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글마루 문학기행
-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고향을 찾아서 -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 노벨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이 낳은 대문호의 고향, 캘리포니아의 살리나스(Salinas)를 이 가을에 찾아가 보았다. 지난 11월 7일(토요일), ‘2009 글마루 문학기행, 존 스타인벡의 고향을 찾아서‘라는 테마로 41명의 문우들이 1박 2일의 노정에 나섰다. 고 고원 선생님이 창설하고, 현재 많은 회원이 활동 중인 문학 동호회 ’글마루‘ (회장 정해정)가 ‘오렌지 글 사랑 모임’의 후원으로 추진한 이번 기행은 기성 문인들뿐만이 아니라 문학을 사랑하는 일반인들도 여럿 동승을 하였다.
토요일 오전 7시, 정원을 빼곡히 채운 40인승 버스는 LA의 한인 타운을 출발하여 살리나스(Salinas)로 향했다. 주최 측이 직접 대여한 그 버스 안의 풍경은 여타 관광을 염두에 둔 여행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글마루'의 회원인 김동찬 시인이 직접 가이드 역할을 맡았고, 편도 예닐곱 시간 중 많은 부분이 존 스타인벡과 그의 작품 해설로 할애가 되었다. 스타인벡의 대표작인 '분노의 포도', ‘에덴의 동쪽’, ‘통조림 공장 골목’, ‘달콤한 목요일’, ‘진주’, ‘생쥐와 인간’ 등, 여행에 앞서 작품을 나누어 읽었던 회원들이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막힘없는 작품 해설을 이어갔다. 수많은 작품을 남겼고, 익히 머릿속에 기억되는 저명한 작가이지만, 막상 그의 작품을 몇이나 읽었던가. 고작 영화로, 미국 고등학교 권장도서로, ‘스타인벡’은 우리의 독서목록 중 변방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늦게나마 그의 심오한 문학 세계를 발견한 우리는, 인간과 사회를 예리한 시각으로 다루는 주제의식과 놀라운 문장력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존 스타인벡은 1902년 2월 27일 중부 캘리포니아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어촌 살리나스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탠포드 대학에 입학을 하였지만, 1925년까지 무려 7년 동안 생활고에 시달리다 결국 학업을 포기하고 만다. 그 후 제 2차 세계 대전 중 뉴욕헤럴드 트리뷴지 종군기자로 활동하게 되는데, 당시 전쟁의 단상이 잘 드러난 그의 논픽션, ‘한 때 전쟁이 있었다.’를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자 생활 중 객관적인 사실보도가 아닌 주관적 기사를 즐겨 쓴 탓에 해고를 당하고 곧바로 대공황을 겪으며 갖가지 힘든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게 된다. 1929년, 그의 처녀작 ‘황금 배’는 고된 생활 가운데에서도 식지 않은 문학에의 열망의 소산이었다. 이후 1939년에는 ‘분노의 포도’로 퓰리처상을 받으며 역량 있는 작가 대열에 서게 된다.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 준 작품은 1962년에 쓴 ‘불만의 겨울’로 사실주의와 휴머니즘을 아우르는 작품성을 인정받아 대작가의 명예를 획득한다. 스타인벡은 생전에 세 명의 아내를 두었으며, 1968년 12월 20일, 지병인 심부전증으로 그의 세 번째 아내의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난다. 그가 66세 되던 해, 뉴욕에서였다.
스타인벡의 작품 세계를 너울처럼 오가다, 문득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넓은 밭에서 드문드문 가을걷이를 하는 농부들이 보였다. 구부린 등위로 소설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쥬드의 일가족이 겹쳐졌다. 터전을 잃어버린 유랑민이 절박하게 부여잡았던 젖줄, 예나 지금이나 땅은 피폐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동아줄이다. 시대가 달라졌다지만, 생계를 잇기 위해 거친 숨을 들이쉬는 농부는 오늘도 땅위에 허리를 숙이고 있다.
줄잡아 문학 공부만 한다면 더없이 지루할 터, 사회자의 촌철살인의 입담에 힘입어 버스 안은 여흥 또한 무르익어 갔다. 고원 작사, 권길상 작곡의 ‘글마루’ 회가를 필두로 ‘진도 아리랑’이 정찬열 수필가의 선창을 따라 버스 안에 목청껏 울려 퍼졌다.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일행의 얼굴을 익히고, 목소리를 기억하기에 더 없이 알맞은 시간, 버스 여행이 주는 귀한 선물이었다.
출발한 지 7시간쯤 지나 마침내 살리나스(Salinas)의 표지판이 보였다. 살.리.나.스. 지명을 가만히 읊조려보았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스타인벡이 어려 있다. 혀끝에서 동그랗게 말려오는 어감위로 그를 향한 반가움이 살포시 솟았다.
살리나스는 조그마하고 한적한 마을이었다. 낮은 가게들이 길가에 나란히 열을 짓고 있었지만, 정작 인적은 드물었다. 드문드문 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과 아주 드물게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 ‘혹 스타인벡의 작중인물, 그 후손이 아닐까?’, 호기심이 일어 자꾸만 차창에다 고개를 들이 밀었다.
오후 2시가 넘어 스타인벡 생가에 도착하였지만, 이미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1974년 비영리 목적의 한 독지가에 의해 현재의 레스토랑으로 재건축 된 그의 생가는 매주 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오전 11:30부터 오후 2:00까지만 영업을 한다고 쓰여 있었다. 양질의 음식에, 스타인벡을 떠올릴 수 있는 기념품과 그의 저서도 함께 판매한다고 이미 다녀왔던 이가 귀띔을 해 주었다.
‘존 스타인벡 센터'는 그의 생가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중앙 홀을 중심으로 스타인벡의 생애를 담은 영상물을 보여 주는 영화관과 그의 유품이 전시되어있는 방, 그리고 작품 속 시대를 고스란히 재현한 방 등이 아담한 건물 안에 자리를 잡았다. 다큐멘터리 영상속의 스타인벡은 영화배우 버금가게 수려하며 동시에 이지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어린 시절을 거쳐 열정적으로 활동을 하던 시절, 말년에 노벨상 시상식에 나타난 그의 육성까지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우리는 이미 그의 작품 속에서 여러 차례 조우를 하였으니까.
개인적으로 이 여행에서 가장 아꼈던 장소에 들어섰다. 어릴 적 그가 몸을 뉘였던 싱글 침대, 초등학교 급우들과 찍은 사진, ‘1965년 1월 25일’이라고 선명히 찍힌 그의 여권 등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 곳. 오래전에 그는 떠났지만, 바로 곁에서 숨 쉬고 있는 대문호를 경험하는 순간이다. 보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트럭 한 대가 시선을 끌었다. 1960년 9월, 스타인벡의 나이 58세에 애견 찰리를 태우고 미국 34개주, 소외된 뒷골목을 누볐다던 바로 그 차, ‘로시난테’(돈키호테의 애마 이름을 차용함)이다. 그 시기에 집필한 ‘찰리와 함께 한 여행’에서 의 한 구절을 옮겨본다.
"내 자신, 나의 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참된 미국의 언어를 듣지 못했고, 미국의 풀과 나무와 시궁창이 풍기는 진짜 냄새를 알지 못했고, 산과 물, 그리고 일광의 빛깔을 보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 알지도 못하는 것을 써온 셈이다. 이른바 작가라면 그 일은 범죄에 해당될 것이다. 해서, 나의 눈으로 과연 이 거대한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직접 발견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날 저녁, 살리나스의 서쪽 바닷가에 위치한 마리나 시티의 ‘할리데이 인’에 여장을 풀었다.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행 모두는 호텔의 미팅 홀로 속속 모여들었다. 스타인벡의 문학과 삶을 보다 심도 있게 정리해 보는 시간이 기다리던 터였다. ‘오늘날에 있어서 리얼리즘 문학은 가능할까’라는 주제로 황숙진 미주 평론가가 진행을 맡은 토론회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내닫고 있는 21세기 문학 시류에 과연 스타인벡이 지향한 리얼리즘 문학이 소통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짚어보는 장이었다. 소외받은 인간들의 비극과 부조리한 사회 체제를 냉철하게 비판했던 스타인벡의 문학정신이 우리 문인들의 창작 세계에도 살아나기를 염원하는 장이기도 하였다. 각박한 이민 생활 속에서 과연 문학이라는 거대한 산맥을 오롯이 바라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그 밤, 우리의 가슴 속에는 스타인벡에게서 뿜어져 나온 문학 열정이 둔중하게, 하지만 제어할 수 없는 폭포수처럼 용솟음 치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 몬트레이로 향했다. 천천히 빠져 나가는 버스 뒤로 스타인벡의 고향, 살리나스가 아침 햇살 아래 조용히 깨어나고 있었다.
스타인벡 작품 중 ‘통조림 공장 골목’과 ‘달콤한 목요일’의 무대가 되었던 ‘캐너리 로(Cannery Row)’에 이르자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그의 숨결인 듯 살가웠다. 두 작품에 등장하는 몇몇 장소, 어분 창고와 매음굴, 그리고 해양생물 연구소. 이 곳일까, 혹 저 곳이 아닐까. 건물의 모양과 거리를 가늠해보는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사람들이다. 가을 태양을 빨아들이는 진공의 거리 한 복판에서 지나 간 시간의 낮은 음률을 듣는 사람들이다. ‘뱃고동 소리만 들어도 온 몸이 쭈뼛쭈뼛해지고 발이 들썩거린다.’고 한 스타인벡, 그의 흉상이 바다를 등지고 미로처럼 꼬부라져 사라진 골목길을 바라보고 있다.
버스가 그 유명한 17마일 드라이브로 접어들었다. 빼어난 골프코스 '페블비치'와 아름다운 저택을 끼고 구불구불 태평양 해안을 감아 도는 길이었다. 그 광경은 깔끔하고 날씬한 신사처럼 도도한 멋을 풍겼다. 하지만, 소박한 어촌의 냄새를 간직한 살리나스가 벌써 그리워지는 것은 어쩐 일일까.
버스로 얼마를 달려 덴마크 민속촌 ‘솔벵'(Solvang)에 이르렀다. 솔벵은, 1900년경 덴마크에서 미국으로 건너 온 이민자들이 산타 이네즈(Santa Ynez) 산맥의 분지에 새운 마을이다. 혹독한 추위에도 질기게 살아남았다는 바이킹 족의 후예들은 캘리포니아의 허허벌판위에도 자신들의 고향을 고스란히 옮겨놓는 저력을 보였다. 눈부신 햇살아래 그림처럼 반짝이는 덴마크 전통 가옥들은 한 편의 동화 속 삽화와 같다. 근처에 자리한 '산타 이네즈' 미션도 놓칠 수 없다. 1804년에 세워진 산타 이네즈는 로마시대에 참수형을 당한 여성 순교자의 이름을 따왔다. ‘숨겨진 보석’이라는 애칭에 걸맞게 고즈넉하면서도 기품이 서려있는 모습이다.
버스가 곧장 LA로 향한다고 알려왔다. 빡빡한 일정을 마치고서도 버스 안에서는 활기가 떠나지 않았다. 하루 전 서먹한 인사를 나누던 우리는 마치 수년 동안 정을 쌓아온 벗들 마냥 서로에게 거리낌이 없었다. 쉼 없이 이어지는 장기 자랑에 스타인벡의 원작 영화를 보겠다던 일정도 슬그머니 취소되어 버렸다. 노래 한 자락뿐이 아니었다. 시를 낭송하는 이, 서편제 가락을 띄우는 이, 그리고 ‘에덴의 동쪽’의 영화본과 소설본을 세세히 비교해 가며 들려준 이영우 소설가에 이르기까지, LA 도착을 코앞에 두고도 열기가 끊이질 않았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또 다시 스타인벡이 나의 정수리를 잡아당긴다. 반세기도 훌쩍 넘겨 쓰인 종이 책장 속에서 나에게 말을 걸어온 한 사람, 그와 이렇게 깊은 인연을 맺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단숨에 관통하는 문학의 힘이며 동시에 두 발로 그에게 직접 찾아간 여행의 힘일 것이다. 그 힘을 빌려, 보다 많은 독자들이 미국이 낳은 대문호와 귀중한 인연을 맺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첫댓글 죄송합니다. 제가 이제야 여러분의 덧글을 보고 부랴부랴 올립니다. 용서하시길...
서노기님도 문학기행문을 시인의 눈으로 잘 썼구만요.
나도 그의 작품을 읽고 쓰느라 좀 늦었지만, 쓰고나니까 정리되는 것 같아요.
내가 쓸때 함께 고민하고 쓴 기행문이기에 애정을 가지고 읽게 되었네용.
다른 난에 있는 두개의 문학기행 후일담 글을 조회, 종례 난으로 옮겼습니다. 행사를 치르고 난 기록문으로서의 가치도 있어서, 글마루 활동 역사도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입니다. 차후에 글마루에 무슨 일들이 있었나 확인해볼 때 조회, 종례 난이 일종의 회의록 역할을 하겠기에... 두 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후일에 후학들이 글마루 사 정리할 때 큰 도움이 될 것 입니다.^^
서노기님.. 글 쓰시느라 수고 많으셨네요. 이런 원문을 어쩜 그리 표시도 안나게 잘 띵갔는지 역시 신문사의 기자님들
재주가 좋으신거 알았슴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