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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안 보충자료 I
문화인류학적 차원에서의 이슬람권 이해
(2000)
1. 기독교 선교는 이슬람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
1.1. 이슬람권 이해의 패러다임 변화
전형적인 이슬람권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기독교 학자나 비기독교 세속 학자들을 불문하고 이슬람을 종교로만 인식하여 연구하는 경향이 짙은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슬람은 그동안 일반적으로 그 교리를 중심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지식층의 이슬람만이 정통적인 이슬람으로서 알려져 왔다. 특별히 근세기의 이슬람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슬람의 세계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구분을 중심으로 주로 정치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져 왔다. 그들의 철학과 신학과 율법학과 정치이념 등만이 주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이다. 서구의 이슬람 학자들 혹은 동양학자들(Orientalists)도 이슬람의 이러한 “고등종교적” 현상들과 정치적인 이슬람만을 이슬람의 내용으로 취급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학적인 경향은 기독교 선교의 이슬람 이해에도 그대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슬람의 이해에 있어서 기독교 진영에서도 이슬람의 교리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등을 중심한 내용들만을 주로 이슬람 연구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이슬람권 내의 사람들, 즉 “무슬림”들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는 태부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슬람 연구는 사람보다도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의 이상주의 및 그 이론들에 대한 내용만을 주로 다루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이슬람의 이상주의를 대부분의 평민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이슬람이 주창하는 이상주의적인 사상들은 얼마나 내부에서 실현되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미흡한 실정인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지난 반세기 동안 기독교 진영에서의 이슬람 연구는 새로운 물꼬를 틀 수 있었다. Kenneth Cragg, Bill Musk, Dudley Woodberry 등과 같은 선교사 출신의 학자들의 공헌으로 이슬람권 연구는 이데올로기 연구 일변도에서 벗어나서 무슬림들의 삶의 현상으로 그 연구와 관심의 대상을 옮겨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특별히 이슬람권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하던 서구 선교사들이 오랜 기간을 현장에 있으면서 그들이 학교나 연구소에서 배웠던 이슬람의 현상과 실제로 평민들이 믿는 이슬람 사이에는 커다란 괴리가 있음을 간파하면서 이슬람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사람들”의 연구 쪽으로 그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현장 연구를 하던 종교문화인류학자들의 민속학적 보고서(ethnography)들이 출판되면서 기독교 선교 진영에서도 평범한 무슬림들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떠한지, 이슬람의 이상주의와는 어떠한 상호작용을 갖고 있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꾸란은 무슬림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슬람의 전통인 순나(sunnah, 혹은 hadith)의 내용은 어떠한지, 이슬람의 신비주의(Sufism)와 교리적인 이슬람과의 관계는 삶의 실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이슬람의 샤마니즘 현상의 원인과 이에 대한 이슬람 지도자들의 입장은 어떠한 것인지, 왜 이슬람권에는 정령숭배적인 풍습과 샤마니즘적인 현상이 편만히 있는지, 그 실례들은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또 이슬람은 근동지역에서 전세계로 전파되면서 토착적인 종교나 전통들을 왜 관용하였는지 등에 관한 관심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갖게 된 것이다. 교리적인 부분들보다도 실제적인 이슬람권 내의 사람들의 삶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슬람권 선교에 오랜 경험을 갖고 있는 서구의 선교 역사를 들여다 보아도 이러한 방향으로 관심을 갖고 이슬람권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특별히 선교학적으로 무슬림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다룬 것은 불과 이십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1)
필자도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 이슬람권에서 수년을 있어보았지만 이슬람의 실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학적인 도구를 갖게 된 것은 불과 지난 5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필자는 특별히 지난 1996년부터 1998년 사이에 탄자니아의 동해안에 위치한 Dar es Salaam이라는 도시와 Zanzibar 섬을 중심하여 무슬림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탄자니아 내륙 정부와 잔지바 정부로부터 문화인류학 연구가의 연구활동 비자를 받을 수 있었고 그 신분으로서 스와힐리 무슬림들의 내면의 삶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본 강의에서는 필자의 실제적인 현장 경험과 또 문화인류학자들의 현장 리서치 보고서 등을 토대로 하여 우리가 이슬람권 선교를 수행함에 있어서 꼭 필요한 현장의 인간 이해가 어떠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다루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1.2. 문화로서의 이슬람 이해
이슬람을 단순히 하나의 종교적인 체계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이슬람은 종교를 가리키기보다는 삶의 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쓸람”이라고 하는 말은 “안전하다” 혹은 “평안하다”는 뜻의 “쌀리마”라고 하는 동사에서 파생된 제 4형 동사의 동명사로서 “복종함” 혹은 “온전히 바침”의 의미를 갖는다. 즉, 알라에게 온전히 순복하는 것이 이슬람이다. 모든 삶에 있어서 알라에게 온전히 바치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이슬람의 기본 정신인 것이다.2) 그리고 “이쓸람”하는 사람들이 “무쓸리임”(“이쓸람”의 분사형)인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은 종교이기는 하지만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되는 원리이기 때문에 “문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문화”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정의할 필요가 있겠다. 문화란 Spradley가 정의하듯이 일차적으로는 “문화적 지식(cultural knowledge)”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문화적 지식이라 함은 어떤 특정한 문화권에서 아이가 태어나서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성장해가는 과정, 곧 소위 “문화화 과정(enculturation)”을 통하여 갖게된 세계와 자신과 이웃에 대한 이해들 및 믿음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문화적 지식들은 문화적 전제들(cultural assumptions)이 그 기본이 된다. 이 문화적 전제들을 가리켜서 세계관(worldview)라고 말하는데, 이 세계관은 문화적 전제들과 함께 가치들(values)과 충성의 내용들(allegiances)을 내포하고 있다. 이 세계관은 또한 감정적인 차원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에 한 문화권의 세계관을 이해하게 되면 그 문화권에 속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가치관과 감정들과 그 감정들의 의미들과 그들의 믿음들(즉, 어려서부터 의심하지 않고 진리라고 믿어온 내용들)을 간파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슬람은 그것이 초자연적인 세계를 다루고 있고 인간이 신에게 순복하며 예배한다는 차원에서 분명히 하나의 종교이기는 하지만, 그 종교 자체가 사회의 모든 영역의 기초 및 원리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종교 이상의 문화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이다. 이슬람을 가리켜 “띤”이라고 아랍어는 표현한다. 즉, 종교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종교 가운데 하나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참 종교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의 모든 삶은 이 “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여서 이슬람의 세계는 종교가 곧 문화임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내용을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슬람을 무슬림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이슬람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삶 속에서 구현하고 있는가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 더 나아가서, 무슬림들은 과연 이슬람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만족하며 살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이슬람은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유익을 주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연구하여 보아 무슬림들의 내면의 세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슬람이 문화로서 사람들의 폐부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라면, 선교사들이 많이 사용하여 온 교리적인 접근은 그리 효과를 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이슬람권 선교 역사 속에서 이미 누차 지적된 부분들이기도 하다.
이슬람의 교리들과 이상주의를 외부인인 우리들이 아무리 잘 이해하고 또 변증학적으로 기독교적 답을 준다고 하여도, 무슬림들 입장에서 기독교인들이나 외부인들의 그러한 노력이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할 때에, 우리의 모든 노력들은 우리 스스로의 변증을 위한 것 외에 다른 의의가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슬림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고 필요로 하도록 돕기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므로 그들의 내면의 어떠한 부분들이 이슬람으로도 채워지지 않고 있는지 찾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소위 “내적 결핍감” 혹은 “내면의 필요들(felt-needs)”을 찾음으로써 그들의 실제적인 필요의 부분들을 정확히 진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필요의 부분들에 어떻게 접근하여야 복음이 그들에게 복음으로 인식될 수 있는지, 곧 복음전달의 접근방법들을 강구(講究)하여야 하는 것이다.
1.3. 무슬림들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적 도구
이렇게 무슬림들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외부인의 단순한 관찰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를 갖추지 않을 경우에는 비록 동질 문화권에서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동족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종교 및 사상면에서 판이하게 다른 이질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는 그들의 문화와 심리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가 되지만 언어만을 배웠다고 해서 그들을 이해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질 문화 내지 종교권에 있는 사람들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내면의 필요들”을 파악하기 위하여서는 몇가지 학문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필자가 사용하고 있는 방법론들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인간의 삶의 외형적인 구조와 인간들 사이의 관계 및 사회조직들 사이의 관계들을 파악하기 위하여서 우리는 사회학적(sociological) 접근들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서 더 깊이 들어가 그들이 자기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여 온 문화적 상징들과 형식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서는 문화인류학적(anthropological)인 접근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특별히 후자의 경우 소위 “민속학적 조사법(ethnography)”이라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이 방법론은 조사 대상인 사회의 문화적 의미들(cultural meanings)을 파악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하면, 외부인의 눈에 비쳐진 문화적 표현들과 형식들과 그것들에 부착되어 있는 다양한 감정들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이 의미들은 그 사회 구성원들이 살아나가는 데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렇게 내부인(insider, 곧 조사 대상인 그 사회의 실제 구성원들)의 세계 및 인간 이해 그리고 이에 따른 그 내부인들의 많은 이론들을 있는 그대로 정리하여 소개하는 현상학적 연구를 가리켜서 문화인류학자들은 “emic” 연구라 부른다.
이 emic이라는 말은 언어학에서 말하는 음소론(音素論 phonemics)이라는 영어 단어의 뒷부분을 따서 기독교 언어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인 Kenneth Pike가 1960년대에 사용하기 시작한 학술용어이다. 그는 또 음성학(phonetics)이라는 영어 단어의 뒷부분을 따서 etic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emic과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외부인들이 내부인들의 문화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을 가리킨다. 음소론은 말의 소리 뒤에 숨겨진 의미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Pike는 여기에 착안하여 이러한 용어들을 만들어 내었다. 오늘날 민속학적 조사 곧 ethnography를 연구하는 이들은 이 개념들을 매우 유용하게 쓰고 있다. 이 민속학적 조사를 수행하기 위하여서 이를 수행하는 조사가(ethnographer)는 먼저 emic의 입장을 철저하게 연구하고(이를 위하여서 필자는 Spradley 교수의 참여관찰법과 인터뷰방법을 동시에 사용하였는데, 이것을 실천하기 위하여서는 약 4학점에서 8학점 정도 분량의 훈련을 요구함), 이 emic 이해을 토대로 하여 etic의 분석을 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조사 방법론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선교사들에게 가장 필수적인 과목이 된다. 선교사들이야말로 문화와 그 의미들을 다루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문화연구의 도구는 반드시 숙지되어야 한다. 성경적인 메시지가 그 문화에 적합하게 들려지도록 연구하고 또 그 메시지가 어떻게 그 문화들을 바꾸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이가 선교사이기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한 훈련이 모든 선교 훈련 프로그램에 반드시 비중있게 포함되어야 한다.
1.4. 무슬림들의 종류?
앞에서 언급한 도구들을 갖고, 또 이슬람에 대한 편견들을 일단 내려놓고, 무슬림들의 삶과 그 사회를 깊이 들여다보게 되면, 이슬람이라고 하는 엄청난 괴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될 만한 부분들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이제 그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잘 이해하고 또 복음으로 접근하는 데에 좋은 접촉점들을 마련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는 자세를 견지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는 타문화권으로 갈 때에 버려야 될 몇가지 부정적인 자세들이 있다. 본 항목에서는 우선 이것을 다루고 다음의 논의들을 진행하여 나가도록 하겠다.
사람들은 다른 문화권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가 살아왔던 문화권의 문화적 전제들을 기준으로 다른 문화권의 삶의 양식들을 해석하게 마련이다. 이것을 가리켜 “자기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선교사들에게는 커다란 선교의 방해거리가 된다. 특히 자기문화중심주의 입장에서 다른 문화권의 삶의 양식들을 판단하고 그 의미조차도 외부인인 자기의 문화적 지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가리켜서 “나이브한 실재인식(naive realism)”이라고 한다. 이 역시 선교사들이 피하여야 하는 자세이다.3)
자기문화중심주의 및 나이브한 실재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에 우리는 타문화권의 종교현상들을 우리 기독교적인 의미들로 해석하기가 쉽다. 그 한 예가 무슬림들을 기독교인들을 이해하듯이 분류하는 것이다. 즉, 명목상의 기독교인을 말하듯이 명목상의 무슬림들을 말하는 경우를 종종 듣는데, 이것은 이슬람의 성격을 깊이 파악하지 못한 소치이다.
이슬람에서 무슬림이 된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에서처럼 거듭난다든지 하나님을 마음에 영접하여야 한다든지 하는 어떤 영적인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슬람에서는 원죄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새롭게 영적으로 피조되어야 한다고 하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처음부터 약하게 창조되었고 비록 죄(실수)를 범하였지만 알라 신에게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슬람의 의미이다. 도덕적인 죄에 대한 신의 의로운 분노와 죄책(guilt)에 대한 개념 등이 부재하기 때문에4) 이슬람에서의 구원론은 종말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인간의 영원한 구원은 종말에 가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지 이 생에서 구원을 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거듭난 무슬림”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명목상의 무슬림”도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일한 무슬림의 연속체상에서(on the same continuum of Muslim) 무슬림들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 이슬람의 이상주의적인 정통성에 좀더 가까운 소위 “정통 무슬림”을 연속체의 그 오른쪽으로 하여 좌측 끝에는 이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극히 토속화(indigenized)된 무슬림 등에 이르기까지 무슬림이라고 하는 정체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들이 모두 무슬림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이슬람 세계도 한 가지의 성격으로 묶을 수가 없을 정도로 그 이슬람의 특질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또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무엇이 정통 이슬람인가에 대한 무슬림 학자들 사이의 견해들도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무슬림들을 만날 때에 그들의 외견상의 삶의 양태를 놓고 그들이 “정통”이다, “명목상”일 뿐이다, “혼합주의적”이다, 등으로 분류하거나 말하는 것은 이슬람 세계의 진면목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가 되는 것이다. 서부 아프리카 무슬림 출신인 Yale 대학의 이슬람 역사 교수이자 복음주의자인 Lamin Sanneh 교수의 말대로 무슬림의 세계를 논할 때에 정통이슬람이다 민속이슬람(folk Islam)이다 하는 개념은 매우 인위적인 분류일 뿐이다.5) Peter Lienhardt가 지적한대로 소위 “정통”과 “비정통”은 모든 무슬림들의 마음 속에 다 자리잡고 있는 이슬람의 실재인 것이다.6) 실질적으로 이슬람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이슬람의 교리와 역사 자체가 혼합주의적(syncretistic)이며 복합적(synthetic)한 성격을 두드러지게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슬람의 교리만을 이해하여서는 결코 한 사람의 무슬림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슬람의 교리는 특별히 이슬람 발생 초기의 아랍의 상황을 중심하여 발전된 것이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아랍식 정통 이슬람”을 이해하였다고 하여서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어느 무슬림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한 지역의 무슬림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그가 태어나서 성장한 그 지역의 문화와 문화적 세계관과 전통들을 파악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지역마다 이슬람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슬림들도 표면적으로는 다 “정통성”을 주장하며 교리적으로 일치함을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 내면의 문화적 의미들과 그 성격들은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을 이해하고 또 무슬림들을 알기 위하여서는 이슬람의 세계가 갖고 있는 이중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볼 때에는 무슬림들이 “정통”과 “비정통”을 혼합시켜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순수하지 못한” 이슬람을 신봉하는 것 같지만, 이슬람의 성격 자체와 그 교리의 내용 자체가 앞서 언급한 대로 혼합주의적인 성질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는 희한(稀罕)한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슬림들의 삶의 깊은 내면을 이해하고 그들을 복음으로 돕기 위하여서는 이슬람의 이중적인 특성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전제되었을 때에 우리는 그들에게 적합하고 이해될 수 있는 방법으로 복음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독자들의 (혹은 수강하는 분들의) 무슬림들의 세계 인식과 그들의 내면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필자가 『세계선교(World Missions)』잡지 35호(1999년 봄․여름호, 총신대학교부설 선교연구소 간행)에 기고한 소고(小考) “이슬람의 두 얼굴과 기독교 선교” 중에서 상당한 내용을 발췌하여 아래에 소개하고자 한다.
2. 현대 이슬람 세계에 편만한 정령숭배 사상들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이슬람 교리에 따른 종교 의식을 규례에 따라 행하는 반면 (금요일에 사원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 등), 동시에 주 중에는 만일 가정에 문제가 있거나 신변에 어려움이 생기게 되면 일종의 “샤만 (shaman)”을 찾는다. 이슬람 지역에서 샤만은 아랍어로 “샤이크 (shaikh)”나 “이맘 (imam),” 혹은 “피르 (pir)”,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마알림 (maalim)” 또는 “뫌리무 (mwalimu)” 등으로 불리는 영들의 전문가들을 가리킨다. 이슬람에서 실제로 알라 신은 인간의 세상으로부터 너무 멀리 존재한다.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절대자이지만, 실제로 인간의 삶의 대소사는 인간들이 책임져야만 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인간이 일상사에서 도움과 힘 (power)을 얻기 위하여서는 인간보다 더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다고 믿어지는 영들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러한 영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영들을 부릴 수 있는 지식과 영력을 가졌다고 믿어지는 위에 언급한 무슬림 샤만들의 사회적 위치는 공식적인 이슬람에서 “샤이크”들이 차지하는 위치 이상으로 중요하다.
또 예를 들면, 알라의 계시의 책으로 믿는 꾸란은 그 내용 뿐만 아니라 그 책 자체가 어떤 영적인 힘을 갖고 있다고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믿는다. 따라서 사람들이 병이 들거나 집안에 어떤 불행한 일이 생기면 이러한 악운을 해결하기 위하여 알라에게 직접 기도하기보다는 무슬림들은 “샤이크”나 “이맘”을 불러서 일종의 의식을 행하는데, 이때에 항상 꾸란의 어떤 특정한 수라[장(章)]를 읽는다. 그 이유는 그 특정한 수라 자체에 악한 힘을 물리치는 영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발흥하면서 무하마드는 이전의 이방적인 정령숭배 의식들을 다 제거하여 유일신 종교를 완벽하게 구축하려고 하였지만, 실제로 이 신흥 종교는 이전의 우상숭배 사상에 강력히 반대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그것에 채색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무하마드는 바위나 돌무더기들을 숭배하는 것과 어떤 나무들이나 샘물들을 신성시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정죄하였지만, 이러한 사상은 이슬람의 정통 의식 속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메카의 흑석 (Ka‘ba)을 숭배하며 (그들은 그것이 절대로 숭배가 아니며 알라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만지면 알라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메카의 성소에 있는 젬젬(Zemzem) 샘물을 어떤 능력과 축복의 근원으로 보는 것은 분명히 정령숭배 사상이 이슬람에 혼합되어 남아 있는 증거이다. 특별히 메카 순례 (hajj) 의식은 이슬람 이전부터 내려오던 메카의 전통 의식으로서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많은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 사회적 현상이다.7) 또 이슬람에서 복술가나 무당 같은 샤만들은 정죄되었지만, 무하마드의 언행을 보면 복술가나 샤만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이것은 후에 무하마드 숭배 사상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지역으로 가면 전통적인 이방적 복술가들이나 마술사들과 같은 샤만들은 사라지지만 이슬람의 형태로 나타난 샤만들을 만날 수 있다.
또한 무슬림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jinn)이나 까리나(qarina, 태어나면서 개인을 따라다닌다고 믿는 영) 등과 같은 영들의 개념은 이슬람 발생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것이 꾸란과 이슬람의 교리 속에 스며든 것들이다. 또한 이슬람이 비아랍 지역으로 확산될 때에도 이슬람은 그 지역의 전통적인 영적 세계관과 융화되어 일종의 혼합주의적인 세계관을 창출하였다. 예를 들면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로 이슬람이 들어가면서, 아프리카의 아주 강한 조상숭배의 사상은 이슬람 종교 안에 흡수되어 버렸다. 이렇게 흡수되는 과정에서 소위 아프리카화(Africanization)와 이슬람화(Islamization)가 혼합적으로 발생하였다.
다시 말하면 아프리카의 조상 숭배는 이슬람화되었고 이슬람의 내세 사상은 아프리카 전통 사상과 비슷하게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아프리카의 토속적인 관념에 의하면 조상은 육신적으로는 죽었으나 영적으로는 살아서 몸이 살아 있을 때보다도 더욱 강력하여진 것으로 믿어진다. 이제 이슬람이 들어와서 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은 조상의 영혼에게 더 이상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알라에게 기도할 때에 조상을 통하여, 즉 조상에게 알라에게 기도하여 달라고 부탁하는 방식으로 기도한다. 이들이 더욱 이슬람화되게 되면 아프리카 무슬림들은 알라에게 조상을 위하여 기도한다.8) 다시 말하면 이슬람이나 심지어 기독교 사상이 들어왔다고 하여 아프리카 사람들의 뿌리 깊은 곳에 박혀 있는 조상 숭배 사상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모양만 바뀌어 나타날 뿐이다.
필자의 경험을 하나의 예로 소개하겠다. 탄자니아의 잔지바라고 하는 무슬림 섬 남단에 있는 마쿤두치(Makunduchi)의 사람들은 겉보기에는 아프리카의 내륙 사람들처럼 생활습속이 전적으로 아프리카적이고 이슬람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그들 스스로는 무슬림임을 자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잔지바의 이슬람 지도자들이나 무슬림 지성인들조차도 그들을 정식 무슬림들로 인정하고 있다. 마쿤두치에서는 약력으로 매년 7월 즈음이면 "무아카 코과"(Mwaka Kogwa)라고 하는 그 지역의 전통적인 종교의식을 행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음력으로 신년이 되는 행사이다. 그 내용은 마부아(Mavua)라고 하는 그 지역을 수호하는 영에게 관계된 것들이지 알라에게 관계된 것들은 아니다. 물론 꾸란을 낭송하고 이슬람의 기도 의식이 있는 것 같지만 대부분의 행사는 그 지역의 전통적인 것이다.
이 종교 의식을 주관하는 최고의 지도자는 여자인데, 필자는 현재의 지도자의 스승인 조모(祖母)를 인터뷰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분에 의하면 오래전에 잔지바의 이전 대통령 중의 하나인 모 대통령은 자신의 대통령 당선을 위하여 이 노파에게 찾아와서 복을 빌었다고 하였다. 이 대통령은 당선되었는데 그는 누가 보아도 “정통” 무슬림이었다.
이렇듯 이슬람의 세계는 그들이 아랍 무슬림들이건 혹은 비아랍 무슬림들이건 간에 정통 이슬람의 지역과 민속 이슬람의 지역이 확연하게 구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 자체가 혼합주의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만큼, 이슬람이 확산되는 곳에는 민속이슬람의 현상이 자연히 일어나게 되어 있다. 물론 어느 정도 이슬람화되었는가에 따라서 민속 이슬람적 성격이 반비례하여 나타나겠지만, 이 두가지의 성격이 모든 이슬람권에 다 나타나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표면적으로는 공식적인 이슬람의 교리에 의하여 그들의 종교적인 의무 조항을 나름대로 열심히 수행하지만, 이들 무슬림들의 내면 세계는 그들의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문화관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3. 지역 이슬람 (Local Islam) 속에 나타나는 민속종교 (Folk Religion)
바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통 이슬람이라고 하는 내용 속에는 많은 정령숭배의 요소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정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슬람의 이상주의적인 교리의 내용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수니의 율법주의적인 이슬람을 기본적으로 지칭하는 것이지, 우리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단 사상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성경적 혹은 복음주의적인 “정통”의 개념과 혼돈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 상의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필자은 “정통”이라는 표현 대신 “지역”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여서 아랍 이슬람, 북아프리카 이슬람, 동남 아시아 이슬람 등등으로 지역의 특성에 따라서 이슬람을 구분하며 이해하자는 것이다. 이 구분도 실제로는 더욱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즉, 사우디 아라비아 이슬람, 예멘 이슬람, 이집트 이슬람, 이란 이슬람, 터어키 이슬람, 탄자니아 이슬람, 감비아 이슬람, 인도네시아 이슬람, 말레이지아 이슬람, 태국 남부 이슬람, 북미 이슬람, 등등으로 세분하여 연구하고 이해함으로써 선교의 전략도 그 지역의 무슬림들에게 맞는 접근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더욱이 나아가서는 지역 내의 부족들에 따라서 또 이슬람의 성격이 달라지게 되므로 부족의 전통과 문화에 따라서 더욱 세분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필자가 사역하던 탄자니아의 이슬람권은 해안선을 따라 발달된 스와힐리 이슬람과 내륙의 이슬람으로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스와힐리 이슬람도 부족에 따라서 자라모 이슬람, 은뎅게레코 이슬람, 혹은 지역에 따라서 잔지바 이슬람, 바가모요 이슬람, 탕가 이슬람 등등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현지를 리서치하여 본 결과, 그 지역 혹은 부족에 따라서 그들의 전통적인 정령숭배의 내용이 약간씩 다르며 이에 따라서 약간씩은 다른 선교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각 지역 이슬람에는 다 공식적인 교리적 이슬람의 요소와 민속 혹은 토속적인 종교의 요소가 둘다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슬람은 그 시작부터가 혼합주의(syncretism)의 성격을 갖고 탄생하였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정통”이라고 하는 개념은 종교적이기보다는 사회적 혹은 인종적인 편견이 더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랍의 이슬람이 세계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이슬람은 표층구조로서의 교리적인 부분을 고수함과 동시에 그 내면에는 그 지역의 토속적인 정령숭배 사상을 그대로 흡수하여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수니 이슬람이건 시아의 여러 분파들이건 그들은 모두가 다 스스로 정통임을 자처하고 자부심을 갖는다.
심지어 이슬람의 신비주의(Sufism)까지도 정통이라면 정통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이슬람의 소수의 근본주의 혹은 원리주의자들은 이러한 이슬람 신비주의나 토속적인 정령숭배적인 요소들을 다 발본색원(拔本塞源)하여 소위 정통 이슬람 왕국을 건설하여 보고자 그들의 이상주의를 위하여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보지만, 결과는 인간의 깊은 내면의 세계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소위 “정통 이슬람”이라고 하는 이슬람의 이상주의 내지는 율법주의는 오히려 보통 무슬림들의 신개념을 마비시켰고, 그들의 내면 속에 생명과 내세에 대한 안전감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을 더욱 증대시켜 버렸다. 이러한 인간의 답답한 깊은 심리가 바로 무슬림들이 정령숭배 사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심층부분이 그동안 많은 서구 선교사들이 보지 못하였던 부분이며 오늘날 회교권 선교사들이 깊이, 그리고 신중하게 들여다 보아야 할 부분인 것이다.
3.1. 공식 이슬람과 민속 이슬람의 종교적 특질
지역마다 나타나는 민속이슬람적인 현상이 다 다르기 때문에 본 장에서 한마디로 그 모든 현상들을 일반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공식적인 이슬람(formal Islam)과 민속적인 이슬람(folk Islam)의 개략을 대비해 놓은, 아래의 비교표는 일단 이슬람 내면의 이중 구조를 개괄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공식 이슬람 Formal Islam | 민속 이슬람 Folk Islam | |
기본적인 이슈들 | -알라의 계시 및 무하마드의 선지자됨 (선지자의 마지막 인봉) -알라에 대한 절대 복종 -인생의 종말에 대한 경고 -무하마드의 전통을 고수 -세계의 이슬람화 | -구체적인 삶의 현상을 다룸 -즉, 죽음과 질병과 같은 인간의 두려움의 대상들을 다룸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들을 다룸 (미움의 문제, 저주의 문제, 저주를 푸는 문제 등등) -이 땅에서의 복락과 성공을 추구 |
영적 세계에서 중요한 존재 및 개념들 | -알라신 -천사 -사탄, 진(jinn)들 -알라의 절대 주권적인 의지 (In-Sha'-Alah) | -진(jinn)들 (3.2. 참조) -그 지역의 토속 영들 -까리나 -죽은 성자들이나 조상의 영혼 -운명 -복 또는 힘 (power, Baraka) -흉악눈 (the evil eye) |
중요한 영적 지도자 및 영력 소유자들 | -샤이크 (Shaykh), 이맘(Imam), 울라마 (Ulama) 등으로서 주로 꾸란과 하디쓰를 가르침. -이슬람 신비주의 (Sufism) 지도자들 | -샤만(shaman)들이 있는데 이들 역시 샤이크, 마알림, 피르 등으로 지역에 따라 다르게 불리움. |
종교적인 장소 및 의식들 | -모스크 (회교 사원) -순나 (무하마드의 가르침)에 따른 예배 및 기도 -지크르 (dhikr, 알라를 명상함. Sufi들의 의식) | -샤만들의 사당 -성자들의 무덤 -특별한 조상들의 무덤 -복술(卜術, divination) -점성술(占星術, astrology) -저주(sorcery) 및 저주 해소(witch craft) -지크르를 영들 의식에 사용 -무하마드의 탄생일 축하 의식 (스와힐리 이슬람에서는 마울리드(maulid)라함) |
3.2. 민속 이슬람의 심리학 및 무슬림들의 내면의 세계
그러면 왜 무슬림들은 그들의 공식적인 이슬람의 교리와 무하마드의 전승으로만 만족하지 못하고 토속적인 그네들의 전통종교를 용납하는가? 그 이유는 첫째로 이슬람 교리 그 자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슬람의 율법주의는 인간의 내면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꾸란 자체가 인간의 내면의 구체적인 문제들과 죄를 다루어주기보다는 알라의 절대적인 계시와 인간의 신분과 의무에 대한 내용들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성에 대한 문제의 답을 찾을 수가 없다. 더욱이 꾸란에 나타난 알라는 인간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 인하여, 인간의 구체적인 삶에 동참하는 사랑의 신이기 보다는 인간을 판단하고 언젠가는 심판으로 다가올 완벽하고 거룩하신 신이기 때문에, 피조물인 인간의 두려움과 예배의 대상이 될 뿐 감히 가까이 나아가 교제할 수 있는 인격적인 신은 아닌 것이다. 또 이슬람에는 원래 중보의 개념도 없다. 자기의 악행은 자신의 선행에 의하여서 극복되어야만 한다. 누군가가 대신 형벌을 받는다는 개념은 원래 이슬람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대속의 개념을 무슬림들이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심리는 다 비슷한 것임을 이슬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즉 신비주의와 민속 이슬람을 포함한 소위 대중 이슬람의 모습 속에서 저들도 구원을 갈망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같이 자신들의 “정통 아랍” 이슬람을 고수하는 민족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수니 무슬림들은 무하마드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정도를 지나쳐 신격화하기에 이른다. 실제로 꾸란의 명령에 의하면 무하마드에게 순복하는 것이 알라에게 순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8:1, 59:6-7 등). 특별히 역사적으로 무하마드 숭배 사상은 무하마드의 사후 급격히 수니 무슬림들 사이에 번져나갔는데, 특히 수피 신비주의자들 사이에서 무하마드 숭배 사상은 원래 이슬람의 정신을 넘어가 기독교의 구세주의 개념까지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시아파 이슬람의 경우는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시아 무슬림들의 신학은 그 분파마다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자기들의 영적인 지도자인 이맘(Imam)은 알라와 영적으로 직통하며 이것은 무하마드의 영력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믿는다. 특별히 그들은 12번째 이맘 혹은 7번째 이맘이 죽지않고 사라졌는데 알라가 이 세상을 심판하는 날 일종의 심판주로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 이맘을 ‘마흐디’라고 한다). 이렇듯이 수니든 시아든 무슬림들은 자신들과 알라 사이에 누군가가 중보하여 주기를 바라며, 그들의 이러한 강한 바램이 이슬람의 초기 사상을 넘어서 수피 신앙이나 민속 이슬람의 종교적인 형태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민속 이슬람은 공식 이슬람에서 해결하지 못한 인간의 일상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여 보고자 하는 인생의 자연스런 몸부림인 것이다. 알라는 너무 멀리 계시고 항상 심판자로 계시기 때문에, 아무리 이슬람에서 알라는 자비하시다고 외우고 기도 때마다 반복하여 미나렛(기도를 알리기 위하여 높이 세운 기도탑)에서 들여오지만, 그 누구도 알라가 자비하다고 느끼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알라는 엄중하고 정의로우며 강할 뿐이다. 이러한 이슬람 신학 자체가 갖고 있는 인간론 및 구원론의 한계 때문에 무슬림들은 자연히 알라와 인간의 중간 지대에 위치한, 소위 히버트 (Hiebert) 교수가 이미 지적한 “배제된 중간지대(the Excluded Middle)”에서 실제적인 정신적이며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9)
따라서 무슬림들의 이 중간지대를 이해하는 것은 선교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이 중간지대야말로 대다수의 보통 무슬림들이 실제로 영적 생활을 영위하는 정신 세계이며, 우리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공중권세 잡은 악한 영들이 무슬림들을 기만하고 온갖 비진리로 인도하는 지옥의 함정인 것이다. (왼쪽의 그림은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 무슬림들이 믿고 있는 우주관이며 알라신과 인간 사이가 그들이 실제적으로 살고 있는 정신 세계이다.) 다음 항목에서는 이 중간지대에 관하여 간단히 언급하겠는데, 특별히 보통 무슬림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영들과 샤만들의 위치에 대하여만 다루도록 하겠다.
3.3. 민속 이슬람에서 영들의 세계와 샤만들의 위치
민속 이슬람에서 진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이슬람의 일반 교리 자체가 진(jinn)들에 대한 존재뿐만 아니라 그들의 활동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슬람이 전파되면서 그 지역의 토속적인 영의 세계와 쉽게 융화되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반적으로 진에 대한 무슬림들의 믿음은 다음과 같다.
(1) 이블리스(Ibliss)는 진의 우두머리이다. 이블리스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탄에 해당하는 존재이다. 이슬람에서 사탄(Shaitan, ‘샤이딴’이라고 발음)은 악령(demon)에 해당하는 존재로서 악한 진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진들 사이에는 좋은 무슬림 진들과 악한 사탄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들은 알라신의 심부름을 맡아하는 천사들과는 구별된다.
(2) 진 역시 알라의 피조물인데 인간과는 달리 불가운데서 피조되었다고 믿는다. 또 반면에 인간과 비슷한 면이 많이 있다. 즉, 지정의의 인격이 있으며, 태어나기도 하고 결혼도 하며 죽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처럼 진들은 음식을 먹는다. 필자가 잔지바 섬에서 조사를 할 때에 병고치는 의식을 끝내고서 진들이 식사하는 순서가 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그 진들은 그들이 사로잡고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나타났는데 사람의 식사행위를 통하여 진들도 음식을 먹고 마신다고 하였다. 또 인간처럼 자유의지가 있어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3) 무하마드의 하디쓰 전승에 의하면 진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공중을 나는 종류이고 둘째는 뱀과 전갈과 땅에 기는 것들과 개 등과 같은 동물들로 나타난다고 하고 셋째는 한곳에 머물러 그 지역을 지키는 종류이다.
(4) 진은 형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무슬림들마다 그 견해가 다르기 하지만, 공통된 것은 어떤 인간이나 동물의 형체로 혹은 괴물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5) 이러한 진들 가운데 악한 진들을 가리켜 ‘샤이딴’이라고 한다. (아랍어인 ‘샤이딴’은 스와힐리어로는 ‘셰타니’라고 음차되어 사용되는데, 악한 진뿐만 아니라 악한 행실을 하는 사람들을 비유해서도 사용된다.) (이러한 샤이딴보다도 더 강하고 힘이 쎈 진을 가리켜 ‘이프맅 (Ifrit)’이라고 한다. 수라 27:39에서 단 한 번 언급된다.) 이러한 진들은 해가 지면서부터 활동이 활발하여지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밤을 무서워한다.
(6) 진들은, 특히 샤이딴들은 인간을 시기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인간이 불행해지도록 온갖 질병과 시기심과 미움을 불어넣어 준다. 그러므로 질병과 인간관계의 어려움은 그 원인이 샤이딴의 시기심에 있다고 믿는다. 흉악눈(the evil eye)도 인간이 갖고 있는 것이 있고 진이 갖고 있는 것이 있다.10) 무슬림들은 진이 갖고 있는, 즉 보이지 않는 흉악눈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다.
(7) 이외에도 진에 대한 무슬림들의 지식은 상당하다. 한가지 더 언급할 것은 많은 무슬림들이 사람과 진이 성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필자가 잔지바 섬을 조사할 때에 얻은 정보들에 의하면 많은 무슬림 여성들이 자신의 인간 남편 외에도 진 남편이 있다는 것이다. 남성들도 마찬가지로 여성 진의 공격을 받아 밤마다 성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11) 흥미있는 것은 이 진들은 동성을 공격하지는 않아서 동성연애를 하는 인간들보다는 더 도덕적이라고 어떤 무슬림은 서구사회의 변태적인 성풍속을 꼬집어 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진과 영계에 대한 무슬림들의 신앙은 모든 인간의 일상사의 원인자(causality)를 진들에게서 찾는다. 특별히 질병이나 재난 등과 같은 불행한 일들을 당하였을 때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형식적으로는 언급하면서도 (“인샬라,” 즉, “알라의 뜻이라면!”) 내면적으로는 자기들 스스로 영의 세계를 다루지 않으면 안되는 필요를 느끼며 두려움에 늘 사로잡혀 사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그리고 생활적인 깊은 필요가 무슬림 사회에서는 샤만들의 역할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샤만”이라는 말은 문화인류학적인 용어로서 “영들을 다루는 자”라는 뜻이다.12) 이슬람은 샤만의 역할을 하던 전통적인 복술가(diviner, witchdoctor, sorcerer)들을 거부하고 제거하고자 하지만 실제로 그 역할은 공식적으로 임명된 샤이크나 이맘 혹은 피르나 마알림 등에 의하여 계속 계승되고 있다. 그들은 진에 대한 남다른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통 무슬림들은 그들을 두려워하고 존경한다. 그들은 병의 원인이 어떠한 진에 의한 것인지, 또 누가 어떤 진을 통하여 저주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불행한 일이 발생하였는지를 아는 영의 세계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은 꾸란의 어떤 장이나 절들을 어떠한 경우에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고 사람들이 믿기 때문에 많은 무슬림들은 병을 고치고 액운을 떼우기 위하여서는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이들로부터 처방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슬림 사회의 샤만의 위치와 역할은 아주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정통”을 주장하며 고수하는 원리주의 무슬림들과 공식 이슬람의 상부 지도자들은 이렇게 민간에 만연하여 있는 무슬림 샤만들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는 있지만, 자신들도 어느 정도는 그 필요를 인정하고 있으며 또 사회적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러한 샤만과 민속이슬람의 현상들을 제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이슈는 이러한 무슬림 사회에 복음을 들고 선교사들이 들어갈 때에 어떠한 준비를 하여야 하며 어떻게 이러한 무슬림들을 접근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4. 이제 무슬림들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이제 결론적으로 간단히 우리 선교사들이 가져야할 자세와 전략에 대하여 언급하기로 한다. 다음의 간추린 내용들은 특별히 우리 한국교회 선교사들이 잘 실천하게 될 때에 무슬림들에게 더욱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바이다. 우리가 그네들과 같은 비서구 사회에서 온 기독교인이며 또 여러 면으로 열강의 지배라는 국제 질서 속에서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민족으로 부상함을 보여 줄 때에, 무슬림들은 기독교의 또 다른 면, 즉 기독교가 결코 서방의 종교가 아닌, 만인의 복음인 것을 이해하는 데에 더 도움을 받을 것이다.
4.1. 안으로의 선교 혹은 내면으로의 선교를 추구한다. 이슬람이 아니라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슬람권”이라는 거대한 영적 장벽을 대항하여 싸운다기보다는 이러한 거대한 기만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한 영혼의 내면에 답을 갖고 찾아간다는 차원에서 우리의 선교를 스스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무슬림권 선교는 “사람”을 찾아가는 선교이다. 오늘날 영적전쟁이라는 용어로 인하여 많은 경우에 선교를 단순히 대결의 양상만으로 이해하는 잘못된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물론 선교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여야 하는 영적 전쟁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전쟁은 사랑의 전쟁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 무슬림의 친구가 되어서 그의 내면의 세계관에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인내로써 그를 돕는 복음사역을 필자는 “안으로의 선교”(inward mission) 혹은 “내면으로의 선교”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 다시 말하여 앞에서 언급한 “중간지대”를 이해함으로써 그들의 내면의 깊은 고민들을 찾아가 해결하여 줄 수 있는 선교이어야 하는 것이다.
4.2. 먼저 복음의 “능력”을 알아야 한다.
진리의 대결이야말로 능력의 대결이다. 필자는 선교지에서, 복음은 그 자체가 능력이 있어서 (롬1:16) 복음이 들어갈 때에 엄청난 저항 세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의 메시지와 함께 나타날 때에 그들이 행하는 거짓된 능력들을 무색하게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능력대결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분명한 복음의 의미가 그들의 내면에 전달되는 것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 민속 이슬람이라고 하여 그들이 단순히 마술에 의지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민속 철학(native theories)들을 갖고 살며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그들과 인격적인 의미있는 만남들이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만남들을 통하여 복음의 의미가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슬림권에서의 우리의 삶의 모습은 다른 어느 사역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들은 경건하여 보이는 영력있다고 믿는 자신들의 샤이크나 이맘 혹은 피르 등에 대한 경외심이 대단하다. 따라서 우리의 경건한 모습과 언행은 특별히 민속 무슬림들에게는 큰 영향을 끼친다. 다시 말하면 경건의 대결이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과 경건성이 그들의 마음을 여는 데에 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별히 기독교를 서구의 세속주의로 아는 무슬림들이 너무 많다. 심지어 시골의 민속 무슬림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많이 본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사의 경건한 삶의 모습은 기독교가 서구 세속주의라는 편견을 불식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경건의 모습이 그 사역지의 문화관에서 볼 때에 분명히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의미가 전달되도록 형식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4.3. 이슬람의 교리 및 그 지역의 문화적 세계관의 특질을 파악한다.
이미 언급한대로 이슬람은 지역마다 그 특색이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일반적인 이슬람의 교리만을 이해하여서는 그 지역의 무슬림들을 깊이 이해할 수 없다. 그 지역을 깊이 조사해 보면, 필자가 위에서 언급한 민속 이슬람적인 내용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민속적인 종교의 내용과 형태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은, 따라서, 현장에서 체득할 수밖에 없다.
4.4. 사람들 (무슬림들)의 내면의 영적인 필요들을 간파한다.
현장 조사를 통하여 현지 무슬림들의 내면에 어떠한 두려움이 있는지, 그 지역에는 어떠한 진이 강하게 역사하는지, 또 흉악눈을 가진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 이러한 불행과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들은 누구에게 찾아가는지, 또 이러한 문제해결을 위하여 전문가는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는지, 등등을 선교사는 먼저 알아야 한다.13) 다시 말하면 그들의 영적 내지는 정신적인 필요을 찾아내서 그들의 아픈 곳을 싸매어주고 고쳐주기 위하여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복음이 답인 것을 알려주기 위한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다.
4.5.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긍휼과 사랑으로 접근한다. (R.F.B. 원리)
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들을 멸시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자신과의 투쟁을 계속한다. 그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못듣는 것은 그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갖고 있는 편견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는 기독교 서구 세계에 대한 오해 및 증오심, 그리고 외국인이나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무시한다고 느꼈을 때에 갖는, 자기방어로 인하여 생기는 거부감이 그 이유일 때가 많다. 이들에게 우리가 진정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인간관계의 원리를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필자는 이것을 “친구의 원리”라고 부르고자 한다. 즉, 어떤 모양이든지 서로 아는 관계를 갖게 되면 (Relationship), 다음에는 친구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Friendship).
무슬림들의 경우 친구가 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진정한 의미에서 친구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식사에 초대도 하고 또 식사 초대에 응하기도 한다. 이러한 친구의 관계가 형성되고 깊어질 때에 우리의 본론(Business)도 언급할 수 있는 것이다. 특별히 민속적 무슬림들은 좋은 관계만 형성되면 상당히 마음을 여는 것을 볼 수 있다. 복음에 대하여 좀더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환경을 설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14)
4.6. 성령께 많은 여지를 드리고 인내하며 기도한다.
항상 중요한 선교의 기본원리는 성령님께 예민하며 성령께서 하시도록 때로는 우리는 인내를 갖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성령님의 수단이요 도구로서의 충성이다. 우리의 소명은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무슬림권에서 이러한 사명의 삶은 어렵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혜와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을 우리는 하고자 하는 것이다. 순간순간을 성령님의 음성에 예민할 필요가 있다. 성급히 판단하는 것을 멈추고 우리가 배우고 익힌 선교학의 성경적인 원리들을 충실히 적용하면서 성령이 하시는 손길들을 경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7. 회심한 뒤의 사역이 더 어렵다. 그들을 양육할 준비를 한다.
무슬림권 선교에서 무엇보다도 힘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전도보다도 회심해 온 이들을 어떻게 돕는가 하는 일일 것이다. 무슬림으로서 가졌던 오래된 세계관과 사상들이 하루 아침에 없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사역자는 인내를 갖고 그들의 내면 안에서 작은 혁명들이 일어나도록 사랑으로 돕고 기다려야 한다. 주관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의 주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며 우리는 그분의 종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앞에서 언급한 무슬림들의 내면의 세계들과 그들의 신앙 체계 및 사상의 깊이들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특별히 성경을 함께 공부해나가게 될 터인데 무슬림이었던 회심자가 어떻게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효과적인가에 대하여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에 회심자를 양육하기 위하여서는 사역자/선교사 자신이 먼저 그의 배경과 그의 동족 무슬림 세계관을 깊이 아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1991년도에 케냐에서 회심한 어느 형제를 통하여 (그는 모스크에서 꾸란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쳤던 젊은 선생이었는데 그의 이슬람의 지식이나 꾸란 지식은 가히 놀랄 만한 학자적인 것이었음) 이슬람에 대하여 먼저 배우며 도전을 받는 기회가 있었다. 그를 만남을 통하여 사실 이슬람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필자가 얼마나 이슬람에 대하여, 그리고 타문화권에 대하여 무식하였는가를 드러내 준 은인이 된 것이다. 그를 통하여 필자는 처음으로 이슬람의 지성인들조차도 민속적 이슬람의 사상을 갖고 있으며, 이슬람에서는 이것이 하나도 이상한 이단적인 현상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 것이다.
간단하지만 필자는 경험에 비추어서, 그것도 실패하였던 많은 경험들을 돌이켜 보면서, 몇가지 중요하다고 믿는 선교사의 자세와 전략들을 언급하였다. 무슬림권 선교에 헌신하신 독자들과 특별히 무슬림권 선교사로 자원하신 분들에게, 그리고 무슬림권 선교에 여러모로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필자의 현장 경험과 조사에서 나온 위의 내용들이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1) 물론 20세기 초에 이슬람권 선교의 사도라 일컬어지는 Samuel Zwemer 선교사가 이미 이 부분에서는 선구자이기는 하지만, 그의 노력은 지난 20세기 후반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더 개발되지 않았다. Bill Musk와 같은 선교학자들에 와서야 비로소 이슬람 세계의 무슬림 실상들이 학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 학문의 영역에서는, 예를 들면, 미국의 문화인류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Clifford Geertz는 인도네시아와 모로코에서 무슬림들의 삶을 연구하였고, Vincent Crapanzano는 모로코의 신들림 현상들과 토속이슬람의 샤마니즘 현상을 연구하였고, I. M. Lewis는 소말리아의 Sar/Zar 샤마니즘 현상을 연구하였고, Linda Giles는 스와힐리 이슬람의 영들의 현상을 연구하였다. 필자는 스와힐리 이슬람에 나타나는 이슬람의 영인 진(jinn)들이 무슬림들의 내면의 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연구하고 있는 중이다.
2) 그러나 실제로는 알라의 마지막 선지자인 무함마드에게 더욱 충성하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하여서는 아래 대중 이슬람의 현상에서 다루기로 한다.
3) 이에 반하여 모든 문화들을 절대적으로 상대화시키는 경향이 지난 반세기동안 팽배하였는데, 이러한 “절대적 상대주의(absolute relativism)”는 하나님 조차도 상대화시키며 주관적인 신인식(神認識)들을 모두 인정하여 버림으로써 절대적인 복음을 희석시켜 버렸다.
4) 이슬람의 죄의 개념은 기독교의 죄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기서는 지면의 제약상 자세히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단, 간단히 말해서 알라가 용서할 수 없는 죄는 shirk라고 하는데, 알라에게 다른 신적 존재를 동반시키는 것(association of any other divine beings with Allah)이다.
5) 이 내용은 Sanneh 교수가 1995(?)년도 Fuller 대학원에 와서 강연할 때 언급한 말이다.
6) Lienhardt의 책 (1968) 38쪽 참조.
7) Yusuf Ali가 번역한 꾸란 수라 2장 196-203절 참조. 순례의 구체적인 의식 내용은 Ali의 2:197의 각주 217을 보라.
8) Woodberry 1990:317-318 참조.
9) “배제된 중간지대”라 함은 Hiebert 교수의 글 “the Flaw of the Excluded Middle" (배제된 중간지대의 결점)이라는 글에서 소개된 개념으로서 (Missilogy: An International Review 10.1. 1982년 1월호), 서구 선교사들이 그동안 현지인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정신적이고도 영적인 세계를 서구의 과학주의적인 세계관으로만 바라보아 베제시켜버린 데에서 기인한 용어이다.
10) 흉악눈(the evil eye)은 악의가 강한 사람이나 진에게 있다고 사람들이 믿는 마법의 눈을 가리킨다. 이 눈을 마주치거나 혹은 이 눈이 그 어떤 사람이나 동물을 저주하며 바라보게 되면 그 저주가 임한다고 무슬림들은 믿는다.
11) 물론 이러한 영들과의 성관계는 비단 무슬림 사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전통 종교에도 이러한 개념들이나 풍속을 볼 수 있다.
12) 이에 대하여서는 I.M. Lewis의 책을 참조 바람.
13) 선교현장 조사에 있어서 조사가는 항상 그 현지인들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무엇을 두려워 하며 무엇을 문제로 여기는지, 문제중심 조사법을 사용한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Spradley의 점진적 연속 조사 방법(Developmental Research Sequence (D.R.S.) Method)을 응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14) 무슬림 문화권마다 ‘친구’의 개념이 다르다. 어디까지가 친구인지, 친구의 종류는 얼마나 있는지 먼저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친구는 한국적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참고서적
Hiebert, Paul G.
1984 Anthropological Insights for Missionarie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94 Anthropological Reflections on Missiological Issue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Lewis, I. M.
1989 Ecstatic Religion: A Study of Shamanism and Spirit Possession.
London, UK: Routledge.
Lienhardt, Peter, trans. & ed.
1968 The Medicine Man. London, UK: Oxford University Press.
Musk, Bill
1989 The Unseen Face of Islam. England, UK: MARC, Evangelical
Missionary Alliance.
1994 Touching the Soul of Islam. England, UK: MARC, Monarch Publications.
Sanneh, Lamin
1989 Transating the Message: The Missionary Impact on Culture. Maryknoll, NY: Orbis Books.
Spradley, James P.
1979 The Ethnographic Interview. Orlando, FL: Harcourt Brace Jovanovich
College Publishers.
1980 Participant Observation. Orlando, FL: Harcourt Brace Jovanovich College
Publishers.
Westermarck, Edward
1933 Pagan Survivals in Mohammedan Civilization. Amsterdam, Netherlands:
Philo Press.
Woodberry, dudley
1989 Muslims & Christians on the Emmaus Road. Monrovia, CA: MARC.
1990 "The Relevance of Power Ministries for Folk Muslims." In Wrestling with Dark Angels. Edited by Peter Wagner and Douglas Pennoyer. Ventura, CA: Regal Books.
Zwemer, Samuel
1920 The Influence of Animism on Islam: An Account of Popular
Superstitions. New York: Macmil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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