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원익은 이런 과정에서 명나라 군사의 원조를 끌어오는데 공을 세웠습니다. 여기에는 통역관을 내세울 필요없이 명나라 장수들과 1대1로 대화하는 중국어 실력이 밑바탕이 되었음은 재론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실했는지를 명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했다는 말이 지금도 전해집니다. 이여송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우리측 신하들이 앞다퉈 보물과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내놓았습니다. 이여송이 조금도 기꺼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원익이 품에서 지도를 꺼내자 이여송이 비로소 기뻐하며 사례하고 나중에 부채에 시(詩)까지 한 수 적어 선물로 보내왔다는 것입니다.
“이 한 사람으로 사직의 평안함과 위태로움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백성의 여유로움과 굶주림이 달라졌으며, 이 한 사람으로 왜적의 진격과 퇴각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윤리도덕의 퇴보와 융성이 달라졌다….”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와 명나라 군사들이 끼친 폐해에 신음하던 평안도 백성은 이원익의 선정을 잊지 못해 죽은 사람도 아닌, 산 사람에게 바치는 생사당(生 祠堂)을 짓기도 했지요. 선조도 귀가 있었던지 이 소식을 전해듣고 강원감사로 부임하는 윤승길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남겼다고 합니다.
“나라의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실로 나의 잘못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평안감사 이원익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있는 힘을 모두 바치려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나는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현재 당면한 급무는 생산을 늘리고 군대를 훈련해 기필코 치욕을 씻는 일이라 하겠다(중략)….”
임진왜란 말기 이원익은 평안도를 떠나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삼남(三南)지방을 순시하는 도체철사로서 수군통제사인 이순신 장군과 처음으로 대면합니다. 명신(名臣)과 명장(名將)의 회동에 대해 백호전서는 이런 기록을 남기지요. 한마디로 서로서로 배려하는 상하 간의 아름다운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공(이원익)이 영루(營壘)를 살펴보고 방수방략(防守方略)을 점검해보고는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공이 돌아오려 할 때에 이순신이 가만히 공에게 말하기를 ‘체상(體相ㆍ도체찰사의 약칭)께서 이미 진에 오셨거늘 한번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푸셔서 성상의 은택을 보여주심이 어떻습니까? 하니, 공은 뜻은 좋으나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니 이순신은 이미 잡을 소와 술을 준비해놓았으니 허락만 하시면 잔치를 베풀 수 있다고 아뢰었다. 공이 크게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마침내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군사들의 재주를 시험하여 상을 주니 군사들이 모두 기뻐하고 사기가 충천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후인들이 그 땅을 정승봉(政丞峰)이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말기 이원익은 평안도를 떠나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삼남(三南)지방을 순시하는 도체철사로서 수군통제사인 이순신 장군과 처음으로 대면합니다. 명신(名臣)과 명장(名將)의 회동에 대해 백호전서는 이런 기록을 남기지요. 한마디로 서로서로 배려하는 상하 간의 아름다운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공(이원익)이 영루(營壘)를 살펴보고 방수방략(防守方略)을 점검해보고는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공이 돌아오려 할 때에 이순신이 가만히 공에게 말하기를 ‘체상(體相ㆍ도체찰사의 약칭)께서 이미 진에 오셨거늘 한번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푸셔서 성상의 은택을 보여주심이 어떻습니까? 하니, 공은 뜻은 좋으나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니 이순신은 이미 잡을 소와 술을 준비해놓았으니 허락만 하시면 잔치를 베풀 수 있다고 아뢰었다. 공이 크게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마침내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군사들의 재주를 시험하여 상을 주니 군사들이 모두 기뻐하고 사기가 충천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후인들이 그 땅을 정승봉(政丞峰)이라고 불렀다….”
놀랍게도 오늘날 우리가 전국에서 볼 수 있는 산성(山城) 가운데 상당수가 이원익의 명에 의해 개축됐습니다. 예를 들자면 경상북도 선산(善山), 즉 지금의 구미에 있는 금오산성, 포항의 용기산성, 경주의 부산산성, 달성의 공산산성, 함안의 황석산성, 창녕의 화왕산성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왜란을 몸소 헤쳐나간 이원익은 1599년, 처음으로 영의정에 오릅니다.
그 후 광해군 때도, 인조 때도 이원익은 영의정에 잇따라 제수되지만 이미 그때는 당쟁이 격화될 대로 격화됐던 시기였습니다. 더욱이 인조의 옹립에 기여한 공신들의 입김으로 이원익은 자신의 정치를 펼 수 없었지요. 한가지 그의 빼놓을 수 없는 공이 바로 백성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대동법 하면 김육(金堉)을 떠올리지만 1608년 광해군을 설득해 대동법을 실시키로 하고 그 시행관청으로 선혜청을 만든 것은 바로 오리대감이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업적이지요.
쓰다 보니 이원익의 거대한 생애에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마는 기분이 들지만 요즘처럼 근시안적이며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관료들이 횡행하는 시대에 그는 우리가 본받아 마땅한 사표(師表)라는 생각을 거듭하게 됩니다. 이런 선현을 두고도 오늘날의 우리는 이 지경이라는 자괴를 느끼는 삶이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