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慶尙道) 남해현(南海縣)
樂民 장달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 경상도(慶尙道)
남해현(南海縣)
동쪽으로 진주 경계까지 40리이고, 서쪽으로 바닷가까지 15리이며, 남쪽으로 바닷가까지 36리이고, 북쪽으로 노량까지 38리이며, 서울까지는 1천 45리 거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이었다. 신라 신문왕(神文王)이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이 현령을 두었던 곳이나, 공민왕 때에 왜적에게 땅을 빼앗기고, 진주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에 우접하였다. 본조 태종조에 하동과 합쳐서 하남현(河南縣)이라 일컫다가 뒤에 다시 하동현을 설치하고, 진주의 금양부곡을 내속시켜서 해양현(海陽縣)이라 일컬었다. 얼마 안 되어 금양을 진주에 환속(還屬)하고 다시 남해라 하였으며, 세종조에는 곤명현과 합쳤다가 다시 쪼개고 그대로 현령을 두었다. 전하(殿下) 4년에 현 사람이 구례(求禮) 백성 배목인(裵目仁)과 서로 연결해서 모반했으므로 현감으로 강등시켰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신증』 연산군(燕山君) 4년에 현감으로 강등되었고, 지금 임금 2년에 다시 현령을 두었다.
【군명】 전야산(轉也山)ㆍ해양(海陽)ㆍ전산(轉山)ㆍ화전(花田)ㆍ윤산(輪山) 관풍안에 있다.
【성씨】 본현 배ㆍ김ㆍ백ㆍ진(陳), 제(諸) 촌성(村姓)이다.난포(蘭浦) 정(鄭)ㆍ박ㆍ고 촌성(村姓)이다.평산(平山) 조(趙)ㆍ배ㆍ백ㆍ조(曺)ㆍ화(和) 촌성(村姓)이다.
【형승】 진도(珍島)ㆍ거제(巨濟)와 함께 솥발처럼 우뚝한 것이 하늘 남쪽에 훌륭한 곳이다 모두 정이오의 기문에 있다.
【산천】 망운산(望雲山) 현 서쪽 2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소흘산(所訖山)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원산(猿山) 현 남쪽 16리 지점에 있다. 녹두산(鹿頭山) 현 북쪽 23리 지점에 있다. 금산(錦山) 현 동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 성현(城峴) 현 남쪽 24리 지점에 있으며 요해처이다. 미조항(彌助項) 현 동남쪽 87리 지점에 있다. 노량(露梁) 현 북쪽 40리 지점에 있다. 적량(赤梁) 현 동쪽 41리 지점에 있다. 동천곶(凍川串)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둘레가 55리이며 목장이 있다. 상주포(尙州浦) 현 남쪽 45리 지점에 있다.
관음포(觀音浦) 현 북쪽 21리 지점에 있다. 신우 때에 원수 정지(鄭地)가 수군을 거느리고 여기에서 왜적을 섬멸하였다. 왜적이 우리에게 패전한 것은 이 싸움에서 처음이었다.
○ 정이오의 시에, “망운산 아래에서 돛배 바람 바라보니, 동서로 오가는 배가 통행한다. 영웅의 당시 일을 묻지 마소. 지금도 사람들이 첫째 공이라 기쁘게 말한다네.” 하였다.
대포(大浦)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파천포(巴川浦)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난포(蘭浦)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이상은 아울러 어장(魚場)이 있다. 차산포(車山浦) 현 동쪽 6리 지점에 있다. 평산포(平山浦)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두음포(豆音浦) 현 동쪽 22리 지점에 있다. 염전포 (鹽田浦)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호을포(湖乙浦)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모답포(毛沓浦) 현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가을곶포(加乙串浦) 현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이상은 모두가 염밭이다. 소도(蘇島) 현 동쪽 6리 지점에 있으며, 온 섬이 모두 동백이다.
【토산】 살조개[江瑤柱]ㆍ문어ㆍ홍어ㆍ오징어[烏賊魚]ㆍ전복[鰒]ㆍ조개ㆍ대구[大口魚]ㆍ석류ㆍ유자ㆍ석이버섯[石蕈]ㆍ미역ㆍ애끼찌[弓幹桑]ㆍ비자(榧子)ㆍ닥종이[楮]ㆍ청어ㆍ모래무지[鯊魚]ㆍ홍합ㆍ송이[松蕈]. 『신증』 낙지[絡締]ㆍ준치[眞魚]ㆍ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농어ㆍ해삼ㆍ치자.
【성곽】 읍성 석축인데, 둘레는 2천 8백 76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성 안에 우물 하나, 샘 다섯이 있는데 사시로 마르지 않는다.
○ 정이오의 기문에, “남해현은 바다 복판에 있는 섬으로서, 진도ㆍ거제와 함께 솥발처럼 우뚝하다.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번성하여 국가에 도움되는 것이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 지역이 왜국과 아주 가까워서, 경인년부터 왜적에게 침략을 당하기 시작하여, 붙들려 가기도 하고, 이사하기도 하여 군의 속현인 평산ㆍ난포가 쓸쓸하게 사람이 없었다. 8년이 지난 정유년에는 바다에서 육지로 나와, 진양 선천(鐥川)의 들판에 거처하였다. 그리하여 토지도 지키지 못하고, 공물과 부세도 바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판도(版圖)에 기재된 재물과 부세가 나오는 곳이, 모두 풀이 무성한 사슴의 놀이터로 되어버렸고, 왜구들의 소굴이 된 지가 46년이었다. 그러나 계모가 있는 신하와 지략이 있는 장수의 빈틈없는 책략으로 선함을 수리하여 수전에 대비하고, 성과 해자를 설치하여서 수비를 엄하게 하니, 왜적의 기세가 떨치지 못하고 나날이 쇠하여졌다.
지금 임금이 즉위한 지 4년만에, 우수(雨岫) 임덕수(任德秀)를 등용하여 구라량 만호(仇羅梁萬戶)로 삼고, 겸하여 이 고을의 현령이 되게 하였다. 후가 와서는 계획을 베풀고 은혜를 베풀어서, 이로운 사업을 일으키고 민폐를 없애니, 군무(軍務)가 정비되고 민사 또한 거행되었다. 그러나 지역이 좁고 험하여서 백성들이 옛날에 살던 곳을 생각하였다. 후가 이 말을 듣고 민중과 협의한 다음,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최유경(崔有慶)공에게 사유를 갖추어서 조정에 알리도록 청하였다. 그리고 이웃 고을, 하동ㆍ사천ㆍ명주(溟州)ㆍ고성(固城)ㆍ진해 등 다섯 고을 사람을 동원하여, 고현 외딴 섬 복판에 성을 쌓았는데, 돌로 포개어 견고하게 하고 해자를 파서 못을 만들었다. 2월에 일을 시작해서 3월에 준공하였다. 남해 백성들이 죄다 돌아와서 그 밭을 갈고 그 집을 꾸며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며 즐기고 화락하였다. 물고기ㆍ소금ㆍ벼ㆍ따위 이익이 장차 지난 날의 부유함을 회복하리니, 이에 기문이 없을 수 없다. 후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문을 청하였다.
내 생각하니, 왕(王)이나 공(公)이 요해지를 방비하여, 그 나라를 지키는 것은 《주역》의 가르침이요, 이 성을 쌓고 이 못을 파서 죽기를 기약하고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맹자》의 격언이다. 그러므로 주(周) 나라가 북방에 성을 쌓으니, 험윤(玁狁)의 난(難)이 없어지고, 정(鄭) 나라에서 호뇌(虎牢)에 성을 쌓으니 초인(楚人)으로 인한 걱정이 없어졌으며, 우리나라에도 바닷가 고을에 성을 쌓으니 왜구의 침해가 그치게 되었다. 대개 성보(城堡)로 지키면 약한 것으로써 강한 것을 제어할 수 있고, 적은 것으로써 많은 것을 대적할 수 있으며, 편한 것으로써 수고하는 것을 대적할 수 있게 된다. 하물며 이 고을은 남방의 훌륭한 지역으로서, 해산물의 풍족함과 토산물의 풍부함이 나라 쓰임에 꼭 필요한 것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리고 진도와 거제를 부흥하는 것도 기대할 수 있다. 지금 바다에는 쓸만한 수군이 있고, 성곽에는 지킬 수 있는 누(樓)와 순(楯)이 있으며, 주야로 조심하는 봉수(烽燧)가 있으니, 흉악한 적을 방어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구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외딴 섬, 외로운 성에 외방의 구원이 없다 하여, 베개를 높이 베고 편하게 눕지 못한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나는 장차 돛대를 두드리며 남해 터를 죄다 찾아다니고, 성루의 난간 위에서 술을 들며 국가에서 인재를 얻었음을 경하하리라.” 하였다.
【관방】 평산포영(平山浦營) 석성이 있으며, 둘레는 1천 5백 58척이다. ○ 수군만호가 1명이다.
성고개보(城古介堡) 현 남쪽 22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 있는데, 둘레는 7백 60척이다. ○ 권관(權管)을 설치하여 방어한다.
우고개보(牛古介堡)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 있으며 둘레가 9백 13척이다. ○ 권관을 설치하여 방어한다.
『신증』 미조항진(彌助項鎭) 현 동쪽 87리 지점에 있다. 성화(成化) 병오년에 진이 설치되었다. 그 뒤에 왜적에게 함락되어 혁파했다가 가정 임오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석축이며 둘레는 2천 백 46척이고 높이는 11척이다. ○ 수군첨절제사 1명이다.
곡포보(曲浦堡)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9백 60척이고, 높이는 11척이다. 가정(嘉靖) 임오년에 우고개보(牛古介堡)를 혁파하고 여기에다 옮겼다. ○ 권관을 설치하여 방어한다.
상주포보(尙州浦堡) 현 남쪽 60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9백 85척이다. 가정 임오년에 성고개보를 혁파하고 여기에다 옮겼다. ○ 권관을 설치해서 방어한다.
【봉수】 금산 봉수(錦山烽燧) 북쪽으로 진주 대방산(臺方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소흘산(所訖山) 및 원산(猿山)에 응한다. 소흘산 봉수 동쪽으로 금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원산에 응한다. 원산 봉수(猿山烽燧) 동쪽으로 금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소흘산에 응한다.
『신증』 【누정】 주변루(籌邊樓)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덕신역(德新驛) 현 북쪽 35리 지점에 있다. 노량원(露梁院) 노량 남쪽 억덕에 있으며, 현 북쪽 40리 거리이다.
【불우】 보리암(菩提庵)ㆍ상도솔암(上兜率庵)ㆍ중도솔암(中兜率庵) 모두 금산에 있으며 남쪽 바다를 굽어본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19리 지점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고현 산성(古縣山城) 현 북쪽 1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1천 7백 40척이고 높이는 10척이다. 관당성(官堂城) 현 북쪽 1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7백 20척이고, 높이는 9척이다. 난포 폐현(蘭浦廢縣) 본래 신라 내포현(內浦縣)이며 본 섬 안에 있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내속시켰으며, 현 동쪽 21리 지점에 있다. 평산 폐현(平山廢縣) 본래 신라 평서산현(平西山縣)인데, 서평(西平)이라 하기도 한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내속시켰으며,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우산소(于山所)ㆍ미조항고진(彌助項古鎭) 석성이 있는데 둘레가 8백 35척이다.
『신증』 【유우】 본조 김전(金詮) 연산조에 귀양갔다.
【효자】 고려 함부(咸富) 낭산도(狼山島) 백성 능선(能宣)의 딸이다. 아비가 죽자 침실에다가 빈소를 차리고, 5개월이나 찬을 받들기를 생시와 다름이 없이 하였다. 성종 9년에 정문하고 요역을 면제하도록 하였다. 섬에서 나오게 하고, 소원에 따라 호적을 주현(州縣)에 편입시켰다.
【제영】 운개오배삼산근(雲開鰲背三山近) 권맹손(權孟孫)의 시에, “자라 등에 구름 트이니 삼신산이 가깝고, 바람은 고래 같은 물결을 말아 올려서 만리에 아득하다.” 하였다. 염점연청해초향(鹽店煙靑海草香)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장기(瘴氣) 끼는 귀로에 풍경 적으나, 염점에 연기 푸르고 해초는 향긋하다.” 하였다. 조성편해객(潮聲偏駭客) 김조(金銚)의 시에, “조수 소리는 매우 객을 놀라게 하는데, 신기루는 벌써 물가에 생겼네.” 하였다. 이역내조수도장(異域來朝水道長) 옛 사람의 시에, “성상의 은택이 끝이 없어 바다 바라보는 느낌인데, 섬 오랑캐도 은혜를 사모하여 강포한 버릇 버렸다. 궁벽진 지역이나 편하게 지내니 밥짓는 연기 둘렀고, 이역에서 조회 오는데 물길이 멀다. 태수는 계엄(戒嚴)하면서 화각(畫角)으로 전하고, 사신은 흥이 나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았네. 좋은 때에 훌륭한 경치 만나기 어렵나니, 내 말을 꼴 먹여서 바쁘게 하지 말라.”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토산】 대[竹]ㆍ김[海衣].
【방면】 현내(縣內) 사방 5리이다. 이동(二東) 처음은 10리, 끝이 40리이다. 삼동 처음이 45리, 끝이 90리이다. 남면 끝이 25리이다. 서면 끝이 20리이다. 고현(古縣)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설천(雪川) 동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 우산소(于山所).
【진도】 노량진(露梁津) 북쪽으로 38리, 하동ㆍ곤양으로 통한다.
【목장】 금산곶장(錦山串場)ㆍ동천곶장(凍川串場).
【창고】 읍창ㆍ외창(外倉)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조창(漕倉) 노량에 있다.
【사원】 충렬사(忠烈祠) 인조 계유년에 세우고,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이순신(李舜臣) 아산(牙山) 편에 보라. ○ 승첩비(勝捷碑)를 사(祠) 앞에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