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삼풍(張三豐) : 진인이 세상에 내려오다
들어가는 말
탕탕한 천문이 만고에 열렸으니 몇 사람이나 돌아가고 몇 사람이나 왔는가?
(蕩蕩天門萬古開,幾人歸去幾人來? 역주: 소강절의 《매화시》에서 인용)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유(儒), 석(釋), 도(道) 사상이 서로 비추고 섞이면서 불도(佛道)의 상호다툼이 천 년간 끊이지 않았다.
원(元)나라 헌종(憲宗) 8년(1258년) 쿠빌라이(忽必烈 훗날의 원 세조)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불도(佛道) 대논쟁을 직접 주관했다. 당시 변론에 참가한 저명한 승려와 이름 높은 도사가 약 5백여 명이었는데 논변에서 도교가 크게 패했다. 이에 황제는 칙령으로 도사들에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게 했으며 노자의 《도덕경》만 남기고 나머지 도서(道書)들은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를 통해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맑게 하려던 것인데 도(道)와 불(佛) 양가는 하나는 약해지고 하나는 성장했다.
조야(朝野)에서는 “(도교)가 병을 물리치고 장수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백일비승(白日飛昇 역주: 대낮에 하늘로 날아올라가는 것)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양생술은 인정하지만 신선에 관한 일은 인정하지 않는다”며 위아래가 모두 한 목소리를 냈다.
바로 이때 역사는 천고진인(千古真人) 장삼풍(張三豐)을 배출했다. 그는 조화의 기틀을 얻어 오고감이 신속했으며 건곤(乾坤)의 묘한 이치를 장악해 숨고 드러남이 오묘했다. 또 삼교(三敎)의 진리를 열어 미혹에 빠진 억만 중생을 일깨웠으며 무당산에 깊이 은거해 천년 도량을 열고 태극신권(太極神拳)을 창립해 후세에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권을 연마하게 했다. 대도무적(大道無敵)이라 천지에 오직 그 한 사람뿐이었다!
1. 진인이 속세에 내려오다[真人臨凡]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장삼풍은 본명이 장전일(張全一)이고 자(字)가 현현(玄玄)이며 삼풍은 호다. 원래 조상들이 살던 곳은 강서(江西) 용호산(龍虎山)이었다. 그의 조부가 점성술에 정통해 남송(南宋) 말년 천하의 왕기(王氣)가 북쪽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가족을 이끌고 요양(遼陽) 의주(懿州)로 이주했다.
장삼풍은 원나라 정종(定宗) 정미(丁未) 2년 여름(1247년) 사월 초아드레 자시(子時)에 태어났다. 고서의 기록에 따르면 장삼풍이 탄생하기 전날 밤 모친 임(林)씨가 “꿈에 두모원군(斗母元君)이 손으로 큰 학을 부르다 지붕에서 멈춰 긴 휘파람을 세 번 불었다.”[명나라 육서성(陸西星)의 《회해잡기(淮海雜記)》]고 한다. 여기서 두모원군은 북두 여러 별들의 어미를 말한다. 장삼풍이 출생할 때 또 선인(仙人)이 알려주고 지켰으니 그의 내력이 비범함을 알 수 있다.
장삼풍은 《구경도정(九更道情)》에서 인류의 생명은 우주의 보다 높은 층차에서 내원하며 천지가 개벽할 때 세상에 내려와 동토신주(東土神州 역주: 중국) 미혹의 삼계에 내려왔다고 말했다.
“옛날 영산(靈山)을 떠난 이래 혼돈이 처음 나뉠 때 세간에 내려왔네. 서방에 근본이 있으나 근원을 잃어버렸네. 동토에 와서는 성명(性命)이 속세에 떨어졌구나. 애초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길을 잃었네.”(自從離了古靈山,混沌初分下世間。西方有本,丟下根原。來在東土,性命落凡。失迷了,老母當初未生前)[《구경도정》]
2. 속세에서 벗어나 도를 닦다[拜道脫翳]
장삼풍은 자태가 위엄이 있고 얼굴이 신기하게 생겨서 거북의 모습에 학의 뼈를 가졌고 귀는 크고 눈동자가 동그랬다. 다섯 살 때 괴상한 눈병이 생겨 시력이 점점 떨어졌다. 이때 방외(方外 세속을 벗어났다는 의미)의 이인(異人)이 장삼풍의 집을 찾아왔다. 자칭 장운암(張雲庵)으로 벽락궁(碧落宮)의 주지이며 호는 백운선로(白雲禪老)라 했다. 그는 장삼풍의 부모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선풍도골이라 원래 비범한 그릇이지만 눈에 마장(魔障)이 걸렸습니다. 반드시 빈도의 제자가 되어 속세를 벗어나야 하며 지혜의 구슬이 다시 밝아져 시력을 되찾으면 돌려보내겠습니다.”[청나라 왕석령(汪錫齡)의 《삼풍선생본전(三豐先生本傳)》]
이에 어린 장삼풍은 벽락궁(碧落宮)에 가서 장운암 도장을 따라 도를 배우자 반년 후 눈병이 완전히 치유되었다. 하지만 즉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벽락궁에서 7년을 보냈으며 청소년시기를 도관에서 보냈다. 장삼풍은 천부적인 자질이 총명하고 지혜로워 도경(道經)을 배우면 눈으로 읽기만 해도 바로 알았고 한가할 때는 또 유가와 불가의 서적도 함께 읽곤 했다. 그의 독서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바로 빠르게 책장을 넘겨 대략적인 뜻만 알면 넘어가고 깊이 탐구하지 않았다. 어느 덧 7년의 세월이 흘러 모친의 아들 생각이 간절해지자 도장은 마침내 삼풍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에 돌아온 후 삼풍은 유학공부에 전념했다.
7년에 걸친 벽락궁 생활은 장삼풍이 나중에 도를 닦는데 깊고 튼튼한 기초를 다져주었고 소년시기에 수도(修道)할 뜻을 세우게 했다.
젊어서 뜻을 세우니 도심이 굳건하고
반롱을 뛰쳐나오니 물 밖에 나온 연꽃이라.
비단구름 씻어내듯 말끔히 흩어버리니
밝은 달이 먼 하늘에 걸려있구나.
少年立志道心堅(소년입지도심견)
跳出樊籠出水蓮(도출번롱출수련)
散盡錦雲空似洗(산진금운공사세)
一輪明月掛長天(일륜명월괘장천)
(명나라 만력(萬曆) 《귀주통지(貴州通志)》 12권 《선석(仙釋)》)
3. 속세의 인연을 마무리
원 세조 중통(中統) 원년(1260년) 장삼풍의 나이 13세 때 조정에서 ‘거무재이(舉茂才異 역주: 뛰어난 인재를 추천받아 관리로 선발하는 제도)’를 실행해 인재를 선발했다. 장삼풍도 빼어난 능력으로 추천을 받아 수재(秀才)가 되었고 이듬해 ‘문학재식(文學才識)’이 되었다. 원 세조 지원(至元) 갑자년(1264년) 가을 장삼풍은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을 여행하며 평장정사(平章政事) 염희헌(廉希憲)을 알게 되었다. 염희헌은 장삼풍이 삼교를 두루 알고 고금의 지식에 통한 기재(奇才)임을 알아보고 황제에게 주청해 중산(中山) 박릉(博陵 지금의 하북 보정)령으로 추천했다.
세간의 영예는 애초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았던 장삼풍을 더할 수 없이 외롭고 고독하게 만들었다.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세상에 나섰지만 지음(知音)을 만나기는 어려웠고 높이 나는 기러기처럼 높아질수록 더 추워질 뿐이었다(高處不勝寒).
장삼풍은 당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황금대에 오르길 원하지 않고
단지 황화주 마시길 바랄뿐이라.
술에 취해 아득하면 천지를 잊고
고금의 명리는 티끌에 불과할 뿐.
我不願登黃金台(아불원등황금대)
我只願飲黃花杯(아지원음황화배)
醉裏昏昏忘天地(취지혼혼망천지)
古今名利總塵埃(고금명리총진애)
(《갑자추유연경작(甲子秋遊燕京作)》--갑자년 가을 연경에 놀러가서 쓰다)
집과 나라를 저 사람에게 맡기고
다만 나 홀로 외롭고 슬프구나.
두 눈 가득 눈물이 흘러내리니
나는 기러기 그림자 비치는 높은 곳은 추워라
家國伊人任(가국이인임)
孤哀獨我單(고애독아단)
澘然雙淚落(산연쌍루락)
飛雁影高寒(비안영고한)
(장삼풍 《유감(有感)》)
여기서 황금대란 전국시기 연(燕)나라의 소왕(昭王)이 천하의 인재들을 널리 초빙하기 위해 세웠다는 건물이다. 소왕은 천금매골(千金買骨) 즉 천금으로 천리마를 사기 위해 먼저 500금을 주고 천리마의 뼈를 샀더니 이 소문을 듣고 1년 만에 3마리의 천리마를 샀다는 일화에 감동을 받아 황금대라는 높은 누대를 만들어 널리 인재를 구하고 우대함을 알렸다.
이 기간에 장삼풍은 진(晉)나라 때 갈홍(葛洪)이 수도했던 갈홍산(葛洪山)을 찾아 동천복지(洞天福地)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또 시선(詩仙) 이백이 시를 읊고 도를 논하던 곳들을 찾아다니고 싶어 “하루 빨리 속세 인연을 끝내고” 산에 들어가 도를 닦고 싶어졌다.
“모의(毛義 역주: 한나라 때 은자)는 여기에서 은거했으니 갈홍이 어찌 관직에 연연했으랴! 이태백을 찾아가 함께 대환단을 말하고 싶구나
(毛義從茲隱,葛洪豈戀官!欲尋李太白,同說大還丹)”(《유감(有感)》)
“속세 인연 빨리 마치고 오악삼산으로 돌아가리라.
(早將壯歲塵緣了,五嶽三山歸去來)”(《갑자추유연경작(甲子秋遊燕京作)》)
장삼풍은 또 염희헌의 추천으로 원나라 개국 재상 유병충(劉秉忠)을 만났다. 유병충은 장삼풍을 보고는 놀라서 “진짜 선재(仙才 신선의 재목)로다”라고 했다. 장삼풍은 삼교를 두루 관통했기에 유병충은 마침내 지음을 만났다는 생각에서 장삼풍을 발탁하려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유병충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장삼풍의 부모님이 잇따라 사망했다. 장삼풍은 어려서부터 수도하려는 뜻을 세웠지만 단지 속세의 인연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장삼풍은 유병충에게 편지를 써서 사의를 표하고 자신의 굳건한 도심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표명했다.
“태평성대의 훌륭한 재상이 천고에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풍수 술은 한가한 일에 불과하지만 제왕의 신하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공의 천금과 같은 중한 말씀을 얻으니 제게 주신 공의 편지는 제 마음을 흔들어놓았습니다. 말씀하신 지리는 아는 사람이 없겠지만 오직 저만은 묵묵히 깊이 믿습니다. 공께서는 어찌하여 천한 저를 중히 여기시는지 이 은혜와 이 덕이 저를 들어 올리셨습니다. 오직 공의 편지 도착이 더딘 것이 한입니다. 부모님을 이미 장사지냈으니 감히 나설 수 없습니다. 명예를 바라지 않고 이익을 바라지 않으며 다만 부모님이 이 땅에서 편하시길 바랄뿐입니다. …중략…. 나중에 공께서 계신 형주도를 지날 때 팔반산 아래에서 공을 찾아뵙겠습니다.”(장삼풍 《답유상공서(答劉相公書)--유상공께 드리는 답신》)
이 편지에서 보듯이 본래 장삼풍은 부모님을 잘 안치한 후 유병충을 찾아가려 했지만 뜻밖에도 유병충이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버렸다.
장삼풍은 요양(遼陽)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대한 효를 다하기 위해 삼년상을 지냈다. 또 구(丘)씨 성을 가진 도인의 방문을 받아 현리(玄理 도가의 현묘한 이치)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눴다. 도인이 떠나자 장삼풍은 곧바로 처자식과 작별하고 짐을 꾸려 운유에 떠났다. 이때 장삼풍의 나이 32세로 대도(大道)가 진리를 찾아 떠나는 기나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수년 후 장삼풍은 구(邱)도인을 다시 만났고 함께 서산(西山)에 놀러간 후에야 비로소 구 도인이 구처기(丘處機 역주: 전진교 왕중양의 제자 장춘진인)임을 알게 되었다.
추운 대낮 조용한 유주(幽州)
연경(燕京)에서 옛 술집 다시 찾으니
새로 사귄 미치광이는 술꾼이 되고
전에 알던 호걸은 이미 거친 언덕 되었구나.
빠른 시간은 호로병 속의 해와 같지 않지만
개미 목숨은 오히려 물거품과 같구나.
지인을 만나 대도를 담론하니
눈 그친 서산에서 함께 마음껏 노니네.
天寒白日澹幽州(천한백일담유주)
燕市重尋舊酒樓(연시중심구주루)
新學瘋狂爲醉漢(신학풍광위취한)
故交豪傑已荒邱(고교호걸이황구)
駒光不似壺中日(구광불사호중일)
蟻命猶如水上漚(의명유여수상구)
我遇至人談大道(아우지인담대도)
西山晴雪共遨遊(서산청설공오유)
(장삼풍 《연조한유오구장춘수동유서산(燕趙閑遊䎸邱長春遂同遊西山)》)
구처기는 도교 전진도(全真道) 용문파(龍門派)의 조사로 일찍이 칭기즈칸을 찾아가 알현한 적이 있다. 몽골인들의 ‘장생천(長生天 역주: 몽골인들이 숭배하는 하늘 신으로 ‘텡그리’라고 한다)’이 바로 중원에서 말하는 ‘도(道)’로 중원은 신이 정한 하늘과 통하는 문이라고 말했다. 그 후 칭기즈칸은 구처기에게 천하의 도교를 관장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조서에서는 또 “짐은 평소 늘 신선을 동경해왔으니 신선은 짐을 잊지 마시라.”고도 언급했다. 구처기에 대한 칭기즈칸의 예우가 지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4. 진리를 찾아 도를 방문
장삼풍은 《하늘 사다리를 오르다(上天梯)》에서 자신이 반석처럼 굳은 결심으로 속세를 떠나 수도할 뜻을 노래했다.
《하늘 사다리를 오르다(上天梯)》
대원(大元)의 출가 수련자 창처럼 긴 수염 있다네.
하늘사다리 오르는 노래 하늘의 선물로 간주하라.
도를 찾던 처음 되돌아보니 돌이킬 수 없는 마음 돌과 같았네.
관직 버리고 산과 바다 유람하며 고생스레 단의 비밀 찾아다녔네.
돌아가신 부모님 묘도 버리고 고향 산도 남기지 않았네.
중년의 처와 이별하고 이른 새벽 문을 나서
어린 아들마저 버리고 고개 돌려 집을 떠났네.
사람들이 끝내기 어려운 것을 수행인은 이미 끝냈고
사람들이 자르기 어려운 것을 수행인은 모두 자를 수 있네.
장생과를 증득하고 싶어 신선되어 선학을 타네.
후천 배양 든든해 두 발은 멀리 다닐 수 있건만
내 마음 가로막는 근심 흐르는 세월이 너무 빨라서
고개 들어 종남산 바라보며 하늘 향해 길게 탄식하누나!
大元飄遠客(대원표원객) 拂拂髯如戟(불불염여극)
一曲上天梯(일곡상천제) 可當飛空錫(가당비공석)
回思訪道初(회사방도초) 不轉心如石(부전심여석)
棄官遊海嶽(기관유해악) 辛苦尋丹秘(신고심단비)
舍我亡親墓(사아망친묘) 鄉山留不得(향산유부득)
別我中年婦(별아중년부) 出門天始白(출문천시백)
舍我丱角兒(사아관각아) 掉頭離火宅(도두이화택)
人所難畢者(인소난필자) 行人已做畢(행인이주필)
人所難割者(인소난할자) 行人皆能割(행인개능할)
欲證長生果(욕증장생과) 沖舉乘仙鶴(충거승선학)
後天培養堅(후천배양견) 兩足邁於役(양족매어역)
悠悠摧我心(유유최아심) 流年駒過隙(유년구과극)
翹首終南山(교수종남산) 對天三歎息(대천삼탄식)
장삼풍은 요양의 고향집을 떠나 태항산(太行山)을 목표로 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 전에 근무했던 하북을 지나며 느낀 무한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장삼품 《32세북유(三十二歲北遊)--32세에 북에서 노닐다》
유주와 기주를 다시 오니 감개를 잊었는데
관복 대신 도인의 행장이로다
내일 아침 검을 차고 거문고 메고 떠나
서산에 올라가 태항산을 바라보리라.
幽冀重來感慨忘(유기중래감개망)
烏紗改作道人裝(오사개작도인장)
明朝佩劍攜琴去(명조패검휴금거)
卻上西山望太行(각상서산망태항)
항산에서 필묘(畢昴)에 응하다
장삼풍이 검과 거문고를 지니고 태항산맥을 경유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도가의 동천복지 중 하나인 항산(恒山)이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도가 팔선(八仙)의 하나인 장과로(張果老)가 바로 항산에 은거한 채 수련했고 수많은 자취와 유적을 남겨놓았다고 한다.
유명한 현공사(懸空寺)는 항산 금룡협(金龍峽) 서측 취병봉(翠屏峰) 절벽에 매달려 있다. 현공사는 북위(北魏) 효문제 태화(太和) 15년(491년)에 건립되었다. 위로는 위태로운 바위가 있고 아래로는 깊은 계곡이 있으며 중간에 누각이 공중에 매달린 기이하고 오묘한 구조는 가히 세계일절(世界一絕)이라 할 수 있다.
우주 천지만물에는 대응관계가 있다. 지상의 산은 천상의 별에 대응하며 천상의 별은 또한 천신(天神)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때문에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에서는 “하늘의 도를 살펴 하늘의 운행을 조종할 수 있다면 다 된 것이다.(觀天之道,執天之行,盡矣)”라고 했으며 중국 역대의 황제들은 모두 천문관측을 중시했다. 필성(畢星)과 묘성(昴星)은 고대 28수 중의 두 별이다. 장삼풍은 항산이 천상에서 필성과 묘성의 정(精)과 대응되는 도가 동천복지의 하나라고 말했다.
장삼풍《항악(恒嶽)》
필묘의 정이 응결된 곳
항산은 기상이 높아라!
등 넝쿨 절벽을 당기고
송백은 파도처럼 울부짖네.
북녘 들판 어찌나 광활한지
신령한 바람 성난 듯 울부짖네.
선령 위에 지은 오두막에서
바라보면 호방한 흥이 이누나.”
畢昴精凝處(필묘정응처)
恒山氣象高(항산기상고)
藤蘿牽絕壁(등라견절벽)
松柏吼飛濤(송백후비도)
朔野何空闊(삭야하공활)
靈風乃怒號(영풍내노호)
結廬仙嶺上(결로선령상)
望裏興飛豪(망리흥비호)
장삼풍은 선령 위에 오두막을 짓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를 찾았다. 그러나 장장 16년이 흘렀음에도 대도(大道)를 만나지 못했다. 장삼풍은 《유유가(悠悠歌)》 한 수를 남겨 짧은 인생과 진정한 도를 찾기 어려움을 탄식했다.
《유유가(悠悠歌)》
유유한 노래여 유유한 노래여
48년을 헛살았도다.
인생 수명이 얼마나 되랴!
항산을 16년간 지켜왔건만
연(燕)과 조(趙)를 왕래한 게 쓸모없게 되었구나.
차라리 거문고와 칼 들고 삿갓에 도롱이 쓰고
동쪽 봉래로 가서 도가를 불렀더라면.
悠悠歌(유유가) 悠悠歌(유유가)
四十八歲空銷磨(사십팔세공소마)
人生壽命能幾何(인생수명능기하)
株守恒山十六載(주수항산십육재)
燕趙往來成逝波(연조왕래성서파)
到不如攜琴劍整笠蓑(도불여휴금검정립사)
東走蓬萊唱道歌(동주봉래창도가)
봉래선산(蓬萊仙山)
장삼풍은 이에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옛날 제나라와 노나라 지역(지금의 산동성)에 가서 신선세계를 찾아보기로 했다.
《동유(東遊)》--동쪽에서 노닐다
이 몸이 오랫동안 물과 구름 사이에 처하여
제로에서 맘껏 노니 흥이 절로 한가하다.
방곤(신선의 산)과 원교 찾아가 손님이 되고파라
예부터 신선은 삼신산에 살았노라.
此身長放水雲間(차신장방수운간)
齊魯遨遊興自閑(제로오유흥자한)
欲訪方壼圓嶠客(욕방방곤원교객)
神仙萬古住三山(신선만고주삼산)
《일관조기관일(日觀早起觀日)》--일관에서 일찍 일어나 해를 보다
하늘 닭이 한번 우니 바다문이 열리고
태양은 파도를 타고 바다에서 나오네.
만 리에 붉은 빛 끊이지 않는데
삼신산 정상이 푸른 언덕 되었네.
멀리 생황소리 들리고 공중에서 학이 내려오니
바라보니 구름용이 비를 싣고 돌아오네.
따로 나는 신선 있어 사슴을 거느리니
목 빼고 봉래산을 바라보게 하노라.
天雞一唱海門開(천계일창해문개)
日湧波濤出海來(일용파도출해래)
萬里眼光紅不斷(만리안광홍부단)
三山頭腦綠成堆(삼산두뇌녹성퇴)
遙聞笙鶴從空降(요문생학종공강)
只見雲龍帶雨回(지견운룡대우회)
別有飛仙揮鹿麈(별유비선휘록주)
令人企首望蓬萊(영인기수망봉래)
이 시에서 말하는 방곤(方壼)과 원교는 전설에 나오는 발해의 신산(神山)이다. 《열자(列子)‧탕문(湯問)》에는 “발해의 동쪽에 다섯 산이 있는데 첫째는 대여(岱輿), 둘째는 원교(員嶠), 셋째는 방곤(方壼), 넷째는 영주(瀛洲), 다섯째가 봉래(蓬萊)다.”라고 했다. 나중에 대여와 원교가 깊은 바다에 가라앉고 오직 방곤, 봉래, 영주 삼신산만 남았다. 삼신산은 신선이 거처하는 곳으로 궁전은 모두 금과 옥으로 만들어졌고 산에 나는 꽃과 과일은 달콤하기 그지없으며 이를 먹으면 장생불로한다. 역사상 진시황과 한무제가 모두 사람을 파견해 선약을 찾게 했다.
《사기‧진시황본기》에는 진시황이 서불(徐巿)을 바다로 보내 신선을 찾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나라 사람 서불 등이 상서를 올려 바닷속에 삼신산이 있으니 이름이 봉래, 방장, 영주라 하며 신선이 거주합니다. 청컨대 재계하시고 동남동녀와 함께 구하게 하십시오. 이에 서불에게 동남동녀(童男童女)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에 들어가 신선을 찾게 했다.”
《사기‧봉선서(封禪書)》에는 한무제가 방사를 바다로 보내 신선을 찾게 한 기록이 있다.
“소군이 주상에게 아뢰길 ‘……신이 일찍이 발해에서 노닐다 안기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안기생은 참외처럼 큰 대추를 먹었습니다. 안기생은 신선으로 봉래 가운데를 통할 수 있습니다. 만약 황상께서 그와 의기가 합하면 나타나겠지만 합하지 않으면 모습을 감출 것입니다.’ 이에 천자가 친히 부엌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방사를 바다로 보내 봉래의 안기생과 같은 무리를 찾게 했다.”
해상의 선산 노산(嶗山)이 장삼풍의 발걸음을 멈추게 해 장삼풍이 이곳에 머물러 수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장삼풍은 봉래각(蓬萊閣)에 올라가 멀리 선경(仙境)을 조망하며 속으로 마음이 아득해졌다.
장삼풍 《단암산(丹岩山)》
단암산 정상 봉래각
봉래산 바라볼 수 있지만 다가갈 순 없네.
하늘 바람 바닷물 가슴을 흔들고
푸른 파도는 저절로 열고 닫네.
내가 동모에 오니 눈앞이 텅 비고
시정이 영웅처럼 호방해지누나.
아침 햇살 저 멀리 부상 위로 나오니
누대 각종 금은보배로 장식된 신선의 궁궐
박수 치며 노래 부르니 구름 학이 일어나고
느릿느릿 선인이 앞으로 오네.
바다에 술잔 올리고 해신에게 축원하니
천만리에 광명이 펼쳐지네.
멀리 바다 밖 하늘을 보려하니
하늘이 바다 위로 뜨니 바다는 끝이 없어라.
폭풍 수레 타고 날아가고 싶지만
아직 우화등선 못하여 망연자실하구나.
丹岩頂上蓬萊閣(단암정상봉래각)
可望蓬萊不可卻(가망봉래불가각)
天風海水蕩心胸(천풍해수탕심흉)
蒼蒼浪浪自開闔(탕탕랑랑자개합)
我到東牟眼界空(아도동모안계공)
詩情豪放若英雄(시정호방약영웅)
朝㬑遠出扶桑外(조확원출부상외)
樓台貝闕金銀宮(누대패궐금은궁)
拍手長歌雲鶴起(박수장가운학기)
仙人冉冉來前矣(선인염염래전의)
把杯祭海祝海神(파배제해축해신)
爲展光明千萬里(위전광명천만리)
遙情欲觀海外天(요정욕관해외천)
天浮海際海無邊(천부해제해무변)
欲駕飆車飛過去(욕가표거비과거)
未能羽化心茫然(미능우화심망연)
장삼풍은 황하 동쪽에서 3년을 두루 다니며 대종(岱宗 태산)에 올라 “인생이 여기에 이르러 웅대한 경관을 열고(人生到此拓雄觀)” 조래산(徂徠山)에 노닐며 “산속의 여섯 은자는 지금 어디 있는가(山間六逸今安在)?”라고 노래했다. 멀리 봉래의 선경을 바라보며 우화등선하여 날아갈 수 없고 대도(大道)를 얻지 못하니 선산(仙山)의 빼어난 경치도 모두 헛되었다.
장삼풍 《하동(河東)》
삼년간 하동을 두루 다니며
소맷자락 휘날리며 밤낮으로 걸었다네.
산을 오르면 대나무에 의지해 미소 짓고
강을 만나면 한가하게 거문고 타네.
해악에선 언제쯤이나 도반을 만나려나?
티끌세상 어느 곳에서 신선을 방문할까?
三年步履遍河東(삼련보리편하동)
戴月披星兩袖風(대월피수양수풍)
登山笑倚一根竹(등산소의일근죽)
遇水閑彈三尺桐(우수한탄삼척동)
海嶽幾時逢道侶(해악기시봉도려)
塵寰何處訪仙翁(진환하처방선옹)
중주기행(中州紀行)
장삼풍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중주(中州 지금의 하남 일대) 일대에 두루 족적을 남겼다. 장삼풍이 중악 숭산(嵩山)에 이르자 이곳은 불문(佛門) 정토라 소림사가 숭산 안쪽 소실산(少室山)의 무성한 숲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숭산은 또 도가의 선산(仙山)으로 한무제가 숭악에 와서 산신(山神)에게 제사를 지내다가 산이 만세를 외치는 소리를 듣고 만세관(萬歲觀)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장삼풍에 따르면 숭산은 팔괘(八卦) 중 리(離)의 위치에 해당하는데 리는 화(火)에 속한다. 높고 가파른 주봉(主峯)은 하늘로 우뚝 솟아 위로는 삼태성(三台星)에 대응하고 아래로는 태실산과 소실산을 나누는 기준이 되니 바로 하늘이 낸 천연의 연단선로(煉丹仙爐)가 된다.
장삼풍은 자신을 청련(靑蓮 시선 이백)에 비유하며 숭산 36기봉(奇峰)을 두루 찾아다녔지만 진정한 스승은 만나지 못했다. 후인들은 장삼풍이 소림권(少林拳)에 정통했기 때문에 나중에 태극권을 창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장삼풍 《숭악(嵩嶽)》
리괘(離掛)가 중첩된 큰 불에 단벽이 열리니
중주의 진정한 준극(峻極)을 표현하노라.
선령은 은은하게 삼태(三台)를 세워
우뚝 솟은 태실과 소실산을 나누는구나.
내 지금 이백(李白)처럼 도를 찾아서
서른여섯 기이한 봉 정상까지 나아갔네.
바위 위에서 거문고 타니 생각이 아득해지고
구름 속에선 학이 훨훨 나는구나.
문득 입이 말라 느껴 현주(玄酒 맑은 물)가 생각나니
늦게 나온 밝은 달이 계곡 소나무에 걸렸구나.
소나무 물결 우레처럼 울리는데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 있고 움직이면 곧 한가하다.
야자 표주박과 먼지 털이로 바위 사이에 앉으니
참 스승 만나지 못해도 역시 즐거웁구나.
장차 내가 지난 흔적 남겨 숭산에 기록하리라.
重離大火開丹壁(중리대화개단벽)
表正中州真峻極(표정중주진준극)
仙靈隱隱立三台(선련은은입삼태)
太少峩峩分兩室(태소아아분양실)
我今訪道如青蓮(아금방도여청련)
奇峰六六造其巔(기봉육육조기전)
石上彈琴思縹緲(석상탄금사표묘)
雲中飛鶴鱗翩翩(운중비학인편편)
忽然口渴憶玄酒(홀연구갈억현주)
手掬山泉聊漱口(수국산천료수구)
晚來明月掛溪松(만래명월괘계송)
松濤幾陣如雷吼(송도기진여뢰후)
靜中有動動偏閑(정중유동동편한)
椰瓢棕拂坐岩間(야표종불좌마간)
不遇真師亦快活(불우진사역쾌활)
留將鴻爪記嵩山(유장홍조기숭산)
숭산을 떠난 장삼풍은 도가(道家) 십대동천(十大洞天)의 으뜸인 왕옥산(王屋山 역주: 산속의 동굴이 마치 제왕의 궁궐과 같다고 해서 왕옥산이라 불린다)에 올랐다. 소위 동천(洞天)이란 “산속 동굴로 여러 산을 관통해 직접 하늘에 도달한다(山中有洞,貫通諸山,直達上天).”는 뜻이다. 주봉 정상에는 돌로 된 단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헌원(軒轅)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당시 황제는 치우(蚩尤)와 큰 전쟁을 치르고 있었는데 아무리해도 승리할 방법이 없었다. “황제가 이에 하늘에 고하니 마침내 구천현녀와 서왕모를 감동시켜 《구정신단경(九鼎神丹經)》, 《음부책(陰符策)》을 얻어 마침내 치우의 무리를 이길 수 있었다.”[《정통도장(正統道藏)》 동신부(洞神部)의 《천단왕옥산성적기(天壇王屋山聖跡記)》]
장삼품은 이곳 왕옥산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장삼풍 《왕옥산(王屋山)》
해내 큰 동천 중에서
왕옥이 제일이라 하네.
예부터 흰 구름 날다
지금은 원나라 황실을 지키네.
바위 골짜기엔 생황소리 울리고
뾰족한 정상에 해와 달이 걸리누나.
내가 움막 짓고 살면서
신선의 자질 단련하고 싶어라.
海內大洞天(해내대동천)
王屋稱第一(왕옥칭제일)
終古飛白雲(종고비백운)
至今護元室(지금호원실)
岩壑響笙簧(암학향생황)
峰尖掛日月(봉첨괘일월)
我欲結茅居(아욕결모거)
煉取神仙質(연취신선질)
장삼품은 중주의 남북, 고도(古都 옛 도읍)의 안팎을 두루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다만 “제왕의 무덤에 아득히 해가 지는(“茫茫日落帝王墳)”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장삼풍 《중주기행(中州紀行)》
중주 남북 두루 다니며 진리를 찾으며
가는 곳마다 옛날을 생각하는 노래 높이 불렀어라.
재상 저택에 도도하던 수레흐름 끊어지고
제왕의 무덤엔 아득히 해가 지누나.
이 몸은 잘려진 가지처럼 물 따라 흐르고
어깨엔 거문고 메고 저녁노을 둘렀어라.
내일은 또 하내를 떠나리니
소맷자락엔 태항산 구름 지니리라.
中州南北遍尋真(중주남북편심진)
到處高歌吊古文(도처고가조고문)
滾滾涸飛卿相宅(곤곤학비경상택)
茫茫日落帝王墳(망망일락제왕분)
身如斷梗隨流水(신여단경수류수)
肩負瑤琴帶夕曛(견부요금대석훈)
來日又從河內去(내일우종하내거)
袖中攜取太行雲(수중휴취태항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