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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사 일요법회 불교는 삐에로 입니다. 결국 광대의 웃음짓 입니다. 그기에 있는 幸. 不幸은 우리의 몫 입니다. 법회. 불교미술 해석, 송년회 법사. 동우스님 법회일. 2017년 12월 24일(일) 오전 10:00 장소. 서봉사 공양간 참석자. 연화장, 본자연, 보현수, 유연행, 이경희, 단나, 심미정, 묘관음, 묘해 법륜화 & 혜명 (11명)
석굴사(石佛寺)의 석굴(石窟) [상] 。 석불사(석불사)의 석굴(석굴), 언제부턴가 우리가 석굴암이라고 잘못 부르고 있는 듯 하다. 석불사의 석굴, 그것은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됨을 이루는 지고(至高)의 최미(最美)이다. 。 석굴에는 불(佛), 보살(菩薩), 천(天), 나한(羅漢)이 모두 마흔 분 모셔져 있다. 거기에는 절대자를 중심으로 한 천상의 질서가 정연하게 펼쳐져 있다. 팔만대장경으로 설명한 장엄하고 오묘한 불법이 이 하나의 석굴안에 요약되어 있다. 。 석굴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기술로 축조되었다. 석굴의 구조는 그 평면과 입면이 과학적이고도 철학적인 수리(數理)체계를 이루어 부분과 부분의 조화, 전체에 의한 부분의 통합이 빈틈없이 이루어져있다. [돌을 자르고 깍아 세우면서도 10m를 재었을 때 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1만분의 1의 실수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 고은 선생 " 모든 이 나라의 찬미(讚美)형용사는 그곳에 모여들었다가 하나씩 하나씩 다른 것을 찬미하기 위하여 나갔으니 석굴은 하나의 형용사로서 도저히 찬미할 수 없다. "고 고백하였다. 。 석굴사 석굴의 유래 석굴사는 암자가 아니라 석굴사원이다. 석굴은 인도에서 기원전부터 시작되었다. 챠이티아(chaitya, 塔院) 라고 하여 암석을 파고 굴을 만들어 그안에 도량을 세우는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산은 노년기 지형으로 단단한 화강암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인도나 중국에서 처럼 쉽게 굴착될 수 있는 사암(沙巖)이 없다. 그래서 석불사의 석굴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인공석굴을 조형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주실의 천장이 궁륭을 이루는 돔(dome)으로 설계된 것이다. 이는 조금의 역학관계가 어긋나도 안쪽으로 쏟아져내리고 마는 것이다. 천장을 돔으로 만들기 위해 김대성은 여기에서 '팔뚝돌'이라는 버팀돌의 힘을 창안하였다. 석굴암 천장은 반구형으로 올라가는 것이 모두 5단으로 되어 있다. 석굴 안으로 들어가 천장을 올려다 보면 아래쪽에 제1단과 제2단은 평판석 12개, 13개를 호형으로 다듬어 이어나갔는데 천장덮개돌을 향한 제3, 제4, 제5 단은 모두 10개의 평판석과 그 사이마다 끼워 있는 돌출된 삐침돌을 볼 수 있다. 이 삐침돌을 보통은 '동틀돌' 또는 '리벳(rivet, 대갈못)형상'이라고들 부르고 있으나 남천우 교수는 아주 적절하게도 '팔뚝돌'이라고 표현하였다. 。 그 길이는 대략 2m이다. 이는 바깥쪽에서 비녀를 꽂듯이 수평으로 끼워 아래쪽 평판석을 눌러줌으로써 낱장의 천장석들은 역학적 균형 속에 안정을 취할 수 있다. 천장덮개돌들이 세 동강 난 사연 석굴사의 석굴은 마지막 마무리 단계에서 천장덮개돌이 세동강 나고 마는 사건과 함께 그 미완성의 전설을 지니고 있다.
。 천장덮개돌의 안치는 곧 석굴의 마지막 마무리를 의미한다. 덮개돌을 눌러 줌으로써 천장의 낱낱돌이 힘의 평형을 이룬다. 천장 덮개돌은 지름 2.5m, 높이 1m되는 홈통을 끼우는 꼴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완벽할 지 모르나 。 김대성은 이 모양을 아름다운 연꽃이 두 겹으로 피어나는 모습으로 디자인하였다. 그래서 석굴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면 구멍을 막은 것이 아니라 피어나는 연꽃이 본존불의 머리 위에서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분위기를 연출. 측량기사 요네다는 이것을 태양으로, 고유섭 선생은 광배의 이동으로 보았다. 。 김대성이 설게한 천장덮개돌은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진 손잡이 없는 찻잔을 거꾸로 엎어놓은 형상으로 연화문 지름이 2.5m, 높이 1m, 바깥쪽 지름이 3m되는 크기로 무게가 20톤이다. 이것을 떨어뜨려 세 동강 내고 만 것이다. 석굴사 석굴의 세 동강 난 천장덮개돌은 석굴의 난공사를 더욱 실감케 해주는 아름다운 상처인 것이다. 。 석굴사의 석굴의 재 발견 1907년 도굴꾼들은 석굴내 안치된 불상 중 두 개 아마도 10개의 감실상 중가장 아름다운 것 둘을 훔쳐갔다. 모두 40개의 불.보살.수호신상으로 구성되었던 석굴과 조상은 두개를 잃어버린 채 38개만 남아 있게 되었다. 이때 불국사에서는 다보탑에 있는 네 마리의 돌사자 중 3개를 잃어버리게 된다. 。 1909년, 엄청난 문화재 약탈자인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는 그의 관심사인 불교미술품과 고문서를 1년도 못되어 무더기로 갈취하여 황실에 헌납한다. 그것이 한일협정 때 반환문화재로 돌아오기 전까지 일본에서 '소네 아라스께 헌상본(獻上本)'이라는 이름으로 보관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가 석굴사의 석굴을 다녀간 이후 석굴 11면관음보살 앞에 놓여 있던 아름다운 대리석 5층소탑이 증발되었다. 。 소네 통감의 도둑질과 감실불상의 실종에 대해 두 사람 일본인의 증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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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소네 통감의 도둑질은 다름아닌 일본인의 증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일본인의 증언에서 "애석하기 짝이 없다." , "죽을 때까지의 소망"이라는 구절을 깊이 음미해 본다. ' 이는 조선에 대한 동정적 시각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그것은 단지 일본 관료정신의 발현이었던 것이다. 식민지의 재산관리를 맡고 있던 실무자들이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인 것이다. 테라우찌 총독의 보수공사 。 1910년 한일합방과 동시에 첫 총독으로 부임한 테라우찌는 토지조사와 함께 문화제관리 조사에 들어간다. 조선고적 조사사업도 해마다 보고서 발간과 연차사업으로 「조선고적도보」를 간행. 즉 식민지 재산이 일본정부의 재산을 의미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 총독부에 석굴에 관한 현장조사로 제출된 복명서復命書에는
이 복명서에 따라 석굴암의 해체작업이 시작되었다. 해체되는 석굴 이로 인해 석굴사의 석굴은 창건 이래 처음으로 완전 해체되는 비극적인 대수술을 받게 된다. 1913년 10월, 석굴 해체공사를 위하여 천장덮개돌의 위치를 고정시키는 목제 가구를 설치하는 작업부터 시작하였다. 。 해체작업 중 석굴 뒤쪽 암반에서 두 개의 샘물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들 샘물이 석굴 밑의 암반을 관통하여 지금 석굴암 공터에 있는 감로수로 흘러내리는 오묘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연관으로 배수로를 만들어 밖으로 빼어내었다. 그 오묘한 뜻이란 훗날 이태녕 박사가 밝혀내게 된다. 。 3차년도, 1915년 석굴재조립 공사 시작. 본래 석굴의 외벽은 '지름 5자의 옥석(玉石) 또는 절석(切石)으로써 이중으로 쌓아올려" 내벽을 두껍게 포장하여 석굴 내부의 공기가 숨을 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 기술, 아니 이 시대의 기술로는 그렇게 재조립할 능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외벽에 3자 정도의 삭재를 쌓아 버팀판을 만들고는 두께 2m의 콘크리트 외벽으로 싸발라버렸던 것이다. 석조물의 보수공사에서 시멘트를 사용한 것은 석굴 보존에 치명상을 주게된다. 왜냐하면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CO2)와 칼슘(Ca)의 해독이 있기 때문이다. 。 특히 석굴에서의 치명적인 손상은 석굴 내부가 콘크리트 벽으로 인하여 숨을 쉬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 1915년 9월 13일에 3년간의 공사를 마치고 성대한 준공식이 거행된다. 이때 총공사비는 2만 2726원 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장문의 「석굴사의 조각에 관하여」라는 글을 통해 통탄의 비판을 가하였다.
끊임없이 생기는 습기와 이끼 。 미관보다도 더 큰 문제는 석굴에 극심한 누수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3차례의 보수공사에도 불구하고 석굴의 습기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석굴에는 푸른이끼가 끼며 육안으로도 그 손상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 조선총독부는 1927년 증기사용에 의한 세척법을 강구하게 되었고 이를 위한 보일러를 제작 설치케 하였다. 이끼가 끼는 원인을 조사하여 그것을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작동에 의하여 처리하는 강제방법을 동원한 것이었다. 수증기 분무에 의한 세척작업은 석굴의 돌들이 풍화작용을 일으키는 데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일이었다. 。 1945년, 8.15해방을 맞으면서 석불사 석굴의 제문제는 우리에게 넘어오게 되었다. 일제 36년을 통하여 일제가 석굴에 남겨준 유산이란 두께 2m의 콘크리트 벽과 끊임없이 생기는 습기외 푸른 이끼, 그리고 가공할 흉기, 증기세척 보일러 뿐이었다. 그것은 석불사 석굴이 겪은 오욕의 역사에 첨부된 증거물이었다.
*** 법회 및 뒤풀이 풍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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