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世 첨정공(僉正公)
공의 휘는 이도(爾度)요, 자는 진경(晋卿)이니, 선고(先考)는 휘 인검(仁儉)이요 자는 군현(君賢)이며, 조고(祖考)는 휘 수강(壽康), 증조고(曾祖考)는 휘 익현(益賢)이다.
공은 병오년(丙午年)에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근실하고 순후하였으며, 몸가짐이 공손하고 검소하였다. 부모를 섬김에는 효성을 다하고 형제와 일가 사이에는 화목을 돈독히 하였으므로, 향리 사람들이 그 행실을 높이 여겼다.
공은 젊어서 군중에 종사하여 군무(軍務)를 익혔으며, 진법(陣法)과 군사의 일에 밝았다.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이 일찍이 공에게 진법과 군사에 관한 일을 물었다고 하였으니, 공이 군사 실무에 상당한 식견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뒤에 음사(蔭仕)로 첨정(僉正)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이로 말미암아 후세에서 공을 첨정공(僉正公)이라 일컬었다. 다만 공이 어느 관아의 첨정으로 재직하였는지는 전하는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몰후에는 통훈대부 장악원정(通訓大夫掌樂院正)에 증직되었다.
공은 비록 군무에 종사하였으나 문학에도 뜻을 두어, 자손과 후생을 경계하기 위한 글을 지었다. 그 글이 곧 『훈가이담(訓家俚談)』이니, 혹은 『훈가사(訓家辭)』라 일컫는다.
『훈가이담』은 모두 열다섯 편으로 이루어졌으며, 조손(祖孫)·부자(父子)·군신(君臣)·부부(夫婦)·형제(兄弟)·붕우(朋友)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를 서술하였다. 또한 일가가 화목하는 법, 몸과 마음을 삼가는 법,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법, 곤궁한 사람을 구휼하는 법과 독서하고 농사에 힘쓰는 도리를 두루 밝혀 놓았다.
공은 어려운 문자를 일삼기보다는 사람들이 쉽게 읽고 외울 수 있도록 국문 가사로 훈계의 뜻을 풀어냈다. 그 말이 질박하면서도 뜻이 바르고, 일상생활에서 실행할 수 있는 가르침이 갖추어져 있었다.
담헌 홍대용은 공이 지은 글을 읽고 그 운율이 법도에 맞으며, 관현악에 올려 노래하거나 길이 읊을 만하다고 평하였다. 또한 그 말이 꾸밈없이 순박하고 성실하며, 윤리와 일상생활의 도리가 두루 갖추어졌다고 칭찬하였다. 이는 공의 가르침이 책에서 얻은 말에 그치지 않고, 평생 몸소 행한 바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은 흩어져 있던 금곡파(金谷派)의 세계(世系)를 수습하여 『금곡파소보(金谷派小譜)』를 만들었으니, 선대의 계통을 밝히고 후손에게 전하고자 한 뜻이 컸다.
공은 만년에 가세가 어려워져 고향 예천을 떠나고자 하였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공의 덕행을 아껴 연명으로 글을 올려 다시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향청에서도 사람을 보내어 공을 돌아오게 하였으며, 고을의 무인들이 재물을 모아 거처할 집을 마련해 주었다고 전한다. 이로써 공이 향당에서 받은 존경과 신망이 매우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翁之先。嶺左士族。近世流落失其所。爲酒泉之吏族。惟其家居。有行有法。
홍대용은 공의 선대가 본래 영남의 사족(士族)이었으나, 근세에 들어 유락하여 본래의 기반을 잃고 예천의 이족(吏族)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분과 가세가 쇠락한 뒤에도 집안에서는 행실과 법도를 지켰다고 평가하였다.
비록 공의 집안이 사회적 지위는 낮아졌으나, 선대로부터 이어 온 가법과 생활 규범은 잃지 않았다는 뜻이다.
공은 현달한 지위로 이름을 드러낸 이는 아니었으나, 군무에 밝고 문학을 익혔으며, 효우와 공검을 몸소 행하였다. 또한 자손과 향리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훈가이담』을 지어 충효와 화목, 근면과 절제의 도리를 후세에 전하였다.
배위는 증숙인(贈淑人) 인동장씨(仁同張氏)니, 휘 세일(世一)의 따님이다. 아들은 휘 상덕(相德)이요 자는 여용(余容)이며, 뒤에 통정대부 좌승지(通政大夫左承旨)에 증직되었다.
공의 묘는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광전리 후산에 있으며 술좌(戌坐)이다. 배위 인동장씨의 묘는 예천군 보문면 작평리 후산에 있으며 간좌(艮坐)이다.
공은 정미년(丁未年)에 졸하였다. 족보의 간지에 따르면 생몰년은 병오생 정미졸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를 서력으로 환산한 연대에는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추후 원본 자료의 대조가 필요하다.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자 과학 사상가.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과 홍지(弘之)이며, 본관은 남양(南陽). 북학파(北學派)의 학자인 박지원, 박제가 등과 우정을 쌓았으며, 학풍은 유학보다도 군국과 경제장려에 치중하였다.
관인(館人)
한 집안이나 관청에 소속되어 실무를 맡거나 오랫동안 왕래하며 일을 돌보던 사람을 말한다. 홍대용은 공을 “우리 집안의 옛 관인”이라고 기록하였다.
진법(陣法)
군사를 일정한 대형으로 편성하고 운용하는 방법이다.
첨정(僉正)
홍대용은 ‘배첨정(裵僉正)’이라 불렀으나, 공이 어느 관서의 첨정에 제수되었는지, 실제로 종4품 관원으로 근무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관련 문학 자료에서는 공을 예천 작청(作廳)의 무속(武屬), 곧 지방 관아에서 군사 실무를 담당한 하급 무인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공에게 붙은 ‘첨정’이라는 칭호를 조선시대 시(寺)·원(院)·감(監) 등의 중앙관서에 설치된 종4품 실직과 동일한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며, 지방 군무 경력과 관련된 직함 또는 명목상의 관직일 가능성을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
훈가이담(訓家俚談)
‘집안을 가르치는 쉬운 말’이라는 뜻이다. 공은 자신의 글을 낮추어 『훈가이담』이라 하였으나, 후대에는 『훈가사(訓家辭·訓歌辭)』라고도 불렀다.
금곡파소보(金谷派小譜)
정확히 금곡파가 어떠한 계통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소보의 내용을 살펴보면, 백죽당공의 오남인 주(柱)공의 계대를 기록하고 있다.
소지(所志)
백성이 관청에 청원이나 진정을 올리기 위하여 작성한 문서이다.
증직(贈職)
생전에 지내지 못한 관직이나 품계를 사후에 추증하는 것을 말한다.
고증 사항
족보에는 공의 생몰을 병오생(丙午生)·정미졸(丁未卒)로 기록하였다. 이를 1726년 출생·1787년 사망으로 환산하기도 하나, 일부 문학 자료에는 1706년부터 1786년까지로 적혀 있어 확정 전에는 간지 기록을 우선하여 쓰는 것이 안전하다.
배이탁(裵爾度) 표기에 대하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공의 휘를 ‘이탁’으로 표기했다. 이는 ‘度’ 자에 ‘도’와 ‘탁’ 두 독음이 있기 때문에 ‘탁’으로 읽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흥해배씨 족보를 비롯하여 한국역대가사문학집성과 예천군 인물자료에는 모두 ‘이도(爾度)’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문중에서는 ‘이도’를 정식으로 사용한다.
『금곡파소보(金谷派小譜)』에서 말하는 금곡(金谷)
현재의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대맥리, 행정리상 대맥2리의 새실(쇠실) 마을 일대로 비정.
족보에는 이 계통의 묘소가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甘泉面金谷洞後山 — 감천면 금곡동 후산
甘泉面金谷二洞後山 — 감천면 금곡2동 후산
甘泉面金谷里後山 — 감천면 금곡리 후산
따라서 이 금곡은 오늘날의 은풍면 금곡리가 아니라, 옛 감천면 금곡동. 현재 지명으로의 변천
감천면의 지명 자료에는 현재 대맥리에 속한 자연마을로 다음 이름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쇠실·우곡(牛谷)·금곡(金谷)
즉 쇠실·우곡·금곡은 같은 마을을 가리키는 이칭으로 현재 감천면에는 법정리로 ‘금곡리’가 존재하지 않고, 이 지역은 대맥리에 편입되어 있다.
또한 최근 마을자료에서는 대맥2리를 ‘산의실·새실·장자골 마을’로 새실은 옛 기록의 쇠실·세격실이 음운 변화한 이름으로 보이므로, 금곡의 구체적인 현재 위치는 대맥2리 새실마을 일대로 이는 지명자료들을 종합한 추정이지만 근거가 상당히 분명하다.
혼동하기 쉬운 다른 금곡
예천군에는 현재 은풍면 금곡리도 있다. 이곳은 옛 하리면 금곡동으로서 지금도 법정리 이름이 금곡리로 남아 있는 별개의 지역.
족보의 기록은 명확히 감천면 금곡동이라고 하므로, 『금곡파소보』의 금곡을 은풍면 금곡리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
또 대맥3리에 전하는 금댕이라는 마을도 있으나, 이는 보리골과 함께 대맥3리를 이루는 별도의 자연마을이므로 금곡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