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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의 시, 긍정의 힘
김신중(시인)
1. 아픔의 길
사람들은 아프다. 아픔의 이유도 가지각색이고 아픔의 이유를 모르고 아파하는 사람들도 많다. 아픔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고, 모든 사람은 아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아픔 때문에 마냥 슬퍼할 수는 없어서 치유하거나 극복하려고 애쓰지만 아픔을 든든하게 넘어서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아픔은 질기게 우리의 뿌리를 흔든다.
사람들은 아픔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어떻게 아픔을 넘어설 것인가를 고민한다. 아픔을 이기기 위해서 사람들과 부딪히기도 하고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기도 한다. 문화 충돌의 소용돌이에 빠져서 몸부림을 치기도 하고 내적 갈등 속에서 끝없이 번민하면서 아픔을 마주한다. 대부분 사람은 그렇게 아픔의 파고를 넘는다. 아픔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힘이 되는 순간이다.
정선남 시인은 아픔 앞에서 정직하다. 굳이 사람들에게 아픔을 감추려 들지 않는다. 시인도 아플 수는 있지만 아픔에만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감상(感傷)’이라고 말한다. 감상은 ‘사물에 대해 느낀 바가 있어 마음속으로 슬퍼하거나 아파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냥 머물러만 있으면 병든 언어가 된다. 정 시인의 아픔은 그냥 아픔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길을 따라 변한다. 시인에게는 아픔의 여정이 있으며 시집 『아픔도 근육이다』를 읽는다는 것은 아픔의 여정을 따라 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
시인이 걸었던 길을 따라가다 아픔을 절절하게 표현한 시 한 편을 만난다.
동네 끝자락 쓰러져가는 집이
혼곤한 세월을 붙잡고 서 있다
상처로 아픈 기억들이
주름으로 깊이 팬 자국으로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집 안 구석구석 묻어 있다
마른기침이 잦은 집 주인은
기울어진 대문을 닫아버리고
집 안은 가장 작은 섬이 되어
세상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담장밖엔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폭포수를 이루고 있는데
집 안엔 그늘이 쓸쓸하여 깊다
-「우울한 봄」 전문
“상처로 아픈 기억들이 집 안 구석구석 묻어 있다. 집주인은 기울어진 대문을 닫아버리고 가장 작은 섬이 되어 세상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집 안엔 그늘이 쓸쓸하여 깊다.” 시인은 세상과 연결된 통로인 대문을 닫고 세상에서 동떨어진 섬이 될 정도로 아프다. 아픔의 절대성이라고 명명할 정도의 아픔이 시인의 삶을 흔들고 있다. 흐드러진 개나리와 쓸쓸한 집이 대조를 이루면서 아픔의 절대성 앞에 절망하는 시인이 무척 안쓰럽다. 이런 아픔 때문에 정 시인이 걸었던 아픔의 길을 함께 걷고 싶어지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변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는 것은 아픈 것일까, 든든한 것일까? 특히 곁에 있는 사람이 말없이 바라보면서 지켜보고만 있다면 든든하기 이전에 섭섭한 생각이 들 수 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존경하는 마음은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표현하는 데서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시인은 단호하게 사랑은 표현하는 것이며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착각이며 아픔이라고 정직하게 말한다.
눈보다 심장이 먼저 알아보는 것
심장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혈관이 팽창하여 가슴이 요동치는 것
선홍빛 얼굴로 물들어 가는 것
입보다 표정으로 먼저 고백하는 것
눈앞에 두고도 간절히 그리운 것
그리움에 달보다 환한 얼굴로 먼저 달려오는 것
천년의 시간이 지나도 오늘처럼 생생한 것
해가 지고 달이 가도 꼭 만나지는 것
그리움의 무덤이고
애태움의 무덤인 것
언제나 변치 않고 제 자리에 있는 것
-「사랑 착각」 전문
사랑을 뭐라고 정의하기는 어려우나 마음을 감각적인 표현으로 드러냈을 때 우리는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감각은 우리 몸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랑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다가 은근히 마음이 저린다. 정작 나의 사랑은 “언제나 변치 않고 제 자리에 있는 것” 같다. 궁극적으로는 변치 않고 제자리에 있는 것이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리움의 무덤”이고 “애태움의 무덤”이기 때문에 착각이라고 해도 감각적이었으면 좋겠다. 변치 않고 제자리에 있는 것은 그 깊이를 깨닫기까지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척 아픈 것이다.
이 시집에는 그리움의 시편들이 많다. 그리움은 아픔의 연원이 된다. 추억의 방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시어머니는 당연히 그리움의 대상이다. 이웃집에 살았던 사람들이며 함께 했던 모든 사상(事象)이 그리움이다. 그중에서도 시인에게 가장 애틋하게 가슴에 남아 있는 아버지는 시인의 삶의 뿌리와도 같기에 그립다.
어느 해 겨울
아버지는
차가운 땅속을 열고 가셨다
그날처럼 추운 날 친정에 갔다
집안 곳곳 마당에도 거실 벽에도
아버지의 숨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방바닥에 납작 엎드려 코를 박자
군불을 지피며 나지막이 읊조리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히고
아랫목에선 아버지 냄새가
노릇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뭐하나 변변하게 하는 것이 없던 내가 혼자 힘으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들고 집에 갔던 날, “우리 남이가 최고제. 암, 그렇고 말고.” 힘들고 지칠 때마다 불끈 힘을 주는 내 생의 최고의 찬사도 여전히 방바닥을 맴돌고 있다
오랜만에
아버지가 달궈놓은 따스한 아랫목에서
가마솥에서 빡빡 긁어낸
누룽지를 둥글게 말아 쥐고 뒹굴던
어릴 적 추억을 베고 누워
까무룩 잠이 들었다
-「친정집」 전문
메타포와 이미지, 아버지의 이야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절창 한 편을 읽는다. 방바닥에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게 하고, 거실 벽에는 숨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며, 아랫목에는 아버지의 냄새가 노릇하게 익어가고 있다. 이렇게 아버지의 추억을 베고 누워 잠이 들었다. 아버지의 숨결이 메타포로 그 깊이를 더하면서 이미지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거기에 추억 중 가장 절실했던 이야기를 중간에 삽입하여 시적 긴장에서 툭, 여유 있는 감동을 던진다.
소나무에도 아버지가 계시고(「소나무를 읽다」),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고구마의 향기가 문틈으로 들어와 그리움으로 물든다(「오래된 기억」).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를 키우고 있다(「소리」). 가오리 장지갑에는 시어머니의 말씀이 돈 대신에 아직도 두둑하게 들어 있고(「가오리 장지갑」), 가난 때문에 집의 뼈대가 허물어졌던 어린 시절이지만 “마당을 넘어 동구 밖을 뛰놀던 추억/ 맑은 하늘 가득 시간의 주름이 그려지고/ 고요히 나부끼던 그리움이/ 코끝에 와 닿으며 글썽거린다”(「추억」)처럼 가난마저 아름다운 그리움이다.
2. 추억의 방
그리움은 부재중일 때 주로 나타나는 정서다. 추억도 부재중이어서 그립다. 사랑도 이별을 맞으면 당연히 그립다. 그러나 정 시인에게 있어서는 부재중이 아니라 곁에 있어도 그리운 특별함이 있다. 류시화의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처럼 옆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타는 그리움을 느끼는 독특함이 있는 것이다.
부부에게 있어 사랑은 점점 일상이 되어 간다. 사람들에 따라 차이는 나겠지만 대부분 사람은 일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랑의 감각은 무뎌져 가고, 때가 되면 사랑보다는 신뢰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일상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사랑은 사랑의 색채와 감각, 사랑의 언어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일상의 진실함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지나가야 하지만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지는 못하기에 늘 그리움의 시편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달은 늘 제 그림자를 따라다녔지
먼 길을 돌고 돌아도
누구도 외롭냐고 묻지 않았어
애타게 울부짖는 것들이 잠든 시간
어둠이 주는 묵직함은 고요를 더했지
크기가 정해지지 않은 시간이
은밀하게 자신만의 리듬으로 떠돌다가
적막한 어둠을 베어 물고
홀로 우뚝 솟은 나무를 발견했어
어느 순간
나무가 달을 포획해 버렸지
서성거리던 어둠이 끝내 머리를 풀며
날아가 버리고 난 후에야 알았지
허공엔 온통
그리움의 무늬가 새겨져 있음을
-「그리움을 품다」 전문
부부라고 해서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부부는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것과 같아서 더불어 살아가되 지향하는 삶의 목표는 서로 다르다. 그러기 때문에 부부만큼 그리움이 더한 관계는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찬바람에 나부끼던 마음도/찻잔 속 고요하게 물들다/따스한 인연으로 피고 지고/그대를 그리며 오늘도 차를 마셔요”(「국화차 마시는 날엔」) 그렇게 차를 마시면서까지 서로 그리워한다.
이런 일상 속에는 사랑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랑이 일상이 되었다고 해서 무관심으로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어느 날 문득 일상 속에 빛나게 살아 있는 사랑을 깨닫고 그리움은 물론 아픔을 치유하기 시작한다.
익숙한 것에 화르르 미움이 돋아
발가락 끝까지 서러워서
마음과 마음 사이 찬 서리 끼던 무렵
미움에도 다리가 돋고 날개가 있음을 알았네
세월 지나니 몸에 새겨진 뾰족한 기억은 희미해지고
몸을 빠져나가는 기운은 빠르게만 느껴져
아옹다옹했던 시간은 덧없기만 하네
이제 와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오래 길들인 편한 신발 같은
그대가 있어 험한 인생길 그나마
무던히 걸어왔음을 알았네
때늦은 고백이 그래도,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궁색한 핑곗거릴 찾다가
손과 손을 마주 잡는다는 게
그대 손등 위 내 손 살갑게 얹는다는 게
이리 긴 세월이 필요한 줄은 몰랐네
슬며시 맞잡은 그대 따스운 손이 위로라는 걸
내 생애 가장 큰 위로가 그대였음을
이제사 고백하네
-「그대라는 위로」 전문
일상은 사랑이다. 이 명제는 거짓이지만 이 시에서는 참이다. 거짓인 명제를 참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랑이야말로 위대한 사랑일 수 있다. 사랑의 감각이 무화無化하여 점점 일상이 된다는 것은 아픔이지만 “오래 길들인 편한 신발 같은 그대가 있어” 오히려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두 그루의 나무가 각자의 세계를 향해 가다가 잎을 내어 서로 스치면서 소리를 내듯이 이제 시인도 오랜 세월이 지나서 “손과 손을 마주 잡는다는 게/그대 손등 위 내 손 살갑게 얹는다는 게”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사랑임을 깨닫게 된다.
3. 근육의 힘
아픔의 연원 깊은 곳에 말이 있다. 시인에게 있어 말은 “세상을 밝히고 캄캄한 것을 밝히는”(「말 말 말」) 것이어야 한다. 말은 빛이다. 말은 존재를 드러나게도 하지만 더 깊은 어둠 속에 사물을 가두는 힘이 있다. 말을 한다는 것은 어두운 마음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빛나는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환하고 시원하게 하지만 어두운 말은 마음을 할퀴고 답답하게 한다.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어두운 말을 시인은 참을 수가 없다.
어른은
사람들을
말言語로 툭툭 치며
장난이란다
사는 게 난장亂場이다
-「장난」 부분
말로 사람을 툭툭 치면서 장난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장난은 난장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은 언어유희다. 사람들은 말로 장난을 한다. 시인은 장난을 난장으로 말하면서 말장난을 한다. 피차가 장난하고 있으니 우리는 이런 세상을 난장亂場이라고 한다. 시인의 언어유희 속에 말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 대한 냉소와 풍자가 날카로워 섬뜩하기까지 하다. 시인은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주거나 상처를 주는 어두운 말을 용납할 수가 없다. 아픔을 주는 사람들을 직접 욕하거나 탓하지 않고 풍자로 사람을 찌르는 날카로움이 있다.
특히 시의 언어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시의 진정성은 여러 관점의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시인의 말이 거짓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시인과 시적 화자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시적 화자의 삶의 태도와 시인의 삶이 어느 정도는 일치해야 한다는 말이다. 시의 언어보다 시인의 사람됨에 문제가 있다면 결국 말에 문제가 있다,
무릇 말은 은유적이어야 한다며
한 번 두 번 더 꼬아줘야 제맛이라면서
더욱 거세게 불길을 당긴다
젓가락으로 휘휘 젓다가 뒤집다가
숨죽어 노릇하게 구워진
요염하게 뒤틀린 허기를 집어 들었다
-「뒤틀린 맛」 부분
진정성이 없이 비유로 꼬아줘야 시가 된다는 혹자의 말을 전면 부정하면서 그런 시 작품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제맛이 나지 않아 시인은 풍성한 비유의 식탁에서 허기를 느낀다. 그렇기에 시를 읽는다는 것은 “설레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다가 때론 씁쓸하기도 하고 가끔은 썩은 냄새를 맡기도”(「향기를 읽다」) 하는 것이다. 진정성이 없는 시는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부패한 언어라는 것이다. 진정성이 없는 말은 소멸하여 결국 무덤이 된다. “아늑한 강의 밑바닥에는 수많은 말의 무덤이 가라앉아 있다.”(「우렁쉥이 얼굴」)고 선언한다. 정 시인에게 진정성이 없이 수사나 이미지가 화려한 언어는 죽은 언어일 뿐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리워할 추억이 있다. 많은 사람은 추억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흩어져서 존재하기 때문에 추억 때문에 생긴 아픔을 치유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정 시인에게는 추억의 방이 따로 있어서 추억들이 그 방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어쩌면 정리돼 있기에 아픔을 다뤄 나가기가 훨씬 수월할 수도 있다.
힘든 고비마다
버팀목이 되어
삶의 줄기를 세우고
따사로운 햇살로 다가와
만 갈래의 가지로 피고 졌음을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고행길을 걸으며
발목이 시릴 때마다
아픔을 어루만지던 추억
그 추억의 방에 누워 쉽니다
여전히 그 하루가 오늘입니다
-「하루 그 추억」 부분
추억의 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사상事象은 모두가 그리움이며 아픔이지만 힘들 때마다 버팀목이 돼 주었으며 삶의 나무가 깊고 넓게 높게 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오히려 삶이 힘들고 괴로울수록 아픔을 어루만지며 쉴 수 있는 삶의 여유를 주었다. 시인은 추억의 방에 가지런하게 정리된 추억을 소환하면서 현재의 삶을 긍정하게 된다.
이쯤 되면 아픔도 근육이 된다. 근육은 우리 몸의 움직임과 조작을 담당하며 자세를 유지 시켜 주고 관절을 연장해 주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우리는 근육 없이는 제대로 설 수가 없고 아무리 뼈대가 있다고 해도 근육이 없으면 튼튼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아픔도 이기면서 살아가면 오히려 삶을 튼튼하게 한다. 정 시인에게 있어서 아픔은 삶에 운동력을 부여하는 근육과 같다.
소나무는 바람과 태양을 키웠다
이슬과 벌레들의 보금자리
늘 푸른 손으로 길을 연다
길이 끊어진 곳에서
삶의 한 통로를 닫은 채
하얀 페인트처럼 말라붙은 송진 액이
세상을 향해 두꺼운 방패가 되었다
몸에서 뻗어나간 또 다른 근육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팔 하나를 도려내고
변함없이 꼿꼿한 기상으로 묵직하게 서있다
소나무의 내력을 살피다가 보았다
꺼칠한 수피는 온몸으로 번져
보드라운 속살을 지키고 있었다
거기, 한쪽 폐를 도려내고도
담담히 가족을 지킨 아버지가 계셨다
-「소나무를 읽다」 전문
가파른 절벽 위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가끔 본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든든히 뿌리를 내린 소나무보다도 쉽게 뿌리가 뽑힐 수 있다. 세상에 내어줄 수가 있다. 더 세차게 바람이 불면 소나무는 가지 하나를 바람에게 내주고 송진으로 몸을 보호하면서 근육을 키운다. 소나무의 상징 속에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는 아픔을 아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식들의 근육을 키워주기 위해 단호하게 자신을 희생한다. 그래서 아픔도 근육이다.
유월 어느 날 밭이랑 가득
푸른 잎들이 넘실거렸다
언제 저렇게 넓게 번져 갔을까
뜨거운 태양 아래서
온몸으로 뽑아 올린 생명의 힘이
폭염을 뚫고 어느새 푸른 강을 이뤘다
-「묘목농원을 지날 때마다」 부분
길 지나는 사람을 위해
나무의 팔을 내어주고 그 자리에
솟아난 옹이는
상처 위로 진액을 덮어가며
저렇게 곧게 서 있었던 것이다
투영되는 나무 안의 그림자를 보며
나는 자꾸 목이 멘다
괜스레 내 팔을 만진다
잘려 나간 팔이 무수히 많아서
마음에 생긴 옹이로 울퉁불퉁하다
나도 모르게 오르막을 오르며
둥글게 말렸던 중심을
반듯하게 펴고 걷는다
-「소나무 옹이」 부분
굽은 허리에 푸른 혈관이 돌고
발이 돋고 귀가 돋아
수만 번 번뇌를 끊고 끊었더니
천 삼백 개의 깨달음이
뿌리로 흘러들어 발을 적신다
산사 청량한 목탁소리에
귀가 밝아지고 눈이 맑아져
누가 있어 예까지
버선발로 달려왔나
선비화
선비화
아픔 속에서 밀어 올린 빛
이토록 환한 해탈의 꽃 피우다니
-「부석사 조사당 선비화」 전문
아픔이 근육이 되어 꿋꿋하게 일어서는 모습이 시집 곳곳에 있다. 수많은 나무가 ‘생명의 힘으로 폭염을 뚫고’ 일어서는 묘목농원의 경험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나무의 옹이를 보면서 진액이 굳어지고 울퉁불퉁하게 아픔이 근육이 돼 가는 과정을 노래하면서 오르막을 중심을 반듯하게 펴고 꼿꼿하게 걸어 올라가는 시인의 강인한 정신을 느낀다. "아픔 속에서 밀어 올린 빛으로 해탈의 꽃을 피우는" "부석사 조사당 선비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아픔이 밀어 올릴 수 없는 빛을 밀어 올려 추상적인 것을 생생하게 눈으로 보여줌으로써 아픔이 근육이 되는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4. 긍정의 삶
미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시인의 상상력은 가장 극단적인 것을 서로 연결할 때 가장 위대하다”고 했다. 아픔과 근육은 얼핏 보기에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둘은 가장 극단적인 자리에 위치한다. 시인은 극단적인 곳에 있는 아픔과 근육을 빛나는 상상력으로 연결하고 있다. 아픔이 근육이 되는 순간에 아픔은 보편적이며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게 된다. 여리고 여린 감정이 단단하고 꼿꼿한 정신으로 승화되는 멋스러움이 있다.
아픔이 근육이 되는 곳에 긍정의 힘이 있다. 닫았던 대문을 열고 가장 작은 섬에서 세상으로 나간다. 가장 먼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침묵하는 언어를 잘못 읽은 자신을 발견한다.
당신의 시선 변방을 서성거렸어요
마음속 당신이 너무 크고 깊어서
마음에 가두어 지지가 않았어요
사랑이 커 갈수록
혈관과 뼈들이 녹아내렸지만
변방은 늘 사랑의 구석진 곳이라
끝내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했지요
당신은 화살을 쏜 적이 없지만
그 화살에 맞아 신음했어요
세월은 흘렀고
당신이 박아놓은 대못들은
변방 곳곳에 박혀 있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내가 느낀 그 변방이 실은,
당신의 마음을 관통하지 못한
오독의 길이란 걸 알았어요
-「오독誤讀」 전문
당신에 대한 「오독」을 발견하고 나서 사랑하는 사람을 제대로 읽는다. 지금까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잘못 읽어서 늘 변방에 살고 있다고 한탄했었는데 사랑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힘든 고비마다/ 버팀목이 되어/ 삶의 줄기를 세우고/ 따사로운 햇살로 다가오는”(「하루 그 추억」) 사람임을 알았다. “어둠 속으로 다시 걸어가는/ 죽음을 배웅하는 아침/ 어둠에서 풀려난 잠은/ 깃털처럼 가벼운 아침”(「아침을 맞으며」)을 맞이하면서 긍정의 삶을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긍정의 회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에 더불어 출렁거리다가
세상 속으로 더 넓게 물들어 가는 것이라고
가벼워져 세상의 강을 건너는 것이라고
박주가리 홀씨의 가르침을 듣는다
-「비상飛翔」 부분
박주가리 홀씨의 가르침으로 시인은 세상을 긍정한다. 긍정의 삶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감하면서 함께 한 시대의 강을 건너는 것이다. 넓은 세상에 대하여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세상과 더불어 살아갈 것을 선언한다.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 속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상飛翔」임을 깨닫는다. 삶을 긍정하고 나니 이제는 날 것 같다는 것이다.
시집을 읽으면서 시집 전체의 구도를 나타낸 시 (「추억」)이 눈에 띈다. 시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무의식 속에 이미 아픔이 근육이라는 명제가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어릴 적 살던 집 뼈대가 허물고
이끼가 시간의 더께로 내려앉는다
따스한 밥이 끓던 부엌을 지나면
엄마의 종종걸음이 따라온다
마당귀퉁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우물에
지나버린 시간이 머물고 있다
반짝, 빛 하나가 빠르게 날아올랐다
책상에서 소설을 읽던
옛날의 내가 말을 걸어온다
고여 있던 추억이 우물 가득 넘쳐나고
우물에는 미소가 아른거린다
마당을 넘어 동구 밖을 뛰놀던 추억
맑은 하늘 가득 시간의 주름이 그려지고
고요히 나부끼던 그리움이
코끝에 와 닿으며 글썽거린다
뼈대 앙상한 집 등뼈 위에
따사로운 햇살이 새살로 내리더니
조금씩 조금씩
힘을 내어 일어서는 추억
-「추억」 전문
「추억」에는 그리움과 아픔, 근육처럼 당당하게 일어서는 시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시집의 전체적인 구도를 보여주면서 시집 제목처럼 ‘아픔도 근육’이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시인의 무의식 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픔의 여정이 마무리되면서 그 여정에 진정성이 있음을 잔잔하게 말하고 있다. 추억 속의 하늘에 시간의 주름이 그려지면서 아프다. 그리움이 코끝에 닿으면서 아픔이 깊게 자리 잡지만 아픔의 뼈대에 새살이 내리면서 근육으로 꿋꿋하게 일어선다. 아픔과 그리움이 메타포로 의미가 깊어지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노을과 같이 그리고 있다.
아픔의 긴긴 여정을 걸어본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시간이다. 아픔은 시간이 지나야만 곪았던 것이 터지고 새살이 난 후 옹이와 같은 근육질이 생겨나는 것이다. “때를 알아 꽃은 통째로 몸을 던져/ 툭툭 숨을 잘라 가벼워지고/ 비워야 채워지는 나무 아래에서/ 오래도록 하얀 꽃등을 봅니다(「쪽동백나무 아래에서」)” 쪽동백나무꽃은 줄기에 매달려 피기 때문에 하늘을 등지는 아픔은 있지만 기다리고 마음을 비우면서 가벼워지고 나무 아래를 아름답게 비추는 꽃등이 된다. 아픔의 미학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이제 아픔의 여정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아픔의 길 양쪽에 있었던 정선남 시인의 가족이 눈에 선하다. 친정과 시집에 사랑하는 어르신들도 나무처럼 서 계신다. 고물상을 향하는 할머니, 이웃사촌 맹수 아저씨, 고흐, 헨리 데이비드 소로, 입을 앙다문 소년도 길가에 서 있다. 아픔이 근육으로 변하면서 시인이 따듯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아픔의 시학을 넘어 긍정의 힘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당당하게 걸어가는 정 시인의 곁에서 든든하게 함께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저 길 저 언덕 너머 다가오고 있는 정 시인의 새로운 세계가 기다려진다. 아픔과 그리움, 기다림과 긍정의 길에 이어지는 길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픔도 근육이라는 상상력에 이어지는 길에는 사유의 깊이도 더할 것이다. 단단한 아픔으로 만든 길이기에 삶의 태도 또한 든든하리라고 믿는다. 길은 길로 이어진다. 이어지는 길 어디쯤 어떤 시의 꽃을 피우게 될지 설레는 마음으로 아픔의 여정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