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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가 함께한 자유여행
여행이란 말만 들어도 눈망울을 굴리는 6명의 정예(精銳)?요원은, 두근거림의 가방을 메고 출발했다. 우리부부와 딸 내외, 그리고 초등학생인 두 손녀였다. 때는 2015년 2월21일 오후2시였다. 여행명칭은 나의 ‘칠순’ 기념으로, 여행지는 ‘일본 오사카’였다.
보는 여행보다 느끼는 여행을 위해 그리고 6명의 각기 다른 취향에 맞게, 사위가 삼 개월에 걸쳐 자료를 수집 계획을 짰다. 항공권은 가장 저렴한 시기를 택해 인터넷으로 구입 밤에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하는 첫날 밤 이동에만 렌터카를 이용하고, 나머지 이동수단은 버스와 지하철, 기차를 이용 경비를 최대한 줄이기로 했다. 우린 콧노래를 부르며 승용차로 고속도로를 달려 김해국제공황에 도착했다. 구정 끝이라 그런지 국제선 대합실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한가로이 오가는 사람들 머리위엔 활주로안내 모니터만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16:45분 비행기 탑승시작이다. 대한항공소속 중형기는 좌석별 tv모니터와 리모컨이 비치되어 있고 개인별 이어폰까지 새것으로 지급해주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정시에 활주로를 박차고 날라 올라 약 5분후 비행기가 제 고도를 잡았다는 신호음이 울리고 곧이어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 비행기는 1시간 1ㅇ분후에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황에 도착 예정입니다.” 오사카입국 수속은 좀 까다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손 지문까지 등록한 후에야 세관 검색대까지 갈 수 있었다. 짐을 찾아 카트에 싣고 공황 밖을 나오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국어 안내 방송이 공황대합실을 누비고 있었다. 우리의 국력이 그만큼 올라갔다는 자부심에 어깨가 으쓱했다. 우린 인터넷으로 예약한 공황의 렌터카 사무실을 찾아 이동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구글 지도에 의지 요리조리 찾아가는데 it의 정확성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린 용감했다>
차를 인도받아 시동을 걸며 우리 모두는 숨을 죽였다. 운전대가 우리와는 정반대인 우측에다 도로주행도 좌측통행이란다. 비 내리는 낮선 이국에서, 낮선 차량으로, 낮선 교통방식으로, 어둠이 깔린 도로를 이용 우리가 묵기로 한 교토외곽지 오쓰의 ‘프린스 호텔’을 찾아가야한다. 우리는 초보운전자의 첫도로 주행보다 더 조심스레 차도로 진입했다. 시간은 오후7시40분이었다. 차의 네비게이션과 스마트폰에 의지 시가지 도로를 벗어나 별 어려움 없이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약30분이 지나자 자동차가 좀은 안정된 속도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새 차량과 도로주행에 적응한 사위의 순발력이 놀라웠다. 우린두 개의 고속도로를 이용 밤 9시30분 공황에서 120km떨어진 호텔에 무사히 안착했다. 차를 호텔주차장에 세우고 어른 4명은 안도의 숨을 내 쉬며 내뱉었다. 우린 참 용감하다고.
<일본에서의 첫 식사>
일본에서의 첫 식사는 37층 뷔페였다. 호수를 내려다보며 먹는 음식은 눈의 만족, 맛의 만족, 새로움의 만족까지 더해졌다. 일본의 음식문화는 우리와는 많이 달랐다. 숟가락을 비롯한 모든 접시들이 사기그릇이며 크기가 장난감처럼 작았다. 사각 식판은 가로세로 30cm가 조금 넘는데 반찬 담는 칸이 12개였다. 우리네 기준으로 하면 김치 한 젓가락 담기에도 불편할 정도로 칸이 작았다. 여행은 떠나야 하는 것이기에 아쉬움을 달래며 1층 로비에 내려와 호텔안내 책자 꽂이에서 무심히 빼든 작은 책자가 한글판이었다. 나로선 미처 생각 못한 놀라운 일이었다.
<청수사>
우리는 오사카에 인접해 있는 청수사로 향했다. 동남아인들에게 잘 알려져 한 해 약10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온다고 했다. 주차장에서 절가지 약400m 거리에 폭이6m인 도로에 인파 가 넘쳐 우린 등 떠밀려 올라갔다. 사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백화점 특별세일 기간에 구름같이 몰려드는 인파 같았다. 그 인파 양편엔 몇 백 개의 가게가 줄지어 일본전통과자, 전통음식, 전통공예품등을 팔고 있었다. 모두 문전성시다. 나는 두 손녀의 손을 꼭 잡고 되도록 일본문화를 꼼꼼히 살피며 손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빈틈없는 가게의 건물을 살피니 현대식 건물이라곤 눈 씻고도 찾을 수가 없었다. 모든 건물들이 목조2층인 옛 전통가옥이다. 집 색깔도 남보라 색으로 통일 깨끗함과 고옥(古屋)의 멋을 풍기고 있었다. 다만 실내만 각자의 집 넓이와 파는 상품에 따라 단장한 모습이었다. 일본인들의 전통계승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일본 사람들의 애국심>
그 많은 가게를 지나며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오직 일본 과자, 일본빵집, 일본음식, 일본공예품 일색이다. 커피, 햄버거, 피자는 몰론 콜라도 찾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자판기 음료수도 일본제품 독차지였다. 옛 전통 지키기만큼이나 철저한 자기네 상품 판매 전략인 것 같았다.
<우리의 민낯>
일본의 사찰(寺刹)은 우리네와는 많이 달랐다. 우선 불상이 없었다. 따라서 불전함도 없었다. 다만 입구에 입장료 판매소가 한군데 있을 뿐이었다. 경내를 돌다 아름드리 중앙기둥에 큼지막하게 써 붙인 한글을 발견했다. “음식물 반입금지”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먹거리를 가지고 들어와 절 마루에 전(展)을 폈으면 중앙 기둥에 이렇게 큰 글씨로 써 붙였을까? 옥의 티라고 하기 엔 너무 입맛이 씁쓸했다.
<손녀의 염원>
경내를 한 바퀴 돌고 내려오는 계단아래에 옛날 우리네 시골 우물 같은 양철 지붕 위에서 세 줄기의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옆 안내 글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 물을 받아 마시면 50년을 더 산다는 속설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물을 받아 마시려는 인파의 긴 줄을 따라 들어가다 초등학교 4학년 손녀가 몇 번이나 강조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번 더 마시세요.” 손녀의 반복된 요청에 나와 집사람은 고개를 끄떡이며 크게 웃었다.
<일하는 일본노인들>
5박6일 동안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일본노인 모두가 일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선 어김없이 노인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우동을 먹기 위해 구멍가게 같은 식당의 문을 밀고 들어서는데 주문메모지를 들고 재빠르게 나타난 사람은전형적인 일본노인이었다. 하이 하이를 연발하며 지나치다 싶을 만큼 친절했다. 호기심에 실내를 살피니 주방에서 할머니가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두 노인 공히 70세 중반은 넘어보였다.
식당을 나서니 옛날 우리나라에서 최고급차로 군림했던 도요다 사각 리무진 택시들이 줄지어서있었다. 주차장 옆 쉼터에 모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기사들 모두가 노인들이다. 관광버스 기사들 또한 우리네로 치면 과도한 노인들이었다. 한신 역사박물관도 노인의 일터였다. 입구 표를 받는 사람도, 층층별로 관람학생들의 질문에 답하고 확인 도장을 찍어주는 이도 노인이었다. 천수각엔 엘리베이터 안내까지 노인이 맡고 있었다. 일하는 노인의 하이라이트는 오사카의 밤 야시장 ‘도톰보리’ 번화가에서 목격했다. 순찰 복장에 호루라기를 찬 노인4명이 한조를 이루어 인파속을 오가며 순찰하고 있었다. 참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이로 넘쳐나는 밤거리 그곳을 집안의 제일 어른인 노인들이 순찰하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거두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다음날 한신백화점에서 목격한 것은 이번여행의 압권이었다. 키가 아주작은 할머니 한 분이 파란 순찰복장으로 상가 구내를 씩씩하게 순찰하는데 어깨에서 대각선으로 흘러내린 호루라기 금줄이 길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일본인의 배려>
일본인들은 배려가 몸에 배여 있었다. 한적한 시골 고속도로 출구에 자동요금 정산시스템이 있었다. 우리는 처음 겪는 일이라 차에서 내려 한참을 더듬거리며 겨우 겨우 정산을 했다. 그런데 바로 뒤따라온 화물트럭 운전자는 한 번의 경적 울림도 없이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어디에서나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자연스레 줄이 만들어 지고 그 줄을 흐트러트리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와 비교>
일본인들은 상도의를 철저히 지키는 것 같았다. 옆 가게에 아무리 많은 인파가 물려들어도 그 가게와 똑같은 상품을 팔지 않았다. 그 현장을 ‘도톰모리’ 거리에서 목격했다. ‘타코야기’ (일명 문어 빵)라는 빵집은 초저녁부터 밤늦도록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도 다른 가게는 조용히 자기들만의 고유 업종을 고수하고 있었다. 나는 그 빵을 맛보기위해 10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리며 떠오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네 같으면 바로 건너에 ‘원조 문어 빵, 옆으로 전통 문어 빵, 한 집 건너 3대째 문어 빵’ 등등으로 난립 할 것이......
<특히 한 것들>
우리네 명동과 같은 화려한 거리에 구두수선 가게가 있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잘사는 나라, 세계3대 경제도시의 번화가에 구두수선가게라니, 나는 유심히 살폈다. 두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젊은이 두 명이 전동 공구로 신발수선 작업을 하고 있었다. 두 젊은이의 뒤로 수선공구들이 진열되어있는데 공구의 정리정돈이 백화점의 진열처럼 일목요연했다. 구두수선에 저리 많은 종류의 공구가 필요하다는 것에 나는 새삼 놀랐다. 공구진열장위 2단 선반에 수선이 끝난 6켤레의 신발이 코를 빤짝이고 있었다. 가게 입구 좌측에 큼지막한 사진 3장과 그 아래 프로필이 적혀있었다. 일본 신발 학교를 졸업하고 세계 신발기능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사람, 또 한사람은 신발장인(匠人) 자격을 취득하고 전국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사람. 또 다른 이도 이와 비슷한 내용임을 한자풀이로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신발학교와 경제대국, 그리고 번화가에 신발수선가게, 나는 두 손녀에게 쉽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여행에서 얻은 것들>
일본은 교통질서가 잘 지켜지는데 우리는 왜 잘 안될까? 일본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자연스레 한 줄이 되는데 우린 왜 엉키는 것일까? 일본은 관광지와 시내 어느 곳에서도 버려진 쓰레기를 볼 수 없는데 왜 우리는 관광지는 물론이고 강, 바다. 심지어 고속도로까지 쓰레기로 몸살을 앓을까? 일본은 도로어디에도 불법주차를 보지 못했는데, 왜 우리는 도로는 물론이고 인도까지 주차로 넘쳐날까? 일본의 거리에선 담배 꽁초하나 발견하지 못했는데 왜 우리는 담배꽁초 없는 곳을 찾을 수 없을까? 우리부부와 손녀들 그 중간 세대인 딸 내외가 공통으로 결론내린 것은 어릴 때부터 문화시민으로서의 기초교육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여행에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성과는 삼대가 함께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차를 타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자며 함께 음식을 먹으며 정을 돈독하게 쌓은 것이 아닐까? 그 정점은 여행 끝나기 이틀 전부터 집에 도착 때까지 이어졌다.
나의 왼쪽 엄지발가락에 통풍이 발병 길을 걸을 때도, 차를 탈 때도, 절룩거리는 내 손을 큰 손녀는 놓지 않았다. 특히 비행기트랩을 내려올 때도 절룩거리는 내 손을 잡고 나보다 더 힘겹게 지팡이 역할을 해주었고 딸 내외는 앞뒤경호를 맡고, 집 사람은 내 여행 가방을 메고, 이 보다 더 값진 여행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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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내용 잘 읽었습니다. 가시는 길에 교토에 있는 코 무덤을 보셨으면 더 좋은 교육이 되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15만명의 조선인 귀와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가지고 가서 풍신수길의 무덤 앞에 묻은 치욕적이지만
지나칠 수 없는 현장입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를 챙기는 손녀의 살가움이 무척 사랑스럽습니다.
다시한번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