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낙동정맥 제18~19구간 (한티재~운주산~이리재~도덕산~시티재<안강휴게소>까지)
<첫째 날> 제18구간 (한티재~불랫재~운주산~이리재까지)) ...............언 제 ; 2015년 6월 20일 토요일 (18~26도, 오후 비) ...............누구와 : 박종관, 박찬익, 부길만, 이정일, 임순재, 황성자, @구본영 ...............산행시간 ; 총 6시간 10분(휴식, 탐방, 식사시간 포함)
(05;30) 서울 남부터미널 출발 (06;00) 하남 만남의 광장 출발 (07;40) 문경휴게소 운전 교대 (08;20~09;05) 칠곡휴게소 아침식사 (10;10) 한티재 도착 .................................
10;20 한티재 출발 10;27~10;30 한티터널위 삼거리 도착~출발 10;38~10;40 구 한티재 임도 11;20~11;28 544.9m 문수봉/포항시계능선 합류점 11;50 490봉/좌 12;05~12;18 불랫재/나무테크 계단/비포장임도/낙동정맥 트레일 안내도/비가 오기 시작 12;27 삼각점 12;35 안부 사거리 12;53 421.2봉/삼각점 13;05~13;40 솔밭 능선/비아표 쌈밥점심 13;53~13;56 묘송/춤추는 소나무(사진 촬영) 14;13 상안국사(1.0km)갈림길/공터 14;22 운주산 갈림길 14;25 797봉/돌탑봉/낙동정맥 코스는 직진이고, 우리 일행은 우측 운주산으로 진행 (14;28) 이정표(이리재 4.0km)삼거리 (14;35) 운주산 헬기장 (14;36~14;33) 운주산 정상/경치 좋음 (14;38) 이정표(이리재 4.0km)삼거리/우 14;42~14;45 문무관비석 묘를 지나/정맥길 복귀 13;00 가-13 13;06 식탁바위/촬영 15;42~15;52 돌탑봉 16;30 이리재 도착/기계-임고 921번 2차선 고개도로 ...................................
(17;50~19;00) 한우포도청(포항시 기계면사무소 옆 T.054-243-1199) (20;50) 봉좌마을 캠핑장/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길 46(봉계리 262-1) 054-243-2372 (FAX. 054-243-2371 / Phone. 010-3534-2373) 숙박
<산행기>...............................................
한티란 우리말로 하면 ‘큰 고개’라는 뜻이고 한자어로는‘大峴’이다. 포항시 죽장면과 기계면을 연결하는 고개이지만, 지금은 31번 국도가 지나가는 터널재이다. 구 한티재 아래 위치한 죽장면에 ‘한티’라는 마을이름을 따서 ‘한티재’라고 부른다. 지난달에 제17구간 산행을 마치고 잔디밭에 주저앉아 여유를 부리던 곳이었는데, 오늘은 부산의 모산악회가 먼저 와서 취사를 마치고 한창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근래 메스컴에서는 기상대 관측 사상 최대의 가뭄이라며 타들어가는 농작물의 피해상황을 실시간으로 방영한다. 이곳 한티재도 예외가 아니다. 깊은 숲속임에도 불구하고 앞 사람이 발자국을 내고 지날 때마다 바싹 마른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며 시야까지 방해한다.
가파르게 입산하여 출발 7분 만에 본 정맥코스인 삼거리에 올라 인증 샷 한 컷을 누르고 좌측으로 튼다. 거미줄이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얼굴에 달라붙고, 손으로는 이를 떼어 내느라고 귀찮기는 하지만, 능선 길은 완만하여 걷기에는 편하다. 한티재 출발 20분 만에 구 한티재 비포장 임도에 내려서니 부산에서 왔다는 남녀 한 쌍이 바짝 마른 땅을 파며 질경이 캐기에 한창이다. ‘질경이’가 만병통치약으로 그만이라나.
후덥지근한 날씨에 단비라도 내리려는지 하늘엔 구름이 잔득하고, 실바람이 불어오는 능선에 서면 천하를 얻은 것 같은 상쾌함에 기분도 그만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쾌함도 잠시이고, 오르막을 한참 오르고 나면 금방 숨을 헐떡이며 괜한 고생을 사서한다는 생각도 든다. 첫 번째 만나는 544.9m의 봉우리가 꽤나 높게 느껴진다. 정상에서 잠시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푼 다음 다시 출발한다.
벌써 11시 50분이다. 490봉에서 급히 좌측으로 틀어 가파른 비탈길을 미끄러지듯 15분쯤 내려오니 12시이고, 숲 속 임도에는 나무테크 계단과 낙동정맥 트레일 안내도가 있는 불랫재이다. 그동안 참아 왔던 빗방울이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三春苦旱에 기다리던 단비(甘雨)이다. 그러나 비가 많이 좀 쏟아져서 타들어가는 대지를 촉촉이 적셨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우의를 입을까 말까할 정도의 가랑비이다.
불랫(佛來)재는 영천시 자양면과 포항시 기계면을 잇는 비포장 임도로서 승용차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까 말까할 정도이다. 부처님이 오신다는 佛來의 뜻이 있고, 이 재를 넘노라면 도적이나 범과 같은 야수의 피해가 많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不來의 뜻이 있는 곳이다.
한편, 영천 쪽에서 불이 나면 강한 서풍을 타고 잘록한 이곳 불랫재를 넘어 마을로 번져온다는 뜻에서 아랫마을 이름을 火嶺峴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대화의 상징인 포항종합제철로 보내지는 송수관을 뚫은 이후부터는 마을의 샘물이 말라 지금은 人家가 모두 떠나고,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만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곳이 6.25 전쟁 때는 자양을 중심으로 기계, 안강, 죽장, 장사와 어래산, 보현산, 운주산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기도 했던, 이른바 낙동강 전투이다.
12시 20분쯤에 다시 고도를 높이다가 안부사거리를 지나고 421.2봉을 넘어 점심 먹을 장소를 찾는다. 찬님이 선두에 섰다. 솔숲이 울창한 평지를 보고는 이곳에 보자기를 깔고 점심을 먹자고 한다. 시간도 어느덧 오후 1시를 넘겼을 때이다. 비아표 영양밥에 각종 야채를 준비한 쌈밥이다. 우리만의 오붓한 점심삼매에 빠져 있는데, 정작 비아는 햇반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왜냐고 물어보니 본인은 늘 먹는 잡곡밥보다 햇반이 맛있어서 먹는다고 한다.
알고 보니 집에 있는 밥솥으로는 여럿이 먹을 밥을 한꺼번에 다 짖지 못하고 두 번이나 밥을 지어야 되는 번거로움과 식구들 눈치 때문에 1인분은 햇반을 데워 온 것이란다. 속 깊은 비아의 배려에 버럭도사는 오히려 ‘다음부터는 밥을 더 많이 싸오라’고 밥투정을 한다.
점심을 먹고 난 뒤부터는 빗줄기가 제법 굵어지고 메마른 땅에도 물기가 스며든다. 방수복을 단단히 하고 배낭커버를 확인한 후 15분쯤 걸었을까. 소나무 가지가 묘하게 뻗어나가 춤추는 듯이 구부러진 묘송 앞에 서니 지친 심신을 달래려는 듯 걸음도 따라 멈춰진다. 소나무 가지에 앉아도 보고, 카메라에 담기도 하며 한 숨을 돌린다.
오후 2시 13분에 상안국사 갈림길을 지나고 10분도 되지 않아 다시 운주산 갈림길에 선다.우리는 여기서 직진하여 797봉에 오른다. 이른바 돌탑봉이다. 돌무더기가 있고, 운주산 정상은 우측으로 200여 미터 거리에 있다. 안개는 자욱하고 비는 내려 전망은 바라볼 수 없지만 그래도 운주산 정상석은 찍어야겠기에 길님과 함께 대표 자격으로 정상을 갔다 오기로 한다.
이곳까지 기왕 왔다면 아무리 지쳤어도 운주산 정상은 꼭 한 번 다녀오는 것이 후회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이다. 시간도 왕복 15분이면 충분하고, 실제로 오르막 느낌도 그렇게 많이 받지 않는다. 797봉인 돌탑봉을 내려오니 이리재 4km 이정표가 있고, 여기서 100여 미터 거리에 헬기장 다음에 바로 운주산 정상이다.
해발 806.4m의 雲住山 또는 雲柱山은 八公山, 普賢山과 함께 영천의 三山으로 불린다. 특히 임진왜란 때는 산세가 외적을 방어하기 좋은 곳이어서 김백암(金柏岩) 장군이 이곳에 성을 쌓아 항전하였고, 韓末 때에도 의병 조직인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일제와 항쟁을 펼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임진왜란과 6·25 전쟁 때는 주민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지금도 운주산 남쪽 아래의 영천군 임고면에는 守城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지키기 위한 선조들의 항전이 얼마나 치열했으면 마을 이름까지 守城里로 불렀을까.
‘산기슭에 항상 구름이 머물러 있는 모습이 마치 산이 구름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기둥 같다는 雲柱山’. 오늘은 비에 젖고 안개에 가려져 황량하기만 하다.
또한 이곳 운주산 정상석 옆에는 壇을 쌓은 중앙에 ‘제천단’이란 간판석이 있다. 단군 성조께 올리는 祭壇인지, 아니면 이 고장에 체전이 열리면 성화 불을 붙이는 체화단으로 활용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단을 쌓은 역사는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가 않다.
정상을 밟고 바삐 되돌아오는 데 역시 나머지 팀원 모두가 운주산 정상을 올라오고 있다. 빗줄기는 추적추적 점점 굵어지는 때이다. 이리재 4.0km라고 표기된 이정표 앞에서 팀원 모두를 기다렸다가 다시 합류하여 우측으로 내려선다. 그리고 2~3분 후 좌우에 문, 무관 비석을 세운 커다란 묘를 만나는데, 영장군 정시심(鄭詩諶)장군의 묘이다.
정시심 혹은 정시담 장군은 숙종 2년인 1661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충무위 대호군(종3품 무관)까지 올라 전주 영장(전주지방의 초고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정시심 장군의 묘가 이곳에 있기까지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정지심은 평소 풍수가이기도 한 최씨 성을 가진 친구와 무척 가까웠는데, 하루는 ‘이곳의 명당은 자네가 하고, 자네도 산을 많이 다녀 보아서 알겠지만 혹시 자네가 봐둔 명당이 있으면 그곳은 나를 주게’
의아한 정시심이 ‘왜 이 좋은 명당을 자네가 갖지 않고 나를 주려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최씨는 ‘이 명당 터엔 그냥 시신을 묻으면 명당이 될 수 없고, 바닥에 송진을 깔고 시신을 묻어야 명당이 될 수 있다네, 이 터가 탐은 나지만 나는 가난해서 송진을 깔 수 없으니 이 터 주인이 되지 못하므로 자네가 갖게’
이후 정시심이 별세하고 그의 아들 정석달이 친지들과 함께 청송, 기계 등지에 송진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소금을 댓가로 준다는 소문을 내어, 송진 한 가마니를 모아 이곳에 깔고 묘를 썼다고 한다. 장군 묘를 지나 정맥 길에 복귀하고 보니 비는 점점 많아지고 길은 완만한 평지성 내리막이다.
오후 1시가 될 즈음 ‘가-13’이라고 표기된 말뚝을 지나자 雨衣 속으로 스며드는 빗물이 팬티까지 젖어 온다. 원탁처럼 생긴 ‘식탁바위’를 지난다. 그러나 이젠 머물러 가기도 쉽지 않은 빗속의 생쥐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는 점점 굵어지고 그만그만한 능선 길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다. 빗물을 머금은 잡목들은 푸르디푸른 진록을 자랑하며 생기가 넘쳐난다. 이왕 내리는 비라면 좀 더 많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운주산을 출발하여 한 시간 반 이상을 지나도록 휴식도 없이 걷는 것을 보면 날씨가 뜨겁고, 땀나는 날 보다 비오는 날이 더 걷기에 좋은 걸까. 이리재 고개가 가까워지면서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릴 듯 말 듯한 거리의 625m의 돌탑봉에 오른다. 3시 50분이다. 비를 맞으며 물병을 들이키는 광경도 오히려 멋져 보인다.
도착 예정했던 시간대를 많이 벗어나지 않은 4시 30분에 이리재에 내려선다. 차량도 뜸한 한적한 고개마루의 2차선 지방도이다. 포항시 기계면과 영천시 임고면을 잇는 고개인데 현지인들은 ‘임고재’라고도 부른다. 택시 두 대를 불러 한 대는 기계면의 유명식당을 찾아 나서기로 하고, 나는 비아, 찬님과 함께 한티재로 직행하여 승합차로 바꿔 탄다.
그럭저럭 시간은 벌써 오후 5시 50분이다. 기계면사무소 옆에 ‘한우포도청’이란 식육식당에 들어 배낭을 풀고 나니 오돌오돌 한기까지 든다. 이를 눈치 챈 서빙아줌마는 재빠르게 바닥에다 불을 지피고 맥주, 소주, 막걸리와 불고기거리를 알아서 챙겨 놓는다.
식사를 끝내고 나오면서 우리의 신분은 책쟁이, 글쟁이 들이라고 밝힌다. 전국의 여행담을 2~3년 후에 책으로 엮어 나온다고 하니까 주인장은 ‘그런 줄 알았더라면 더 잘 해드렸을 텐데’ 하며 기념촬영도 빼놓지 않는다.
숙소를 찾아 나선다. 요즘 메르스 정국이어서 전국 여행객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예약을 하지 않아도 잠자리가 문제없을 것으로 예상되어 그냥 내려 왔다. 우선 이리재 넘어 ‘임고 마을회관’으로 달린다. 그런데 마을회관에 도착해서 보니 동네 이장님이 반겨준다. 그러나 잠은 그냥 자고 가라고 하는데 이불이 없어 곤란하디. 다시 수소문하여 도착한 곳이 ‘봉좌마을 캠핑장’이다.
폐교된 옛 기남초등학교를 새롭게 단장하여 마을에서 운영하고 있다. 오토캠핑장과 주변에 포항승마장 그리고 농촌과 연계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 등이 있다. 커다란 교실을 객실로 꾸몄고, 회의실등도 갖추고 있어서 각종 모임이나 교육 세미나장소로도 가능할 것 같은데, 글쎄, 관리하는 아줌마가 불친절하여 뜻대로 될 런지는 걱정스럽다.
우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큰 객실에 이부자리를 편다. 비에 젖은 속옷은 바닥에 깔고 겉옷은 벽에는 넌 다음 등산화에는 신문을 구겨 넣는다. KBS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세자 광해군의 활약에 대한 선조의 경계심이 보는 이로 하여금 흥미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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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제19구간 (이리재~봉좌산~도덕산~오룡고개~시티재<안강휴게소>까지))
...............언 제 ; 2015년 6월 21일 일요일 (14~27도, 흐림) ...............누구와 : 박종관, 박찬익, 부길만, 이정일, 임순재, 황성자, @구본영 ...............산행시간 ; 총 6시간 40분(휴식, 탐방, 식사시간 포함)
(05;40~06;00) 이침 식사 (06;22) 이리재 도착 ..................................
06;30 이리재 출발 07;15 봉좌산 전망대/615봉 봉좌산 갈림길/삼시봉/정맥길은 우측/우리는 봉좌산으로 진행 (07;16) 정자 (07;20) T자 삼거리 갈림길/정상은 좌 (07;25) 심복골 (07;30~07;40) 봉좌산 정상/나무테크/쉼터 의자 전망 좋음 07;52 615봉 봉좌산 전망대/삼시봉/정맥길 다시 복귀 08;00~08;05 쉼터정자(민내마을 3.29km) 08;30~08;40 의자 2개 봉/휴식 08;55 임도 정자/낙동정맥루/우측으로 30m쯤 진행하다가 좌측으로 입산 09;34 도덕산 갈림길/우측, 그러나 대표주자로 500m의 도덕산행 왕복 (09;35) 자연 천연쉼터/30~40명 정도 앉을 정도의 평편한 암반 (09;36~09;39) 삼각점~송전탑 통과 (09;41~09;44) 도덕산 정상석/사진(도덕산은 평편한 암반이 많다.) 09;50~10;52 도덕산 갈림길 복귀/출발 10;10 우측으로 너덜지대 10;23 경주이씨 묘 2기 10;33 마을뒷산(묘등)/울타리 10;37~10;42 오룡고개/시멘트도로 11;20~11;32 이정표(오룡리 3.7km, 삼포리 1.8km)/의자에서 간식 타임 11;58 삼성산 갈림길/우 12;01 월성이씨 묘/삼각점 12;34 소나무 많은 작은 봉/ 좌측에 묘 12;55 삼성산 제단석설치 내력비/355봉 13;10 시티재/안강휴게소(영천-경주간 28번 국도)도착 ..........................................
(15;10) 택시로 이리재 도착/승합차 탑승 (16;00~17;05) 임고서원 앞 식당/점심(소찌개) (17;10~18;00) 임고서원 관람 후 상경, 출발 (22;20~22;50) 하남 광장/저녁식사 (22;30) 남부터미널 도착/해산
<산행기>.........................................................
큰 객실 숙소에서 4시 40분에 기상한다. 끓인 라면에 햇반을 말아 먹고 일찍 출발하려 했지만 주방을 일찍 오픈시켜 주지 않는다. 무뚝뚝한 관리아줌마에게 비아가 통사정을 하고, 그 덕분에 겨우 문을 열어준 시간이 5시 40분이다. 비아가 같은 주방에서 라면을 끓이며 인사를 해도 비아에게만 더욱 불친절하다. 같은 여자로서의 시기심일까.
6시에 차량을 몰고 이리재 고갯길에 6시 22분에 도착, 6시 30분까지 준비를 마치고 곧바로 출발한다. 비도 그친 상태여서 걷기에 좋고 구름도 끼어 뜨거운 햇빛 걱정도 없다. 다만 선두에 서다 보면 엊저녁에 내린 빗물이 나뭇잎에 매달렸다가 사람이 스치면 바지로 떨어져 바지가 온통 다 젖는다. 여기에 거미줄은 얽혀있어 얼굴에 달라붙는다.
초입부터 빡센 오르막이다. 소나무와 잡목 숲이 빼곡히 우거졌다. 내려다보이는 골짜기의 전경이 시원스럽게 뚫릴 무렵 7시 15분에 615m의 봉좌산 갈림길에 도착한다. 선두에 선 길님과 찬님이 곧바로 직진이라고 생각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뺀다. 시그널은 오른쪽에 달려 있는데, 혹시 바로 보이는 亭子까지 깠다가 다시 내려오려는가 싶어 따라 나선다.그러나 곧장 도망가는 걸 보면 코스에 대한 별다른 의심은 전혀 없어 보인다.
다만 봉좌산 정상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 亭子를 지나고, T자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틀어 심복골 갈림길을 지난다. 심복골이란 옛날 어느 부자집에 착하고 일 잘하는 머슴이 있었는데 이름이 없어 동네사람들이 복을 많이 받으라는 뜻에서 深福으로 이름을 지어주었다. 심복이 나이 들어 세상을 떠나자 봉좌산 아래에 묻어주고 이 골짜기를 심복골이라 부른다는 곳이다.
아침 7시 30분에 626m의 봉좌산 정상에 오른다. 나무테크 쉼터 의자가 있고, 타종이 설치되어 있으며 정상석 옆에는 국기가 휘날리는 깃대봉이 있다. 봉좌산은 땅의 골격을 이루는 대간이나 정맥에는 속해 있지 않다. 다만 봉좌산 정상에는 봉황이 내려앉은 듯한 鳳座岩이 있고, 그 기상은 정맥의 기운을 그대로 간직한 채 봉계리 일대를 품은 형상을 하고 있다. 우리도 鳳座席에 올라 잠시 東海의 기운을 받아 숨 쉬며 두 팔을 번쩍 들어 고함을 질러본다.
봉좌산 정상에서 다시 원 위치까지 돌아오는 데는 약 16분, 왕복 35분간이나 정맥길 하고는 관계없는 시간을 보낸 셈이다. 그러나 봉좌산 다녀 온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으며, 봉좌산 갈림길인 615m 전망대로 다시 돌아온다. 조그마한 어느 리본에 이곳을 三市峰으로 표기한 것을 보면 아마 경주시, 영천시, 포항시를 경계하는 곳인가 보다.
이곳 갈림길에서 정맥길 따라 우측으로 내려서니 쉼터 亭子가 있고, 민내마을 3.29km라고 적힌 이정표가 있다. 아침 8시이다. 낮은 능선길에 우거진 숲 속 길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간간히 쉼터의자가 설치되어 있어 휴식을 유혹하기도 한다. 결국은 30분도 못가 8시 30분에 쉼터의자가 있는 봉우리에 올라 배낭을 벗어 제친다. 1 0분간의 휴식을 끝내고 내리막 하산길을 15분쯤 내려오니 비포장 임도길에 또 하나의 亭子가 나타난다. 간판엔 낙동정맥루라고 적혀있고, 아마 이곳이 지도상의 ‘배티재’인 것으로 보인다. 정맥길에 산허리를 휘몰아 가며 곡선을 그린 임도의 경치가 너무 좋아서 그럴듯한 정자이름을 붙인 것일까. 길은 임도를 따라 우측으로 20m쯤 진행하다가 다시 좌측으로 입산하는데 시계는 어느덧 오전 9시를 가리킨다.
이제 도덕산이다. 숨이 턱에 닿도록 식식대며 가파르게 오른 정상이 도덕산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봉우리는 545m의 무명봉이다. 지도를 펴고 도덕산 정상을 찾으니 정상은 아직 왼쪽으로 한참을 뻗어 나간다. 9시 34분이 되어서야 도덕산 갈림길에 도착한다. 정상은 직진하여 500m거리에 있고, 정맥코스는 오른쪽으로 급하게 찍어 내려서게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 道德山 정상을 전부 같이 다녀오자는 제의에 아무도 호응을 않는다. 할 수 없이 나 혼자 스스로 다녀오기로 하고 계산을 해보니 직진거리 500m이면, 왕복거리 1km이다. 그렇게 만만치 않은 거리이다. 그리고 ‘자연 천연쉼터’라고 적힌 암반을 지난다.
이 암반에는 30~40명 정도는 앉을 수 있을 듯한 평석이다. 가족단위의 쉼터로는 안성맞춤이다. 라는 생각을 하며 삼각점봉과 송전탑을 거치고 9시 41분에 도덕산 정상에 올라선다. 암석 틈 위에 정상석이 있고, 정상석은 동해로 향해 장대한 몸짓을 하고 있다. 장쾌하고 시원한 절경 앞에 나도 따라 큰 숨을 들이키며 팔을 뻗는다.
道德山은 높이 702m로서 경북 경주시 안강읍과 영천시 고경면을 경계하는 산이다. 일명 斗德山이라고도 한다. 주 봉우리에서 바라보면 동해가 한 눈에 들어오고, 남쪽의 紫玉山과 마주친다. 북쪽의 鳳座山에서 뻗어 나온 맥이 서쪽의 三聖山과 어깨하고, 동쪽으로는 魚來山을 거느린다. 산 중턱에는 道德庵이 있다.
또한 산 아래 玉山里에는 조선시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기거하던 독락당(獨樂堂 : 보물 제413호)과 옥산서원(玉山書院 : 사적 제154호)이 있고, 정혜사지 13층 석탑(국보 제40호)등의 유적이 있다. 또한 도덕산은 동방의 五賢(이황, 조광조, 이언적, 정여창, 김굉필)이라고 일컫는 그 중 한 사람인 조선의 대학자 晦齋 李彦迪이 이 산에서 공부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덕산 갈림길에 다시 복귀하니 9시 50분, 왕복 16분이 걸렸다. 혼자 빨리 걸어 왔으니 망정이지 쉬엄쉬엄 여유롭게 다녀오려면 왕복 30분은 걸릴 듯하다.
이제 정맥 길은 급하게 내리막으로 내려선다. 10시 10분에 너덜지대를 지나고, 산촌마을 뒷산을 경유하여 10시 40분에 시멘트도로인 오룡고개에 도착한다.
오룡고개는 산자락에 위치한 마을터가 용처럼 생겼다고 하여 처음에는 美龍이라 불렀다. 그 후 이 고개를 갈구목 또는 미룡고개라고 부르다가 일제가 강제로 彌農이라 하였다. 五龍은 그 후 행정구역 개편시에 부르게 된 이름이다. 비가 내리면 이를 경계로 하여 빗물은 東西 양쪽으로 갈라서는 고개이다. 그러나 오늘은 마침 경주에서 왔다는 부부가 가뭄에 타들어가는 고구마 줄기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 10시 40분이다.
정맥코스를 가리키는 시그널은 곧바로 건너편 가시밭 언덕에 조그맣게 달려있다. 산딸기가 드문드문 눈길에 들어오고 한 움큼 따서 입에 넣으니 그 맛 그대로이다. 묵은 산딸기 밭을 지나 본격 숲속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오룡리 3.7km, 삼포리 1.8km 이정표 옆에 쉼터 의자가 있기에 이곳에서 10여분이나 간식을 취한다.
11시 30분이 넘은 삼성산 가는 숲 길은 오르막의 연속이다. 오룡고개에서 한 시간 정도는 족히 걸렸을까 삼성산 정상으로 향하는 갈림길에 올라섰는데, 시간은 벌써 12시를 바라본다. 삼성산 800m 떨어진 이곳 갈림길에서 우린 우측으로 내려서며 월성이씨 묘가 있는 삼각점을 지난다.
멀리 시티재 굽은 도로가 눈앞에 아른거리고 개 짖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보면 목적지도 이제 불과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작은 봉우리 서너 개는 더 넘고서야 355봉에 닿고, 이어 ‘삼성산 제단설치 내역비’를 지난다. 산딸기가 지천으로 널린 내리막을 내려갈 때면 주섬주섬 산딸기 따먹기에 신이 난다.
오후 1시 10분에 경주시 안강읍과 영천시 고경면은 이어주는 28번 국도에 도착한다. 시티재의 안강휴게소, 오늘 산행 6시간 40분으로 마감하는 최종 목적지이다.
이곳은 옛날에 소대 발(소에 싣는 나무 발)이 많았다고 하여‘시치재’로 부르다가‘시티재’가 되었다고 한다. 安康은 신라 경덕왕 때 주민들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에서‘安康’이라고 하였고, 안강휴게소에 내려서면 특이하게도‘南北平和統一念願碑’가 우뚝 서 있다. 낙동강 전투의 치열했던 이곳에 통일탑을 세운 뜻은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은 없어야겠다는 염원이리라.
통일 염원비 앞 나무그늘에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중년 두 사람과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들은 절친한 친구관계이다. 불행하게도 산업현장에서 일하다가 몸을 다쳐 겉보기에만 멀쩡하지 실은 몸을 제대로 못 써는 불구자들이다.‘연세 드시면서까지 산에 다니시는 모습이 무척 부럽다’고 하는 그 말에 새삼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도 해 본다. 이들은 또 그들의 친구가 운전하는 택시에 여섯 명이 타는 조건으로 이곳까지 호출해 주는 친절도 베푼다.
6명을 태운 택시는 오후 3시에 이리재에 도착하고, 우리는 3시 10분에 승합차로 갈아탄다. 임고서원 탐방길을 나서기 위해서이다. 영천시 임고서원 앞 소찌개 식당에 도착하여 식사를 하고, 임고서원을 탐방할 때는 어느덧 늦은 오후 4시가 된다.
臨皐書院은 우리나라 충절의 대표적 정치인 圃隱 鄭夢周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다. 조선 明宗 8년(1533)에 노수(盧遂),김응생(金應生),정윤량(鄭允良)등의 사람들을 창솔하여 浮來山에 서원창건을 시작하고 이듬해인 1554년에 준공하였다. 명종으로 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位田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6년(1603)때 현 위치에 移建하여 再賜額 받았으며, 인조 21년(1643)에 旅軒 張顯光을 배향하고, 정조 11년(1787)에는 芝峰 皇甫仁을 추배하였으나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5년 정몽주의 위패만을 봉안하여 복원하였고 2001년에는 황보인의 위패도 다시 배향한 곳이다.
경내의 묘우 표충사, 내삼문 유정문, 강당 흥문당, 정몽주 신도비, 유물 보호각 삼진각, 문루 영광루, 서재 함육재, 동재, 수성재 등을 차례로 탐방하고, 마지막으로 정몽주 유물관에 들어선다.
圃隱은 고려말의 학자이자 충신으로서 이 고장 영천 출생이다. 초명은 夢蘭 또는 夢龍이었고, 자는 達可, 호는 圃隱이다. 어머니 李氏가 임신하였을 때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나서 夢周를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몽란이라 하였다가 뒤에 몽룡으로 개명하고, 성인이 된 뒤에 다시 몽주라 고쳐 불렀다.
충절의 대명사 포은 정몽주의 일대기를 관람한 후 유물관 밖으로 나오니 오후 6시를 바라본다. 식지도 않고 달아오른 따끈따끈한 햇볕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갈 길은 아득하다. 정몽주의 고향이 영천이라는 것도 몰랐던 무식을 내심 부끄러워하며, 1박 2일의 일정을 여기서 마무리한다. 오후 6시를 조금 넘겨 막 상경을 서두르는데, 내비게이션에서는 4시간 30분 후에 서울을 도착한다고 일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