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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 1,7; 4,12 | 에바프라 | 필레 23 |
4,17 | 아르킵보 | 2 |
4,10 | 아리스다르코 | 24 |
4,9 | 오네시모 | 10 |
4,14 | 루카 | 24 |
4,10 | 마르코 | 24(사도 13,5.13; 15,37.39) |
4,14 | 데마 | 24 |
| 압피아 | 2 |
4,7 | 디키고 (사도 20,4; 에페 6,21; 2티모 4,12; 티토 3,12) | |
4,11 | 유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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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 님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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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새서와 필레몬서에서 여러 번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점이 특이하다. 압피아만 제외하면 필레몬서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콜로새서에도 등장한다. 그러나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 같은 현상 분석에서 아직 콜로새서의 저자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이끌어낼 수는 없지만 두 서간의 특별한 관계성만은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이 서간을 바오로 자신의 것으로 볼 수 있는 신학적 근거가 있다. 콜로 3,18-4,1의 “가정질서 목록”을 특히 에페 5,22-6,9와 비교해 보면 그리스도교적 발전의 색채가 거의 없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또한 엔 크리스토와 엔 퀴리오 같은 표현이 에페소서와는 달리 콜로새서에서는 바오로 신학에 상응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콜로 3,18-4,1의 경우를 제외하면 바오로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가정질서 목록”을 다시금 제시하지 않는다.
이 서간이 주변의 큰 도시가 아니라 작은 도시 콜로새 사람들을 향해 씌어진 이유는 바오로 자신의 상황 때문이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오네시모와 필레몬이 콜로새 출신이라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2) 간접적 바오로 서간으로 보는 견해
이같은 근거들을 제시한다 해도 콜로새서는 바오로의 친서가 아니라 그의 권위와 이름으로 전해오는 바오로 서간으로 볼 수 있겠다. 바오로가 직접 쓰지 않고 구술하여 서기로 하여금 받아쓰게 했다는 견해다. 슐라이어마허와 홀츠만에 이어 근래에 슈바이처는 티모테오가 콜로새서를 기록한 바오로의 서기라고 본다. 슈바이처는 콜로새서를 바오로 친서들과 후기 바오로 서간들의 “중간 서간”으로 보며, 그 근거로 언어와 신학의 차이점들을 제시한다. 코린토 전서와 테살로니카 전서처럼 “바오로와 티모테오”가 동시에 발신인으로 등장함에 유의해야 한다(콜로 1,1). 특히 콜로새서의 경우는 바오로가 당시에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서기가 필요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3) 바오로 이후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
무엇보다도 콜로새서의 언어가 바오로 친서들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점에서 출발할 수 있다. 바오로가 흔히 사용하는 다음 주요 용어들이 콜로새서에는 전혀 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하마르티아는 콜로 1,14에 한 번 나온다. 또한 이러한 용어들이 모든 바오로의 친서에서 고루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의화(디카이오쉬네) | 바오로 서간전체 | 50회 |
| 로마34회 |
믿다(피스테위오) |
| 42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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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노모스) |
| 118회 | 로마74회 | 갈라32회 |
죄(하마르티아) |
| 59회 |
| 로마48회 |
콜로새서의 문체에는 인위적 흔적이 엿보인다. 특히 1,9-20; 2,9-15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두 단락 모두 긴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접속사(카이, 데 등)도 드물다.
몇 가지 신학적 독특성으로 미루어보아 이 서간은 바오로의 친서라고 보기 어렵다: ① 이 서간의 그리스도론이 “우주관”에 뿌리박고 있다. 이 같은 관점은 특히 1,15-20에서 두드러지는데, 친서인 로마 12,3-5; 1코린 12장의 경우와 사뭇 다르다. ② 콜로 2,12; 3,1의 세례 이해가 로마 6장의 것과 다르다. ③ 종말론적 대망사상도 기존의 것과 좀 다르다.
4) 익명의 저자로 보는 견해
콜로새서는 콜로새 지방과 그곳의 영적·사회적 상황을 잘 아는 익명의 저자가 집필했다고 본다. 그는 필레몬뿐 아니라 바오로와 그의 신학사상까지도 잘 알고 있었고,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의 권위를 빌려 이 서간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점으로 미루어 그는 바오로의 한 제자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러나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입증하기는 불가능하다.
3. 집필 시기와 장소
집필 시기는 크게 두 가지 입장에서 볼 수 있겠다. 먼저 이 서간을 바오로 친서로 볼 경우와 후대 작품으로 볼 경우가 그것이다.
1) 바오로의 친서로 볼 경우
갈라티아서와 코린토 전서를 쓴 시기와 가깝게, 필레몬서와 더불어 50년대 중반에 썼다고 본다.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집필 장소로는 바오로가 감옥에 갇혀 있던 에페소가 가장 개연적이다(콜로 1,24; 4,3.10.18).
2) 바오로 후대 작품으로 볼 경우
61년 대지진 후, 필레몬서 집필 직후에 콜로새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이 서간을 썼다고 본다. 아마도 바오로가 죽은 후이며, 분명히 바오로의 로마 압송 전은 아니라고 본다. 70년경으로 추정할 수도 있겠다. 집필 장소는 정보가 너무도 미흡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으나 소아시아의 어느 곳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그 근거로 저자가 콜로새 공동체의 상황과 그곳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4. 집필 배경과 동기
1) 무엇보다도 이 서간의 집필 동기로 콜로새에 등장한 “이단”을 들 수 있다. 이는 2,8에 잘 묘사되어 있다: “누가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호릴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들은 사람들의 전통을 따르며 세상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2) 지진 등으로 인해 세계 내 질서의 붕괴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었을 수도 있다. 이 측면은 1,15-20에 엿보인다.
3) 세계내적 요소들(스토이케이아 투 코스무)에 대한 평가절하로 인해 영적인 것, 나아가 천상 존재, 즉 천사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대두되던 때였으므로(2,8.10.15.20; 1,16 참조), 이 같은 사람들의 위협을 경계하는 의미도 있다.
4) 천사 공경(2,16.18)이나 음식물 절제 규정(2,20-23) 등으로 인한 혼란을 막고자 한다.
5) 그러한 경향에 맞서 콜로새서의 저자는 그리스도론적인 사상을 고취시키고자 한다. 저자는 콜로새 공동체 구성원들로 하여금 “세상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그분은 누구나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분”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분은 세상과 교회의 머리로서 존재하는 분이며 콜로새 신도들은 세례를 통해 그분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다(2,12).
6) 그리스도론은 곧바로 구원론으로 연결된다. 바꾸어 말하면 우주론적이며 세계내적인 그리스도 이해는 믿는 모든 이를 위한 “보편적 구원론”으로 귀결된다. 이는 또한 뒤따르는 훈계와 직결된다. 곧, 새로운 삶의 질서를 따라 살아야 한다. 이에 걸맞은 일반적이며 근본적인 가르침은 3,1-4에서, 더 구체적인 가르침은 3,5-4,6에 섬세하게 묘사된다.
Ⅱ. 내용 구성
편지 인사말(1,1-2)뿐 아니라 편지 구조의 측면에서도 콜로새서는 일반적으로 다른 바오로 서간과 같은 체계를 따른다. 내용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겠다 :
머리말(1,1-8)
인사말(1,1-2)
감사말(1,3-8)
선포의 내용(1,9-2,23)
기도(1,9-11)
찬가적 가르침(1,12-23)
교회의 일꾼 바오로(1,24-29)
라오디게이아(프리기아?) 공동체를 위한 책임(2,1-5)
콜로새 철학에 대한 가르침(2,6-23)
교훈적 내용(3,1-4,6)
그리스도 안에 새 인간으로서의 삶(3,1-17)
가정질서 목록(3,18-4,1)
기도생활과 책임있는 삶을 권고함(4,2-6)
종결(4,7-18)
디키고와 오네시모 추천(4,7-9)
인사와 당부(4,10-17)
맺음인사(4,18)
Ⅲ. 영향
콜로새서가 그리스도인 신앙생활과 신앙고백 역사에 미친 영향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론과 우주론과 윤리신학 영역에서 지대했다. 유다교 지혜문학에서 물려받은 “그리스도 찬가”의 내용과 서간 저자가 사용한 호교론적 논증은 훗날 아리우스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즉 1,15에서 “모든 피조물의 맏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사상을 펴는 데 기여한다.
Ⅳ. 주요 신학적 특징
콜로새서에서 빠뜨릴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화해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분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다”(1,16)와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1,18ㄱ)라는 표현은 우주적 ․ 지상적 영역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구현된 화해에(1,20) 한몫 차지한다는 사고의 틀을 마련해 준다.
이 서간은 전반적으로 그리스도 중심 사상으로 펼쳐진다. 저자는 신학 전개의 기본 틀과 방향, 나아가 초점을 그리스도께 두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만 충만한 의미를 띤다고 말한다(1,17; 그리스도 안에서[엔], 그리스도와 함께[쉰], 그리스도를 통하여[디아], 그리스도께로[에이스] 등 참조). 그리스도 앞에서 여타의 모든 존재는 상대적 의미를 지닐 뿐이다.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을수록 그 존재의 가치는 상승하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 존재는 가치는 평가절하된다(2,3).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신비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 신비가 만방에 밝히 드러났으므로 수신인들은 이제 그 신비를 깨닫고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한다(1,25-27; 2,2). 하느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활동하시며(1,13.20; 2,13-15) 또한 그리스도 친히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음을 알고 천상 것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한다(3,1).
Ⅴ. 오늘 독자에게 주는 의미
콜로새서를 읽는 이는 다음과 같이 묻게 되며 또 늘 그렇게 물어야 한다: 내 존재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엔 크리스토) “그리스도와 함께”(쉰 크리스토) 있으며 그렇게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아직 이 세상 안에서 살고 있지만 이미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3,3) 위에 있는 것을(타 아노) 찾으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세상 삶이 두려워 현실을 피하거나 외면함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서간이 주는 윤리적 교훈은 강조점을 바른 곳에 두자는 데 있다. 즉, 법규나 규정만이 모든 척도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바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의 관계, 곧 내가, 나의 삶이 그분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가이다. 이는 그리스도 신자 개개인에게, 나아가 교회 공동체에 의미심장한 이야기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1,18) 자신의 삶을 위해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깊이 그리고 든든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또 다른 교회 구성원들과도 그렇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은 내 실존의 처지를 직시하고 더욱 새로운 나로 거듭 태어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신앙인은 언제나 한편 이미 새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의 처지와 다른 한편 “창조주의 모상” 사이의 긴장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콜로새서의 저자는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을 창조하신 그분의 모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우리 모두를 초대한다: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을 따라 새로워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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