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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향기
어저께 주문한 사과를 받았다.
올 가을 들어 수확한 사과를 처음으로 만나는 설레임이 남다른 기쁨을 주었다. 또한 이 사과를 가꾸고 돌보았을 이름 모를 어느 농부의 땀을 생각했다. 색갈도 고왔고 과육 또한 중년의 사랑처럼 농밀한 게 입에 착 달라붙었다. 여름 햇살을 듬북 받아서인지 붉으레하게 색갈도 고왔고 아삭, 씹히는 소리 또한 싱그러웠다. 밤이 깊어갈 수록 사위는 적막했고 사과를 베어물며 내 생각은 어언 삼십 년을 지나서 먼 옛날 학창시절로 돌아간다. 사과보다도 달디단 추억, 그 한 자락을 풀어볼까. 용서하신다면....
제가 노래를 즐겨 부르노라 합창단멤버였다는 건 말씀 드렸나요? 노래를 즐겨 부른다는 것과 잘 부른다는 것은 다른 말입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연극에 흠뻑 빠져 공부는 뒷전이었다. 명동, 지금의 명동예술극장이 당시 국립극장이어서 시내에 나오게 되면 으례 명동국립극장 앞에서 친구를 만나고 기다리는 중에 포스터를 훑어보는 게 취미였지.
명동, 시내중심가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극장이야말로 우리나라 예술의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극장에는 불과 삼사십 명 정도의 마니아들만 가지고 연극무대가 올려졌다. 그게 우리나라 예술의 현주소였다. 연극뿐만 아니라 음악회도 그러하고 요즈음 성황을 이루는 오폐라와 뮤지칼 같은 것은 올린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황무지였지 뭐. 아~ 김자경 선생이 처음으로 오폐라를 올린 게 아마 그때였을 게다.
당시 활동했던 극단을 든다면 김정옥 선생이 연출을 본 자유극단, 임영웅 선생의 산울림과 여인극장, 극단 가교, 실험극장 등등 아참! 남산 올라가던 길에 있던 케이비에쓰 방송국 옆에 자리한 드라마센터의 동랑레퍼토리극단을 잊을 수 있나.
내가 제일 좋아했던 극단은 몰리에르와 보마세르 등 프랑스 희극작가의 작품을 주로 올리던 자유극단이었다. 보마르쉐의 휘가로의 결혼이든가 시라노 드 벨주락같은 작품을 김정옥선생이 연출했는데 대단했어. 시라노에 출연했던 이순재 선생이 발성이 형편없다고 혹평을 받았던 것도 그때였다.
하지만 동랑레퍼토리는 명동에서 꽤 멀리 자리잡은 터라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작품의 완성도는 훌륭했다. 막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유덕형이 우리나라 연극의 선각자이자 극작가이던 동랑 유치진(숙부였지?)이 창단한 극단에 들어가면서 화려한 동랑레퍼토리 극단이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동랑레퍼토리 극단은 연극프로그램을 몇 달치를 미리 예고했다. 한 번 작품을 올리면 장기간(1개월 정도) 상연되어서 마음에 드는 작품은 두어 번 더 보곤했다. 출연진 또한 서울예전출신이라 프로냄새가 물씬 났다. 그리고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연극을 공부한 탓에 기초가 탄탄했고 실험적인 작품이 많아서 연극마니아들한테는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배우는 전무송, 이호재가 생각난다.
헤럴드핀터의 생일파티라든가 오태석의 초분, 태, 햄릿의 번안극 하멸태자가 오래 생각나는군. 특히나 동랑레퍼토리 극단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터라 극장은 겨우 스무남 명 될까. 헤럴드 핀터의 생일파티는 열두어 명이 채 안 되었던 걸로 기억이 나네. 끝나는 날 관객과 함께 뒷풀이를 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을 주로 애용했지만.
임영웅의 산울림은 69년에 창단했는데 창립 기념작품이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 였다. 충격이었지. 당시에 이런 연극이 상연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을테니. 사실 내가 대학 졸업반이었을 때 산울림의 "꽃피는 체리"를 보면서 연극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을 한 계기가 되었지만.
맨처음, 연극에 빠진 이유는 이랬어. 영화야 누구나 잘 알지만 연극은 생소하거든. 그래서 고급스런 예술동호인처럼 보이길레 극장을 드나들다가 옴팍 빠진거지 뭐. 후후 당시에는 타임즈나 뉴스위크같은 영어잡지 한 권정도는 뒷주머니에 끼고 테니스라켓을 들고 다니면 대단한 멋쟁이였어.
"니도 그랬나?" 흠흠~ 나도 그랬지. 허지만 내가 들고다니는 타임즈는 언제나 몇 개월 지난 거였어. 멋으로 들고다니는 잡지를 제 돈 주고 살 순 없잖아.
그래, 연극은 전율이었어.
상연내내 배우의 모습뿐 아니라 무대배경과 그의 몸짓이 이루는 기하학적인 구도를 살피는 것이 연극을 잘 보는 방법이 아닌가 싶어. 무대 위의 배우가 만드는 공간을 세심하게 보는 걸 즐겼다. 어깨선과 고개를 드는 각도라든가.....연극과 영화는 달라. 매한가지가 아니냐고? 천만에 달라도 많이 달라. 영화와는 달리 자연스러운 동작이 아니야. 동작이 크지. 과장되게 몸짓이 커야하고 목소리 또한 울림이 커야하지. 영화는 세밀한 거까지 확대해서 볼 수 있지만 연극의 무대는 쪼그맣잖아. 연극, 그리스어 'theaoma'의 어원을 따져보면 '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거든. 연극이 대본의 문학성을 충분히 살리고 또 대본을 능가하기 위해서는 무대미술·조명·춤·음악 등의 여러 예술과 배우의 연기가 연출가의 종합적인 미적 판단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대. 이렇듯 연극은 다양한 예술이 복잡한 연습 과정을 통해 조화되고 통제되어 나타나는 순간 예술이라 하지.
아이~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 거같네. 체계적인 공부를 한 게 아니고 또 너무 오래되었잖은가. 양해해줘.
당시 자유극단 땜에 프랑스의 희극이 유행을 탔으나 한편으로는 미국의 유진오닐의 작품 또한 각광을 받았지. 느릎나무밑의 욕망, 지평선 너머, 밤으로의 긴 여로 그리고 아서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손톤와일더의 우리읍내 같은 미국 작품 또한 커다란 연극의 흐름이었다.
사과 이야기를 하다가 뭐 이상하게 흘렀네. 쫌만 기다려.
아무래도 내가 본 작품 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최인훈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가 아닐까. 바로 몇해 전 새로 개관한 명동예술극장이 상연한 첫 작품이 바로 이것이었다. 40여 년의 세월의 간극을 두고....같은 작품으로.
당시 내가 본 마지막 장면, 온달이 죽은 뒤, 찢어지는 슬픔을 안고서 평강공주, 박정자였을 게다. 꾸부정한 모습으로 서있는 그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사랑했던 온달을 잃은 공주는 세상을 다 잃은 듯 허탈했고 그래서 대학 4학년, 밥벌이 하나 찾지도 못하고 방황하던 내 꼬라지와 많이도 닮았다. 다 잃은자만이 가득 찬 무대 위로 하염 없이 눈이 내리고. 막이 내린 내 가슴에는 휑하니 바람이 불어갔다.
고구려의 설화에서 빌어온 온달과 평강공주를 주인공으로 희곡을 쓴 최인훈은 과연 천재였다. 극이 끝났다고 금방 일어서는 관객은 없었다. 커튼이 내려져도 아직 관객의 눈에는 배우의 목소리, 동작, 무대의 조명이 잔상으로 남아 있는데 어찌 매정하게 일어설 수가 있을까. 출연 배우들이 다 나오고 커튼콜을 받으며 하나하나 인사를 하는 장면까지 극의 연장이 아닐까? 배우가 내쉬는 숨소리, 약간 분장이 지워진 듯 배우의 일상의 얼굴까지도 관객과 직접 교감하는 연극의 매력을 몰랐다면 당신은 문화인이 아니지요, 암만.
객석에서 숨죽이고 무대를 응시하던 젊은이는- 이제 중늙은이가 되어, 어디서- 촌에서, 무엇이 되어-아직도 등골이 휘도록 돈을 벌어야 먹고사는 신세가 되어, 만나랴- 정말,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재개봉 작품을 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하늘을 찌르듯 빛나던 기상을 지녔던 청춘이 이제는 늙수레한 모습으로 차마 평강공주를 만날 수 없더라고.
이제 본격적으로 사과이야기로 들어가볼까.
아마 이 연극을 보고 나온 게 밤 9시 반이 넘어서지. 그래서 갈길이 바빴다. 하지만 넘쳐나는 이 감동을 어쩌지 못해 극장 바로 앞의 호프집을 들어선게 사고를 부를 줄을. 이름이 베어였지? 통나무 그루터기를 잘라서 만든 의자에서 삐루를 1,000씨씨 땡기고 급히 걸었겠다. 명동을 벗어나서 산업은행본관 침침한 길(롯데호텔)을 뛰다시피 걷다가 시청 광장에서는 지하도로 내려갈 때면 아예 하이힐을 벗어들고서 뛰었다.
"꽃사랑, 니가 여자였나?"
아니 여자랑 연극보러 왔지. 정동 성공회 기숙사까지 필사적인 달음질에도 무정하게 기숙사 철창문은 잠겨버렸네, 어쩌지... 당시 성공회 기숙사는 여대생만을 받아들였다. 수녀님이 엄해서 외박은 어림도 없었다. 오죽하면 시골 집에 다녀온 학생은 부모님이 서명한 외박 확인증을 보여야했을까. 그래서 지방에서는 딸아이가 서울에 유학을 가게 되면 성공회 기숙사에 입사시키려고 온갖 애를 썼다. 당사자인 여학생들이야 싫어했겠지만. 요즈음은 어떤가 모르겠네.
외출 마감시간이 밤 10시라 서둘렀지만 철창대문은 닫기고, 어떡하나.
내가 그애를, 불과 한 학년 아래인 숙이를 무등 태워서 문을 넘어가게 할 수 밖에. (훗날 누가 그러대, 그날 치마 입었는가?) 어떻게 어떻게 철창문을 넘겨보내고 나니 잠시 기다리래. 저녁을 먹지 못해 무척 배가 고팠거든. 기숙사 주방에 가서 챙겨왔다고 누릉지를 철창 사이로 건내기에 사이좋게 누릉지를 먹었는데 무척 고소하더라고. 가을이었나 하늘에 달도 밝았고 별이 총총했던 기억이 나는군.
왠걸 2층 숙소 창문이 열리면서 휘파람과 우~와하는 소리까지, 여기저기서 박수소리도 나고 말이야. 그날, 나는 줄리엣의 창문을 타고 올라가 달콤한 연가를 부르던 로미오였어. 그래, 우리의 우정은 별났어.
자주 그랬나? 음 연극이 끝나는 시간이 그런 걸 어떡해. 몇 번 더 철제문을 타고 넘긴 적도 있었지만 대게는 닫힌 것 같아도 살며시 열렸어. 수녀님도 우리의 연극 사랑을 너그러이 보신게지 뭐. 아님 우리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어여삐 본 기숙사 룸메이트가 살며시 열어둔 건지.
12월, 졸업시험도 끝나고 하숙방에 남아 있었는데 나보고 오라더군.
성공회기숙사가 엄하기는 이루 말할 수 없어도 한 달에 한 번 주말에는 기숙사를 개방해서 부모님들이나 친구들, 연인들에게 1층 식당을 공개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거길 오란 거야. 약간의 다과와 차를 준비해서 자유스럽게 담소를 나눌 수 있는 파티랄까. 흥이 올랐어. 그때 와이엠씨에이에서 전석환씨가 이끌던 씽얼롱이 대세랬지. 기타를 치면서 노래도 부르고 파티는 흥겨웠다.
그러더니, 갑자기 기숙사 자치회 간부가 올해의 기사상을 수여한다고 주목해 달래. 기숙사에서 해마다 올해의 나이트를 뽑는 '기사 작위식'이 년말에 있었거든.
뭔가 했더니 내 이름을 부르는거야, 맙소사. 내가 기숙사 자치회에서 뽑은 그해의 기사래나. 마치 아더왕 시절의 원탁의 기사(Knights Of The Round Table)처럼. 나와서 무릎을 꿇는 의식이 있더군. 영국에는 지금도 기사 작위수여식은 그렇다나. 에바가드너처럼 오만해뵈는 자치회장이 내(나는 로버트 테일러라고 해두지) 어깨에 긴 칼을 대며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헌신하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그대를 만나서 기쁘노라." 그래서 기사 작위를 수여한다고 했지. 애개개 겨우 나무꼬쟁이에 꽂은 사과를 훈장으로 수여하는 게 아니겠어. 아름다운 미사여구와, 작위에 비해서 보잘 것 없지만 엄숙하게 건내주는 사과를 받지 않을 수 없었어. 나무꼬쟁이는 은색 종이를 감았을 뿐인데 큐피트의 화살이라고 말은 번지르하더구먼. 아무튼 그녀는 쑥스러워했지만 모처럼 표정이 밝아서 내 마음이 흐뭇했어.
축하공연이 있었고 안양 포도원 포도주회사에서 만든 샴페인- 마시면 며칠간 머리가 깨지는 듯 아프지만 어떡해- 을 마셨다. 러브샷으로.
어쭙잖게 축하인사를 했는데 뭐라했던가. 아~ 슬픈 까폐의 노래(the Ballad of the sad cafe) 라고 불과 며칠 전에 봤던 연극의 대사를 읊었지. "사랑을 한다는 것은 사랑을 받는 사람보다 사랑을 하는 사람 깊숙이 잠자고 있던 사랑의 감정을 일깨우는 거에 불과하지요. 내 사랑은 이렇게 이기적인데 황송하옵게도 제게 기사작위를 주시다니요. 여왕폐하!" 가당치도 않는 소감을 극적으로 읊으며 무릎을 꿇고서 폐하를 알현하는 내가 진짜로 배우 로버트 테일러를 닮지 않았을까?
기사는 호칭에 써(Sir)를 붙인다며?
생각해봐. 그날, 졸지에 여왕폐하가 된 자치회장은 얼마나 황홀했을까. 나또한 내 이름을 부를때면 꼭 써라고 붙여주던 귀족들과 귀부인들의 우아한 모습. 황궁에서 열린 파티의 주인공이 된 나야말로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웠을까. (흠흠! 내 젊은날에는 제법 멋쟁이 소리를 들었다니까.)
큐피트의 화살이 꿴 사과를 들고서 그녀에게 건냈지. "그대의 사랑이 부디 이루어지기를" 하고서. 그러나 내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랑은 돌아오질 않았어. 그래도 그날 이후 그녀의 얼굴은 다시 쾌활해졌어. 그리고 연극에 문을 두드린거야.
사실 그녀는 나처럼 자기 파트도 불분명한 별볼이 없는 합창단원에 불과했어.
나보다 한 학년 아래 덜렁대기 좋아하는 시골 술도가(양조장) 맏딸이었어. 목소리도 허스키했고 사내처럼 곧잘 내게 형 하고 친하게 지냈지. 이쁘기는 정말 이뻤어. 당시 여학생이 "형" 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드물었어. 운동권에서 그랬다고 했지만 나도 우쭐했어.
당시 그녀는 실연중이었어. 동급생인 합창단원, 부산 싸나이한테 마음을 온통 빼았겨 꿈처럼 달콤하게 지내더라고. 웬걸, 같은 합창단원 친구한테 그 싸나이를 빼았겨 버린 거야. 얼마나 슬프고 허망했을까. 그래서 나와 연극에 심취했던지 몰라. 나도 안 돼보여서 연극을 보러 싸돌아다니며 그녀가 하루빨리 실연의 아픔에서 벗어나기를 바랬지. 공교롭게도 남보기에는 내가 그녀에게 백마를 타고 나타난 기사가 된 셈이었지만 사실은 연극에 빠져서 전공을 바꿀까 심각했던 연극 마니어에 불과했어.
그날, 한 편의 달콤한 꽁트같은 사건이 그녀의 상심을 풀어주었는가봐.
그녀의 얼굴이 모처럼 환했고 나도 기뻤어. 사실, 학생시절의 나는 멋진 로맨스의 주인공이 아니었어. 비련의 여주인공을 다둑이며 슬픔을 함께 해준다며 삐루 잔을 들고서 위로해 주는 조연, 햄릿 곁에 있던 호레이쇼에 불과했어. 얼마있어 그녀는 학교 연극의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했더라고.
그녀가 빨랐어, 연극을 하자고 꼬신 나보다가.
이내 졸업이었고 당시 연극계의 유명한 교수님의 언질을 받아 의기양양했던 나는 꿈을 접어버렸어. 아버지께서 보따리 싸서 나가라고 노여워하시길래 연극은 빠이빠이 한게지 뭐.
지금 생각해보면 안타까워. 그때 계획대로 연극을 전공했더라면 지금쯤 내가 길러낸 한류스타가 얼마나 될까. 중국이나 일본 가서 제자 이름 팔면 대접 잘 받고 올텐데. 이게 뭐야. 법관이 되어서 영감소리 듣기를, 하다 못해 관료가 되어서 출세하기를 원했던 당시의 풍속이 나를 이렇게 덜 떨어진 인생으로 만든 게야. 내가 무슨 소리를 이리 해쌌는지 모르겠네.- 사실 고등학교 때는 미대에 가려고 그림에 빠진 적도 있는 난 그야말로 갈팡질팡이었어.
밤이 깊어가도 잠이 오질 않네요.
무슨 만화 같은 되지도 않는 소설을 쓴다고 나무래지 마시고, '허허~ 당신한테 그런 시절도 있었던가' 하고 웃어주시던가.
'에이~ 강천사에서 실물을 봤는데 영 비디오가 아니던데 뭐.' 이렇게 시비걸면 제가 아프잖아요. 허구헌날, 말 타고 전장터에서 죽여야 내가 사는 피비린내나는 삶을 살아보슈. 이처럼 삭지 별수 있간디요?
그래요, 인생이란 한편의 연극이라지요.
배우는 연출가가 시키는대로 살아야하고 비록 1막에서 내 역할이 끝나고 말지라도 군말없이 내려와야 하는 게 아니던가요. 그저 주어진 역활에 최선을 다 할 뿐.
누구에게나 꿈이 있었고 그 달콤한 꿈이 오늘에까지 나를 밀어주었으며, 고달픈 삶이라해도 살아가는데 힘이 되어 주었다는 걸 기억하시기 바라면서 내 달콤했던 로만스를 끝낼까합니다.
한 알의 사과를 두고 제가 말이 길었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