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우도에서 의병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던 까닭은 학봉이 초유사로서 의병 창의를 권유하고 지원하며 수령과 관군의 방해를 막아주는 방패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왜적의 침략과 더불어 수령 대부분이 도망하는 상황 속에서도 학봉의 적극적인 지원과 후원을 받은 경상도 의병은 결국 적의 보급로와 호남 진출을 차단함으로써 임란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학봉 김성일과 임진왜란, 정진영, 1992, 『안동』 23, 문화모임 사랑방)
김성일은 왜적의 침략과 더불어 경상도 초유사로 급파된다. 말하자면 경상도에서 왜적을 방어하는 총책임을 맡은 셈이다. 그는 임지에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뜻있는 선비와 백성들을 창의의 대열에 나설 수 있게 격려하고 지원했다. 경상도에서의 임란 의병은 여기서 시작된다.(중략)
임진왜란이라는 역사 무대 위의 주연과 조연은 분명 의병과 관군들이었지만, 이들은 상호 협력하기보다는 대립하고 있었다. 이들을 국난 극복의 주역으로 이끈 이가 바로 김성일이었다. 그는 의병진에 군량과 무기를 지원함은 물론 지방 수령들의 방해를 막아주고, 나아가서는 갈등과 대립을 상호 협력하는 관계로 이끌어 나갔다. 이로써 관군을 조연의 자리에만 머물게 하지도 않았고, 의병 활동을 개별 분산적인 것으로 방치해두지도 않았다.
김성일은 지리산에 도망해 있던 판관 김시민에게 진주성의 전략적인 중요성을 깨우쳐주며 죽음으로써 지킬 것을 명했고,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의 의병부대를 의령, 합천, 거창 등지에 포진시키고, 이정에게는 적진 쪽으로 나아가 함안에 전초기지를 구축하게 했다. 이러한 그의 조치로 경상도의 의병과 관군은 진주성에서의 1차 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낙동과 그 서쪽을 굳게 지킬 수 있었다. 이것은 왜적의 보급로 차단과 호남 진출을 좌절시킴은 물론 동시에 이순신의 해상 활동을 측면에서 지원한 것이기도 했다.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 p199~201, 김성일 편, 정진영 글, 푸른역사
김성일은 일본의 정세를 감지하기 위한 특별 임무를 부여받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직접 만난 인물이다. 귀국 후에 그는 임금 앞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을 일으킬 위인이 못 된다고 보고함으로써 조선이 일본의 침략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그렇게 잘못된 보고를 올린 이유에 대해, 후에 김성일은 전쟁의 조짐이 있다고 보고하면 나라와 인심이 혼란에 빠질 것을 우려해 그렇게 보고했다고 술회했다. 이는 자기 스스로 그것이 허위보고였음을 시인한 셈이다.
그런 엄청난 허위보고를 한 김성일을 퇴계학파의 거두로 평가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를 훌륭한 선비로 평가하는 것은 어떤가? 김성일이 제시한 이유가 정말 타당하다면, 불과 1~2년 후에 발생할 전쟁으로 인해 야기될 더 심한 사회 혼란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자기 변명을 그대로 받아주고, 그의 학통만을 강조한 당대의 평가와 현재의 평가가 과연 올바른 역사 평가일까? 차라리 전쟁의 낌새를 눈치 채지 못했다고 고백했다면, 무능의 소치로 간주해 오히려 선처해 줄 여지가 있겠다. 그런데 저런 고의적인 거짓 보고를 관대하게 받아준다면, 그게 정말 관대한 것인가. 바보스러운 것인가? 왜란 발발과 동시에 당장 효수를 했어야 할 인물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p23~24, 계승범 지음, 역사의 아침
정치인은 외교문제와 같은 국가의 중대사를 개인적・파당적 이익에 근거하여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조선의 동인과 서인 두 정파는 서로를 견제하였는데, 동인의 김성일(金誠一, 1538~1593)과 서인의 황윤길(黃允吉, 1536~?)이 함께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러 갔다. 조정에서 결과를 보고할 때, 황윤길이 “필히 병화가 있을 것이니 내침에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김성일은 “그러한 저앙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라고 하였다. 선조가 “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하고 묻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력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았는데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은 정세를 잘못 복명한 죄로 파직되었으나 같은 당의 좌의정 류성룡(柳成龍, 1542-1607) 등의 변호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됭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뒤,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황윤길은 별다른 관직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시호(諡號)도 없고, 언제 사망하였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현재의 역사해석도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당리당략이나 개인적 사감에 따라 국사를 그르친 죄의 결과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당한 국가적 수모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인데도, 왜 그 책임을 제대로 따지지 못하고 있을까?
『선비문화 제27호』 p24-25, 손홍철(안양대 교양학부 교수), 남명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