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펌] https://blog.naver.com/heedaa77/222550683973
낯선여름 님의 정리해 주신 글인데 정말 열심히 사시는 분들이 세상에 많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고로운 정리를 꼼꼼히 해주신 낯선여름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강의 목차]
1강 세상은 나빠지는가? (세상은 진보하고 있다)
2강 우리를 유혹하는 나쁜 뉴스
3강 폭력에 끌리는 이유
세상은 정말 나빠져만 가는 것일까? 스티븐 핑커(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아니라고 말한다.
강의 주제는 '진보'에 대해서이다.
강의는 '진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 묻는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진보의 정의가 존재할까?라는 질문에 대해,
핑커 교수는 '아마 있을 것이다'라고 답하며, 진보를 '인류의 번성'으로 정의한다.
덧붙여, 웰빙의 지표들이 증가했다면 그것이 진보라고 추가 설명한다.
(웰빙의 지표 : 수명, 건강, 생계, 부, 평화, 여가, 행복, 안전, 자유, 지식 등)
1) 수명
인간의 기대 수명은 1770년대만 해도 전세계적으로 30대에 머물러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공중보건과 의학 발달, 농업 발달 등으로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72세가 넘는다. 선진국일수록 기대수명이 높지만, 아프리카도 많이 높아졌다.
2) 부
가난은 인류에게 늘 있어왔다. 오히려 부유한게 이상. 자연상태의 인간은 가난. 인류 역사에서 경제성장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세계 총생산 (gross world product : 전세계 모든 국가의 국민 총소득을 더한 지표)을 살펴보면 1500년 동안은 완벽한 일직선이었다가, 산업혁명 이후 세계 총생산량 급증. 200년 전에 비해 수백배 발전한 수치이다. 또한 그 결과, 극빈층의 비율도 전세계적으로 크게 줄었다. (90%에서 9%로)
200년 전만 해도 전 인류의 90%가 극빈층이었다면, 현재는 9%에 불과하며, UN은 2030년까지 전세계 극심한 빈곤을 완전히 없애겠다고 했다.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공식 발표할 수 있는 근거는 계속해서 부가 증가해왔기 때문이다.
3) 평화
사람들은 전쟁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인류사에서 전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
정점은 제 2차세계대전이었는데, 그 이후 전쟁으로 인한 전사자는 급격히 감소했다. 1940년대 후반, 10만명당 20명 --> 현재는 1명 미만이다. 이는 역사상 낮은 전사자 수치이다.
4) 자유, 인권
여전히 몇몇 국가의 상황을 볼 때, 민주주의는 위협받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터키, 러시아, 헝가리, 미국 등)
물론, 민주주의 발전정도는 국가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평균을 내보면, 지난 10년 대비 현재가 가장 높은 민주주의 수치를 기록중이다. 놀랍게도 1970년대 초반 민주주의 국가는 단 31개국에 불과.
(유럽의 절반이 공산주의. 대부분의 중남니 국가는 우익 군사정권 하에 있었고, 남한,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도 독재정권 하에 있었다)
* 이를 통해서, 진보란 실재하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기 바란다. 이것은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수치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여기서 다시 몇 가지 질문이 생긴다.
Q1. 무엇이 진보를 일으킬까?
스티븐 핑커 교수는 <Enlightment Now>라는 본인의 책에서 "이성, 과학, 휴머니즘"의 3가지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너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사실 당연한 건 아니다. 가치 판단의 기준을 종교에서 찾을 수도 있고, 국가 부흥을 위해 리더를 앞세우거나 개인의 충성을 요구하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권위적인 민족주의나 포퓰리즘이 대표적이다) 과거 회귀를 주장하는 반동적 이데올로기도 있고, 체제 전복을 주장하는 혁명적 이데올로기도 있다.
Q2.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진보를 부정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장 좋은 것은 세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위험과 고통, 불의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인식해야 한다. 원인을 찾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진보를 가로박는 위험 : 운명론, 급진주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믿음이 급진주의를 불러온다. 극단적 급진주의는 과거에 엄청난 폭력을 불러왔고, 지금도 그렇다
Q3. 진보는 당연한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진보란 모든 것이 항상 나아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진보가 아니라 기적이다. 그리고 진보는 기적이 아니다.
진보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식을 사용한다.
문제란 늘 발생하기 마련하기 마련이고, 문제를 푸는 해결책이 또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 그렇다면, 코로나 팬데믹을 살펴보자.
진보의 관점에서 감염병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인류 역사의 가장 큰 공포인 전염병은 오랜 역사 속에서 인류와 공존해왔다.
병원균과 기생충은 어디에게나 존재한다. 인규 역사에서 팬데믹은 주기적으로 존재해왔다.
로마제국에서 유스타니우스 역병으로 유럽인구의 40% 사망, 흑사병 유럽인구의 60% 사망,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배 시, 90%의 원주민이 전염병(천연두, 홍역)으로 사망
19세기 중국과 인도에서 페스트로 1,200만명 사망, 20세기에는 3억명이 천연두로 사망
스페인 독감으로 5천만명 사망, 에이즈로 3,200만명이 사망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는 350만명이었다.
끔찍한 비극이지만 했지만 인류사에서 드문 일은 아니었다.
진보를 잠깐 지연시켰을 뿐이다. (기대수명이 1920년대에 감소했을 때, 전쟁인 줄 알았으나 스페인 독감이었다)
이처럼, 감염병이 인간과 함께 한다면,
감염병의 창궐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았던 것일까?
1. 진화 덕분이다. (면역계가 있고, 인간은 유성생식 하기 때문에, 우리 자손은 우리와 유전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2. 혐오라는 감정도 우리를 보호한다. (벌레, 구더기, 오물 등 더러운 것을 본능적으로 피한다)
3. 이성, 과학, 휴머니즘에 기반한 현대적 방법으로 더욱 탄탄해졌다. (백신, 항생제, 위생관리 등)
그리고, 코로나 이전에도 인류의 진화와 기술의 진보는 감염병 사망자 수를 줄이는데 기여해 왔다.
선진국의 주요 사망원인은 따로 있었다.
감염병 < 암, 심장질환, 흡연, 비만, 치매 등이었다. 개발도상국은 여전히 감염병으로 사망하지만,
그곳에서 조차 5대 치명질환인 폐렴, 설사, 홍역,말라리아, 에이즈로 인한 치명률도 급격히 감소중이다.
또한 백신을 개발한 기간조차 4개월이라는 최단기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인류는 '이성'과 '과학'으로 코로나에 대응하고 있다.
[결론]
1. 진보는 실재하는 현상이다.
2. 장밋빛 미래만 보는 낙관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데이터는 인류가 진보해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물론, 아직도 문제가 많이 있다. 즉, 진보는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진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과거는 지금보다 더 끔찍했다.
프랭클린 피어스 "행복한 과거는 나쁜 기억력 때문이다"
3. 진보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류의 번성을 위해 지식을 활용해 온 결과이다.
우리가 이성, 과학, 휴머니즘에 전념한다면 진보는 계속될 것이다.
2강 우리를 유혹하는 나쁜 뉴스
사람들은 우리가 끔찍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세상을 오해하는 이유는 저널리즘의 왜곡이 한 몫 하고 있다.
세상은 절대로 완벽할 수 없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재난은 생기기 마련이고, 그것은 뉴스가 된다.
뉴스는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최악의 일들을 작위적으로 모아놓은 것이다.
사람들은 뉴스의 끔찍한 소식을 통해 세상이 더 나빠진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일어난 나쁜 사건일 뿐이다.
세상이 더 나아지는지 아닌지 알려면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야 한다.
뉴스는 최근의 사건만 주목한다. 따라서 시대의 전체 흐름을 놓칠 수도 있다.
또한, 뉴스는 일어난 일에만 주목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사건이 없다면 뉴스가 되지 못한다.
뉴스는 평화보다는 혼란스러운 사건에 주목하는데, 이를 '뉴스의 편항성'이라 한다.
이러한 편향성이 대중에게 세상에 대한 무분별한 비관론을 양산한다.
사회의 좋은 변화는 긴 시간이 걸리므로, 당장 부각되기 어렵다.
그런 뉴스의 헤드라인은 이런 모양일 것이다. ( '지난 30년 동안 매일 13만 7천명의 사람들이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났다' ) 긍정적인 뉴스는 헤드라인을 장악하기는 어렵다.
또한 언론인들은 네거티브 뉴스 보도에 강박을 갖는다. 그것이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기자는 책에서 긍정적인 뉴스는 광고나 홍보 정부의 선전이라고 쓰기도 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을 수도 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편향된 미디어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것은 개인의 성향이다. 개인의 주관이 진실을 가리면 안된다.
객관적인 데이터, 수치,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데이터로 바라본 세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
세상은 우리의 통념보다 훨씬 더 나아졌다.
잘못된 통념은 데이터가 아니라 뉴스만 보기 때문에 생긴다.
심리학에는 '부정성 편향'이라는 것이 있다.
* 부정성 편향? : 좋은 일보다 나쁜 일에 더 주목하고 휘둘리는 경향
칭찬에서 받는 기쁨보다 비판에서 받는 상처가 더 크다.
실제로 우리 언어에는 부정적 감정 표현하는 단어가 더 많다.
어떤 일이 반복되면 일이 잘못 될까봐 걱정한다.
어느 정도는 문제 인식에 필요할 수 있으나,
지나치게 부정적인 사고는 인간의 독창성과 행동성을 막을 수 있다.
* 가용성 편향 : 자신의 경험이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들에 근거해 판단하는 인지적 경향성
인지 심리학자인 아모스 트버스키와 대니얼 타너먼이 발견했다. (대니얼 카너먼은 노벨상 수상)
우리는 특정 사건의 가능성을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성이 있다.
빈도나 위험도 같은 객관적인 데이터가 아닌 주관적 견해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뉴스에서 보고 듣지 못한 것들은 과소 평가하고, 자극적인 뉴스들은 과대 평가하게 된다.
유혈 낭자한 뉴스들이 실제보다 더 많이 발생한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긍정적인 사람보다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사람을 더 똑똑하게 여기는데, 이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심리 때문이다.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을 무시하거나 부정하게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토대로 세상의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눈 앞에 벌어진 특수한 상황에 휘둘리면 안된다. 특수한 상황은 작위적인 표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최악만 생각하면 세상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과학, 민주주의, 국가기관, 자선단체가 모두 실패하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는 안된다.
우리 인류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해왔고 많은 부분 성공했다.
우리는 전보다 오래 살고, 가난과 질병, 전쟁, 문맹률 면에서도 더 나아졌다.
인간의 행동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
# 나쁜 뉴스에서 벗어나는 법.
언론인은 더 많은 데이터와 통계를 사용해야 한다.
깨어있는 대중만이 민주주의와 인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언론인은 정보를 제공할 때, 더 깊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언론인은 사람들이 통계를 싫어하고, 숫자보다는 그림, 이야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뉴스를 보는 대중은 더 많은 데이터를 제공받아야 한다.
뉴스에 필요한 것 : 전체 맥락을 볼 수 있는 데이터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5, 10, 50년간의 경향을 보여주는 그래프 등)
저널리즘의 왜곡에 빠지지 않으려면, 전반적인 동향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는 것과 기억하는 것에 쉽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물론, 데이터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데이터도 뉴스도 거짓을 말할 수 있다.
완전하지 않은 데이터는 오해를 야기하기도 한다.
데이터의 팩트체크는 필수. (기자, 통계학자, 과학자, 작가)
데이터에 대한 교차 검증이 필요.
소셜 미디어에서 얻은 지식만으로 세상을 이해해서도 안된다.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의 목표는 정확성이나 사실 추구에 있지 않다.
소셜 미디어의 궁극 목표는 클릭 유도해 그 플랫폼으로 사용자를 유인하는 것이다.
진실에 접근하는 제도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실에 닿을 수 있다.
개인으로서는 진실에 다가가기 어렵다.
그 이유는 종종 사실을 왜곡하고, 잘못 기억하고 편향된 시선을 갖기 때문이다. (1. 사실 왜곡 2. 기억의 오류 3. 편향된 시선)
사람들은 자신이 따르는 정당, 대의, 종교가 제일 우위에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은 편향성을 최소화하는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진실 추구를 위해서는 편항성을 견제할 제도가 필요하다.
민주주의 제도에는 3권 분립이 있다. 정부도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를 받고 있다.
정보의 진위 여부를 검토하는 제도야말로 올바른 현실 인식의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사실과 데이터에 기반해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고 지식은 불완전하다.
그래도 불완전한 지식이 독단적인 주장보다는 낫다.
우리가 무작정 행동하다면 세상은 더 나빠질 것이다.
세상에는 정답보다 오답이 더 많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순종과 믿음은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있다.
다른 길은 없다.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끊임없는 의심,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해야 한다.
과거 자료를 찾아보고 실험을 통해 이론을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진보시킬 유일한 방법은 세상을 더욱 잘 이해하는 것이고,
이것은 데이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