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권력의 계보학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하겠다.
로쟈의 저공비행을 운영하고, 서평의 대가로 알려진 이현우(한림대 연구교수, 서울대 러시아문학 전공)의 카페를 방문하여 권력의 계보학을 퍼왔다. {인문과 사상}에 소개된 바에 의하면 15,000권정도를 읽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정작 본인은 15,000권을 산다는 표현으로 자기의 겸손을 대신하였지만, 서평으로 유명한데 돈이 됩니까, 라고 기자가 물으니 책값 정도는 된다고 한 것으로 기억한다.
국내 독자들에겐 <폭력의 철학>(산눈, 2007)을 통해 인상적인 데뷔를 한 일본의 사회학자 사카이 다카시의 새로운 책이 출간됐다. <통치성과 자유: 신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그린비, 2011). 사회사상사를 전공한 저자는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의 일어판 역자이기도 하다. 이번에 나온 <통치성과 자유>는 미셸 푸코의 권력론 혹은 통치성론을 참조하여 자유의 문제를 재해석하고 있는 책이다. 원제는 <자유론: 현재성의 계보학>이다.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지난주부터 책상맡에 놓고 있는 책인데, 리뷰기사를 일단 챙겨놓는다.
경향신문(11. 06. 04) 신자유주의가 잉태한 ‘배제사회’
이 책에서 저자 사카이 다카시가 그리는, 통상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우리 시대의 초상은 그가 ‘포스트 누아르’라고 명명한 과도하게 밝은 얼굴을 하고 있다. 누아르 영화가 흘러넘치는 폭력을 그린다면, 포스트 누아르는 포스트-폭력을, 폭력을 사라지게 하는 폭력을 그린다. 저자에 따르면, 빔 벤더스의 영화 <폭력의 종말>이 딱 그렇다. 영화 프로듀서인 주인공은 2인의 남성에게 납치돼 살해당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 사건이 미연에 방지된 것이다. 폭력을 사전에 제거하는 이 장치를 불안해 하던 위성감시센터의 책임자가 그것을 고발하려던 순간, 그 역시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맞아 죽는다.
폭력을 제거하는 폭력. 그것은 빛과 어둠을 선명하게 대비시키면서 빛을 잠식해가는 어둠의 힘을 음울하게 그려내는 누아르 영화와 달리, 빛과 어둠의 대비를, 혹은 어둠을 전면적으로 몰아내는 거대한 빛으로 정화된 세계를 만들어낸다. 공공장소를 모든 어둠에서 지켜내는 지나친 밝음, 폭력과 범죄로부터 공공을 해방시키는 이 거대한 폭력, 그것은 문자 그대로 폭력에서 ‘벗어남’을 뜻하는 동시에 폭력 ‘이후’의 폭력을 뜻한다는 점에서 포스트-폭력이다.
1982년 발표된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의 ‘깨진 유리창’이란 논문은 범죄심리학에서뿐 아니라 우리 같은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글이다. 가장 중심적인 내용은 “만약 어떤 건물에 유리창이 하나 깨진 채 방치돼 있다면, 머지않아 그 건물의 유리창은 모두 깨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얘기다. 그 건물이 방치된다면, 일대의 건물 또한 모두 유리창이 깨지게 될 것이다. 방치된 무질서는 또 다른 무질서를 낳고 이는 결국 범죄를 양산한다는 것이 요지다. 이를 방지하려면 노숙자, 매춘부, 주정꾼 등을 처벌해야 하며, 무질서를 조장하는 행위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선 안된다는 것이 그 논문의 결론이었다. 이른바 ‘제로 톨러런스 정책’이 그 결과로 출현한다.
줄리아니 시장 밑에서 뉴욕 경찰본부장에 취임한 윌리엄 브래튼은 이 ‘깨진 유리창 이론’을 가장 강력하게 실행했던 사람이었다. 지하철에서 노숙자들을 쫓아내고 체포해 지하철을 ‘탈환’했고, 교차로에 정차 중인 자동차의 유리창을 닦아 팁을 받는 아이들을 단속했다. 맨해튼 다리 밑의 판잣집을 철거하고 성매매와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단속도 강화했다. 이런 치안정책의 요체는 이른바 ‘언더클래스’라고 불리는 하층민들에게 “전쟁 분위기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 1994~97년에 살인은 60% 감소했고, 총범죄수도 43% 감소했다고 한다. 놀라운 성과였다!
그러나 동시에 경찰의 만행에 대한 불만도 늘었다. 그것은 줄리아니가 취임한 94년 전반기에 46%나 증가했다. 또 경찰에 의한 소수민족과 유색인종에 대한 살해도 급격히 증가했다. 범죄와 폭력을 제거하는 일종의 포스트-폭력이 ‘경찰에 의한 테러’로 귀착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누아르에서 포스트 누아르로의 이행은 범죄자에서 경찰로 폭력의 주체가 이동하는 현상을 뜻한다고도 해야 할 것 같다.
폭력으로 폭력을 제거하려는 이러한 정책은 뉴욕경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실업자나 주변적 직업을 갖는 ‘언더클래스’의 사람들에 대한 엄벌주의, 범죄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 등을 통해 소수자나 빈민, 약자들에 대한 강력한 배제주의적 노선이 사법과 행정에 광범위하게 도입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였다. 경쟁에서 열패한 자들에게 강력한 손해를 감수하게 하여, 경쟁에 목숨을 걸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의 공격적 시장주의는 이러한 ‘배제주의 정책’의 경제학적 버전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징벌적 등록금’으로 표상되는, 삽시간에 학생들을 죽음으로 몰았던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이 정확히 이와 동일한 것임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사회학자 조크 영은 이를 ‘배제사회’라고 명명한다.
반대로 있는 자들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이른바 ‘시큐리티’가 급격히 강화되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을 죽음의 땅으로, 목을 매단 경쟁체제로 몰아넣는 배제주의 정책과 표리의 짝을 이룬다. 왜냐하면 이러한 배제정책은 빈민들의 저항을 야기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저항에 대해 가령 로스앤젤레스 같은 도시는 ‘게이티드(gated) 커뮤니티’를 확대하거나 경찰과 방범장비들로 둘러싸인 요새도시를 만들어낸다. 부자들의 요새지역과 경찰과 범죄자가 대결하는 공포지역으로 분할되는 ‘도시의 재구조화’는 마크 데이비스의 말대로 ‘내전의 재구조화’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얘기를 읽는 독자들이, 한국 부자들의 거주지를 뜻하는 ‘강남’에서 방범용 감시카메라를 앞장서 설치하려는 것이 기억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국에서도 ‘사회적 양극화’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거론된 것은 오래 전이지만, ‘기업 프랜들리’를 내건 CEO 출신 대통령이나 부자감세를 무슨 대단한 일인 것처럼 자랑하는 태도, 아이들의 급식비용을 대주자는 것을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는 관료들의 뻔뻔스러운 행동은 이런 사태가 그저 남의 얘기가 아님을 알려준다.
복지국가 형태로 계급적 적대를 완화하거나 은폐하고자 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선 1980년대 이후, 우리에게는 아마도 1997년 이후 ‘적대’가 전면화된 시대로 넘어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중산층이 확대되고 있다고 과장하며 선전했던 시대에서, 양극화를 피할 수 없으니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경쟁력을 강화하고 스펙을 쌓으라고 강요하는 시대로 넘어온 것이다.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욕망하고, 그것을 위해 탐식하듯 자기개발서를 독파하면서 수집광처럼 자격증을 모으고, 오직 경쟁의 한길로, 돈을 버는 것을 향해 매진하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하는 시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신자유주의 시대일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시대를 떠받치고 있는 것들을, 푸코가 “권력의 테크놀로지”라고 불렀던 다양한 기술과 전술, 혹은 전략들을, 그 실행의 양상을 매우 치밀하게 그린다. 물론 그것으로 회수되지 않는 대중의 저항도 잊지 않는다. ‘미성숙’이란 “이성을 사용해야 할 상황에서 어떤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칸트의 정의를, “통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바꾸어 정의하면서, 통치당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새로운 권리의 정박점으로 삼으려고 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책에서 그려지는 현재의 형상은 무겁고 어둡다. 그것은 이 책이 쓰여진 시기가 1997~2001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2008~2009년의 경제위기로 인해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이제 퇴물이 됐지만, 아직도 기승을 부리며 자신의 시대라고 착각한 채 위협적인 언사를 내뱉고 있는 지금의 한국에서는 결코 지난 얘기로 밀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이진경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11. 06.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