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이 지닌 '혼종성'hybridity은 집단적 단순화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혼종성'이라는 개념은 포스트콜로니얼 이론의 '삼위일체' the holy Trinity 가운데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호미 바바Homi Bhabha가 대중화시킨 개념이다. 한 인간은 주변부와 중심부, 피해자와 가해자, 피억압자와 억압자 등 정황에 따라서 이러한 다층적 위치성locationality 속에 자리 잡고 산다. 노동자 남성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층적으로는 주변부일 수 있지만, 남성이라는 점에서 가정에서는 중심부/가해자의 위치에 서기도 한다.
거꾸로 부유한 여성들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언제나 피해자나 주변부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남성이나 여성 위에 군림하는 가해자의 위치에 서기도 한다. 그 어떤 개인도 '순수하게 하나'이기만 할 수 없다. 한 사람 속에는 상충적이고 다층적인 요소들이 겹쳐 있다. 한 개인은 분류하기 어려울 정도로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복합적인 요소로 구성(p211)되어 있다. '혼종의 정체성'identity of hybridity은 이렇게 한 개별인을 구성하는 무수한 요소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하나의 표지만으로 구성하는 '단일 정체성'의 한계를 넘어선다." " (강남순, 『페미니즘 앞에선 그대에게』, 한길사, 2020, 212쪽)
차연Différance 延異 ([펌] http://seebangart.com/archives/4935)
P가 K에게 “사랑이 무엇이냐?”라고 묻자 K는 “눈물의 씨앗이다”라고 답했다. P는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이 답은 어휘의 개념을 설명한 것이 아니므로 사람들에게 상상과 긴장을 유발한다. ‘사랑 = 눈물’이라는 답이 은유적이어서 즉각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사전적인 뜻으로 “사랑이란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대답하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또 다른 개념으로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휘와 마찬가지로 ‘좋아하는’이나 ‘마음’을 설명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가령 ‘좋아하는’의 정도와 강도도 문제이지만 ‘마음’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처럼 어휘나 개념은 그 자체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설명하거나 이해하고자 할 때 본래의 의미와 차이가 생기면서 그조차 지연(遲延)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리다(J. Derrida, 1930 ~ 2004)는 이것을 차연(差延/ 延異, Différance)이라고 하면서 해체의 핵심개념으로 설정했다. 신조어인 Différance의 Differ는 ‘지연되다’와 ‘다르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래의 그것과는 차이가 나면서 지연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차연이 개념이나 어휘라기보다는 해체주의적 인식방법이라는 점이다. 차연이라는 어휘 그 자체도 이미 차연이 되고 있어서 모순이 내재해 있다는 지적도 있고 언어의 미로에 갇혀 있다는 비판도 있다. 가령 하나의 개념이 선명하게 다른 개념으로 대치될 수 없다면 영원한 순환이나 복선의 미로에 갇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의가 기표에 끊임없이 미끄러지는(slide) 현상이 발생한다. 이것을 데리다는 의미의 사슬(chain of signification)이 고정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언어의 의미는 상대적이다.
후기구조주의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차연은 개념이나 의미의 본질 파악이 쉽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하나의 기의에 다수의 기표 즉, ‘1 기의 = 다(多) 기표’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기표는 그 자체로 정확한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다른 기표를 불러온다. 원래 소쉬르의 구조주의(構造主義)에서는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므로 하나의 기호를 형성하는 것으로 본다. 가령 신호등의 파란색이 ‘진행하라’라는 뜻의 기호라는 것이다. 그런데 후기구조주의자 데리다의 차연에 의하면 신호등은 약속이므로 그대로 실행하면 되지만, 본질적으로 파란색은 다른 개념으로 확산되면서 차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호등의 파란색은 강력한 기표에 더 강력한 법적 의미를 부여하여 신호등으로 통일한 것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푸코는 정확한 언술은 존재하지 않고 강력한 언술만 있다고 주장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어떤 어휘나 개념은 언어주체의 세계관, 사상, 철학, 목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맥락이나 상황 속에서 제한된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도 없고 마음대로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지연과 망설임이 생기고 언어의 미로에 갇히는 현상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는 어휘, 의미, 문장 등이 사용되는 텍스트 또는 맥락으로 환원한다. 데리다는 이것을 강조하여 ‘맥락/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There is nothing outside of the [con]text)’*라고 단언한다. 이렇게 볼 때 어떤 개념은 쉽게 그 의미가 결정될 수 없으며 끊임없는 유예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고정된 의미나 불변하는 개념은 없고 상대적인 인식만 있으며 거미줄과 같은 관계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또 다른 예는 독서다. 똑같은 책을 여러 번 읽더라도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은 독서주체의 인식이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텍스트 자체에 유예되는 차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구조주의자이면서 후기구조주의의 지평을 연 데리다는 중심이나 주체가 없는 다층적이고 다원적인 인식을 지향했다. 이를 위해서는 소쉬르의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공시적(synchronic) 의미도 중요하지만 통시적(diachronic) 의미가 중요하므로 역사성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데리다는 데카르트, 칸트, 헤겔, 니체 등 서구철학의 형이상학, 존재론, 인식론과는 다른 해체적 방법론에 착안했다. 데리다는 서구의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해체하고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과 같은 방법을 통하여 인간의 인식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했던 것이다. 데리다의 해체적 방법론에 대해서는 양면적인 평가가 있다. 서구철학의 전통을 극복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관념적이며 초월적인 언어유희에 불과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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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Jacques Derrida, Of Grammatology, trans. G. Spivak,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6), p.158.
Jacques Derrida, trans., Alan Bass, Writing and Difference,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1).
*참조 <거대서사의 붕괴>, <구조주의>, <기표와 기의>, <후기구조주의>, <실재계>, <이항대립>,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