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봉시인들(http://cafe.daum.net/chenbong/D7OA/15?q=%ED%9D%A5%ED%95%B4%20%EB%B0%B0%EC%94%A8)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배천희- 진각국사 2 ♣
“… 임금께서 진각국사라 시호를 내린 후 탑을 대각원조라 이름하시고 신(목은 이색)에게 비명을 쓰라 하명하시니 … (중략) … 대사께서는 두루두루 냇물처럼, 흘러 다녔고밝고 빛나기는 저 해와 같도다. 임금께서 대사를 숭배하여 국사로 삼으셨다.............”
윗 글은 고려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이 당시 고승(高僧)이었던 배천희 진각국사가 돌아가신 후 왕명 에 의해 비문을 짓고, 혜잠(惠岑)의 글씨로 새겨진 비문의 일부분이다. 고려 우왕 12년 (1386년)에 씌어 진 이 비문은 현재 보물 제 14호로 지정되어 있어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 (광교산 창성사지에 있던 것을 수원 성곽 안 화홍문 곁으로 옮김)
호(號)가 설산(雪山)인 배천희국사(1307~1382 , 고려 충렬왕 33년~ 우왕 8년) 는 포항시 북 구 흥해읍에서 태어난 고려 말의 유명한 대덕 고승이었다. 13세에 화엄종(華嚴宗)인 반룡사(般龍寺)의 일 비(一非)대사에게 머리를 깎고 19세에 승과에 합격한 후 금생사, 덕천사, 부인사, 개태사, 낙산사 등 10 여 사찰의 주지를 지내다 76세(법랍 63세)로 입적했다. 이같이 국사는 고려 말 승려로서는 최고 자리인 국사(國師)가 되어 임금과 백성이 우러러 볼 정도의 고승이었다.
하지만 배천희 국사가 태어난 곳이 흥해현이라, 이곳을 흥해군으로 승격 시켜 준 것과 흥해 에 국사의 무덤, 유허비, 사당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국사의 유허비와 사당, 무덤 등이 아무런 보호 대책 없이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사배선생유허비(國師裵先生遺虛碑)는 흥해읍 학천리 포항공원 묘원에서 좁은 비포장 길을 따라 서쪽으로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1m정도의 비석의 비문은 “國師裵先生遺虛碑”라 음각 되어있다. 비석 옆에 새겨진 작은 글씨는 세운 연도와 새긴 이의 이름을 나타내는 듯했으나 마모되어 또렷 하지 않다. 비석과 글씨의 마모 상태로 보아 국사가 입적한 후 이곳 고향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 하여 세운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유허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은 낡아 허물어질 정도이고,문에는 자물쇠도 없이 방치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곳에는 밤이면 특정 종교인들이 와서 기(氣)를 받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녀 간 다고 하며, 그 흔적들을 볼 수 있다. 배천희 국사 사당(裵千熙 國師 祠堂)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4km정도 떨어진 천곡사 바로 옆에 있다.
절에서 북동쪽으로 200여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사당 역시 본체와 담장 모두 낡아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처럼보인다. 위패는 “국사공배선생(國師公裵先生)”으로 되어 있으며, 현판 역시 려조(麗朝)라고 하여야 될 것을 라조(羅朝)라고 표기되어 있다. (려조는 고려를 나타내고, 라조는 신라를 나타내고 있다). 사당은 아주 초라하며, 고려 국사의 사당이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설 및 관리가 부실하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5일 후손들에 의한 향사가 치러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살아있는 닭을 제물로 사용하고 있다. 배천희국사의 묘소는 사당에서 북쪽으로 승용차로 20여분 거리인 흥해읍 양백리 마을 뒷산인 백산에 있다. 이곳에서는 배천희 국사보다는 배장군으로, 무덤은 배장군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인들의 무덤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무덤 둘레에 자연석을 쌓아 무덤의 경계를 표시하였고, 더욱 특징적인 것은 무덤 앞에 망주석으로 당간지주 형태의 석물이 양쪽에 우뚝 서 있어 이 곳에 묻힌 사람이 불교와 관계 있는 분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무덤에는 망주석을 세우지만 당간지주를 세운 무덤은 국내에서는 볼 수 없다. 후손(국사의 유일한 형인 ‘배전’의 후손들로 흥해 배씨)들은 해마다 음력 10월 7일 이 곳에서 묘사를 지내고 있다. 무덤 건너편에 배국사가 타고 다니던 말을 묻었다는 말무덤이 있다. 스님은 원래 화장을 하여 부도에 모시는 것이 보통이나 배천희 국사는 무덤이 남아 있으며, 영일읍지(迎日邑誌)에 “ 國師裵千熙墓 ”곡강면 양백동에 있다. 고려시대 국사로 공민왕 때 흥해를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라 는 기록이 있고, 조선환여승람(朝鮮?輿勝覽)에는 명묘(名墓)조에 “배천희(裵千熙)” “곡강인(曲江人)이고 고려 국사이다. 묘는 곡강면 양백동(曲江面兩白洞)에 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 지역에 전해 오는 배천희 국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보면 유허 비각이 있는 곳에서 말을 타고서는 활을 쏘아 놓고 말을 달려 현재 무덤이 있는 곳에 도착하여 화살을 찾으니, 화살이 보이지 않아 화살 보다 늦은 말이라 하여 말의 목을 칼로 치고 나서 보니, 화살이 말 엉덩이에 꽂혀 있었다고 한다. 그 만큼 배국사는 말을 평상시에도 많이 탔고 잘 탔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 배장군이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라고 생각 된다. 배국사 유허비 있는 곳은 아주 깊은 산중이었는데 이곳에 배 국사께서 키웠던 닭이나 짐승들은 야생 동물들이
해치지 않았다고 하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들이 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
그래서 사당이 유허비각이 있는 곳에 같이 있을 때는 향사를 지내러 가서는 그곳에 방사되어 있는 닭을 잡아 생닭을 그대로 제물로 사용 하였다고 후손들은 전하고 있다
또 한번은, 엿장수가 고개를 넘어 포항에 엿을 팔러 가다가 고개 마루에서 호랑이를 만났는데 호랑이가 이 사람을 해치려고 하자 국사께서 보시고는“ 어찌 짐승이 사람을 해칠려고 하느냐 너는 저 염전에 가서 빠져 죽어라“ 라고 하였다 전한다. 그 날 그곳에서 자고 다음날 포항 쪽으로 엿을 팔러 나루 끝에 갔더니 정말 호랑이가 염전에 빠져 죽어 있었다는 이야기 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다
우리 지역에 이렇게 크신 스님이 출생하셨고 그 분의 출생지인 흥해가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이 될 정도로 존경을 받았던 분의 흔적인 사당이나 유허비, 묘소가 제대로 보존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이 지역민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첫댓글 후손(국사의 유일한 형인 ‘배전’의 후손들로 흥해 배씨)들은 해마다 음력 10월 7일 이 곳에서 묘사를 지내고 있다. 무덤 건너편에 배국사가 타고 다니던 말을 묻었다는 말무덤이 있다. 스님은 원래 화장을 하여 부도에 모시는 것이 보통이나 배천희 국사는 무덤이 남아 있으며, 영일읍지(迎日邑誌)에 “ 國師裵千熙墓 ”곡강면 양백동에 있다. 고려시대 국사로 공민왕 때 흥해를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라 는 기록이 있고, 조선환여승람(朝鮮?輿勝覽)에는 명묘(名墓)조에 “배천희(裵千熙)” “곡강인(曲江人)이고 고려 국사이다. 묘는 곡강면 양백동(曲江面兩白洞)에 있다.” 라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