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과거(科擧)와 음서(蔭敍)
가. 과거제도(科擧制度)
⑴ 과거제도의 도입
과거제도(科擧制度)는 광종 9년 958년 후주의 쌍기(雙冀)의 건의로 시행되었으며 무과(武科)는 공양왕 2년 1390년에 생겼다.
⑵ 과거제도
⑶ 응시자격
양인(良人)은 누구라도 과거에 수험자격이 있었으나 천민(賤民)과 승려(僧侶)의 자식은 응시할 수 없었다. 과거 시험관을 지공거(知貢擧)라고 했고 지공거와 급제자(及第者)는 좌주(座主. 宗伯)와 문생(門生)의 관계를 맺어 일생동안 계속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한 개의 사회집단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나. 음서제도(蔭敍制度)
고려시대에는 문벌귀족은 음서제도(蔭敍制度)라는 것이 있었다. 음서는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게 관직을 허락하여 주는 문음(門蔭)과 특별한 공훈이 있는 관리의 자손에게 관직을 허락하여 주는 공음(功蔭)이 있었는데 이것은 고려의 관료제도가 귀족제도에 뒷받침되는 것을 의미한다.
Ⅲ. 문벌귀족사회의 성립과 동요
1. 문벌귀족사회의 성립
가. 문벌귀족의 형성
⑴ 문벌귀족의 출신 성향
신라 6두품 계통의 귀족들은 고려의 사회와 정치 질서를 개편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여 지위를 굳게 하였고 개경에 가까운 지방호족 출신자들도 점차 문신으로서 중앙의 정치무대에 진출하는 수가 늘어 고려는 이성귀족(異姓貴族)에 의한 정치를 하였다
⑵ 본관(本貫) 사용과 별도 호적 작성
이성귀족들은 개성이나 출신지를 본관(本貫, 貫鄕)으로 삼고 문벌을 중시하며 평민과는 별도의 호적(戶籍)을 작성하였다.
⑶ 혼인정책
가문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왕실 또는 격이 높은 가문과 혼인정책을 사용하였다.
⑷ 대표적인 문벌 귀족
안산 김씨(安山 金氏. 金殷傅), 인주 이씨(仁州 李氏. 李子淵과 李資謙), 파평 윤씨(坡平 윤씨. 尹瓘), 해주 최씨(海州 崔氏. 崔沖), 경주 김씨(慶州 金氏. 金富軾) 등이 대표적인 문벌 귀족이었으며 11대 문종때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안산 김씨 김은부(金殷傅)는 세딸을 8대 현종의 비로 들인 이루 11대 문종때까지 4대 50년간 외척으로서 정권을 독점하였고 인주 이씨 이자연(李子淵)은 세딸이 문종의 비로 들어간 후부터 안산 김씨를 대신하여 인종때까지 7대 80년간 인주이씨 세상이었고 나중에 이자겸(李資謙)은 왕이 되려고 하였다
나. 문벌귀족의 특권
문벌귀족은 음서를 통해 관직을 세습・독점하는 겅치적 특권과 공음전의 혜택을 받아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통해 불법적으로 토지를 착취(토지겸병)하는 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2. 문벌귀족사회의 동요
가. 이자겸(李資謙)의 난(1126)
인주(경원) 이씨는 이자연(李子淵)에서 이자겸(李資謙)에 이르기까지 약 80년간(문종~인종)때가지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자겸은 둘째 딸을 16대 예종(睿宗)의 비로 들여서 그 소생인 해(초명은 구(構)이고 해(楷)로 개명) 인종(仁宗)으로 왕위를 잇게 하고 다시 두딸 3녀와 4녀를 인종에게 주어 이중 인척관계를 맺어 권력을 독차지 하였다.
이자겸 일당은 한안인 등 반대파를 몰아내고 남의 토지와 재물을 강탈하여 경제적으로 크게 재화를 획득하고 18자(十八子)가 왕이 되리라는 도참설(圖讖說)을 믿고 왕이 되려 하자 인종은 왕 4년 1126년 이자겸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여 인종은 행동의 자유를 잃고 최탁, 안보린 여러 신하도 해를 입었다. 이자겸은 인종을 시해하려다가 왕 5년 1127년 인종에 포섭당한 일파인 척준경(拓俊京), 김향(金珦), 이공수(李公壽), 정지상(鄭知常)등에 타도되어 쫓겨 귀양을 가게되어 인주 이씨가 몰락하였다.
이 난으로 문벌귀족사회의 해체가 촉진되고 궁궐이 불타고 민심이 불안하여 도참이 유행하고 서경천도론이 대두되었다.
나. 묘청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1135)
문벌귀족은 개경세력과 서경세력으로 분열 대립하였다. 그리고 금나라는 고려에 종종 압박을 가하여 고려는 외교적 시련에 직면하였다. 묘청(妙淸), 백수한(白壽翰), 정지상(鄭知常) 등 서경파・풍수지리설파・배욀파로 불리던 서경인들은 이자겸의 난 때 불타버린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묘청 등은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개경은 땅기운이 쇠하고 서경은 땅기운이 왕성하므로 서경으로 천도하면 국가를 중흥시킬 수 있고 칭제건원(稱帝建元)하여 송이나 금과 대등한 입장을 칭하고 금국을 정벌할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인종도 처음에는 마음이 움직여 서경에 대화궁(大花宮)과 팔성당(八聖堂)을 짓고 호의적이었으나 개경파・유학파・사대파 귀족들이 반대를 하여 서경천도가 어렵자 묘청은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하여 인종 13년 1135년 서경에서 서경 분사시랑 조광(分司侍郞 趙匡), 분사병부상서 류참(分司兵部尙書 柳旵), 사재소경 조창언(司宰少卿 趙昌言), 안중영(安仲榮)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고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리고 하였으나 백수한, 정지상, 김안을 출병전에 참수하고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조광이 묘청, 류참과 그 아들 류호를 목베어 항복했다가 정부가 항복을 받아 들이자 않자 다시 싸우는 등 내분과 전략 실패로 1년만에 서경이 함락되고 난이 진압되었다.
이 난으로 문벌귀족사회의 모순이 극화되고 분사제도와 삼경제가 폐지되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문벌 귀족 사회의 분열과 지역 세력간의 대립이었고 자주적 전통 사상(풍수지리설 등)과 사대적 유교 정치 사상과의 충돌 및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갈등(신라 계승 이념과의 대립)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 1천년 내 제대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개경파와 서경파
분류 | 개경파(유학파,사대파) | 서경파(풍수지리설파.배월파) |
중심 세력 | 인종 이전의 기존 문벌귀족세력 | 지방의 신진관료 세력 |
사상 | 유교사상 | 풍수지리설 |
대외정책 | 사대정책 | 독립주권(칭제건원.개국기원,서경천도.금국정벌) |
계승의식 | 신라 계승 의식 | 고구려 계승 의식 |
중심인물 | 김부식,김인존 | 중앙관료파(정지상,김안,백수한) | 서경재지파(묘청,조광,류참) |
서경천도 | 불가(개경 고수) | 무력보다는 정치적타결 |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서경천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