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사건의 생존자가 될 수 있게 친구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한국판 아우슈비츠’, 신체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까지 파괴한 국가
비상상고가 기각된 뒤 그 후, 피해자의 외침
“이번 형제복지원 사건은 비상상고의 사유로 정한 ‘그 사건의 법령을 위반한 때’에 해당하지 않는다” 부량자 수용을 명분으로 감금, 강제노역, 암매장등을 자행한 고(故) 박인근 전 형제복지원 원장의 무죄 판결을 취소해 달라며 검찰이 제기한 비상상고가 기각됐다. 지난 11일 재판부는 “이번 사건의 핵심은 신체의 자유 침해가 아닌 헌법의 최고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됐다는 점”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권유린이 자행된 사건에 대해 ‘상급심의 파기 판결로 효력을 상실한 재판은 비상상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로 비상상고를 기각한 것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2년간 무연고자들은 물론 장애인, 고아, 가족이 있는 일반 시민, 어린 아이들까지 잡아 강제 감금했다. 사실상 국가에 의한 반사회적 범죄행위가 ‘사회정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것이다.
사건의 피해생존자이자 피해자 모임의 대표를 맡아 온 ‘한종선 대표님’을 만나 봤다.
Q.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A. 피해생존자 (실종자, 유가족) 모임의 대표 한종선입니다. 1984년 9세의 나이로 누나와 함께 1987년 형제복지원 폐쇄 때까지 있다가 2007년 아버지와 누나를 정신병원에서 찾았습니다. 그 이후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2012년부터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며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을 쓰고, 대표까지 맡게 됐습니다.
Q. 비상상고가 기각되면서 국가 차원의 과거사 정리를 기대할 수밖에 없어진 상황입니다. 대법원은 이 사건이 헌법의 최고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했다고 규정하면서도 ‘법리성 불가피성’을 내세워 비상상고를 기각했습니다. 이 판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1989년의 형제복지원 사건 수사가 외압에 의해 축소 은폐된 사건이었고, 부랑인의 단속 방법이 형제복지원 박원장이 행한 특수감금 불법행위에 합당하다는 게 대법원이 당시 판결이었습니다. 이 판결은 ‘부랑인은 그렇게 해도 된다’는 기본 인권조차 무시한 판결입니다. 애초에 피해자들이 가족이 있고, 집이 있는지의 사실관계 또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축소, 은폐가 목적이었고 지금 2021년의 대법원에서조차 기존의 내용만으로 판결했기에 기각이라는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대검찰청 과거사위원회 조사관들이 짧은 시간 안에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신 그분들의 노고에 감사할 뿐입니다. 처음부터 진실을 밝히고 억울함을 풀기 위해 목소리를 내왔기 때문에 저희는 비상상고 결과에 좌고우면 하지 않고 지금처럼 전진해 나갈 것입니다. 약자 편에 서지 않은 평등성을 위반한 대법원의 과오 또한 낱낱이 기록해 나갈 것이고 피해자면서 시대의 증언자로, 짐승처럼 살아온 피해자들이 다시 온전한 사람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틸 것입니다.
Q.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싸우는 단체는 몇 군데 정도 있고, 활동 현황은 어떻게 되나요?
A. 2012년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생존자(실종자, 유가족) 모임이 지금까지 활동 중에 있습니다. 과거사법 통과 이후로 일부의 사람들이 경기협의회를 만들어 나간 상태이기에 현재 2개의 단체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장애와 인권 발바닥’,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로 주축이 돼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또한 존재하고, ‘진실의 힘’ 등 대책위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응원을 보내시는 많은 시민 단체와 일반 시민분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Q. 모임을 결성하신 후, 어떤 심정과 다짐으로 운동을 지속하셨나요?
A. 과거사위원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국회 앞에서 목례를 하며 1인 시위로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렸습니다. 그저 억울했고, 살고 싶었기에 법이 없다면 법을 만들어서라도 억울함을 풀 수 있게 해달라고 외쳤습니다. 한 가정이 파탄나고 평생을 정신병원에 갇혀 살아가는 인생이었습니다. 누가 우리 가족을 이렇게 만들었고, 사회로부터 격리 시켰는지 알리고 싶었습니다. 너무 많이 늦었지만 아버지와 누나와 함께 가정 속에서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이 평소에 느끼는 평범한 모든 것을 겪어가면 살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게 저를 포기하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Q. 배·보상 관련해 ‘공신력 있는 방법’으로 추진 중에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고 있나요?
A. 현재 과거사위원회에서 조사관을 채용하고 있는 중이고 앞으로 피해 당사자들의 억울함을 입증하고 명예를 찾을 수 있도록 조사관들이 철저하게 피해 사실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조사가 끝난 후에 피해 사실에 관한 인정서를 받은 후 전문적은 변호사님들과 상의를 통해 풀어가기 위한 방법을 논의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배·보상이라는 것은 피해 사실에 모두가 공감하고 가해의 책임, 방관의 책임, 억울함이 드러났을 때 진심 어린 사과와 합당한 배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배·보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Q. ‘형제복지원’은 군사정부 시절에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민주화 과정을 거쳐온 우리 사회가 이제 이런 문제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아직도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로 이런 부류의 문제들이 남아있다고 생각하시나요?
A. 수많은 민주화 운동들이 존재했을 때 그들이 목숨 걸고 지키고자 했던 진정한 민주화는 인간의 존엄성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학살에 가까운 인권침해를 경험했음에도 ‘도가니 사건’, ‘대구희망원 사건’ 등 힘없는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시민들이 감금 학대 당해 사망한 일들이 꾸준히 발생했고, 발생하고 있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분들의 넋을 위해서라도 안주하지 말고 계속 이 문제들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작년 8월 ‘박종철인권상’을 수상하신 걸로 아는데 다른 국가폭력 사건들을 발굴하고 연대하시면서 혹시 ‘형제복지원 사건’과 유사한 사건과 판결이 있었나요?
집단적인 사건으로 판결이 있었다면 세월호에 탑승해 사망한 사람들의 집단소송과 국가책임을 묻는 재판 과정과 진상 조사단들이 유사한 것 같습니다. 한 장소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은 이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싸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가 비슷한 사건이라고 이야기 하는 부분은 세월호 유가족들이 만약 진상조사가 되지 않는다면,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해자들처럼 앞으로 30년이 될지도 모를 긴 시간을 저희처럼 아파하며 괴롭게 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그들의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길 바라고 괴로워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Q. 현재 심정과 앞으로 바라는 점은 어떤 게 있으신가요?
A. 피해자라는 불쌍한 존재로만 남아 있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많은 분들과 손을 잡음으로써 피해자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와 생존자로서 살아갈 수 있음에 힘이 납니다. 생존자라 하니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아서 생존자냐고 묻거나 답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생존자의 의미는 우리가 형제복지원에서 짐승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다가 다시 사람다운 삶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로 생존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모든 피해자들이 생존자가 될 수 있게 저희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소외 받고 눈치와 고집만으로 살아온 우리들이 온 자신의 삶을 갉아 먹지 않도록 억울함을 꼭 풀 수 있도록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함께해 주신 모든분들에게 고마움과 감사함을 보여 드릴 수 있는 방법은 제가 건강하게 살아남아 또다른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해 주는 삶을 사는 것이 그분들에게 드릴 수 있는 감사 표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의 아픔과 상처가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것처럼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의 노고와 가치는 저에게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꼭 생존해서 보답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예솔 대학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