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은 호애산 시사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도착하고 시간을 보니, 30분 정도 여유가 있어서 쌍절려를 찾았습니다.
주변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다행은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하고 급하게 사진만 찍고 나왔습니다.
사진을 잘못 찍었나 봅니다. 대문이 기울어진 듯하게 보입니다.
쌍절여 안내문입니다. 내용이 너무 간략하여 보충하여 아래와 같이 적습니다.
의사공(義士公) 배인길(裵寅吉)은 유산공(儒山公) 휘삼근(諱三近)의 장자입니다. 1571년에 태어나셔서 1592년에 순절(殉節)하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무리 중에 뛰어나셨기에, 백부(伯父)이신 임연재공께서 매우 기특하게 여기시고 기대하셨다고 합니다. 임연재께서 양양부사로 가실 때, 조카이신 의사공을 데리고 가셔서 조석(朝夕)으로 학문과 무예를 닦게 하셨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병이 쳐들어오자, 의사공께서는 22살의 젊은 나이로 예안현감 오봉(梧峰) 신지제(申之悌) 막하에 나갔습니다. 신공(申公)께서는 의사공의 재주와 용맹을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대장의 휘하에서 따르게 하셨습니다.
용궁 진중(龍宮 陣中)으로 가던 중 왜적을 만났는데, 훈련받지 못한 아군이 적을 보고 놀라 달아나기 바빴다고 합니다. 이에 의사공께서는 앞장서서 외치시기를, “나는 오늘 죽기를 결심했다.”하시면서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셨습니다. 고군분투(孤軍奮鬪)하셨으나, 마침내 전사하셨습니다.
부인이신 월성이씨는 이 소식을 듣고, 손가락을 깨물어 명주에다 “군신의혜기중부부은혜환경君臣義兮旣重夫婦恩兮還輕(군신의 의리가 이미 무겁거늘 부부의 은혜인들 가벼우랴)”라 쓰시고 목을 매어 자결하셨습니다.
1817년(순조 17년)에 영남의 선비들이 합사(合辭)하여 보고(報告)를 하니, 순조 임금께서는 의사공과 월성이씨를 같이 표창(表彰)하라 하셨습니다. 이에 국가에서는 관비(官費)로 각(閣)을 세워서 정려(旌閭)케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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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학생흥해배인길지려(忠臣學生興海裵寅吉之閭)
명정숭정사정축삼월십삼일(命旌崇禎四丁丑三月十三日)
열녀충신배인길처유인월성이씨지려(烈女忠臣裵寅吉妻孺人月城李氏之閭)
명정숭정사정축삼월십삼일(命旌崇禎四丁丑三月十三日)
정려기(旌閭記)는 호곡(壺谷) 류범휴(柳範休)가 쓰셨습니다. 정려기를 쓰실 때, 이곳 呦鹿마을에는 槐潭 裵相說이란 걸출한 유학자가 있었습니다. 大山 李象靖 先生의 門人으로, 同門인 류도원(柳道源), 류장원(柳長源) 등과는 道義之交를 맺었던 사이로 보입니다.
槐潭 文集을 보면, 류도원이 쓴 만사(輓詞)와 류장원이 쓴 묘표(墓表)가 보입니다. 호곡 류범휴의 부친이 바로 류도원입니다. 작은 아버지는 류장원인데, <상변통고(常變通攷)>를 저술할 만큼 禮學에 조예가 깊었던 학자입니다.
이 분들은 괴담 선생과의 교분이 있었기에, 의사공 배인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호곡 류범휴가 정려기를 쓴 배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량문은 갈천(葛川) 김희주(金熙周)가 쓰셨습니다.
이 분도 대산 선생 문하에서 괴담 배상열과 동문수학하였던 분입니다. 괴담 문집을 보면, 이 분이 쓴 제문(祭文)이 보입니다.
갈천선생문집(葛川先生文集)을 보면, <배의사전(裵義士傳)>이란 글도 보입니다. 배의사는 의사공 배인길을 지칭합니다. 갈천 김희주께서도 의사공을 숭모(崇慕)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담장 안에서 찍은 쌍절려(雙節閭) 건물입니다. 공간이 좁아서 휴대폰 카메라에 다 담지를 못했습니다. 임진년 음력 6월 15일이 되면, 유림과 후손들은 의사공과 부인 되시는 월성이씨를 추모하는 제례(祭禮)를 행해 왔습니다.
2015년이 임진년이었습니다. 최불암 선생의 '한국인의 밥상'에서 이곳 유록 마을의 음식을 다루면서 쌍절려에서 60년만에 행해진 제례를 잠시 보여주기도 했었습니다. 60년마다 거행되는 제례이다 보니, 확실히 가르쳐 줄 수 있는 어른도 있을 수 없읍니다.
'쌍절려(雙節閭)' 현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