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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을 사랑함으로
"주여! 제롬과 제가 손을 맞잡고 서로 의지하며 당신에게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평생을 통해 마치 두 사람의 순례자처럼 때때로 둘 중 한 사람이 '피곤하면 내게 기대.'하고 말하면, 다른 한 사람이 '네가 곁에 있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라고 대답하면서 당신을 향해 나아가도록 해 주시옵소서. 아닙니다! 주여,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어 가기에는 너무도 좁은 길입니다."
앙드레 지드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 좁은 문을 기억하시지요?
내 젊은 날, 사랑이라는 말에 취해 밤을 새워 고민하고 애태우던 제롬과 알리사가 삼십 년이 훌쩍 뛰 어넘은 지금에서야 저를 이곳으로 부르네요.
이제 파리로 갑니다. 멋쟁이 은발의 슈발리에의 구수한 샹송과 해 질 무렵이면 노상 카페에 나와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인생을 노래하던 랭보, 보들레르와 지드가, 숱한 예술가들의 도시, 그녀에게 제가 달려갑니다. 빅토르 위고의 꼬제트는 어디에서 마리우스와 만나고 사랑에 이르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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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세 번째 밤을 지낸 날 아침은 휘파람 소리가 절로 나오는 상쾌한 아침입니다.
서울의 늦은 가을처럼 싱그러운 아침 공기를 흠뻑 들여 마셨습니다. 그런데 가슴 깊숙이 들어오는 소 나무 향기, 예! 송진 냄새가 은은해서 흡사 고향에 돌아온 줄 알았다니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나 무에 혹하잖아요. 이런 면에서 로마와 우린 통한다니까요. 로마의 시목(市木)이 소나무거든요.
로마를 떠나는 작별 인사로 "로마의 소나무"가 향기를 가득 품어주며 애석해 하네요. “다시 올거지?”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서 아내는 학창 시절 공작부인으로 출연했다고 공연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던 보마르셰의 "세비야의 이발사" 중의 멋진 불어 대사를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우아한 공작부인의 의상만큼이나 아름답고 도도한 아내가 가벼이 들떠 있는 모양이 너무 좋았습니다. 여자들은 파리 하면 엄청 좋아하대요. 내 아내는 프랑스 문학 전공이라고 유독 그런가? 아님 파리 상제리제 거리의 명품관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막 기내 방송으로 가르쳐준 "몽블랑" 산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희디흰 만년설에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알프스 산맥 연봉이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유럽의 전부였습니다. 과연 알프스는 유럽의 지붕이라더니 대단했습니다. 희디흰 연봉에 싸여 이거다 알아 챌 수는 없었지만 그중 유독 쌀쌀맞지만 기품 있어뵈는 공작부인처럼 턱을 고추 세운 산을 "몽블랑"이라고 내 마음대로 정해 버렸습니다. 창가에 앉아 넋을 잃고 있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몽블랑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어디 당신한테야 견줄 수 있겠어!" 아내는 돌아보지도 않으며 "당신 안목도 괜찮은데..."
말장난 중에도 우리 둘은 넋을 놓은 채, 하얗게 부서지는 겨울 햇빛 아래 눈부신 자태로 솟아 오른 우아한 공작부인, "몽블랑"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리의 정오, 겨울날씨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화사한 파리의 햇살이 눈부셔서 썬 글라스를 꺼냈지요. 알제리 가르송(웨이터)이 ‘안녕하세요.’ 라고 우렁차게 인사하는 레스토랑에서 프랑스 3대 요리라는 에스카르고(달팽이 요리)를 시키고 바게트를 한입 베어 물다가 입술을 벨 뻔 했습니다. 그만큼 입 안은 메말라 있었습니다. 유럽은 대개 식탁이 좁아서 아주 불편해요. 하얀 식탁보를 까는 것도 그렇고, 자주 유럽을 다녀봤지만 입맛에 드는 건 아무래도 이태리고 프랑스도 참을 만 하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 같이 북 유럽 쪽은 사양하고 싶네요. 단체로 가는 길에 레스토랑도 변변한 데 가겠습니까만, 자유시간에 카페에 가서 와인을 마시며 가벼운 안주거리를 들며 따스한 햇볕에 취해보는 게 유럽의 별미지요.
파리 시가지 중심에 위치한 유명한 파리 외방전교회(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로 찾아갑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백여 평 남짓한 잔디밭이 나오고 성당에 들어서니 우리를 기다리는 수원교구에서 유학 오신 신부님 두 분과 학사님이 반가운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하네요. 참 ! 빠트릴 뻔 했네, 사실 이번 순례단은 수원교구 조암 본당 교우들이 본당 출신 바오로 부제님이 파리 갈멜 신학교에서 받는 서품식에 참석하려고 계를 들어 순례를 떠난 거랍니다.
파리 외방전교회만큼 우리나라와 깊은 인연이 깊은 교회단체가 있을까요?
책읽기를 좋아하던 선비들이 중국을 통해서 서학이라는 신학문을 접합니다. 서학, 즉 가톨릭을 연구 하다가 교리를 받아들이고 북경에 있는 외국인 사제를 통해 청원을 하지요.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고. 이 청원은 교황청을 감동시켜 1827년 9월 1일 파리 외방전교회를 거점으로 우리나라에 사제를 파견하게 됩니다. 아마 세계 선교사상 초유의 국가로 기억 되겠지요.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에 빠져들며 시작되는 오늘의 미사는 외방전교회 성당, 백여 평이나 되는 중앙 홀에 제대가 놓여 있는데 제대는 그저 평범한 책상 크기였습니다. 바닥도 신자석과 평평해서 아주 편안했지요. 둘러 선 신자석은 십자가형으로 사방으로 모두 삼십여 석이나 될까? 간단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음~ 초등학교 꼬마 걸상과 흡사해서 시골 학교 교실에서 가지는 간이 미사 같아 마음이 편했습니다.
신부님을 둘러싼 채 드리는 오늘 미사는, "사막의 수도자", "수도회의 개척자"라고 일컫는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가 계신 바로 위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중풍 병자를 요에 눕힌 채 예수 앞에 달아내려 보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로 나아가는 적극적인 믿음의 정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굳센 실천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순교하신 선교사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인상적인 것은 외방선교회 성당 벽이 가득 찰 정도로 큰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조선으로 -그 당시 꼬레아를 그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멀고도 먼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겠지요.- 선교의 임무를 띠고 떠나는 신부님들을 배웅하는 눈물의 파티가 벌어지는 장면이네요. 하얀 턱수염의 신사가 신부님 손을 잡고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복숭아 뺨을 가진 예쁜 소년이 엄마인가 귀부인의 손을 잡고서 뒤로 돌아보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습니다. 그림 속의 하얀 턱수염의 신사가 바로 "아베마리아" 작곡자인 유명한 "구노"이고, 복숭아 뺨이 귀여운 소년이 바로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탕"남작의 어렸을 때 모습이랍니다.
우리 귀에 아주 친숙한 아베 마리아의 구노가 당시 이곳 외방전교회의 성가대 지휘자였다네요. 당시 음악에 있어 구노와 쌍벽을 이루던 사제가 누구시더라 우리나라에 나오신 신부님, 아니 주교님이었는데 이름이 가물가물하네요. 아~ 앙베르주교님입니다. 그 신부님이 이 자리에 있었을 테고. 천주교 박해시대 당시 조선이란 땅은 동방 선교사들에게 '죽음의 땅' 이었습니다. 일단 들어가면 100% 죽음이 확실한 사자굴과도 같은 선교지가 조선이었지요. 따라서 조선에 선교를 지원했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조선으로 입국했답니다.
조선으로 떠나기 직전 선교사들은 죽음 준비 작업을 합니다.
아쉽고 송구스런 마음을 겨우 달래며 부모님과 지인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는 작별 편지를 말입니다. 편지지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지요. 이윽고 떠나기 직전입니다. 동료사제들, 주교님께 하직 인사를 올립니다. 아무런 말이 필요 없네요. 이승에서는 마지막이 될 깊고 힘찬 형제적 포옹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서로 말없이 바라보며 고개만을 끄덕이며 마지막 눈인사를 주고받겠지요.
"먼저 떠납니다. 천상에서 다시 만나요"
"그래요, 먼저 가세요. 저도 준비되는 대로 뒤따르겠습니다. 꼭 뜻을(순교) 이루길 바랍니다."
이어지는 순서는 신자들과 친지들과의 하직 인사를 하는 눈물의 파티가 되겠지요. 선교사들이 신자들과 뜨거운 포옹으로 정을 떼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 아마도 이 그림인 것 같아요.
“떠나라! 복음의 군대여, 그대들의 소망을 이룰 날이 왔다. 선교사들이여! 그대들의 발자취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친구들이여! 이 생에서는 안녕을, 언젠가 천국에서 만날 것이요.“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 파견가 중에서)
이 노래가 들리지 않나요?
우렁차게, 마음을 드높이며 부르는 노래는 하늘로 높이높이 올라 천상의 순교자들에게 당신들이 살아온 삶이야말로 헌신의 삶이었으며 찬미 받아 마땅하다고....
파리 외방전교회는 교황청 포교성성 직할 단체로 설립되었으며 수도회처럼 영성을 바탕으로한 헌장이나 회칙을 갖지 않습니다. 창립 후 오늘날까지 아시아 지역에 약 4,000여 명의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는데 그중 170여 명이 한국 에 파견되었으며, 그중 24명의 선교사가 한국에서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2,000여 명의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했는데 그중 한국인이 100여 명에 이르고 있다지요. 성당 지하 기념관에 내려가면 외방 선교회 신부님들의 선교? 대부분 순교하셨으니 순교 기념관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순교하신 신부님들의 자료가, 서툰 한자와 한글 편지, 그리고 그림이 정리되어 있어 우리를 숙연케 합니다. 아시아에서 순교한 지역은 베트남이 가장 많았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며 잠들어 계신 신부님 유골 앞에서 잠시 화살기도를 올립니다.
"얼굴색도, 말도 다른 멀고도 먼 이국땅에서 순교하신 신부님, 죄송해요. 당신의 고귀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저희들, 똑 바로 살겠어요, 예! 올 곧게 살도록 저희를 잊지 말고 돌보아 주실 거지요?"
기도를 끝내고 보니 또 순교 신부님을 조르고만, 이런 엉터리가 있나... 한국에 오래 계시다가 모국에 돌아와 계신 노년의 마음씨 좋아 보이는 프랑스 신부님이 반가운 고향 사람 만났다고 우리보다 더 유창한 한국어로 우리를 반기시네요. 우리나라 사정이 온통 궁금해 죽겠다고 별별 일을 꼬치꼬치 캐묻는 게 아닙니까?
옆에 있을 때는 미처 몰랐던 그리운 이여! 오늘 밤은 세느강, 밤 유람을 나서렵니다.
이슬비에 젖는 파리의 밤 풍경을 유람선에서 내다보는 보헤미안의 우수를 겻들여 그대에게 노래를 보냅니다.
에디뜨 삐아쁘의 "사랑의 찬가(Hymme a L'amour)" 를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겐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나 또한 당신과 함께 죽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끝없는 푸르름 속에서/ 두 사람을 위한 영원함을 가지는 거예요/ 이제 아무 문제도 없는 하늘 속에서/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샹송은 대개 속삭이는 단조로운 맬로디로 시작하는 데 비해 이 노래는 오캐스트라처럼 장중하게 시작하지요. 사랑에 목숨을 거는 에디뜨 삐아쁘의 노랫말이 너무 아름답지 않으세요?
그땐 사랑에 목숨을 걸었지요.
암요, 걸고말고요. 후후후~ 다시 생각해보아도 사랑이란 열병인가 봐요. 이빨을 덜덜 떨며 밤을 지새우는 고통속에도 보석을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니까요. 그때, 제가 사랑을 했냐구요? 아니오, 청춘이 앓는 사랑은 대개 실체가 없는 관념 자체가 아니던가요? 세월이 너무 흘렀나 봐요, 애써 기억을 불러 모아도 실감이 안 나네요. 내 청춘이 앓았던 마마자국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걸요. 하얗게 눈보라처럼 벚꽃이 난분분하던 동숭동 미라보 다리에서 서투른 낭만을 흉내 내던 시절로 돌아가보는데 그런데 말예요. 유람선은 미라보 다리까지 가지 않는다는군요. 언젠가 우리나라에서 상영 되었던 "뽕네프"가 다가오네요. 대단했어요. 그 아름다움, 조명을 받아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하는 파리지엔느의 솜씨가. "뽕(pont)은 '다리'이고 뇌프(neuf)는 '새로운'이란 뜻이니까 결국은 '새 다리'지요. 어느 한국 소설에서 '새다리'를 '9번 다리'라고 썼더라고요. neuf란 단어에 아홉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나온 실수였겠지요. 그 실수는 이 '새다리'가 서기 1600년경에 돌로 만들어졌고 지금은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라는 것을 모르고 이름 그대로 가장 최근에 만든 다리라고 주장하는 실수보단 아주 가벼운 것이지요."(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에서)
제가 아는 다리는 그것밖에 없어요.
세느강을 가로 지르는 다리는 참으로 많은데도 불구하고 모두 너무 아름다워 감탄하기 바빴습니다.
그때, 물안개 젖어오는 파리의 야경 속으로 신기루처럼 솟아오르는 에팰 탑,
그 여인이... 화려한 조명으로 그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맵시 있는 자태로 동방에서 온 순례자를 어서 오라고 유혹하네요. 꼭 유혹에 넘어가서가 아니라 에팰탑을 엘리베이터로 오르며 흡사 꼬리 열 둘 달린 여우한테 얼이 빠진 선비처럼 이끌려 온 제가 이해가 안 되더이다. 차가운 쇳동가리밖에 되지 않는 이 거대한 몸체가 나를 미망(迷茫)에 빠뜨리네요. 파리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에서 나는 가늠하고 있었습니 다. 프랑스 육군사관학교 자리를.... 평생 알리사와 사랑의 열병을 앓던 제롬이 다녔던 육사의 흔적을 가늠하며 나는 또 한 번 젊은 날의 순교자처럼 온 마음을 바쳐 사랑했던 좁은 문의 제롬과 알리사의 영혼, 아니 아니 바로 나 자신 깊숙이 자리한 내 영혼의 떨림, 내 순결한 것을 동경하던 내 그리움을 반추하고 있었습니다.
에팰탑, 그 높고도 높은 전망대, 유리창을 적셔오는 밤안개, 비로소 당도한 내 그리움의 실체, 이제는 너무 멀리 와버린...
"....그때는 삶이 더욱 아름다웠고/ 그리고 태양은 오늘보다 더 작열했었지요./낙엽이 무수히 나뒹굴어요./ 제가 잊지 못했다는 것,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요./Comment veux-tu que je t'oublie? 어떻게 그대를 잊을 수 있어요?/....그리고 그대가 불렀던 노래를 / 언제나 언제나 듣고 있을 거예요...."
어디선가 파리지엔느가 읊조리는 이브 몽땅(Yves Montand)의 "고옆(古葉)"이 들려오고, 길 떠난 나그네가 애련한 감상에 젖는 오늘은, 그냥 두시라...
밤은 속절없이 깊어가고 천 길 높이 솟아 오른 내 그리움의 꼭지에서 에팰탑, 거대한 몸체를 빗겨 적시어 흐르는 빗방울에, 이루기 요원한 그대에게로 향하는 타는 목마름을 담아 더듬거리며 불러봅니 다.
"...제.롬!...완.전.한..사.라..앙...그리고.자.아.유..."
파리, 밤안개, 샹젤리제, 에팰탑, 세느강......온 밤을 뒤엉킨 꿈속에 창백하고도 여윈 프랑스 여인을 새벽녁엔가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알리사였을 거예요? 너무 거룩한 것에 마음을 두었던 탓이었을까, 몹시 고단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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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고 보니, 그날 밤 파리의 야경에 취해 지나치리만큼 센치했나 봅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면서 부끄러워 지워 버릴까 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반백이 지난 이 나이에 그리 부끄러워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참 기묘한 건, 세월이 지나면서 젊은이의 뜨겁고 말랑말랑하던 마음은 죽은 자의 발바닥처럼 뻐덕뻐덕 화석화되는 거라며요. 그래서 이런 세상에 주책맞은 센치멘탈리스트가 가끔은 필요한 게 아닐까 해서요? 음~ 늙는다는 것은 후회가 꿈을 덮어가는 거라는 말도 있지만... 어쩧던 젊은 시절, 랭보를 보들레르와 앙드레 지드한테 심취하지 않은 청춘이 있던가요? 에디뜨 삐아쁘를 흥얼거리며 꿈꾸던 그 현장에 제가 왔다는 것이 이렇게 멜랑콜릭한 감상에 빠지게 했나 봐요.
제가 알기로 뾰죽한 첨탑과 가파른 지붕, 고딕이란 건축양식은 하느님께로 향한 인간의 그리움과 염원이 그렇게 하늘로 높게 솟아오르게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수많은 성당이 이를 증명하는 거잖아요? 그럼 높이 300M가 넘게 하늘로 솟아오른 에팰탑은 무엇 때문에 그리 키를 키우고 있을까요? 다다르고 싶은 ‘그분’에게로 줄달음치는 우리의 그리움인가요? 혹시혹시말예요, 바벨탑처럼 ‘그분’과 키 자랑을 하고 싶어하는 치기 어린 교만 땜인가요? 아무래도 모르겠습니다. 콩코드 광장에서 싱그런 아침 공기를 마시다가 무심한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에팰탑을 올려보면서 생각해 본거니까요.
부질없는 생각이라면....저도 그만 둘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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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 프랑스가 파업을 풀었던가요? 그냥 파리로 와버렸지 뭐예요.
파리, 그냥 가슴이 두근거리는 맛이 있어 남다르지요. 왜냐고요? 숱한 시와 소설, 영화와 오페라의 무대잖아요. 그냥 멋진 건물을 세운다든가 기막힌 유흥거리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안에 스토리가 있어야지요. 다시 말해서 예술의 향기가, 떠나버린 연인을 잊지 못해 거닐던 추억의 오솔길이라도,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겨야 사람들이 올 테지요.
에펠탑이야기를 조금 더하고 넘어갈까봐요.
파리 마르스광장에 우뚝 솟은 에펠탑은 공학자 겸 건축가였던 알렉상드르 귀스타프 에펠 (1832~1923) 이름을 딴 높이 324m 의 철제 구조물입니다.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제10회 파리세계박람회(엑스포)를 위해 지어졌습니다.
에펠을 일러 '철의 마법사'라는 별 명이 있을 정도로 목조와 석재 대신 철구조물에 전문화된 국제적인 건설회사를 운영했습니다. 뉴옥의 랜드마크인 '자유의 여신상' 내부의 철골 구조물을 만든 곳도 에펠의 회사였어요. 에펠탑은 수많은 철골이 서로 지탱하면서 격자형으로 위로 올라가는 구조입니다. 아래로 퍼진 나팔 모양의 구조는 거센 바람에 저항하는 당대 건축 기술의 산물이었고요. 철의 무게는 총 7,300톤, 탑 전체 무게는 1만 톤에 육박하답니다. 탑의 원래 높이는 300m는 현재 80층 건물에 상당하는데 지금도 파리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랍니다.
당시 예술가들은 고전적인 5, 6층 석조건물로 말끔하게 정리된 파리 시가지에 이렇게 거대하고 새카만 철골 구조물을 세운다는 건 충격에 가까웠지요. 에펠탑을 일러 '해골 같은 종탑', '정말로 비극적인 가로등' 비난을 퍼부었어요.
여자의 일생으로 유명한 모파상은 에펠탑 1층 식당에서 자주 점심을 해결했답니다.
왜냐고요?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파리에서 유일한 장소라고. 이렇게 험담을 퍼부었지만 엑스포가 열리자 최고의 인기를 구가합니다. 아이러니지요. 엑스포가 끝나고서 20년이 지나면 허물기로 했던 임시건축물 에펠은 파리 시민들의 반대로 철거를 할 수 없었답니다. 1940년 나치 독일이 파리를 점령했을 때 프랑스군은 엘리베이터 케이블을 끊어버려서 히틀러는 에펠탑을 오를 수 없었대요. 1,000 개가 넘는 계단 때문에 오르기를 단념한 셈이지요. '히틀러는 프랑스를 정복했으나 에펠탑은 정복하지 못했다.' 는 말이 여기서 나왔어요. 1991 년 에펠탑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오늘 신문에 보니, 케이 팝 때문에 동유럽에서도 우리나라를 자세히 알고 싶어서 한국의 유물을 전시하게 해달라고 우리 박물관으로 신청이 들어오나 봐요. 케이 팝에서 신라금관이라든가 반가사유상, 그리고 달항아리 조선백자로 이어지는 기막힌 흐름, 이게 바로 한 나라가 가지는 문화의 힘이고 인류를 아우르는 인류애로 이어질 테지요.
여행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를 바꿔주지요. 단순한 여행보다는 뚜렷한 테마가 있는 투어가 바람직할 테고요. 가톨릭신자인 우리에겐 성지순례는 한 번 꼭 가봐야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다란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길 떠난 중세 유럽의 순례자가 되어 저랑 또 길을 떠나볼까요? 신발이 좋아야하는데 하이힐은 집에 두고 하얗게 세탁을 한 운동화가 제격이지요. 신발끈 조이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