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씨의 미루나무
김영애
봄, 드디어 봄이다. 옆집 유 씨네 미루나무가 활개를 치는 계절이 돌아왔다. 유 씨는 캐나다본토 사람이다. 하지만 이름이 꼭 한국사람 같아서 우리는 그를 유 씨라 부르기로 했다.
겨울에 이사한 우리는 한동안 이웃들을 볼 수가 없었다. 캘거리의 겨울, 로키에서 불어오는 눈바람은 얼굴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워 다들 실내에서만 생활하는 편이다. 눈 속에 파묻힌 뒤뜰에도 무슨 꽃과 나무가 있는지 통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옆집 유 씨의 미루나무가 눈부시게 눈꽃을 피우고 있어 다소 위로가 되었다. 날이 풀리자 드러난 누런 잔디뿐인 우리 집 뒤뜰은 쓸쓸하기만 했다. 캐나다의 봄은 아주 짧다. 그 잠시의 봄 동안 동네 사람들은 겨우내 눈에 덮여 있던 잔디를 손질한다. 덕분에 옆집 유 씨와 또 다른 이웃 실비아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전 주인의 관리 소홀로 엉망이 된 잔디는 몸살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왜 그가 집을 겨울에 내놓았는지 알 수 있었다. 쌓인 눈이 모든 것을 감춰주었다. 잔디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민들레, 토끼풀과의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는 나날이 되었다. 긴 겨울 끝에 뒤뜰에서 유 씨와도 첫인사를 나눴다. 낮은 담장 너머로 이야기를 나누던 유 씨는 전에 살던 집주인이 정원 손질을 전혀 하지 않아서 잡초가 무성했는데 당신들은 정원 관리를 잘해서 참 좋다며 웃었다. 다시 살리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며 활짝 웃는 주름진 그의 얼굴에서 한국 아저씨 같은 정이 느껴졌다.
어느 이른 아침 유 씨가 잔디를 깎다 나와 마주쳤다. 나무를 심을 예정이라고 말하자 유 씨는 미루나무를 심어 보라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꽃이 피고 향기가 있는 나무, 키 작은 나무를 심어 이웃들을 보고 너의 얼굴도 보면서 지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미루나무 그늘에 가려 데크 밑에서 겨우 얼굴을 내밀고 있는 중국산 라일락을 가리키면서 저 나무를 심었으면 한다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겨울에는 몰랐다. 미루나무의 벌거벗은 몸에 몇 개 남은 갈색 잎 위로 얼음꽃이 피고, 가지 위에 하얀 눈이 만들어 놓은 눈꽃을 보며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봄이 되니 미루나무의 무성한 잎과 그 큰 키가 만드는 그늘이 이웃집과 우리 집을 가로막는 울타리가 되었다. 미루나무는 유 씨의 집을 모든 집으로부터 고립되게 만들고 있었다.
데크에 앉아 고개만 들면 볼 수 있었던 로키의 풍경을 미루나무 사이사이를 비집고 보아야 했다. 밤에는 잠을 설치게도 했다.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한 캘거리는 밤이 되면 기온이 떨어지고 가끔 심한 바람이 불기도 한다. 미루나무가 바람을 만나 온갖 소리를 만들어내는 밤이면 그렇지 않아도 갱년기 증상에 시달리는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바람이 미루나무를 장애물로 생각하고 마구 흔들어대는 모양이다.
어느 날 집에 놀러 온 그의 딸이 유 씨에게
“아빠, 나무를 너무 많이 심은 거 아니에요. 이웃을 볼 수가 없네요.”
했다. 그 순간 뒤뜰에 나와 있던 내 남편과 유 씨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머쓱해하며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유 씨의 아내는 12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혼자 사는 세월이 길어져서 인지 그의 마음의 문은 서서히 닫히고 있는 듯했다. 자신의 삶을 방해 받고 싶지 않은 듯 말수가 적어졌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우울증까지 겹친 것일까. 미루나무는 유 씨의 마음을 말해주는 듯 하늘을 찔러대는 꼬챙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 우리 집 뒤뜰에는 꽃들이 다투어 피고 있다. 꽃 사과 나무와 체리나무, 아카시아 닮은 메이데이, 앙증맞은 빨간 열매를 만드는 마운틴애쉬, 그리고 여러 그루의 장미가 서로 다른 색깔을 뽐내고 있다. 라일락에서 나오는 향기로 온 뜰 안이 황홀하다. 아침이면 새들이 노래하고 언제 담 밑으로 숨어들어왔는지 토끼 한 마리가 풀을 뜯으며 껑충거린다. 스프링클러에서 나오는 물로 샤워하는 지렁이들, 푸른 잎들을 점점이 수놓고 있는 무당벌레들, 장미꽃 사이로 얼굴을 박고 정신 없이 꿀을 빨고 있는 벌들. 낮은 담장 위를 오르내리고 있는 청설모. 낮은 담장은 그저 경계의 표시에 불과할 뿐 이웃들과 소통할 수 있는 예쁜 담장이다.
꺽다리 미루나무 사이에서 유 씨의 유일한 꽃나무인 중국산 라일락이 향기를 뿜어낸다. 햇살이 부드러운 어느 날인가, 유 씨가 뒤뜰에서 나와 마주쳤다. 우리 꽃밭에 꽃이 많이 피었다고, 꽃들이 예쁘다고 말했다. 언제쯤이나 그의 마음에도 꽃이 활짝 피어 향기로움이 번질까. 그가 미루나무 울타리로 가려진 그의 마음을 열고 나와 나의 뒤뜰을 보며 행복하게 웃을 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기대해본다.
또 다른 이웃 실비아가 소리친다.
“킴, 별일 없어?“
수다쟁이 아줌마 특유의 활달한 목소리가 동네에 메아리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