 부상자들을 적극 치료했다. 마틴 선교사는 나라 잃은 백성들의 피난처 되는 걸 회피하지 않았다.(아래 사진 참조)
1920년 10월, 일제가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민간인까지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는 다시 일어났다. 여기저기 부상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치료했다. 그리고 그 참상을 사진에 담았다. 그와 연락되는 서방 세계에 참상을 알렸다. 독립운동에 많은 협조를 했던 마틴 선교사를 상해 임시 정부는 초청하여 독립유공자로 표창했다. 그는 제창병원, 세브란스 병원 등에서 의료선교를 감당하며 결핵퇴치 운동에도 앞장 선 선교사였지만, 일제가 그를 강제로 추방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분명한 독립의지를 실천한 선교사였다.
3.1 독립 운동의 제34인이라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스코필드 선교사는 캐나다 선교사들의 애국 운동을 대표하는 분이다. 원래 그는 토론토대 수의과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소지한 세균학 병리학 교수였다. 잘나가던 그가 세브란스 의학교 교장 에비슨 선교사의 강권에 따라 의료선교사로 한국을 찾은 것은 1916년이었다. 그는 세브란스 의학교 미생물학 교수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선교 사역과 학문 전수 이상으로, 무르익어가던 독립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는 선교사나 의사, 교수와 다른 특별한 사명이었다. 그에게 있어, 부당하고 불의한 강도에게 주권을 강탈당한 나라가 독립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3.1운동이 일어나고, 탑골 공원에서 33인의 민족 대표들이 독립을 선포하고, 국민들이 궐기했을 때, 일제의 잔인한 학살 상황을 사진에 담고 글로 적어서 해외에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누구보다 충실한 공보관이었다. 그 대표적 사건이 제암리 학살사건 보도였다.(아래, 폐허가 된 제암리 교회 사진) 일제가 항거하는 기독교인들을 제암리 교회에 강권적으로 모이게 하고 교회에 불을 질렀다. 마을을 불사르고 백성을 학살하였다. 그는 달려갔다. 눈을 뜨고 차마 볼 수 없는 잔혹상을 보았다. 그는 눈물로 그 광경들을 필름에 담았다. 그리고 글로 그 상황을 적어 함께 해외에 알렸다. 일제의 만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제암리 잔혹상을 세계에 알린 자임을 빌미로 1920년 7월, 강제 출국을 당했다. 그가 3.1운동에 관여한 사실 또한 숨길 수 없었다. 그는 추방당하는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3.1운동 관련 사진들을 붕대 감은 다리에 숨겨서 출국했다.
대한 민국 국가보훈처는 다음 네 사람 독립유공자 선교사들
Robert Grierson(具禮善, 캐나다장로회, 1968년 독립장)
Stanley Martin(閔山海, 캐나다장로회, 1968년 독립장),
A. H. Barker(朴傑, 캐나다장로회, 1968년 독립장),
F. W. Schofield(石虎弼, 캐나다장로회, 1968년 독립장)을 세 분의 미국 선교사님과 함께 7인의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고, 그들에게는 1968년 독립장을 수여했다. 독립유공자공훈록편찬위원회는 1992년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에 그 자랑스런 이름을 실었다. 그러나 어디 이 선교사님들 뿐이랴.
4. 마무리하는 말
1888년 게일 선교사를 필두로 시작된 내한 캐나다 선교사들의 한국 사역은 1893년에 입국한 메켄지 선교사의 순교를 통해 강렬하게 점화되었다. 그 순교적 신앙에 감동한 친구 선교사들이 바통을 이어받고, 교단선교회 파송을 배경으로 함경도와 간도·연해주 지역을 누볐다.
그들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인을 생각했고 도왔다. 그들의 한민족 친화적 성향 때문에 한국을 침략 지배하는 일제 당국과는 관계가 매끄러울 수 없었다.
그들은 “오 주여, 내게 스코틀랜드를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제 목숨을!”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던 존 녹스를 생각나게 한다. 그 후예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캐나다 동부 지역까지 와 정착했던 스코들랜드 출신들이다.
1875년, 캐나다장로교회가 출범할 때만 해도 그런 뜨끈뜨끈한 조상의 신앙이 핏속에 흐르고 있었다. 그 양질의 신앙을 이어받아 성장한 젊은이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빚진 자의 심장으로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왔다. d;들 안에는 한 알의 밀알 되기 원하는 메켄지 선교사의 심장이 공유되고 있었다.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함흥제해병원 2대 원장(1923년)으로 한국을 찾은 Florence.J. MURRAY 선교사(위 사진 중앙에 흰 모자 쓰신 분)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한국과 결혼하였기에 누구와도 결혼할 수 없었던, 40년간의 고독한 선교 사역! 1941년, 일제에 쫓겨났지만 해방과 함께 다시 찾아 돌아온 한국, 세브란스 병원에서, 이대병원에서 얼짱인 그 미모가 꼬부랑 할머니 되기까지, 함흥에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는 한을 품고 다 닳아져 세상을 떠난, 그녀와 같은 내한 캐나다 선교사님들.
킹스 칼리지의 부로우어 교수의 말씀을 일부 옮겨본다.
캐나다 해안 주들의 해외선교회로부터 파송 받은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이미 맥켄지 선교사의 노고와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개신교 선교사들의 초기 사역에 관해 익숙히 알고 있었다. ....언어불통의 어려움과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국인을 사랑할 수 있었고 그들과 동화될 수 있었다. 한국에 나와 있든지 한국을 떠나든지 간에 한국에 뼈를 묻기 원하는 선교사들이기도 했다.
글을 마치며, 이 놀라운 내한 캐나다 선교사님들의 하나님 사랑과 한국 사랑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또, 우리는 이런 선교사님들의 발자취를 찾아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하여 주옥같은 저술을 남긴 유영식 교수님이나 이 보배(선교사님들과 업적)를 후세에 알리기 위해 내한 캐나다 선교사들의 생애를 정리하여 선교전시관 Vision Fellowship을 세우고, 지난 120여년 간 한국에 가서 헌신한 선교사님들을 세상에 알리고 있는 최선수 박사님과 그 사역팀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이 글로 인하여 내한 캐나다 선교사님들에 관심을 갖게 된 분들에겐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으면’(1985,Elizabeth A. McCully) ‘조선회상’(셔우드 홀) ‘내가 사랑한 조선’(플로렌스 J. 머레이) 등의 감동 깊은 책들이 있다. 그리고 토론토에 내한 캐나다 선교사님들에 관한 좋은 자료를 다수 전시하고 있는 선교전시관 Vision Fellowship(2-26th St. Toronto) 을 방문할 수 있다. 이글에 소개된 몇 사진들도 선교전시관이 제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