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몽골침입과 대몽항쟁에 대하여 논하라.
Ⅰ. 서(序)
거란(요. 916~1125)과 금나라(1115~1234)에 예속되었던 몽골은 징기스칸(Genghis Khan, 成吉思汗, 鐵木眞, 테무친, 위 1206∼1227)의 등장으로 1206년 건국하여 제국을 건설했다. 몽골은 1227년 서하, 1234년 금, 1279년 남송을 멸망시켰다. 고종6년 1219년 몽골군에 쫓겨 내려온 거란을 고려, 몽골 및 동진국이 연합하여 강동성에서 격퇴시켰고 몽골은 이후 은인을 자처하면서 형제의 맹약과 아울러 수달피, 명주, 모시 등 과중한 공물을 고려에 무리한 요구하여 최씨정권을 갈등을 빚다가 1225년 제구유(저고여, 著古與)가 귀국 도중 압록강 국경지역에서 살해당하자 이후 9차례 고려에 쳐들어 왔고 고려는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1270년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와 삼별초난으로 끝났다.
Ⅱ 몽골의 침입과 대몽항쟁
1. 몽골의 침입
고종6년 1219년 강동의 역에서의 고려, 동진국과 함게 거란을 물리친 몽골은 고려의 은인을 자처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여 고려와 사이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몽골은 고종 31년 12년 1225년 몽골 사신 제구유(저고여, 著古與)는 수달피 10만장, 비단 3천필, 모시 2천필, 종이 10만장을 강요하고 귀국 도중 압록강 국경지방에서 살해된 사건을 구실로 고려에 9차에 걸쳐 침입하였다.
2. 대몽항쟁
구분 | 연대 | 장수 | 구실 | 경과 |
1차 | 고종 18년 1231.8~1232.3 | 살리타이(撒禮塔) | 고종 12년 1255년 著古與(저고여, 제구유) 피살사건 | 서북면 마산 동산역 및 관악산 초적 활동 72명 다루가치(達魯花赤, 단사관) |
서북면병마사 朴犀 삭주분도장군 金仲溫 정주분도장군 金慶孫 자주성 성주 崔椿命 |
2차 | 1232.8~12 | 살리타이(撒禮塔), 반장 홍복원(洪福源) | 1232년 6월 16일 강화천도(참지정사 유승단, 야별초 지휘관 김세충(처형) 반대) | 처인부곡 白峴院(자현원) 승려 金允侯살리타이(撒禮塔) 살해. 용인현으로 승격돠고 김윤후 (상장군→攝郞將) 임명. 부인사 초조대장경 소실. 다루가치 축출 |
승병 金允侯 |
3차 | 1235.7~1239.3 | 탕쿠(唐古, tanggu, 당올(唐兀), 당올태(唐兀台), 당올대(唐兀臺)), 반장 홍복원(洪福源) | 출룍환도 | 전주, 경주까지 칩입. 황용사9층목탑 소실 |
죽주성 방호별감 송문주(宋文胄) |
4차 | 1247.7 | 阿母侃(아무간), 반장 홍복원(洪福源) | 출륙과 국왕친조 | 价州・竹州에서 몽고군 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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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산성 方壺別監 김윤후 |
5차 | 1253 | 지라타이(車羅大) |
| 충주노예 활약. 김윤후 攝上將軍 승진. 충주 國原京 승격 |
김윤후 |
6차 | 1254.7~1255.2 | 지라타이(車羅大) |
| 충부부근의 다인철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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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차 | 1255.8~1256.10 | 지라타이(車羅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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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 | 1257.5・10 | 지라타이(車羅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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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차 | 1258.6~1259.3 | 지라타이(車羅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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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순(洪大純)-홍복원(洪福源)-홍다구(洪茶丘)
원간섭기(1270∼1351)
4한국(汗國)과 원
몽골(1206~1271)
한국 | 설립자 | 위치 | 별망 |
킵차크한국(金帳汗國, 1243∼1502) | 바투((拔都) 주치[求赤:拙赤]아들) | 남러시아 | 크림한국(1441년 ~ 1783년) | 1783년 4월 8일에 예카테리나 2세에게 별망 |
카잔한국(1448~1552) | 1552년 10월 2일에 이반 4세에게 멸망 |
아스트라한 한국(1466년 ~ 1556년) | 1556년 이반 4세에게 멸망 |
시비르한국(1490년 ~ 1598년) | 1598년 러시아에 멸망 |
오고타이한국(1218~1310) | 오고타이 | 외몽골・내몽골,북중국 | 1310년 차가타이에 병합됨 | 동차가타이한국(( 모굴리스탄 한국 )에선 부카1360~1706) | ~1706 준가르에 멸망 |
차가타이한국(1227∼1360) | 차가타이 | 중앙아시아 | 서차가타이한국(1360~1369) | Timur제국(1369) |
일한국(1256∼1411) | 훌라구 | 페르시아 | 1411년 티무르(帖木兒)에게 멸망 |
원(1271~1368) | 쿠빌리아 | 남중국 | 1368년(북원 1696년 청나라 강희제 중국 복속) |
3. 개경 환도와 강화
가. 최씨 정권의 몰락
온건파인 김준(金俊)과 류경(柳璥)이 최의(崔竩)를 타도하고(무오정변, 戊政變) 몽골과의 강화를 추진했다.
나. 무신정권의 최후
김준(金俊) 임연(林衍) 임유무(林惟茂)로 이어지는 무신정권은 원종이 이분성(李汾成)을 보내 회유당한 근위대 삼별초와 어사중승(御史中承) 홍문계(洪文系((임연의 사위 임유무의 매형)), 문하성직사(門下省直事) 송송례(宋松禮) 등이 임유무를 살해하여 무신정권의 막이 내렸다.다. 개경 환도
원종 11년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39년간의 강화도 시대가 막을 내렸다.
4. 삼별초(三別抄)의 저항(1270~1273년)
가. 배경
삼별초(三別抄)는 도방(都房)과 더불어 최씨정권의 군사적 배경을 이루었다. 삼별초의 시초는 최우가 무인들의 일당인 악소(惡少)의 무리들의 행패를 막기 위하여 설치한 야별초(夜別抄)가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로 나누어지고 다시 몽고와의 항쟁에서 포로로 되었다가 도망쳐 온 신의군(神義軍)을 합하여 삼별초라고 한다. 삼별초(三別抄)는 무신정권의 전위부대이며 대몽항쟁의 중심부대였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붕괴와 몽골과의 강화에 불만을 품었다.
나. 과정
삼별초는 무인정권이 타도되고 몽고와 강화가 성립된데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개경 환도가 발표되자 즉시 장군 배중손(裵仲孫)과 지유(指諭) 노영희(盧永喜)가 반란을 일으켜 강화도와 육지와의 교통을 끊고 왕족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관부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개경정부와 대립하는 항몽정부를 수립하였다.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로 강화(1270.6~8월)에서 진도(1270.8.19~1271.5월. 용장산성과 남도석성)로 배중손이 죽은 후에는 김통정(金通精)이 다시 진도에서 제주도(1271.5~1273.4.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로 가서 항쟁하였으나 여몽연합군에 의하여 제주가 함락하여 항쟁은 끝났다.
다. 의의
고려는 대몽항쟁에서 고려 무인의 항쟁의식을 잘 보여주었고 비록 실패했지만 삼별초의 난은 몽골이 고려를 두려운 상대로 바라보게 하였다.
14.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에 대하여 논하라.
Ⅰ. 서(序)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공민왕(1351~1374)이 집권하던 시기는 대륙의 정세가 크게 바뀌어 1근 100년간 고려 내정에 간섭하던 원의 기세가 꺾이고 중국 남방에서 일어난 명나라(1368~1644)가 원을 막북으로 몰라내는 원의 쇠퇴와 명의 흥기는 고려가 자주성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Ⅱ. 공민왕과 신돈의 개력
1. 공민왕(恭愍王, 1351~1374)의 자주성 회복운동
가. 시기
14세기 중엽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적극적인 반원활동이 가능했다.
나. 반원정책
⑴ 몽골식의 폐지
몽골식 변발을 풀고 호복을 벗었다.
⑵ 부원세력의 숙청
기철, 기륜, 기삼만, 기주 등 부원세력을 처형하고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폐지했다.
⑶ 관제복구
원 간섭으로 격하된 관제를 복구했다.
⑷ 영토회복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회복하였으며 요동지방을 세 차례 공격하였다.
⑸ 친명정책 추진
종래의 친원정책을 버리고 친명정책을 추진하였다.
2. 내정개혁
가.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 약화와 재정수입 기반 확보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재정수입의 기반을 확대하려 했다.
나. 신돈 등용과 개혁
승려인 신돈(辛旽, 遍照, ~1371)을 국사로 삼고 진평후, 판서문관사(음양관)에 봉하고 삼중대광 영도첨의(三重大匡領都僉議)란 직을 제수하여 국가 정치를 총괄하게 하였으며 공민왕 15년 1366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고 판사가 되어 권문세족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 주인에게 반환하거나 해방하여 주었다.
다. 권문세족의 숙청과 한미한 자의 등용
영도첨의(領都僉議) 이공수(李公遂), 시중(侍中) 경천흥(慶千興),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수산 (李壽山), 찬성사(贊成事) 송경(宋卿), 밀직(密直) 한공의(韓公義), 정당(政堂) 원송수(元松壽)등 권문세족을 축출하고 한미(寒微)한 자를 등용하였다.
라.정방(政房) 폐지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방을 폐지했다.
마. 성균관 재정비와 사대부 육성
왕 16년 1367년 성균관을 재정비하고 신진사대부를 육성하였다.
바. 개혁의 실패
권문세력의 반발로 신돈은 역모가 발각되어 공민왕 20년 1371년 제거되고 공민왕이 왕 23년 1374년 자제위 소속 최만생 등에게 살해되면서 개혁은 중단되었다.
Ⅲ. 결어
공민왕은 사랑하는 왕비 노국 대장공주가 출산 중 사망하자 그 뒤로 정사로 제대로 돌보지 않고 음란한 행위를 하는 둥 먕령된 짓을 하다가 결국 피살되고 개혁도 중단되었다.
15.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에 대하여 논하라.
Ⅰ. 서(序)
고려 말은 국제정세의 변화가 심했고 왜구와 홍건적의 창궐했다.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간의 대립 상황속에서 왜구와 홍건적이 창궐했는데 이것은 원명교체기에 따른 영향이다. 왜구와 홍건적을 무찌른데 공이 많은 이성계와 최영은 외교정책으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하다 마지못해 출정후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실권을 잡고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
홍건적의 격퇴
1359년 제1차 홍건적 격퇴 서경(이방경, 이승훈)
1361년 제2차 홍건적 격퇴 화주(정세운, 이성계)
왜구의 격퇴
우왕 2년 1376년 崔瑩 홍산대첩
우왕 6년 1380년 8월 崔茂宣 진포대첩
우왕 6년 1380년 9월 李成桂 황산대첩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 격파
우왕 9년 1383년 鄭地 관음포대첩
창왕 1년 1389년 朴葳 쓰시마(對馬島)정벌
세종 1년 1419년 李從茂 쓰시마(對馬島)정벌
Ⅱ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
1.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문제
명나라가원의 쌍성총관부 관할 아래 있던 요동지방에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통고해 오자 최영(崔瑩) 등은 분개하여 요동 정벌을 꾀하고 우왕도 이에 동조하여 전국적인 징병령을 내려 우왕 14년 1388년 요동정벌에 나서 지방을 수복하려 했다.
2. 이성계의 요동정벌 4불가론
이성계는 우왕(禑王)과 최영이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하자, 다음과 같은 4가지 근거(四不可)를 들며 반대하였다.
첫째, 이소역대 (以少逆大)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
둘째, 하월발병(夏月發兵)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夏月發兵)
셋째, 거국원정 왜승기허(擧國遠征 倭乘其虛)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다. (擧國遠征, 倭乘其虛)
넷째, 시방서우 노궁해교 대군질역(時方暑雨 弩弓解膠 大軍疾疫)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다.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3.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우왕 14년 1388년 최영을 8도도통사, 조민수(曺敏修)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 좌군도통사로 하여 출병했으나 이성계가 반전을 꾀하여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4. 이성계의 집권
가. 실권 장악
1388년 위화도 회군이후 신진사대부들이 실권을 장악했다.
나. 폐가입진(廢假立眞)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조민수와 이색의 추천으로 창왕을 내세웠다가 다시 1년만에 폐가입진이론으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내세우고 권력을 장악악하고 건국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다. 과전법(科田法) 시행
전제개혁을 추진하여 공양왕 3년 1391년 과전법(科田法)이 공포되어 권문세력은 타격을 받고 신진관료들은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라. 신진사대부의 분화
산진사대부는 온건파(정몽주, 길재 등)와 역성혁명파(이성계, 정도전 등)로 분화하였다. 역성혁명파는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1392년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
Ⅲ. 결어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이성계는 자신의 계획에 걸림돌이 되던 우왕과 최영을 축출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학하고 새로운 조선왕조를 건설하는 중요한 계기를 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