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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수) 오전 7시 5분
하루를 어떻게 보낸담? 막막했는데 할일 없는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산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산을 좋아하는 마음이 닮아서 대화가 잘 되고 즐거웠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었는데도 편하고 안정감있는 대화였다고 생각된다. 어머님 두 분은 60대 이시고 한 분은 70대로 신부님께서 산행경력이 오래 되셨고 잘 타시기 때문에 리더로서 이끌고 계시고 신부님 믿고 산을 따라다니는 거라고 하신다. 알고보니 한등출신이신 신부님. 해마다 두 번 설악과 지리산 종주를 하신다고 하는데 겨울 지리산 종주는 처음이어서 많은 고민과 망설임 끝에 참가하셨단다. 적지 않은 연세에 깊은 눈을 헤치고 여기까지 배낭매고 올라오시다니 대단하시다. 나 또한 6,70대까지 산행을 즐길 수 있다면 좋겠다.
11시 30분.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친절한 공단 직원분이 들어와 간단한 브리핑을 해주셨다. 내일 통제가 풀리니 세석까지 러셀을 해주시겠다고... 다만 각각 출발하지 말고 8시에 일괄적으로 출발하여 뒤따르라고 한다. 너무 기뻤다. 이때까지는 여자실을 함께 사용하는 다른 분들과 말을 아끼고 새침을 부렸는데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다 내일 출발할 수 있다는 말에 맘이 놓여져 어머님들과 아주 친해져버렸다.
오후 1시 30분.
천주교팀 분들이 취사장에서 차 한잔 하신다기에 나도 졸졸 따라가 합류했다. 신부님은 좀 어려웠고 수사님은 친근하게 대해주셨다. 준비했던 커피류와 물, 모닝빵 등을 함께 나누었다. 드립커피를 내려주셔서 잘 마셨다.
2시 30분
차 한잔 후 대피소 밖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처마에서 눈 녹은 물이 뚝뚝뚝 떨어진다. 기온이 높아 빠르게 녹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늘 날이 좋지 않으니 대피소에서 쉬고 좋은 날 천왕봉 가게 해줄께 라는 하늘의 뜻이었을까. 독실한 신자님들과 함께 있으니 나도 감사함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바닥이 따땃한 실내에 들어와 할일 없이 있으니 잠이 온다. 잠깐 신나게 자고 일어나보니 오후 3시.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통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고 현실감각이 무뎌온다. 여기 며칠 머무른 느낌!
멍한 정신을 부여잡으니 배가 고파온다. 먹을 거라곤 라면과 김치, 찬밥, 마늘스프 뿐이지만 대충 요기를 해본다. 날이 차니 김이 모락모락해도 먹다보면 금세 미지근해져 라면 먹는 맛이 별로이다. 오늘은 이것으로 식사를 마칠 요량으로 찬밥이랑 함께 꾸역꾸역 먹어줬다. 이렇게 먹어도 저녁쯤엔 배가 고파올지도 모른다.
오후 4시 8분
마치 시간의 흐름에서 예외인 곳에 와 있는 기분이다. 편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이상한 기분. 어제 여기 도착할 때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다. 만 하루 머물 뿐인데 희한한 감정이 만들어졌다.
심심하여 어머님들께 지도보는 법을 간단하게 알려드렸다. 능선과 계곡, 안부. 재미있어하셔서 산길샘도 깔아드리고 지도다운로드 하는 방법과 내위치 파악하는 법을 알려드린다. 저녁 9시 40분 취침.
13일(목)
오전 5시 30분 기상. 누룽밥으로 대충 아침 먹고 물 끓여서 보온병에 담고 양치, 세수 하고 짐 패킹.
7시 5분 아침 해가 뜨는 듯 하여 얼른 짐 싸놓고 나갔는데 그새 해가 다 떠버렸다. 바람이 장난 아니게 불어댄다. 바라클라바 쓰고 복장은 1st&2nd layer를 잘 갖춰입고 고어텍스 쟈켓을 입었다. 8시에 직원 두 분과 다른 산객들은 모두 출발하셨지만 서두를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정성껏 스트레칭 해주고 25분에 천천히 대피소를 나섰다. 강풍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대피소를 나서 마른재 방향으로 나있는 데크길을 따라 걷는다. 바람이 굉장하지만 예보를 충분히 들여다보았고 대비를 했기에 걸을 만 했다. 눈이 많지만 단단하지 않아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한 5분쯤 걸어가다가 뒤돌아본 벽소령대피소. 이틀간 너무 잘 쉬고 갑니다. 좋은 분들을 만났고 통제된 하루동안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다.
마른재 임도까지 예쁜 길 따라 잘 걸어왔는데 임도를 벗어나 산길로 진입하자마자 바람의 세기가 달라진다. 말 그대로 바람이 날뛴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고 숨쉴 틈이 없다. 혼자 걸어갔다면 어땠을까. 도로 벽소령으로 돌아갔을까. 보통은 아무리 센 바람도 숨쉴 틈은 주는데 주능선도 아니고 8부, 9부 능선인데도 잦아들 생각이 없고 어마무시하다. 멘탈이 흔들흔들.
칠선봉을 지나고부터 걷기가 안좋다. 러셀은 되어 있지만 눈이 지금보다 더 많이 쌓여서 잘못 딛으면 허벅지까지 빠진다. 단단치 않아서 스틱을 딛으면 자칫 쑤욱 눈 속에 들어가버리니 추진력을 얻기 어렵고 리듬감 있게 걷는 게 도통 수월하지가 않다.
게다가 관목은 왜 그리 시야를 가리고 배낭을 잡아끄는지... 철쭉같은데. 허리를 숙이는 것도 한계가 있잖은가. 엉덩이를 한껏 내려 자세를 낮추는 데도 자꾸만 이 가지에 걸리고 저 가지에 걸리는데 '이래도 즐거웁냐!' 시험하는 것 같다.
이를 악물고 겨우 영선봉에 도착하니 기진맥진하고 하도 자세를 낮추었더니 허리랑 어깨랑 너무 너무 아프다. 정말 정신줄을 놓고 그냥 막 내리꽂듯이 세석까지 달렸다.
세석 도착.
많이 변했어도 생각난다 옛 기억.
벤치가 그대로 있구나. 지금은 세련된 취사장이 들어섰지만, 예전엔 저기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뭘 깔고 앉아 준비해온 먹거리를 먹던 곳.
야외에 볕이 좋길래 촛대봉으로 가는 가장 끝쪽 테이블에 배낭을 던지듯이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니 바로 드는 생각. '아~ 장터목대피소까지 갈 수 있을까. 세석에서 머무를까'
온 삭신이 아프다. 마음이 약해진다.
보온병에서 물을 받아 믹스커피 두 봉을 탄다. 너무 힘들고 배고프다. 커피와 함께 모닝롤 5개를 해치우니 정신이 조금 돌아오네. 갈까 여기서 고만 머무를까. 약해지는 마음 반, 계획한 대로 가고 싶은 마음 반인데 일단 대피소 직원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본다. 장터목을 예약했는데 세석으로 바꿀 수 있는지 문의했고 장터목까지 가는 길 상태를 여쭤봤다. 대피소 변경은 내가 뭘 할 필요없이 구두로 가능했고 장터목까지는 러셀은 되어 있으나 눈이 많고 다져지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TMI로 아까 장터목쪽에서 세석으로 넘어오신 분이 엄청 힘들었다고 했다는 말까지 전해주신다. 아유... 망설여진다.
14시. 그래, 결심했어! 벽소령대피소에서 만난 프란체스카 천주교 등산팀은 세석에서 머무르신단다. 나는 작별인사를 하고 촛대봉을 향해 오른다. 아직 해가 있으니 가보자.
촛대봉은 정말 정말 추억돋는 장소지만 장터목까지 남은 3.4km를 가야한다는 부담감에 눈으로만 한번 시선주고 바로 왼쪽 연하봉을 향해 뻗어있는 능선을 걷는다. 가는 길은 정말 예뻤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환상적으로 눈이 깊었고 어떤 구간은 양쪽으로 눈이 어깨만큼 쌓여있기도 했다. 해가 좋아서 걷는 동안 힘든 줄 몰랐고 벽소령에서 세석까지보다 훨씬 덜 힘들었다. 다만 역시나 관목이 나를 잡아 끌때는 애먹었지만, 온통 눈으로 덮힌 산길이 새로워서 부지런히 사진찍느라, 내 눈에 담느라 바빴다.
내리막과 오르막을 거쳐 삼신봉을 지난다. 다음 봉우리인 화장봉까지 가는 길은 넓데데한 능선길이라 조망도 좋고 걷기 좋은 오르막이다.
가는 동안 장터목쪽에서 세석 방향으로 오는 등산객들을 종종 마주쳤다. 세석에서 주무시는 걸까. 이른 새벽에 중산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천왕봉과 장터목대피소를 거쳐 오는 걸까. 다양한 코스로 지리산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단 한번도 천왕봉쪽에서 거꾸로 노고단이나 세석방향으로 걸은 적이 없는데 ...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찍고 다시 노고단으로 돌아오는 일정은 어떨까 재미있을 것 같다.
연하봉에 도착했다. 세석에서 장터목까지는 촛대봉-삼신봉-화장봉-연하봉까지 4개의 봉우리를 거치면 되는데 마지막 연하봉으로 오는 길이 힘들었다. 인상적인 봉우리 연하봉.
바람을 맞으며 올 때도 있고 양지바르고 바람 없는 곳은 대번 온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얼굴이 엄청 탔다. 선크림을 덧발라본다. 콧물이 연신 흘러서 손으로 팽 풀고 귀찮을 때는 장갑으로 훔치기도 했더니 코끝이 텄나 아프다. 히말라야 8천미터를 오를 때는 어떻게 할까 궁금타. 바람 때문에 정신없고 추울테지만 콧물은 나올텐데 거 귀찮아서 ... 요령이 있으려나.
언제부터인가 나무에 달린 표지기가 색다르게 보인다. 다른 산에는 서낭당 분위기를 내는 빨간, 노랑의 리본이 나무에 매달린 채로 펄럭거려 너무 많은 리본이 달려있는 곳은 분위기도 보기도 좋지 않은데 지리산국립공원의 표지기는 최대한 친환경적으로 제작한 듯 싶다. 러셀이 되어 있어도 표지기가 흔들거리며 길안내를 해주는 풍경이 반갑고 따뜻하다. 러셀이 되어 있지 않아도 표지기가 아주 적절하게 매달려 있어 안심이 된다. 산꾼들을 위한 등대지기이자 든든한 친구이다.
연하봉을 지나니 멀리 장터목대피소가 보인다. 내 기억 속에 있던 장터목산장이 저기 있구나.
오후 4시 20분 장터목대피소 도착.
취사장이 낯설다. 예전에 왔었을 때는 취사장 자리가 거기가 아니었고 데크가 쳐져있는 전망대 같은 곳이었다. 정확치는 않지만 그런 것 같다. 벽소령에서 이틀을 머물다가 장터목에 오니 좀 낯설다.
한참 헤매다가 계단을 따라 입구로 올라가 체크인을 했다. 세석대피소와 달리 대피소직원의 표정이 무척이나 딱딱하다.
신발을 벗고 1호실 11번 배정받은 곳으로 들어섰다. 먼저 와 있던 분들이 네 분 정도 계셨다. 사람은 있는데 아무도 쳐다도 안본다. 분위기가 왜 이렇지? 벽소령에서 하루 반이나 머물며 그 분위기에 젖어있다가 온 나로선 의아하고 적응안되었다.
세석에서 장터목을 향해 가자 결심하고 출발할 때는 천주교어머님들과 헤어지는 게 다소 서운했지만 장터목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내 자리 바로 옆에 배정받은 분이 있어서 인사하고 말을 걸어본다. 백무동에서 올라오셨다는데 짐이 단출하다. 이리 저리 둘러봐도 나만 짐이 많고 다른 분들은 뭐가 없다. 장터목대피소는 위치상 당일산행이 가능한 곳이기 때문에 종주를 하는 사람도 이용하지만 당일 산행 혹은 1박2일로 가볍게 짐을 지고 오는 사람이 많아 벽소령과는 다른 풍경을 보게 되었나보다. 또, 햇반, 물, 개스를 판매하니까 짐을 많이 지고 올 필요도 없겠구나. 나같은 사람이나 물이랑 밥이랑 버너랑 개스랑 이고 지고 왔으니 배낭이 큰거지.
장터목산장은 벽소령 같이 자리마다 전기장판 온도조절기가 있지는 않았고 대피소측에서 일괄적으로 온도조절을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바닥이 따뜻하진 않았지만 실내기온이 따뜻한 걸 보니 밥 먹고 오면 바닥도 따뜻해있을 것 같다.
엄청 피곤했으므로 언능 밥 먹고 자자 싶어 배낭을 풀고 취사도구를 챙겨 내려갔다.
라면 물을 올려놓고 화장실에 다녀온다.
장터목대피소는 오래된 시설이라 벽소령이나 다른 대피소보다 열악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 장터목 화장실... 정말 충격 그 잡채였다.
겨울철인데도 냄새가 코를 찌른다. 냄새는 둘째, 셋째다. 벽소령은 화장실 오물을 정화처리하여 재사용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장터목은 변기 아래가 그냥 뻥 뚫려있다. 외부와 연결되어 밖에서 부는 바람이 그대로 변기를 타고 올라온다. 그러면 어떤 문제가 생기냐면 변기에 앉으면(앉을 수 있다면) 아래에서부터 냉기가 마구 마구 올라온다. 아주 그냥 션~~~하다. 찬기가 올라오는 것 뿐만 아니라 탱크에 쌓여있는 배설물을 훑고 올라오는 것이리라.
내가 70년대 사람으로서 이런 푸세식을 이용해본 적이 없는 사람도 아닌데 아무리 산이지만 냉기가 변기로부터 올라오는 화장실을 어떻게 이용할 수가 있단가. 더 구체적으로 상세한 설명을 하긴 곤란하고 이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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