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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문화사랑회
◎ 남천교 개건비와 지석묘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번 읽어보면 고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하여 다시 작업을 해서 올렸슴다.
○ 남천교 개건비
◦소재지 : 전주시 동서학동 128 전주교육대학교
1791년 만들어진 남천교의 개건 경위를 기록한 비석으로 정조 18년(1794)에 세워졌다가, 철종 13년(1862)에 다시 세워졌다. 원래는 현재의 전주교와 남천교 중간에 위치에 있었으나, 현재는 전주교대 교정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석은 1794년에 세워진 비석에 뒷면과 측면을 깍아서 3면에 1862년에 새로이 비문을 새김으로서 원래의 비문은 후면이 되어 버렸다. 전면에는 개수내력과 공사에 힘쓴 자들의 명단이 기록되었고, 2면의 측면에는 건립연대(동치 원년 임술; 1862)가 적혀 있고 후면에는 돈을 낸 지방 군현별 액수의 명단과 건륭(乾隆;청 고종) 58년(1794)의 명기가 있으며, 4면의 측면에는 다리 건립에 동원된 연군(烟軍)의 총수와 동원된 지역명 그리고 각수의 명이 새겨져 있다. 비신의 높이는 165cm, 폭 71.5cm, 두께 71,5 기단부 높이 50cm, 비갓높이 33cm로 비갓과 비신은 일체로 되어 있다.
전주부성은 호남에서 가장 도시였으며, 조선 왕조의 발상지이며, 또한 영호남의 중요한 통로로서 교통이 번화한 곳으로 인물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다. 그래서 전주천에는 예로부터 전주 인근지역으로 왕래하기 위하여 남천교, 싸전다리(현 전주교) 서천교, 그리고 완산교 등의 의 다리가 만들어졌다. 특히 전주에서 임실 남원 순창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천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오래 전부터 다리가 놓여졌다.
남천에는 원래 석교(돌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계묘(1783)․정미(1787) 연간의 홍수로 다리가 도괴되어 장마때마다 사람들이 많은 불편을 겪었다. 1790년 부로(府老) 가선대부 김응록(金應祿), 박사덕(朴思德)이 다리를 건립할 것을 논의하여 이 뜻을 관에 고하니 전 현감인 장익복(張益福), 전첨사 하복언(河福彦)이 각각 500량씩을 내고, 7,8명의 부로들이 의연금을 부조하였다. 여기에 관찰사 윤시동(尹蓍東)이 이 뜻을 가상히 여겨 700량을 기부하고, 승려로 하여금 원근에 모금을 하게 하여 14,000을 모으게 하였다.
그 다음해(1791, 신해)에 한양에서 차을 끌어다가 서산의 돌을 운반하여 8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2월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시공 전일에 전주천에 지진이 일어나 돌이 저절로 넘어졌으나 몇 달 동안의 공정에서는 역도가 한사람도 부상자가 없었다고 한다. 새로이 부임한 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800량을 기부하여 남은 공사를 끝마치게 되었다. 이 역사를 감독한 사람은 중군(中軍) 孟廷幹과 李紹였고, 이 역사에는 전주의 연군 7,400명이 동원되었으니, 부동면, 부서면, 부남면, 부북면, 용진면, 상관면, 난전면, 이동면, 우림곡면, 조촌면, 회포면에서 차출되었다.
이 다리는 중국의 오강(吳江)의 홍교를 본떠 5개의 홍예가 있는 무지개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다리를 일명 안경다리라고 하였다. 다리 난간에 다섯 마리의 용을 장식하였다고 하여 오룡교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남천교는 그뒤 여러차례 파손과 개축을 되풀이하다가 1907년 마지막으로 수축한 이후 홍수로 파괴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지게 되었다. 남천교가 무더진 뒤에는 싸전 다리로 불리던 전주교가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현재는 그 자리에 콘크리이트 다리가 놓여져 있다.
○ 교대 지석묘
원래 남고 산록에 있던 것을 전주교대로 옮긴 것이다. 옮길 당시 개석 일부가 지하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개석은 길이가 1.72n, 폭 1.34m 높이 0.79m에 이르는 자연암의 괴석이다. 현재 받침돌은 4개이다.
◎ 충경사(忠景祠)와 이정란(李廷鸞)
○ 충경사
◦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동서학동
충경사는 조선 선조대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전주성을 지키고 국난 극복에 이바지한 공으로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받은 이정란(李廷鸞)을 모신 사당이이다. 1981년 이정란 선생 기념사업추진회가 결성되어 건립되었다.
○ 이정란의 향토 수호 활동
이정란은 전의 이씨 가문에서 承孝의 아들로 1529년(중종 24) 전주에서 태어났다. 1562년 문과에 급제하여 1575년 47세의 나이로 교서정자(校書正子)로 관직에 진출하여 저작박사을 거쳐 1578년 전적(典籍;정6품)으로 승진되었으나 곧 해미현감으로 좌천되어 잠시 관직을 그만 두었으나 1581년 다시 전적으로 기용되었으나 정쟁 속에서 부지하지 못하고 6년동안 불우한 세월을 보내다가 1587년 양재찰방을 거쳐 1590년 개성도사로 제수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 봄 관직에 물러나 초야에 묻혀 있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64세의 노령이었다.
이정란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전라도를 향해 쳐들어올 때 전주부성을 지키는데 공을 세우면서이다. 임란이 일어난 직후 조선을 일방적인 패배를 면치 못하여 왜적이 부산진에 상륙한지 20일 만에 수도 한양이 적에게 짓밟히고, 2개월 뒤에 평양성이 함락되는 참담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적의 육군이 호남을 향하여 공격하여 왔고, 6월 23일 마침내 금산성이 적에게 함락되는 등 전라도도 위기의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 영정과 왕조실록 등도 전란을 피하여 옮겨지게 되었다. 적은 주력부대를 보내 용담 진안을 공격하고 곰티를 거쳐 전주룰 공격고자 하였고, 금산에는 잔류병력 천여명을 남겨 이치를 통하여 전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 때 이정란은 의병을 모집하여 행재로 가려고 하였으나, 부윤이 죽고 적이 금산에 주둔하여 위급함을 본 감사 이광이 그의 용만행을 저지하고 그로 하여금 전주부의 일을 관장하게하였다. 그는 장정 7백여명을 모집하여 정협(鄭車夾)․윤개(尹槩) 등을 종사를 삼고 객사문 밖에 장단을 설치하고 삽혈동맹한 후 기병을 4문에 산포하고, 만마동에 복병을 설치하여 낮에는 기치를 설치하고 밤에는 횃불을 나열하여 부중의 경계태세가 엄중함을 보여 주었다. 또한 두 종사로 하여금 각각 정병 100여명을 거느리고 남고산의 억경대의 위아래에 매복하게 하여 정탐하러 온 왜적 4명을 생포하기도 하는 등 기지를 발휘하여 왜적이 전주 부중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정란은 이번 전주 수성의 전공으로 종부시 첨정으로 승진하였고, 수원부사를 거쳐 동정대부로 승질하여 공주목사로 나갔다가 파직환향하게 되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정란은 전주부성 수성에 노력하였으나 부윤 박경신이 도주하자 상경하여 이 사실을 고하였고, 조정에서는 그를 전주부윤 겸 삼도소모사에 제배하였다. 그는 적이 물러간 뒤 전주 부성에 돌아와 전란의 수습에 노력하였다. 선조 33년(1600)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전주 한계서원에 제향되었고, 순조 7년(1807)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임란 극복에 있어서 호남의 역할과 호남방어
주지하다시피, 임진왜란은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전란이었으며, 민족사적 위기였다. 그러나, 조선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기는 하였지만, 왜군을 물리치고 국가를 지키고 왕조를 유지하며 민족사의 연속성을 확보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임란극복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이 임란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전라도의 역할은 대단히 컸다. 임란 개전초부터 지역군이 동원되어 근왕병으로 출동하여 경기도 용인지역까지 올라가 왜적과 싸웠으며, 전란이 계속되는 동안 중요한 전투마다 병력이 동원되어 임란 극복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한산도 대첩을 거둔 이순신과 이억기 휘하의 수군병력의 주력이 전라도 서남해에서 동원된 장정들이었으며, 행주대첩에서 권율이 지휘한 군대가 전라도 군대였고,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김천일․황진․최경회 등 삼장사 이하 많은 사졸이 전라도 장병들이었다. 이와같이 임란 극복에 있어서 전라도에서 관군과 의병이 지속적으로 동원되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뿐만아니라 호남 곡창으로부터 전란을 버티며 항전할 수 있었던 군량미의 보급은 물론, 국가의 재정이나 경상도 등 전란에 휩쓸린 지역민의 구휼미까지도 전라도에서 조달되었다. 따라서 임란기 전라도가 없었다고 한다면, 조선도 유지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순신도 당시 “국가의 모든 군비가 호남에 의지하고 있으니 만약 호남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임란 극복에 있어서 전라도가 특별히 다른 곳과 달리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임란 5년 동안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고 방어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전라도가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왜군의 수군을 남해에서 이순신이 막아주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은 아니다. 20일 만에 한양이 점령당하는 초기의 암담한 상황에서 왜적의 육군의 호남공격이 이루어졌고, 이에 대하여 전주부근까지 왜군이 진출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전라도의 지역군이 사투를 전개하여 방어함으로서 이루어졌다.
전라도에 대한 왜군의 본격적인 공격은 한양이 함락된 후부터 전개되었다. 선조임금을 쫒아 북상하던 왜군은 조선의 8도을 분할 지배하려는 전략으로 바꾸어 이미 정복한 지역을 각 장수에게 할당하여 지배하게 하는 한편 아직 점령하지 못한 전라도에는 왜군의 소조천융경이라는 장수에 침공을 명령하였다.
소조천융경은 당시 창원에 있던 부장 안국사혜경에게 호남을 공격하도록 하였지만, 그는 의령에서 곽재우의 의병에게 일격을 당하고 성주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에 주장 소조천융경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1592년 6월 중순 서울로부터 청주를 거쳐 영동 황간 지방으로 내려와 전라도의 무주 방면으로 향하여 공격해 왔다. 이때 전라도에서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접경지역에 관군을 배치하여 방어코자 하였으나, 왜군은 6월 19일경 무주를 점령하고, 이어서 금산으로 향하여 쳐들어왔다. 금산성에서는 금산군수 권종과 방어사 곽영이 이를 막아 싸우다가 곽영은 고산으로 철수하고, 권종이 전사하면서 6월 23일 금산성이 함락되어 호남침공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금산의 왜적은 주력부대를 보내 용담 진안을 점령하고 곰티재를 통해서 전주를 공격하게 하고, 금산에는 잔류병력 일천을 남겨 이치를 통해서 전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이광(李洸)은 당시 광주목사였던 권율에게 전라도 군사의 지휘권을 부여하여 남원에 배치하여 경상도로부터 넘어오는 왜적에 대비토록 하고, 웅치와 이치에는 김제군수 정담, 동복현감 황진, 나주판관 이복남 등이 지휘하는 관군을 배치하여 방어하도록 하였다. 마침 담양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된 고경명이 전라도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하다가 금산에 왜적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의 왜적을 치고자 금산을 향하여 진산으로 방향을 바꾸자 금산의 왜군은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이치를 향하여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진안을 점령한 왜군이 곰티재을 향하여 공격해 왔고, 웅치에서는 김제군수 정담 등이 이끄는 전라도 지역 장정들이 사투에 의하여 전력이 크게 상실되었으나, 마침내 웅치를 넘어 적이 안덕원 너머까지 진출해 왔다. (웅치전투)
위기 상황에 직면한 전라도 전주감영에서는 감사 이광이 전적을 지낸 이정란으로 하여금 부중의 사민들을 모아 부성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각읍 병력을 거느리고 유사시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만경대(또는 용함대)에 진을 치고 수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 때 마침 전라감사의 명령으로 남원에서 웅치로 이동하던 동복현감 황진이 전주에 도착하여 웅치를 넘어온 왜적을 안덕원 너머에서 격파하게 됨으로써 웅치를 넘어 전주부성을 공격해오던 왜적을 금산으로 쫒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안덕원 전투)
왜적이 안덕원에서 쫒겨가던 때에 금산에서는 전라도 의병을 지휘하던 고경명이 왜적을 공격하다가 순절하게 되고, 금산성에 남아 있던 왜군은 안덕원에서 퇴각한 병력과 합세하여 다시 한번 전라도를 치기 위하여 대둔산의 이치(배재)을 향하여 공격해 들어 왔다. 이를 동복현감 황진, 광주목사 권율이 막아 금산으로 퇴각시켰다. (이치 전투)
이렇게 본다면, 임진왜란 때 전라도가 지켜지게 된 것은 특정한 한 사람의 공로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적의 호남침공군에 대한 관찰사 이하 방어 태세, 고경명 호남의병의 동향과 순절, 웅치의 혈투와 안덕원에서의 승리, 전주 부성의 방어 태세, 이치에서 승리, 그리고 금산성에 남아 있는 왜적에 대한 끈질긴 저항과 공격 등이 어우려져 극도로 불리한 상황 속에도 호남이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극도로 참담했던 임란 초기 6월부터 8월까지 호남이 지켜지면서 관군이 대열을 정비하고 명의 원군이 도착할 시간적 여유를 확보함으로써 전황극복의 계기를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호남 곡창이 임진왜란 5년 동안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으므로서 조선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확보하여 임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호남 방어가 있었기에 전라도는 조선이 임진 5년 전쟁을 승리하는데 있어서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호남의 역할 때문에 정유재란 때에는 전라도가 왜적의 집중공격을 받아 유린을 당하는 참상을 겪기도 하였다.
◎ 남고산성(南固山城)과 남고진 창건비
○ 남고 산성
◦ 소 재 지 : 전주시 동서학동
◦ 지정사항 : 사적 제 294 호
전주 부성의 남쪽에 위치한 산성으로 고덕산 서북록의 골짜기를 둘러싼 포곡형의 석성이다. 견훤산성이라고 전칭되기도 하고, 고덕산성이라고도 전한다. 산성이라 함은 외성으로서 전란이나 기타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하여 시량 병기 등을 갖추어 놓고 성을 지키며 방비할 목적으로 쌓아 놓은 것이 상례이다. 남쪽의 고덕산 자락에서 이어지는 남고산은 천험의 요새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동쪽의 기린봉․승암산으로 이어지는 동고산성 지역과 더불어 전주의 남쪽 관문을 이루고 있어서 전주 방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전주의 외성으로 남고산성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남고산성은 옛날 신라말기에 무진주에서부터 일어나 전주 영역에 와성 왕을 칭했다는 견훤이 처음으로 쌓았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산세나 전주지방의 지세로 보아 이곳은 매우 중요한 곳으로 생각되어 그 이전부터 성터였을 가능성이 짙다고 보여지는데 고덕산 줄기에 쌓아 놓은 이 산성은 조선왕조 순조 때에 수축하여 남고진을 두게 되었으며, 남고산에 성을 쌓았으므로 남고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 전주부조에는 “고덕산성은 둘레가 1,413보이고, 성내에 7개의 샘이 있고, 시내가 있어 겨울이나 여름이나 마르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 전주부 고적조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는데 성의 높이가 8자라고 되어 있다.
문헌비고에 보면 ‘고덕산성은 전주의 남쪽 7리에 있으며 돌로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9천9백20자나 되나 지금은 폐지되었고 산성 안에는 우물이 일곱, 시내가 하나 있었다.’고 적혀 있다. 이러한 산성을 다시 수축하여 남고진을 둔 것은 순조 13년(1813)으로 되어 있다. 현재 전하는 남고 산성은 이 때 수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완산지》에는 둘레가 9천 9백 63보요 여첩이 1천 9백 44라고 적혀 있다.
남고산성의 평면 구성은 불규칙한 사다리꼴 모양을 이루는데, 중앙 북측에 위치한 각이 267.5m 높이이다. 산성의 동북변은 산능선을 따라 약 800m 길이이고, 동변은 길이 약 480m, 남변은 역시 283.8m의 높이의 동남봉과 254.4m의 서남봉 사이의 능선을 연결하는데, 길이 약 850m이고, 서변은 중앙에 수구가 있는데, 서남봉에서 수구까지는 약 320m, 수구에서 만경대까지는 200m, 만경대에서 북방 남고산까지는 약 300m이다. 산성의 전체 둘레는 약 2천 9백 5십m에 이른다.
산성 안에는 현 남고사 전방에 남장대, 후방에 북장대 그리고 남장대 아래 서쪽 골짜기에 진창 군기고 화약고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1894년 기록인 《여지도서》에 의하면, 산성이 만들어진지 59년이 되는 당시 남고진에는 진장아사(鎭將衙舍), 창고, 화약고, 군기고, 장교청 , 대문, 수직방, 내사, 행랑, 남장대, 북장대, 동문루, 서문루, 성암문루, 동포루, 만경대 석축, 남포루(천경대), 서포루(억경대), 북포루 등의 건물이 있었으며, 성첩 둘레는 2,693보에 여첩이 1,946보에 달하였으며, 제언이 4, 우물이 25곳, 민호 113호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화약 4,320근, 궁노 3기, 각50좌, 노시 10,000, 장창 100병, 군향미 6,060석을 저장하여 두었고, 산성별장 1명, 장관 22명, 군액 1,340명, 수문장 1명, 문직 5명을 두었으며 폐성 당시의 정원은 장졸 100명, 승군 1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고 전한다. 남고 산성내에는 관찰사, 산성별장 등의 공덕비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한편 1871년에는 관찰사 이호준이 계문하여 만마관 북방 5리 지점에 남관진을 신설하여 장대를 세우고 별장 1인이 남고산에서 겸무로 관리하였던 것이다. 만마관에는 관문루가 6간, 홍예문에 선철엽이 있고, 軆城이 150보, 여첩이 78보에 수문장졸수직방 3간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 남고진 창건비
남고산성의 수축과 남고진 설치의 전말을 기록한 비석으로 남고산성 서문지에 있다. 헌종12년(1846)에 세워진 것으로 최영일(崔英一) 찬, 이삼만(李三晩) 서로 되어 있다. 비신은 높이 132 cm, 폭 54cm, 두께 26cm의 오석제인데, 옥개석을 얹고, 화강석 기단석은 폭 111cm, 두께 72cm이다.
이 비문에는 남고산성을 수축하고 남고진을 설치한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전주 부성의 남쪽에 견훤 고성터인 남고산이 있는데 여기에서 부터 만막관(만마관)까지의 첩첩이 산맥이 이어져 천험의 요새를 이루어 임진왜란 때 이정란이 신출귀몰한 전략을 구사하여 전주부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하늘이 만들어준 험준함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영조 10년(1734) 갑인년 관찰사 조현명이 완산부성을 증축하고 나서 이곳에 성을 다시 쌓을 것을 꾀하였다가 임기가 차 그 뚯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순조 11년(1811) 에 이르러 관찰사 이상황이 부성내의 장보와 삼영 장군과 부성의 유지들과 더불어 상의하여 성 쌓기를 시작하였다가 이 또한 도중에 전임하게 되자 그 후임으로 관찰사 박윤수에 의하여 비로소 남고진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내용을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남고진 창건비를 쓴 이삼만은 조선 후기의 서예가로 자는 윤원(允遠), 호는 창암으로 본관은 전주이다.처음 이름은 규환(규환)이었는데 삼만이라고 고쳤는데, 만학, 만교 만혼이라 하여 지었다고 한다. 전주 교동에서 출생했으나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기골로 이사하여 살았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서예에만 전력하여 가정을 돌보지 아니해서 중년 이후에는 생활이 곤궁하였다. 그러나 부귀공명에는 뜻을 두지 않고 일생동안 서예에 몸을 바쳤다.
그는 처음에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전주의 한약 건재상이 약령에 가서 구입할 약재 품목을 이삼만에게 부탁하여 이삼만이 적어 주었더니 건재상이 그것을 가지고 대구 약령에 가서 약재를 사는데, 그 품목을 본 중국인 약재상이 감짝 놀라며 이 글씨를 누가 썼느냐고 물어 이삼만이라고 하였더니 그로부터 중국인에 알려져 중국인 제자가 생겼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전해지는 이삼만의 비문에도 “중국에 알려져 중국인 제자 수십명이 있었다”는 말이 보인다. 김정희가 1840년 제주도로 귀양갈 때 전주에 이르러 관찰사 이목연에게 부탁하여 객사에서 이삼만을 처음 만났는데 그 때 김정희가 이삼만의 글씨를 청해보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현재 그의 글씨를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 외에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지리산 칠불암과 천은사의 편액 그리고 남고진 사적비이다. 그의 서체를 유수체라고 한다. 제자 중에는 서홍순이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가 50여세에 독사에 물려 죽었으므로 독사만 보면 때려 죽였으므로 그 고장 사람들이 장독에 뱀의 침범을 막기 위해서 ‘이삼만’이라고도 써 붙였다고 한다. 매필이 없기로 유명하다.
◎ 만경대와 정몽주 시
◦ 소재지 : 전주시 동서학동 남고산성 내
남고산에는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 등 세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만경대는 산성의 서문을 향하여 우편으로 높게 솟아 있는 바위위 봉우리로 전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이곳의 남쪽 바위 벼랑에는 포은 정몽주가 지었다고 하는 시가 새겨져 있다.
千刃崗頭石徑橫 登臨使我不勝情 靑山隱約扶餘國 黃葉賓紛百濟城
九月高風愁客子 百年豪氣誤書生 天涯日沒浮雲合 矯首無由望玉京
(천길 바위머리 돌길로 돌고돌아/홀로이 다다르니 가슴애는 근심이여/청산에 깊이잠겨 맹세하던 부여국은 /누른잎 어지러이 백제성에 쌓였도다. 구월의 소슬바람 나그네 시름짙고/백년기상 호탕함을 서생은 그르쳤네/하늘가 해는 지고 뜬구름 덧없이 뒤섞이는데/하염없이 고개들어 송도만 바라본다.)
이시는 포은 정몽주가 고려 우왕 6년(1380)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운봉에서 황산대첩을 거두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 올라 고려를 걱정하며 지은 우국시라고 한다. 이성계가 오목대 잔치에서 한고조 유방이 불렀던 「대풍가」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는 마치 쓰러져가는 고려왕조를 비웃는 듯, 또 자기의 웅대한 포부를 말하는 듯 하였다고 한다. 이를 듣고 있던 포은 정몽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홀로 말을 달려 남천을 건너 고덕산성 만경대에 올라 멀리 북쪽하늘을 쳐다보면서 고려 왕조를 걱정하는 우국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시는 포은 정몽주의 문집인 《포은집》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주 산천조에도 실려 있다.
한편 만경대의 봉우리 위에는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는 만인송이라는 낙낙장송 한그루가 서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 베어지고 그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 남고사(지)
◦ 소 재 지 : 전주시 동서학동 2가 724
◦ 지정사항 : 전라북도 기념물 제72호
원래 남고사는 신라 문무왕 8년(668) 열반종조 보덕화상의 수제자인 명덕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때 보덕이 고덕산 남쪽에 경복사를 창건하여 열반종의 근본 도량으로 정하였는데, 명덕화상이 남고사를 창건하여 그 말사의 자격으로 열반종의 전통을 이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남고연국사(南固燕國寺)라고 하였다고 하지만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연구사(燕口寺)라고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후일 언제부터인가 남고사(南高寺)라 칭하였다고 하는데, 문헌상으로 볼 때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는 이달충이 1367년에 지은 「전주관풍루기」에 ‘고을 남쪽에 남고(南高)라는 절이 있어’라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이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오늘날의 이름인 남고사(南固寺)라고 칭하게 된 것은 조선 성종 이후였다고 한다.
남고사는 고려시대까지 교종계통의 사찰로 내려오다가 조선조 세종 때 모든 종파가 교선 양종으로 통합되어 48개의 사찰만 공인되었을 때 탈락되어 사세가 크게 위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 선종이 크게 신장되면서 선종계 사찰이 되었다.
원래의 남고사는 현재의 남고사 대웅전 우측(서쪽) 전방의 건물이 있는 곳이다. 현 건물의 건립연대는 약 100년전 내외로 추정되며,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우측에 약사여래불이 봉안되어 있다.
남고사에서 전주부중으로 울려퍼지는 저녁 종소리는 전주의 전원적 풍경과 어울어져 한폭의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라하여 남고모종(南固暮鐘)이라하여 전주 팔경의 하나로 꼽혔다.
◎ 관성묘(關聖廟)
◦ 소 재 지 : 전주시 동서학동 613 남고산성내
◦ 지정사항 :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5호
관성묘는 관제묘라고도 하는데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를 무신으로 받들어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초부터 관왕묘를 건립하여 일반 서민에게까지도 그 신앙이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 정유왜란 때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1598년 처음 서울 숭례문밖에 남관왕묘가 건립되었고, 명나라 장수 양호 등의 강요로 관왕의 생일인 5월 13일 선조 임금이 직접 관왕묘에 나가 분향하고 삼작을 올리기 까지 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임진 정유난에 전투가 있을 때 자주 관왕의 영혼이 나타나 신병이 명나라 군사를 도왔다고 하는데, 명나라 장수들이 관왕묘를 건립하는데 힘쓴 것은 아마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남관왕묘가 건립된 다음해 1599년 동관왕묘 건립이 논의되어 3년 1602년 준공되었다.
지방에도 관왕묘가 건립되었는데, 1598년을 전후하여 강진 안동 성주 남원 등 네곳에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강진의 고금도는 도독 진린이, 안동 관왕묘는 진정영도사 설호신이, 성주의 관왕묘는 명장수 모국기가 건립하였으며, 남원의 관왕묘는 유정이 건립하였다.
숙종이후 관왕묘에 대한 국가적 관심아래 제식이 거행되었으며, 고종 때에 서울에 북묘와 서묘, 그리고 지방에는 전주와 하동에 관왕묘를 건립하였다. 그것은 위태로운 당시의 정세에서 관왕묘를 통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정신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주의 관왕묘는 고종 10년(1884)에 남고산성별장 이신문(李信文)과 전라관찰사 김성근(金聲根)의 발기로 세워졌다. 광무 3년 봉심사로서 건지산의 시조묘 검분차 내려왔던 이재곤의 상주로 수년전 전주에 관왕묘가 창건되었음을 알고, 고종은 향축봉송절차를 남원 강진의 예에 따라 시행하도록 본도에 명령을 내려져, 연 2회 춘추로 관에서 제사를 행하여 왔다. 융희 원년 궁내부의 사전이 폐지됨에 따라 완전히 민간 유지에 의한 관리로 넘어가 오늘날에는 관우를 숭배하는 몇몇 수호인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다.
관성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자형집으로 되어 있으며, 관우와 제갈공명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 삼국연의도와 채용신
관성묘에는 조선 말기의 화가인 채정산(채용신)이 그린 삼국연의도 10폭이 있었으나, 1975년 1월에 도난당하였다가 1980년 3월 6일 되찾았다지만, 훼손이 심하여 창고에 보관하였는데, 그나마도 몇 년전 창고화재로 소실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삼국연의도를 그렸던 채용신은 본관을 평강으로 어릴 때 이름은 동근이었는데, 용덕이라고 고쳐 불렀고, 장성해서 용신이라고 했는데, 한때 정산원을 지냈다고 하여 채정산이라고 불렀다. 그는 채권영의 아들로 1848년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는데, 어릴때부터 스승없이 인물화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부친이 빗공장을 차리고 있었는데, 화각에 뛰어난 솜씨로 궁중에 납품하는 인연으로 그 그림솜씨가 알려져 화원이 되었다고 한다. 20세 때 고종의 영정을 그렸으며, 그 외 고운 초치원, 면암 최익현, 일유재 장태수, 간재 전우 등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관력은 일설에 의하면, 무과에 급제하여 정산현감 부산첨사, 금부도사, 한성부윤 등 정이품 벼슬에 오른 것으로 전하는데, 민비의 신임을 받아 친청파에 기울었다고 한다. 민비가 시해된 뒤 채정산이라 자칭하며익산 금마에 숨어살다가, 다시 정읍 신태인으로 옮기게 되었다. 1941년 7월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첫댓글 모델답게 폼도 잘 잡았고마요, 글구, 잘생긴 두 아자씨들이 뉘신가 혔더니, 세상에나, 울 친구들였자녀, 으미, 자랑시러버라........전주에 저런 곳이 있었네그랴, 하마지에서 한번 걸어보고, 내려와서 청국장 먹으면 정말 맛나겟당.....언제 울덜도 함 데려가봐바바여........
시간만 있음 하시라도 연락 줌 데꼬 가불겠슴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